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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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金
Robert Chaegon Kim
出生 1940年 1月 21日 ( 1940-01-21 ) (84歲)
일제강점기 日帝 强占期 全羅南道 여수군
(現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全羅南道 麗水市 )
性別 男性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國籍 미국의 기 美國
居住地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서울
學歷 한양대학교 産業工學科 學事
퍼듀 大學校 大學院
父母 김상영 (簿)
配偶者 장명희
子女 김정연, 김종륜, 金在姸
議員 選手
正當 無所屬

김채곤 (金采坤, 美國名 : 로버트 金 , 英語 : Robert Chaegon Kim 로버트 채곤 킴 [ * ] , 1940年 1月 21日, 全南 麗水 ~ )은 美國의 前職 海軍情報局 職員이다. 美 海軍情報局 컴퓨터分析官으로 勤務하던 中 1996年 駐美 韓國 大使館 武官인 백동일 大領에게 江陵地域 武裝共匪 浸透事件 關聯 軍事 機密을 流出한 嫌疑로 拘束돼 美 聯邦矯導所에 9年間 收監 生活을 하였다.

生涯 [ 編輯 ]

김채곤은 1940年 全羅南道 여수군(現 麗水市 )에서 韓國銀行 副總裁와 8,9代 國會議員을 지낸 김상영의 長男으로 태어났다. 民主黨 麗水市 國會議員을 지낸 金星坤 의 兄이다.

1958年에는 경기고등학교 를 卒業하고 1965年 한양대학교 産業工學科를 卒業했다. 1966年에는 퍼듀 大學校 로 遊學, 1968年에 産業工學 碩士를 取得한다.

碩士 取得 後 한동안 NASA 에서 컴퓨터 分析家로 일하다가 1974年 美國 市民權을 取得하고 이듬해부터는 美國 海軍情報局 컴퓨터 分析官으로 일했다.

情報流出 事件 日誌 [ 編輯 ]

  • 1995年, 美國 海軍 은 C4I(指揮統制 通信 컴퓨터 및 情報) 關聯裝備를 大韓民國 에 팔기 위해 努力中이었다. 김채곤은 當時 美國 駐在 大韓民國 大使館 海軍 武官 백동일(前 海軍大領)을 만나 이 시스템이 大韓民國 實情에 잘 맞지 않으니 深思熟考할 것을 助言했다. 김채곤은 그 以後에도 백동일에게 繼續해서 總 39件의 情報를 郵便으로 보냈다.
  • 1996年 9月 김채곤은 FBI 에 스파이 嫌疑로 逮捕되었다.
김채곤은 1996年 9月18日 江陵에서 發見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潛水艦의 浸透經路를 백동일에게 알려준 뒤 같은달 24日 逮捕됐다. 백동일은 外交官의 免責特權으로 法的 處罰은 받지 않았으나 代身 美國에서 强制 追放되었다.
當時 김채곤의 辯護를 맡고 있던 긴스버그는 그가 백동일에게 넘긴 資料가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等 다른 友邦國에게 이미 公開된 資料로, 情報를 流出시킨 것으로 볼 수는 있으나, 間諜 嫌疑로 보기는 어렵다고 主張하였다.
  • 1997年 7月 美國 알렉산드리아 聯邦法院에서 ‘間諜陰謀罪’로 懲役 9年에 3年의 保護監察을 宣告받고 펜실베니아 알렌우드 聯邦矯導所에서 服役하였다.
그의 逮捕 以後 이웅진 , 金昇淵 等의 企業人들이 여러 次例 生活費 等 後援金을 보냈다.
  • 1998年 김채곤은 破産宣告를 받았으며, 間諜罪 前科 탓에 年金 惠澤도 剝奪된 狀態였다.
  • 1998年 11月 6日 조순승 當時 새정치국민회의 議員이 外交通商部 國政監査 에서 當時 長官 홍순영 에게 이 事件에 對한 政府의 關心을 促求하자 홍순영은 "로버트 金이 美國 市民權者라서 美國 政府에 公式的으로 問題 提起하는 것은 어렵다"고 答했다. [1]
  • 1999年 11月 9日 金永三 當時 大統領은 워싱턴 포스트 와의 記者會見에서, "이 事件은 個人의 問題로 우리와는 全혀 關係도 없고 關心도 없다"라고 答했다.
  • 2004年 6月 1日 出所해 家宅收監. 電子感應裝置(一名 電子발찌)가 채워졌다.
  • 2004年 6月 4日 午後 4時20分(韓國時刻) 母親 황태남이 腦卒中으로 쓰러져 死亡. 美國 當局의 保護觀察 制度를 理由로 美國側이 出國을 不許하는 바람에 母親의 葬禮式에도 不參
“皇 女史는 前날 午後 9時쯤 로버트 金과 安否電話를 나눴으며, 이날 午後 사우나를 하다 갑자기 腦卒中으로 쓰러졌다”(출처: 뉴스코리아 2004年 6月 5日子)
  • 2004年 7月 模範囚로 認定받아 15% 減刑받음.
  • 2004年 7月 自敍傳 《집으로 돌아오다》 發刊. ISBN   89-356-5624-0
  • 2004年 7月 27日 午後2時 電子感應裝置 解除. 完全釋放. 保護觀察(Supervised Release) 3年 남음
  • 2004年 8月 1日 ‘保護觀察期間을 줄여달라’는 申請書를 美國 버지니아州 알렉산드리아 聯邦法院에 提出.
  • 2005年 10月 3日附로 保護觀察 終了
브링크마 擔當判事는 김채곤이 그동안 模範的 受刑生活을 했고, 釋放以後 保護監察 期間에도 違反事項이 없었고, 또한 이미 김채곤이 流出한 情報는 10年前의 情報이기 때문에 더 以上 美國安保에 影響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判斷, 10月 5日子로 保護觀察을 끝내는 것을 許諾.

事件 以後 [ 編輯 ]

釋放 다음 達人 2005年 11月 6日 김채곤은 大韓民國 乙 一時 訪問하였다. 그와 함께 活動했던 백동일과 동생 金成坤이 그의 歸國길을 맞았다. 入國 記者會見에서 그는 ""나는 스파이가 아니었다", " 祖國의 統一 에 조금이라도 寄與하겠다는 생각에 아무런 代價없이 百 大領에게 情報를 傳達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以後 金壽煥 , 金大中 , 조용기 等 當時 社會 著名 人士들을 訪問했다. [2] [3]

같은 달 24日 美國으로 돌아간 그는 다음 해 5月에 家族과 時間을 보낼 目的으로 다시 大韓民國을 訪問하여, 2006年 월드컵 應援 메시지도 남겼다. [4]

2007年 末에는 當時 2007年 大選 에서 勝利한 李明博 에게 "民心을 하나로 모으고, 企業하기 좋은 環境을 造成하여 일자리가 創出되는 經濟 살리기와 敎育改革을 政策의 最優先 順位에 두시기 바라며, "北韓에 對한 經濟協力도 北韓의 核과 그 곳의 人權問題를 念頭에 두시고 理性을 가지고 推進하시기 바라며, 韓美自由貿易協定 批准도 早速히 解決되어 우리 經濟가 나아갈 길을 早速히 提示하기 바란다"는 메시지를 傳했다. [5]

2008年 설날 에 맞춰 訪韓하여 故鄕 麗水市 泰安 기름 流出 事故 地域에서 奉仕活動을 하였다. 2009年 初에는 2005年 釋放 後 訪韓 當時 訪問했던 로마 가톨릭 金壽煥 樞機卿 이 死亡하자 그를 哀悼하는 글을 남겼다. [6]

發言 日誌 [ 編輯 ]

  • "美 情報機關은 英國, 濠洲, 캐나다, 뉴질랜드를 除外한 그 어떤 나라도 完全한 友邦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情報 共有體制에서 밀려나 있는 韓國의 狀況이 안타까워 情報를 提供하게 됐다"
  • “百 大領이 束草 앞바다에 北韓 潛水艦 事故가 났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하기에 海軍情報局에 入手되는 韓半島 周邊 時間別 데이터를 分析해서 줬다. 當時 北韓에서 내려온 潛水艦은 2期였는데 座標上으로는 1機만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나 事故가 났다는 것을 알게 됐다.”
  • "(逮捕)當時 김영삼 大統領이 美國 新聞과의 인터뷰에서 韓國 政府와 내가 全혀 關聯이 없다고 발뺌했을 때 甚한 背信感을 느꼈다" "하지만 꾸준히 聲援해준 國民들 德分에 無事히 풀려나게 됐다" [7]
  • "韓國은 제가 矯導所에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난 後 이 시스템(C4I)을 購入했다고 들었는데, 現在 제대로 稼動되고 있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8]

流出 情報 內容 [ 編輯 ]

로버트 金이 백동일 大領에게 傳達한 情報는 機密로 指定되지 않은 資料들이었다. 主 內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住民과 朝鮮人民軍 의 童謠 與否, 國際社會가 보내준 食糧이 人民軍에게 流入되었는지 與否, 休戰線 附近의 人民軍 配置 實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海外로 輸出하거나 輸入하는 武器 現況, 朝鮮人民軍 海軍 의 動向, 住民의 脫北實態 等이었다. 個中에는 北朝鮮의 內部 騷擾 鎭壓用 武器 購買 諜報다 담겨 있었다. 김채곤은 이들 資料가 뉴질랜드나 戶主와 같은 다른 友邦國과 美國이 共有했던 資料였다고 主張했다. [9]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