나경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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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언 朝鮮 英祖 臺의 人物로 1762年 當時 刑曹判書 尹汲 의 종이었다. 그는 나경언의 告變(또는 나경언의 上邊)을 통해 壬午花邊 ( 英祖 思悼世子 를 뒤주에 가두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事件)이 일어나는 것에 決定的인 役割을 하였다.

나경언의 告變 [ 編輯 ]

思悼世子의 丈人인 홍봉한 1761年 3月 右議政에서 8月 左議政으로, 9月 領議政으로 빠르게 立地를 굳혀 가자 危機感을 느낀 老論 系列의 人物인 김한구 , 김상로 , 홍계희 , 尹汲 等은 풍산 洪氏 勢力을 몰아내고 世子를 廢位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努力 下에 1762年 5月 22日 尹汲의 종인 나경언을 시켜 “世子가 일찍이 宮女를 殺害하고, 女僧을 宮中에 들여 風紀를 紊亂시키고, 父王의 許諾도 없이 平安道에 몰래 나갔으며, 北城에 멋대로 나가 돌아다녔다”라는 等의 內容을 담은 10條目의 世子의 缺點과 飛行, 더 나아가 將次 宦侍들과 謀反할 것을 꾀한다는 것을 刑曹에 告發하도록 하였다. 이 事件이 바로 나경언의 告變이다.

世子의 飛行을 알게 된 英祖 는 世子의 飛行을 알리지 않은 臣下들을 問責하였고, 高邊子 나경언을 충직한 者로 보아 살려주려 하였다. 그러나 홍낙순 남태제 等이 나경언이 世子를 謀陷한 大逆罪人이라는 主張을 하여 結局 그를 斬首하였다.

나경언의 告變에 對해 抑鬱함을 느낀 思悼世子는 나경언과의 對質을 要求하였으나 英祖는 이를 拒否하였고 以後 世子의 非行 問題는 더욱 擴大되어 영조가 世子에게 自決을 要求하는 것에까지 이르렀고, 世子가 自決하지 않고 버티자 結局 영조는 世子를 뒤주속에 가두어 8日만에 굶어 죽도록 하였다( 壬午花邊 ). 이때 思悼世子의 飛行과 뒤注意 着想, 그리고 壬午花邊의 事件 그 自體 等은 後날 思悼世子의 비인 혜경궁 洪氏 가 《 閑中錄 》을 著述하는 背景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