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弘一
(金弘壹,
1898年
9月 23日
~
1980年
8月 8日
)은
中華民國
陸軍 軍人이자
日帝强占期
韓國 獨立運動家
出身
大韓民國
의
軍人
兼
政治가
이다.
平安北道
出身으로, 本貫은
법흥
이다. 初名은 紅日(弘日), 號는 일서(逸曙), 山南(山南). 別名은 최세평(崔世平),
中國語
이름은 王雄·王逸曙·王復高.
中國軍
現役 軍人 身分으로
大韓民國 臨時政府
의
金九
를 도와
尹奉吉
,
이봉창
의 擧事를 支援하였고,
韓國 光復軍
參謀長을 거쳐 國軍 准將으로 任官하여 6.25 戰爭에 參戰하였다.
1961年
5·16 軍士 政變
直後에는
外務部 長官
을 歷任하였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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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運動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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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帝國
平安北道
湧泉
出生에서 한때
大韓帝國
慶尙南道
金海
와
大韓帝國
慶尙北道
慶州
와
大韓帝國
漢城府
에서 各各 暫時 幼年期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以後 平安北道 井州 五山學校에서
南崗 이승훈
과,
古堂 曺晩植
門下에서 受學하였고, 以後 五山學校 敎師로 勤務하던 中 日警의 監視와 彈壓을 避해
中華民國
으로 亡命하였다.
1921年
구이저우
의 陸軍軍官學校를 卒業,
國民革命軍
少尉로 任官 以後 獨立運動에 投身, 1923年에는 韓國義勇軍司令官을 지냈다.
國民革命軍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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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의 國民革命軍에 投身하여 1926年 中國國民革命軍 東로군 少領 參謀로서 北伐戰爭에 參加하였다. 以後 聯隊長, 軍團 및 集團軍 參謀長, 師團長 等을 歷任하였으며 1939年에는 外國人으로서는 最初의 中央軍 小腸에 이르렀다. 1943年에는 中國 陸軍大學을 卒業하였다.
1932年
白凡 金九
當時
大韓民國 臨時政府
朱錫의 要請으로 爆彈을 製作하여
이봉창
醫師와
尹奉吉
義士의 義擧를 支援하였다.
光復 以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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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年 11月
國民革命軍
에 다시 復歸하여 두律名 所長의 東北保安司令部 高級 參謀 兼 韓僑事務處長으로 赴任하였고, 中將(中國 國府軍의 中將은 2星 將軍)으로 男警의 國防部 政治部 專門委員으로 赴任하였다.
國軍 服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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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軍으로 入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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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年
12月 10日
李承晩
大統領
의 特別 指示로 陸軍 准將으로 任官되었고 陸軍士官學校 校長으로 任命되었다.
6.25 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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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戰爭
이 勃發하고, 開戰 初期 그는
國防部
에서 開催된 軍元老會議에서 서울 抛棄 및 漢江以南에서 防禦線 構築案을 提示했지만 拒否當했다.
[2]
以後 그에게 주어진 職責이 없었기에 參謀學校로 내려가 있었다. 以後 戰況은 漸漸 深刻해졌고, 結局 蔡秉德 陸軍參謀總長의 잘못된 命令으로 因해 國軍 5個社段이 서울에서 撤收하기 前에 한강교를 폭파시켰다. 이로써 國軍의 5個 師團이 漢江 以北에 孤立되었고, 이로 인해 大部分의 兵力이 흩어지게 되었다.
戰況이 深刻해지자 채 參謀總長은 始興地區戰鬪司令部를 設置하고 金弘一 訴狀을 司令官으로 임명하게 된다. 以後 金弘一 所長은 흩어진 兵力을 收拾하여 漢江 以南에 防禦線을 構築하였다.
金弘一 所長의 活躍으로 西部地域의 陸軍은 兵力을 收拾하고 編制를 再編할 수 있었고, 시흥사는 곧바로 제1군단으로 變化되었다. 以後 首都師團, 第1師團, 第2師團을 效果的으로 指揮하여 美軍과 協助하여 鎭川-陰城-淸州 軸線에서 成功的인 遲延戰을 遂行하였다.
또한 洛東江 防禦作戰에서 機械戰鬪를 勝利로 이끄는 等 第1軍團長으로서 反擊作戰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貢獻하였다. 그러나 그 後 1950年 開校된 陸軍綜合學校 校長으로 發令이 났고 이듬해 3月에는 國防長官 신성모의 謀略으로 族靑系 쿠데타說에 連累되어 强制豫編당했으나 李承晩의 配慮로 駐中華民國(臺灣)大使에 任命되어 10年間 勤務했다.
政治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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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大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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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年
부터
1961年
까지 週
中華民國
大使를 歷任하였다.
[3]
中華民國 大使로 있던 1960年 4月
4·19 革命
이 發生하자, 金弘一은 그 原因으로 最高潮에 達한 共産主義者들에 依한 惡用限 起因하는 것이라고 非難하였다. 이番 事態가 極히 不幸한 事件임을 是認하면서
中華民國
에서 敎育받은 大使는 記者들에 對하여 이番 事態는 6個 都市에서 戒嚴令이 宣布되어 鎭靜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赤色陰謀를 防止할 措置를 取하고 있다"고 金 大使는 本國 政府를 擁護하여 말하였다. 그러나 金 大使는 그가 現場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現在의 이 暴動이 어느 程度까지 共産主義者들의 造作에 依한 것인지 斷定할 수 없다고 附言하였다.
[4]
,
1960年
무렵 某種의 政變計劃을 세우고
강원룡
에게 도움을 要請하였으나 應答을 받지 못하였다.
[5]
5.16 軍事 政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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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5.16 軍事政變
以後
5月 20日
軍事革命委員會
[6]
가 構成되자 軍事革命委員會 委員의 한사람으로 選出되었고 革命內閣의 外務部長官으로 任命되었다. 그러나 이는 朴正熙가 아니라 金弘壹과 같은 平安道 出身이었던 當時 國家再建最高會議 議長 장도영의 推薦에 依한 것이었다.
[7]
그러나 그德分에 革命勢力의 內紛이 일어나 朴正熙 勢力이 장도영 勢力을 去勢시키자 金弘一 또한 밀려나게 되었다. 그後
朴正熙
의 민정 參與를 反對하여 野黨 政治人의 隊列에 섰다.
野黨 政治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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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年
朴正熙
政權의 韓日協定 締結에 反對하면서 政界에 投身하여
1967年
第7代 國會議員에 當選되었고,
韓國獨立黨
을 再建하였으나 黨權이
김학규
等에게 넘어가고 當選者를 내지 못하면서
韓國獨立黨
은 結局 沒落하고 말았다.
1966年
12月 24日
野黨統合과 大統領候補 單一化 推進을 위한 委員會가 設置되자 推進委員으로 委囑되었다.
[8]
1969年
三選改憲反對汎國民鬪爭委員會
指導委員으로 參與하였다.
萬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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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年
5月 10日
에는 運營委員會를 열고
유진산
과
양일동
等 運營委員會 副議長들의 辭退書를 受理하고 金弘壹을
新民黨
黨首 權限代行으로 임명한다.
[9]
新民黨
黨首가 되었으나 黨內 內紛을 겪은 뒤
1972年
黨首職을 辭任하였다.
以後
光復會
會長을 거쳐
國政諮問委員
에 委囑되었다.
1979年
陽曆
1月
中旬부터 老患을 앓다가 1年 7個月 後인
1980年
8月 8日
享年 83歲로 他界하였다.
受賞 經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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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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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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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書 및 論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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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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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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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 選擧 結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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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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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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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國防部 軍史編纂硏究所, 太極武功勳章에 빛나는 6.25戰爭 英雄 (國防部 軍史編纂硏究所, 2003)
- 國防部, 護國戰歿勇士功勳錄 第3輯 (國防部, 1997)
- 國防部, 自由民에게 傳해다오 第1輯 (大韓民國 國防部, 1955)
- 肉彈 10勇士 顯忠回, 肉彈 10勇士 (圖書出版 法廷, 1986)
- 陸軍本部, 韓國의 戰爭英雄들, (陸軍本部, 1992)
- 이원복, 護國勇士100線 (名聲出版社, 1976)
- 병학사, 내 젊음 曺國에 (병학사, 1987)
- 國防部, 韓國戰爭史 第8輯 (國防部, 1975)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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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年
民主回復國民宣言 署名者(銃 71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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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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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鬪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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制憲議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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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主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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改新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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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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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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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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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論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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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曹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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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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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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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年 7月 1日 - 1971年 6月 3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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