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鍾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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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鍾仁
大韓民國의 第24代 保健社會部 長官
任期 1989年 7月 19日~1990年 3月 19日
前任 문태준
後任 金正秀
大統領 盧泰愚
總理 강영훈
次官 이두호
윤성태

身上情報
出生日 1940年 7月 11日 ( 1940-07-11 ) (83歲)
出生地 日帝强占期 京畿道 시흥군 동면 신림리
居住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鍾路區 舊基洞
國籍 大韓民國
學歷 뮌스터 大學校 大學院 經濟學 博士
經歷 서강대학교 經濟學科 敎授
國民銀行 理事長
靑瓦臺 經濟首席
새千年民主黨 共同選擧對策委員長
한나라黨 非常對策委員
새누리黨 國民幸福推進委員長
더불어民主黨 非常對策委員會 代表
더불어民主黨 選擧對策委員長
더불어民主黨 比例代表 國會議員 出身
5選 國會議員(11·12·14·17·20代)
國民의黨 改革共同政府準備委員長
未來統合黨 總括選擧對策委員長
未來統合黨 非常對策委員長
國民의힘 非常對策委員長
國民의힘 拷問
改革新黨 拷問
正當 改革新黨
本館 蔚山
父母 김재열(簿), 이필기(某)
配偶者 김미경
子女 1女
親姻戚 김병로 (親祖父) 김문평 (姑母夫)
宗敎 天主敎 (洗禮名:알렉山델)
署名
웹사이트 金鍾仁 - 大韓民國헌정회
軍事 經歷
服務 陸軍上兵 轉役

金鍾仁 (金鍾仁, 1940年 7月 11日 ~)은 大韓民國의 大學 敎授 出身 經濟學者 政治人 이다. [1] 第11·12·14·17·20代 國會議員과 노태우 政府 第3代 經濟首席 그리고 제24대 保健社會部 長官을 歷任하였다. 本館 蔚山 이며 京畿道 始興 出生이다.

大韓民國 初代 大法院長 가인(街人) 김병로 ( 全羅道 淳昌 出身의 人權辯護士)의 孫子로 出生하였고 지난날 한때 京畿道 洋酒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으며 그 後 서울 에서 成長하였고 獨逸 뮌스터 大學校 에서 經濟學 博士 學位를 取得한 後 1973年부터 1988年까지 서강대학교 經濟學科 敎授를 歷任했고, 1987年 第9次 憲法 改正에서 經濟民主化 條項 新設(憲法 119兆 2項)을 主導했다. [2]

2016年 第20代 國會議員 選擧 를 앞두고 더불어民主黨 非常對策委員長이 되어 總選 政局을 이끌면서 第20代 總選 에서 더불어民主黨 比例代表로 國會議員에 當選되었고 더불어民主黨 새누리黨 을 제치고 第2黨에서 第1黨이 되었다. 그렇지만 2016年 末 當時 더불어民主黨과 摩擦을 빚다가 끝내 議員職 辭退 및 脫黨을 하였다. [3] [4] [5] [6]

그는 1981年부터 2016年까지 여러 政黨들을 넘나들며 憲政 史上 最初로 比例代表 로만 5選 國會議員이 되었다.

未來統合黨 黃敎安 代表가 懇切히 要求하여 21代 國會議員 選擧 에서 共同選擧對策委員長을 맡아 選擧運動을 하였지만 黨名을 민주당이라고 말할 뻔한 狀況을 演出하여 口舌數에 올랐다. 實際로 政黨만 바꾸어 李彦周 候補와 함께 選擧運動韓 事實이 話題가 되기도 했다.

生涯 [ 編輯 ]

1940年 京畿道 시흥군 동면 신림리(現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태어났다. 中央高等學校 卒業 後 韓國外國語大學校 獨逸語學과 在學 中이던 1962年부터 이듬해 1963年까지 祖父인 김병로 가 野黨 指導者가 돼 그 補佐官 逆으로 政界를 經驗했다. 學部를 나온 後 獨逸 뮌스터 大學校 에 留學해 經濟學 博士 學位를 取得했고, 그 以後 1973年부터 서강대학교 經濟學科 敎授로 在職했다. 이 때문에 서강학派 로 分類되나, [7] 先成長 後分配, 財閥 育成을 中心으로 한 壓縮成長을 主張해온 남덕우 等 서강학派 先輩들과는 立場을 달리하는 2世代로 區分된다. [8]

1977年 朴正熙 大統領에게 國民健康保險 導入을 建議했으며 [9] , 1980年에는 新軍部 國家保衛立法會議 專門 委員을 지내면서 財閥의 非業務用 不動産 投機 等에 對해 問題를 提起했다. 이듬해 民主正義黨 所屬으로 全國區 國會議員(比例代表)이 됐다. 以後 노태우 當時 민정당 代表의 核心 經濟 參謀로서 그는 黨舍 안팎에서 機會 있을 때마다 記者들에게 獨逸과 美國을 비롯한 先進國의 事例를 들어가며 韓國 社會가 超高速 成長 過程에서 不可避하게 치르게 될 엄청난 代價와 이에 따른 政治·經濟·社會的 副作用을 最少化하는 方法에 關해 力說하고 다녔다.

盧泰愚 政府의 保健社會部 長官으로 8個月 假量을 보낸 뒤 靑瓦臺 經濟首席祕書官이 돼 經濟民主化에 對한 構想과 財閥의 非業務用 不動産 處理, 財閥의 文魚발式 擴張에 對해 業種專門化 等을 强度 높게 밀고 나갔다. 以後 民主自由黨 比例代表로 第14代 國會議員을 지냈다.

2004年에는 새千年民主黨 第17代總選 選擧對策委員會 共同委員長을 맡으며, 새千年民主黨 比例代表로 17代 國會議員을 지냈다.

2012年에는 19代 總選 을 앞두고 새누리당 박근혜 非常對策委員會의 座長으로서 黨內 改革과 公薦作業을 主導했다. 그 結果, 새누리黨은 敗北가 確實視 되던 狀況을 反轉시켜 152席의 過半議席을 達成하여 大勝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해 말, 朴槿惠 大選競選캠프 共同選擧對策委員長과 國民幸福推進委員長을 맡으며 大選 勝利를 돕는 等 與野를 넘나들며 所謂 킹메이커로서 자리매김하였다. [10]

2016年 第20代 總選 에는 다시 더불어民主黨 의 非常對策委員會 代表를 맡아 公薦을 主導했다. 地域區 議員 公薦 컷오프, 셀프 公薦 論難 等 選擧 直前 雜音이 있었으나 正面 突破 後 더불어民主黨 比例代表 順番 2番을 받아 當選됐다. [11] 20代 總選에서 더불어民主黨은 123席을 차지해 새누리黨을 1席 差異로 제치고 議席數로 第1黨이 됐다. [12] 더불어民主黨의 總選 勝利는 2017年 大選 에서 文在寅 大統領 當選의 발板이 되었다.

2020年 5月, 未來統合黨 非常對策委員長으로 就任하여 21代 總選 의 歷史的 대패로 暗鬱한 狀況에 빠진 保守 政黨의 再建을 始作했다. 같은 해, 9月 黨名을 國民의 힘 으로 變更했다. 基本所得을 包含한 果敢한 進步的 政綱政策, 湖南攻掠을 위한 西進政策, 彈劾에 對한 對國民 謝過 等은 그동안 外面받던 保守의 모습을 果敢히 刷新한 것이었다. 그 結果, 22年 大選의 前哨戰이자 미니 大選級 選擧였던 4.7 再補選 에서 壓倒的인 勝利를 이뤄냈다. 이로써 國民의 힘과 保守陣營은 1年 남은 22年 大選의 主導權을 잡았다. 김종인의 뒤를 이어 黨代表가 된 李俊錫 은 이 흐름을 이어받아 國民의 힘은 2017年 彈劾 以後 保守政黨 最高의 支持率을 達成한다.

또한, 김종인이 21年 1月부터 별의 瞬間 을 言及하며 大選 競選과 本選에서 支援하던 國民의 힘 尹錫悅 候補는 結局 22年 3月 20代 大選 에서 勝利함으로써 第20代 大統領으로 就任하게 되었다. 金鍾仁은 그가 도운 3名의 政治人이 大統領에 當選됨으로써 킹메이커 의 이미지를 더욱 더 굳히게 되었다.

國民健康保險 導入 件의 [ 編輯 ]

우리나라 醫療保險法은 1963年에 처음 制定되어 1964年부터 施行됐습니다. 當時 軍事政權은 '無償醫療'를 자랑하는 北韓에 맞서기 위해 이 制度를 만들었지만, 任意加入 方式이었기 때문에 加入者는 거의 없었습니다. 1977年 西江大 經濟學科 敎授로서 醫療保險制度 導入을 朴正熙 大統領에게 建議했다. 成長 後 分配 패러다임의 朴正熙 政府 에서 保健社會部 長官 신현확 마저 反對하는 어려움을 무릅썼다. 그는 當時를 이렇게 回顧했다. 1977年은 維新體制가 終末을 向해 치닫던 때였습니다. 特히 當時 主力 輸出産業으로 育成하던 重化學 工業 分野 大企業 勞動者들은 極端的인 低賃金에 不滿이 매우 높았습니다. 大企業에서 罷業이 일어나면 ‘國民經濟’에 미치는 影響이 至大할 것이라 判斷한 朴 政權은 大企業 勞動者들을 懷柔하는 한便, 行政公務員, 軍人, 警察 等 政權의 中樞를 이루는 社會勢力의 歡心을 사기 위해 ‘特權的 醫療保險 制度’를 만들었습니다. 當時 醫療保險證은 特權層의 身分證 구실을 했습니다. 醫療保險證만 맡기면 어느 술집에서나 외상술을 먹을 수 있을 程度였습니다.

1987年 6月 抗爭 以後, 민정당 노태우는 ‘全國民 醫療保險 惠澤’을 公約으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醫療保險證이 우리 社會의 不平等 樣相을 두드러지게 表現하는 ‘證據物’이었기 때문이죠. 이 ‘可視的인 不平等의 證據物’을 없애지 않고서는, 6月 抗爭으로 뜨겁게 噴出한 民主化 熱氣를 가라앉힐 수 없는 狀況이었습니다. 1989年부터 ‘全 國民 醫療保險 制度’가 施行된 건 이 때문입니다.

憲法 119兆 2項 [ 編輯 ]

1987年 當時 그가 남재희 當時 勞動部 長官과 憲法 119兆 2項 에 넣은 條項이다.

國家 는 均衡있는 國民經濟의 成長 및 安定과 適正한 所得의 分配를 維持하고, 市場의 支配와 經濟力의 濫用을 防止하며, 經濟主體間의 調和를 통한 經濟의 民主化를 위하여 經濟에 關한 規制와 調整을 할 수 있다.

새누리黨 金容甲 拷問이 "當時(1987年 憲法 改正時) 經濟民主化를 强力하게 主張한 사람은 (김종인이 아니라) 民政黨 남재희 政策위議長이었다. 南 政策위議長이 經濟民主化라는 文句를 넣자고 했다."고 主張한데 對해, 남재희 前 議長은 聯合뉴스와의 通話에서 "全혀 事實이 아니다. 나도 改憲特委에 있었지만 그런 (經濟民主化 條項을 넣자는) 얘기를 全혀 한 적이 없다."며 "金 顧問이 錯覺을 한 模樣"이라고 確認했다. 이어, "(經濟民主化가 담긴) 憲法 119條 2項은 金 委員長이 마지막 손질까지 해서 當時 전두환 大統領에게 別途 報告해 '오케이'까지 받았다고 들었다."며 "20餘年 前에 119條 2項이 '金鍾仁 條項'이라고 맨 먼저 言論에 寄稿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고 强調했다. 또 "金 委員長은 獨逸에서 留學하면서 獨逸의 社會的 市場經濟에 對한 硏究에 心醉했다."며 "'社會的'이라는 말은 國家의 調整機能을 重要視하는 것인데, 이런 脈絡에서 金 委員長이 經濟民主化라는 發想을 한 것 같다."고 傳했다. [2]

土地公槪念과 金融實名制 反對 [ 編輯 ]

노태우 政府 時節 집값, 땅값 急騰을 막기 위해 土地公槪念制가 試圖됐으나 줄줄이 違憲 訴訟 等으로 坐礁됐다. 當時 靑瓦臺 經濟首席을 지낸 金鍾仁은 土地公槪念을 導入한 主體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이런 世間의 認識과는 달리 金鍾仁은, 2005年 不動産 投機 烈風 때 열린우리당 이 再導入하려던 土地公槪念이 窮餘之策이라 貶下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土地公槪念은 1989年 導入 論議 當時 經濟企劃院이 創作한 單語로 經濟學에도 없는 槪念이며, 國有地·私有地는 있을 수 있어도 土地公槪念은 小說 속에서나 나올 수 있는 말"이라고 밝혔다. 이어 "나는 保健社會部 長官으로 있었는데 土地公槪念은 絶對로 안된다고 反對했었다."며 "導入을 主張했던 사람도 根據를 제대로 說明은 못한 채 土地供給 擴大가 어렵다는 名分만 내세웠다."고 덧붙였다. "土地公槪念은 稅制政策으로 一時的 效果를 거둘 수는 있겠지만 結局 市場이 適應하는 方法을 찾게 된다."며 "土地超過利得稅 等은 絶對로 賦課할 수 없는 稅金으로 違憲 素地가 있으며 '開發利益還收制'도 結局 土地값으로 轉嫁되게 된다."고 强調했다. 그는 不動産 投機를 抑制할 根本 方策은 "洗劑로 投機抑制를 하겠다는 發想은 잘못됐고 金利引上 等 經濟政策 全般을 잘 調律해서 解法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主張했다. [13] 또한 金融實名制 도 强力 反對한 것으로 報道된 바 있다. [14]

北韓에 對한 觀點 [ 編輯 ]

(2016年 2月 15日 JTBC 인터뷰에서) "(北韓 潰滅論에 對한 野黨 一角의 批判에 對해) 나는 그 潰滅論을 갖다가 자꾸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잘 納得이 가지 않는데, 潰滅이라는 건 제대로 說明을 할 것 같으면 스스로 무너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흩어져서 없어진다는 뜻인데, 그 말 自體가. 제가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平和統一을 前提로 해서 北韓과의 對話를 이어나가려고 宏壯히 努力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過去의 金大中 大統領 時節에 햇볕政策 도 했고 그것이 盧武鉉 大統領까지 이어지다가 李明博 大統領이 登場하면서 급작스럽게 北韓 金剛山의 銃擊 事件 으로 인해서 對話가 中斷되고 그다음에 천안함 事態 라든가 延坪島 砲擊 이렇게 해서 對話가 進陟이 안 되는 이런 狀況에 있지 않아요? 그런 過程 속에서 核實驗을 갖다가 持續하고 그다음에 長距離 미사일 갖다가 試驗發射하는 그런 行動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제가 얘기하는 것은 우리가 過去에 蘇聯의 崩壞 를 놓고 봤을 적에도 그 蘇聯 은 우리가 흔히 가리켜서 슈퍼파워라고 얘기했는데 슈퍼파워라는 게 自己가 가리고 있는 武力 가지고 世界를 破壞할 수 있는 나라다, 이렇게 前提를 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不拘하고 國民의 生活을 갖다가 제대로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많은 武力을 가지고도 그냥 束手無策으로 무너지고 말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와 같은 自己 生存을 위해서 核을 開發한다 或은 長距離 미사일을 갖다 자꾸 開發한다. 이 自體로서 生存을 갖다가 維持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民生을 돌보는 것이 첫째 課題다, 卽 國民들의 實質的인 生活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이러지 않고 자꾸 그런 쪽에 財源을 投資할 것 같으면 結局 가서 蘇聯이 맞이했던 그런 形態로 무너진다, 이런 뜻에서 潰滅이라는 얘기를 쓴 거예요." [15] 그는 인터뷰 末尾에 自身의 北韓 崩壞論은 取消할 생각이 全혀 없으며 但只 사드 配置는 中國 의 反撥을 充分히 考慮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國保委 參與에 對한 解明 [ 編輯 ]

2016年 金鍾仁 더民主 非對委員長은 自身의 1980年 新軍部 의 國保委( 國家保衛非常對策位 ) 參與 前歷과 關聯, 金容甲 새누리黨 顧問이 이춘구 신한국당 代表의 말을 引用해 自身이 國保委 積極 參與人士 名單에 있었고 當時 國保委에서는 附加價値稅 廢止 論議가 아예 없었다고 主張한 데 對해 事實과 다르다고 反駁했다. 金鍾仁은 "當時 國保委 財務委員長의 補佐官(陸軍 中領)李 '附加稅 廢止 問題'에 對한 立場을 整理해달라고 해 國保委에 가게 된 것"이라며, 朴正熙 政權 末 附加價値稅 導入 때 自身이 參與했는데 以後 租稅抵抗으로 國保委 內에 附加稅 廢止 움직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제 定着段階에 이른 附加稅 廢止는 안된다는 信念으로 國保委에 參與했다고 밝혔다. 또 "當時 이춘구 前 代表는 國保委 財務委員會 幹事였는데 自身은 몰랐다."며 國保委 參與 過程에서 이춘구와도 아무런 關聯이 없었다고 解明했다. [2]

20代 總選 後 더불어民主黨의 未來에 對한 생각 [ 編輯 ]

4·13 總選 에서 더불어民主黨 의 勝利를 이끈 金鍾仁 非常對策위 代表는 4月 17日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糖이 예전처럼 正體性 論難을 벌이던 모습으로 돌아가서는 受權政黨은 不可能하다는 뜻을 分明히 밝혔다. 그는 英國 勞動黨 을 受權政黨으로 탈바꿈시킨 토니 블레어 前 英國 總理의 事例를 들어 "블레어 總理는 勞動黨의 基本을 바꾸지 않고선 執權이 不可能하다며 가장 重要한 政綱까지 바꿨다."며, 더불어民主黨 亦是 旣存 正體性에 사로잡혀 變하지 않으면 政權을 奪還할 수 없다는 點을 强調했다. 그는 鄭淸來 議員이 트위터 에서 "(20代 總選에서 더민주당의 湖南 敗北는) 北韓潰滅論과 햇볕政策 不正 等이 湖南의 逆鱗을 건드렸다."고 말한 것을 겨냥해 "寒心한 생각"이라고 原色的으로 批判하면서, "(黨의) 正體性을 두고 떠드는 것만은 絶對로 避해야 한다."고 거듭 强調했다. [16]

777 經濟 公約 [ 編輯 ]

金鍾仁 더민주 代表가 總選 公約을 2017年 大選까지 念頭에 두고 내놓겠다며, 受權 後 次期 大統領 直屬으로 '不平等 解消委員會'를 設置해 '777 플랜'의 具體的인 實踐 方案을 中·臟器 5個年 計劃으로 樹立한다고 밝혔다. 777플랜은 61.9%에 머무는 國民總所得(GNI) 對比 家計所得 比重(2014年 基準)을 2020年까지 70%臺로 끌어올리고, 아울러 全體 所得分 中 勤勞者(自營業者 包含)에게 配分되는 比率인 勞動所得 分配律을 2012年 基準 68.1%에서 70%臺로, 中産層(中尉 所得의 50~150%) 比重도 1997年 外換危機 以前 水準인 70%臺로 復元한다는 計劃이다. 公約 解決 方案으로 大·中小企業 成果共有制를 施行하는 企業에 稅制 支援을 하고 賃金을 올린 水準에 따라 企業의 社內留保金 課稅 時 利益을 주는 方案을 내놓았다. 이와 함께 最低賃金을 2020年까지 1萬원 水準으로 올리고 最低賃金을 保障하는 生活賃金制를 全國的으로 確信한다는 方針이다. [17]

批判과 論難 [ 編輯 ]

  • 1993年 當時 동화은행 에서 2億 1000萬 원의 賂物을 供與받은 嫌疑로 2年間 服役했다. 國會議員을 지내기도 한 大檢 中搜部 함승희 檢事가 拘束起訴했다. [18] 이에 對해 2011年 12月 28日 田麗玉 한나라당 議員은 평화방송 라디오에서 當時 한나라당 非對委員人 金鍾仁에 對해 "賂物罪는 證據 잡기 어려운데 確然한 證據가 있었고 當時에 財閥 改革을 이야기하시면서 다 쓰러져가는 銀行에서 2億 1000萬 원을 받았다는 것은 正말 낯 뜨거운 犯罪라는 얘기가 있다."고 直擊彈을 날렸다. 前 議員은 27日에도 自身의 블로그에 ‘이건 大體 뭔가요? 半 刷新人 거죠?’라는 글을 올려 金 非對委員을 猛非難했다. 前 議員은 “淸廉은 最高의 價値가 아니라 이제 基本인 世上”이라며 “한나라당의 刷新을 소리 높여 외치는 마당에 賂物을 받아 議員職을 잃은 분이 이 한나라당을 刷新해야 합니까”라김고 물었다. 前 議員은 “賂物 받은 嫌疑만 있어도 黜黨措置 돼 나중에 抑鬱함을 呼訴한 한나라당 議員도 있고, 起訴만 되면 黨員權이 停止돼 正말 가슴 아프게 黨員活動을 못한 議員도 있었다.”며 “그런데 大體 이건 뭔가요? 分明 退行이고 退步高 反刷新인 거지요.”라고 따졌다. [19]
  • 2012年 大選 當時 그는 國民幸福推進委員長이란 職銜으로 박근혜 새누리당 候補 캠프에 있었다. 經濟民主化의 象徵的 人物이자 主唱者로서 그는 當時 박근혜 候補의 經濟民主化 推進意志는 確固하다 여러 次例 公言했었다. [20] 特히 "줄푸세와 經濟民主化가 뭐가 다르냐는 質問을 하는데, 이런 質問 自體가 잘못됐다."고 朴 候補를 擁護한 것은 바로 그였다. 그러나 박근혜 候補가 大選 候補 登錄을 위해 國會議員 辭職書를 낸 바로 다음捺印 2012年 12月 11日, 黃祐呂 當時 새누리당 代表 等 核心 黨職者 7名과 함께 서울 市內 某處에서 金 委員長을 만나 '大企業의 旣存 循環出資에 議決權을 制限'韓 幸福推進위의 經濟民主化 公約을 受容할 수 없다.'고 通報했다. 朴 候補는 또 △大企業集團法 制定 △大企業 總帥 主要 經濟犯罪에 對한 國民參與裁判 義務化 △財閥總帥 等 任員陣 給與公開 等도 모두 拒否하고 김종인 委員長과 訣別 手順에 들어갔다. 이에 對해 그가 한 말은 “朴 候補와 만났지만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더는 (經濟民主化 公約에) 關心을 갖지 않기로 했다”가 全部였다. 朴槿惠 政府 出帆 後 '鄭烘原 總理 留任으로 浮刻된 人事 시스템 問題'와 朴槿惠 政府 早期 레임덕 可能性 等 政治 懸案에 對한 質問에 對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關心 없다"며 입을 닫았다. [21]
  • 2016年 민주당 분당 事態로 安哲秀 , 金한길 議員 等이 脫黨해 國民의黨 을 創黨하고 野圈이 分裂됐다. 非常對策委員會 委員長으로 委囑된 그는 當時 필리버스터 와 自身을 비롯한 表蒼園 敎授의 迎入으로 다시 人氣가 올라가고 있던 더불어民主黨 의 司令塔으로 들어와 필리버스터 를 中斷시키고 鄭淸來 , 李海瓚 議員 等을 公薦에서 탈락시켰다. [22] 이에 對해 그는 3月 16日 記者會見에서 萬若 20代 總選에서 더불어民主黨이 107席을 얻지 못할 境遇 自身이 모든 責任을 지고 黨을 떠나겠다고 公言했다. [11]
  • 2016年 더불어民主黨 의 非對委院長을 맡은 그는 平素 經濟民主化나 財閥 獨寡占 撤廢에 對한 持論과는 달리 金鉉宗 韓美FTA 前 通商交涉本部長을 黨內에 迎入해 論難을 불렀다. 金鉉宗은 게다가 2009年 以後 三星電子 글로벌 法務 擔當 社長으로 일해온 터였다. 이에 對해 國會 농해수위 所屬 더民主 신정훈 議員은 22日 미디어오늘과 通話에서 "우리당은 國內産業을 考慮해 彈力的으로 開放을 調節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며 "勿論 黨 指導部가 바뀌면서 正體性과 政策은 變化할 수 있지만, 半農民籍이고 黨의 政策에 明白히 反하는 人士(김현종 氏)를 아무런 解明과 檢證없이 데려온 것은 黨 正體性 問題를 惹起할 것"이라고 批判했다. 張하나 더민주 議員도 20日 '김현종 前 本部長 迎入을 撤回해야한다.'고 主張해 論難은 더욱 커졌다. [23] 仁川 桂陽 匣에 出馬를 宣言한 김현종 前 本部長은 2016年 3月 18日 4次 競選 結果 43.15%를 얻어 66.85%를 記錄한 柳東秀 前 仁川都市公社 常任監査에게 밀려 公薦이 挫折됐다. (柳東秀 더불어民主黨 桂陽 甲 候補는 43.5%(31,080票)의 得票率로 20代 國會議員에 當選됐다.) [24]
  • 2016年 2月 9日 京畿道 坡州 의 軍部隊를 訪問해 “將兵들이 國防 態勢를 튼튼히 維持하고 우리 經濟가 더 跳躍的으로 發展하면 언젠가 北韓 體制가 潰滅하고 統一의 날이 올 것을 確信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對北 基調였던 햇볕政策 을 正面으로 否定하는 發言이었다. 이에 對해 더민주 革新委員을 지낸 曺國 서울대 法學專門大學院 敎授는 21日 自身의 페이스북 을 통해 “문재인 代表 體制 下에서 代表의 모든 行爲에 발목을 잡으면서, 代表의 權限에 統制를 加하려한 革新案을 代表에게 公薦權을 몰아주는 것이라고 荒唐한 歪曲을 하며 反對하던 사람들이 요즘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며 “더民主 內 '親文'이건 '反文'이건, 다른 것은 몰라도 햇볕政策와 開城工團 問題에 對한 黨 指導部의 '禹클릭' 基調에 對해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迎入된 '啓蒙絶對君主'의 判斷에 忠實히 따르면 萬事 오케이인가”라고 批判했다. 安哲秀 國民의黨 共同代表 亦是 2月 18日 國會 非交涉團體 代表演說에서 “박근혜 大統領 및 與黨도 野黨 一角에서조차도 北韓體制의 崩壞나 潰滅을 이야기한다.”며 金 代表의 發言을 새누리黨과 같은 線上에 놓고 批判했다. 鄭東泳 前 議員도 21日 自身의 페이스북을 통해 “(金 代表는) 지난 大選에서 박근혜 새누리黨 政權 誕生의 一等功臣이며, 그리고 現在도 開城工團 事態에 對해 北韓 潰滅論으로 김대중·노무현 大統領의 햇볕政策을 正面으로 否定하고 있다.”며 “한술 더 떠 18日에는 300萬 農民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한 新自由主義의 尖兵인 韓美FTA 推進 主役을 堂堂하게 迎入했다. 民主 野黨의 얼굴이자 代表가 될 수 있는 분은 아니다”고 밝혔다. [23]
  • 2016年 3月 分裂된 野圈을 聯合시키기 위해 安哲秀 국민의당 共同代表를 만났다. 會同 後 안철수 共同代表는 會談 決裂을 宣言하며 “더民主 內部에서 (김종인 代表에) 짜르 라는 別名이 붙었다고 한다. 모두까기 짜르인 셈이다. 우리나라가 그럼 女王(朴槿惠 大統領)과 짜르의 時代란 말인데 正말 國民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連帶 論議에 對한 거듭된 質問에 安 代表는 “어제附로 다 整理됐다고 생각한다.”고 잘라 말했다. [25] 이에 對해 김종인 더民主 非對委 代表는 安 共同代表가 大選候補가 되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連帶에 反對하고 있다고 貶下했다. [26]
  • 2016年 3月 20日 더불어民主黨 比例代表 2番으로 決定되면서 '셀프 公薦' 論難이 거셌다. 黨內 中央委員會는 이를 두고 黨憲을 어긴 處事라며 反撥했고 이에 金 代表는 政務拒否로 맞섰다. 當時 比例代表 候補를 壓縮하는 過程에서 黨 指導部는 候補群을 A~D로 나눴는데 上位 1~10位를 A그룹, 11~20位를 B그룹, 21位~30位를 C그룹으로 나누어 칸막이를 친 뒤 各 그룹 內에서 順位投票를 통해 定하는 方式으로 했다. [27] 中央委員會 側은 칸막이 自體가 黨憲102兆 1項의 '委員會는 比例代表國會議員選擧候補者를 審査하여 (中略) 候補者를 審査함에 있어서 職能, 世代, 性, 地域 等 다양한 社會的 階層을 安分하되, 政治 新人을 于先 推薦하도록 努力한다.'에 違背된다 主張했다. 아울러 3項의 '選擧 戰略上 特別히 考慮가 必要한 候補者 選定을 除外하고는 中央委員會의 順位投票로 確定한다.'고 明示된 部分도 問題삼았다. 더구나 黨 代表는 比例代表 4名을 公薦할 權限이 주어졌는데 金 代表는 하나를 自身에게 使用한 것이라 論難이 더욱 컸다. 前 달 28日 就任 1個月 記者會見에서 金 代表는 스스로 "내가 比例代表에 큰 欲心이 있느냐, 난 그런 생각은 秋毫도 없다."고 밝힌 바 있었다. 이른바 셀프 公薦 論難에 對해 安哲秀 國民의黨 共同代表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比例代表 趣旨에 어긋난다."고 꼬집었고, 曺國 서울大法學專門大學院 敎授도 "法定管理人으로 더民主에 招聘됐지만 黨規 改正으로 통해 代表理事가 됐다."며 "權力 行使를 自制할 분이 아니다."고 批判했다. 이런 批判에 對해 金 代表는 "黨을 추슬러서 끌고가려면 議員職을 갖고 해야한다.", "그런待接 받는 政黨서 일 못한다."며 받아쳤다. [28]
  • 20代 總選의 더불어民主黨 1黨 登極 後 金 非對委 代表의 黨代表職 推戴論이 불거졌다. 黨內 傳統的 基盤이 없는 김종인 非對委 代表가 곧 있을 더民主 全黨大會 黨代表 競選에 競爭力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鄭淸來 議員은 2016年 4月 19日 午前 推戴論에 對해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出演해 "셀프 公薦도 問題지만 셀프 (黨代表) 推戴, 셀프 合意 推戴라는 게 可能한 일이냐?, 民主 國家에서"라고 反問한 뒤 "이거(代表 合意 推戴)는 北韓勞動黨 全黨大會에서나 可能한 일이다. 어떻게 그런 마음조차 먹을 수 있는 건지 相當히 疑訝하다."며 猛非難한 데 이어, 이날 午後에는 自身의 트위터에 '가만히 있으라?'는 題目의 글을 揭載해 "가만히 있어서 歲月號 慘事가 있었다. 더民主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政權交替 沈沒한다."고 韻을 떼고는, "더民主 船長은 아무에게나 함부로 맡겨서는 안 된다"며 "民主政黨에 걸맞은 리더십이 서야 한다."고 强調했다. 이어 "國會議員 候補者도 公薦審査 時 不淨腐敗 非理嫌疑者는 排除한다."며 "하물며 黨代表하려는 사람은 더욱 嚴格해야 하며, 民主化運動으로 監獄간 것도 아니고 非理嫌疑로 돈 먹고 監獄간 사람은 過去事라도 黨代表 資格 基準에서 源泉排除해야 한다"고 金 非對委 代表를 直接 겨냥했다. [29]
  • 20代 總選이 한창이었던 2016年 4月3日 새누리당 김무성 代表李 釜山 구포시장에서 進行한 박민식 候補 支援 遊說에서 "政治 잘못해서 盆唐시켜 놓고는 批判 안 받으려고 金鍾仁이란 令監님 모셔 놓고 뒤로 숨었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當時 민주당 選擧를 이끌던 김종인 委員長이 批判받았으나 2020年에는 박근혜 彈劾 以後 盆唐되었다가 도로 새누리黨이라고 批判받는 未來統合黨 選對委 委員長을 맡아 구포市場을 찾아 朴敏植 統合黨 候補 支援遊說에 나섰다.

기타 [ 編輯 ]

  • 그가 靑瓦臺 經濟首席 時節 나온 政策 中의 하나가 바로 財閥의 非業務用 土地에 對한 課稅였고, 財閥의 文魚발式 擴張의 問題點을 指摘하고 業種專門化 等을 推進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그는 鄭周永 當時 全經聯 會長을 비롯한 財閥들로부터 集中的인 牽制를 받았고 侮辱에 가까운 批判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特히 鄭周永 前 會長과 金宇中 前 會長 等으로부터 빨갱이 소리도 들었다고 한다. [9]
  • 그는 2008年 7月 25日 인터뷰에서 當時 盧武鉉 大統領에 對해 이렇게 評價했다. "웃기는 사람이다. 어떻게 三星 李健熙 會長을 '21世紀 韓國의 希望이자 비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는 김종인의 錯覺으로 事實 21世紀 言及은 2003年 뉴욕 코리아소사이어티 晩餐 자리에서 李健熙 會長이 盧武鉉 前 大統領을 두고한 祝辭였음 [30] ) 노무현 政府가 무슨 左派政權이냐? 左派 政策을 쓴 게 뭐가 있나? 무슨 ‘左派 新自由主義’... 웃기는 얘기다." 아울러 參與政府 의 左派 新自由主義라는 캐치프레이즈에 對해서도 酷評했다. 그는 新自由主義 가 根本的으로 失敗할 수 밖에 없는 經濟社會的 背景이나 哲學을 言及하며 " 로렌스 서머스 (前 美國 財務長官)도 다보스 포럼 에서 新自由主義는 失敗했다고 確認했다. 問題는 企業(들)李 國家의 모든 機能을 絶對 代替할 수 없다는 데 있다. 所得 再分配 問題와 關聯, 政府의 機能을 一部 企業에서 負擔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거기에도 限界는 있다. 假令 企業 年金制 等으로 醫療保障制度를 代替할 수 있느냐 하면 못한다는 것이다. 企業이라는 것은 언제 亡하거나 門을 닫을지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9] 인터뷰 不過 두달 後 美國發 2008年 金融危機 가 터졌다.
  • 本貫은 蔚山 으로 文廟 從事者인 河西 김인후 의 後孫이고, 招待 大法院長 을 맡은 가인 김병로 의 孫子이며, 東亞日報 , 高麗大學校 의 設立者인 인촌 金性洙 前 副統領과 먼 親戚이다. 親姻戚 中에는 憲法裁判所長, 靑瓦臺 祕書室長, 經濟 閣僚와 參謀 等이 두루 布陣해 있다. 妻三寸은 8年 9個月間 朴正熙 의 祕書室長을 지낸 김정렴 이고 匠人이 한일은행 長을 지낸 金正浩이다. 妹兄은 박봉환 前 동력자원부 長官이고, 4寸 妻男이 노태우 政府 時節 建設部 長官과 靑瓦臺 經濟首席을 지낸 이진설이다. 大法官과 憲法裁判所長을 지낸 윤영철 , 作故한 이택돈 前 신민당 國會議員(辯護士)도 4寸 妻男이다. 또한 강만수 師團의 一員으로 靑瓦臺 經濟首席, 필리핀 大使, 知識經濟部 長官職을 지낸 최중경 이 5寸 조카사위다. 아랍에미리트 大使를 지낸 권태균 前 調達廳長도 5寸 조카사위다. [31]
  • 崔明吉 이 政界에 入門한 後에는 그의 最側近으로 따라다니고 있다.

學歷 [ 編輯 ]

經歷 [ 編輯 ]

  • 1973年 3月~1988年 2月 서강대학교 經濟學科 敎授
  • 1981年 4月~1985年 4月 第11代 國會議員 (民主正義黨 / 全國區 49番)
  • 1985年 4月~1988年 4月 第12代 國會議員 (民主正義黨/ 全國區 32番)
  • 1989年 1月~1989年 7月 國民銀行 理事長
  • 1989年 7月~1990年 3月 第24代 保健社會部 長官
  • 1990年 3月~1992年 3月 大統領祕書室 靑瓦臺 經濟首席
  • 1992年 5月~1994年 9月 第14代 國會議員 (民主自由黨 / 全國區 11番)
  • 1992年 7月~大寒發展戰略硏究院 理事長
  • 1996年 11月~1997年 1月 알렉산더 폰 훔볼트財團 招聘敎授
  • 2003年 6月~2004年 4月 國民經濟諮問會議 元老經濟人分科 諮問委員
  • 2003年 9月~2004年 3月 建國大學校 經濟學科 碩座敎授
  • 2004年 5月~2008年 5月 第17代 國會議員 (새천년민주당 / 比例代表 2番)
  • 2008年 9月~2010年 5月 憲法硏究諮問委員會 委員長
  • 2010年 10月~2012年 10月 憲法裁判所 諮問委員會 委員
  • 2011年 9月~2013年 2月 韓國外國語大學校 國際地域大學院 碩座敎授
  • 2011年 12月~2012年 3月 한나라黨 非常對策委員會 委員
  • 2012年 9月~2012年 12月 새누리黨 國民幸福推進委員會 委員長
  • 2013年 3月~2015年 2月 嘉泉大學校 經營大學 碩座敎授
  • 2014年 3月~2014年 5月 알렉산더 폰 훔볼트財團 招聘敎授
  • 2014年 12月~2015年 1月 大法官候補推薦委員會 委員長
  • 2015年 3月~2016年 2月 建國大學校 經濟學科 碩座敎授
  • 2016年 1月~2016年 4月 더불어民主黨 選擧對策委員會 委員長
  • 2016年 1月~2016年 8月 더불어民主黨 非常對策委員會 代表
  • 2016年 5月~2017年 3月 第20代 國會議員 (比例代表/ 더불어民主黨 )
  • 2016年 6月~2017年 3月 第20代 國會 前半期 企劃財政委員會 委員
  • 2017年 4月~2017年 5月 國民의黨 改革共同政府準備委員會 委員長
  • 2020年 3月~2020年 4月 未來統合黨 選擧對策委員會 總括選擧對策委員長
  • 2020年 3月~2020年 4月 未來統合黨 新種 코로나바이러스感染症(코로나19)에 對應하기 위한 非常經濟對策委員會 委員長
  • 2020年 5月~2020年 9月 未來統合黨 非常對策委員長
  • 2020年 5月~2021年 4月 汝矣島硏究院 理事長
  • 2020年 9月~2021年 4月 國民의힘 非常對策委員長
  • 2021年 3月~2021年 4月 國民의힘 4·7재補闕選擧 中央選擧對策委員長
  • 2021年 12月~2022年 1月 國民의힘 選擧對策委員會 中央選擧對策委員會 選擧對策委員長團 總括選擧對策委員長
  • 財團法人 普通사람들의시대 盧泰愚센터 拷問
  • 2024年 2月~3月 改革新黨 第22代 國會議員選擧 公薦管理委員長
  • 2024年 3月~4月 改革新黨 第22代 國會議員選擧 中央選擧對策委員會 常任顧問
  • 2024年 4月~ 改革新黨 常任顧問

著書 [ 編輯 ]

  • 《只今 왜 經濟民主化인가》 2012年 11月 20日 出刊 童話出版社 ISBN   9788943103996

前科 [ 編輯 ]

  • 1993年 동화은행 賂物收受 事件에 連累되어 안영모 동화은행長한테서 2億1千萬 원을 받은 嫌疑로 搜査를 받게 되었다. 이듬해 1994年 大法院에서 懲役 2年 6個月에 執行猶豫 4年 및 追徵金 2億1千萬 原形을 宣告받았다. 그 餘波로 14代 全國區(現 比例代表) 國會議員職을 喪失했다. [32] [33]

김종인을 演技한 俳優 [ 編輯 ]

藝能 [ 編輯 ]

所屬 政黨 [ 編輯 ]

所屬 政黨 所屬 期間 備考
民政黨 1963 政界 入門
無所屬 1963 脫黨
國民의黨 1963 - 1964 創黨
無所屬 1964 - 1973 脫黨
民主공화당 1973 - 1980 入黨
無所屬 1980 - 1981 政黨 解散
民主正義黨 1981 - 1988 創黨
無所屬 1988 - 1992 脫黨
民主自由黨 1992 - 1993 入黨
無所屬 1993 - 2004 脫黨
새千年民主黨 2004 - 2005 入黨
民主黨 2005 - 2007 黨名 變更
中道統合民主黨 2007 合當
民主黨 2007 - 2008 黨名 變更
統合민주당 2008 合當
民主黨 2008 黨名 變更
無所屬 2008 - 2011 脫黨
한나라黨 2011 - 2012 入黨
새누리黨 2012 黨名 變更
無所屬 2012 - 2016 脫黨
더불어民主黨 2016 - 2017 入黨 [34]
無所屬 2017 - 2020 脫黨
未來統合黨 2020 入黨 [35]
國民의힘 2020 - 2022 黨名 變更 [36]
改革新黨 2022 -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81年 總選 11代 國會議員 全國區 民主正義黨 5,776,624 票
35.60%
全國區 49番 初選
1985年 總選 12代 國會議員 全國區 民主正義黨 7,040,477 票
35.20%
全國區 32番 再選
1988年 總選 13代 國會議員 서울 관악구 을 民主正義黨 34,752 票
27.12%
2位 落選
1992年 總選 14代 國會議員 全國區 民主自由黨 7,923,718 票
38.50%
全國區 11番 3選
2004年 總選 17代 國會議員 比例代表 새千年民主黨 1,510,178 票
7.1%
比例代表 2番 4選
2016年 總選 20代 國會議員 比例代表 더불어民主黨 6,069,744 票
25.54%
比例代表 2番 5線

各州 [ 編輯 ]

  1. 金鍾仁 "김용갑 主張, 내가 野黨온데 對한 不滿인 듯" 《聯合뉴스》
  2. 류지복. 金鍾仁 "김용갑 主張, 내가 野黨온데 對한 不滿인 듯" . 聯合뉴스. 2016年 1月 31日.
  3. (데스크브리핑)더民主 '救援投手'로…金鍾仁 破壞力은? . JTBC. 2016年 1月 14日.
  4. 文在寅, 金鍾仁 더民主 選對委員長 迎入 《한겨레》2016年 1月 14日 김원철 記者
  5. ‘더民主’ 合流 金鍾仁은 누구?… ‘初代 大法院長人 街人 金炳魯 先生의 親孫子’ Archived 2016年 3月 23日 - 웨이백 머신 . 2016年 1月 14日. 동아經濟
  6. 廉洙政 樞機卿 김종인 代表와 幻談 Archived 2016年 9月 14日 - 웨이백 머신 2016年 2月 28日 평화신문 김유리 記者
  7. “서강학派` 産室 西江大 經濟學科 50돌” (每日經濟(2010.4.7)) . 2016年 3月 17日에 確認함 .  
  8. 남덕우 前 總理-변형윤 名譽敎授 成長이냐 分配냐 激論 -2004年 12月 19日 오마이뉴스 이승훈 記者
  9. "憲法 119兆2項, 資本主義 지키는 安全裝置" -2008年 7月 25日 신학림 미디어스 記者
  10. [1]
  11. 金鍾仁 "107席 안 되면 떠날 것…킹메이커 안 해" -SBS뉴스 2016年 3月 16日 한정원 記者
  12. 더불어民主黨 123席으로 院內 第1黨 -2016年 4月 15日 한라日報 不迷眩 記者
  13. 金鍾仁 "與 土地公槪念은 '窮餘之策'" Archived 2016年 3月 29日 - 웨이백 머신 -2005年 7月 20日 聯合뉴스 정윤섭 記者
  14. 김종인 靑瓦臺經濟首席 實名制 反對한 敎授 出身 -1990年 3月 17日 경향신문 記事
  15. (인터뷰)金鍾仁 "大統領, 開城工團 中斷 '避치 못할 事情' 說明해야" . JTBC. 2016年 2月 15日.
  16. 金鍾仁 "正體性 떠드는 것 안돼..종전 프레임, 受權政黨 멀어져" -2016年 4月 17日 聯合뉴스 임형섭 李貞鉉 記者
  17. 더民主, 兩極化 解消 爲한 ‘777 플랜’ 公約 -2016年 3月 2日 매일경제신문 정석환 記者
  18. 大檢察廳 함승희 檢事,金鍾仁.안영모氏 6年 求刑 -1993年 9月 15日 MBC 백지연 앵커
  19. 田麗玉, 김종인 前 首席 等 漢나라 非對委員 批判 Archived 2016年 3月 28日 - 웨이백 머신 -2011年 12月 28日 朝鮮日報 선정민 記者
  20. TBS 生放送 오늘 2012年 10月 30日 라디오 인터뷰 Archived 2019年 1月 30日 - 웨이백 머신 (進行: 여균동 )
  21. 金鍾仁, 朴槿惠 政府 人事 失敗 "關心 없다" -2014年 6月 27日 프레시안 곽재훈 記者
  22. 김종인의 '멘붕 3連打', 이대로 가면 總選 必敗 -2016年 3月 15日 오마이뉴스 최봉진 市民記者
  23. 金鍾仁 “政黨은 元來 말 많아, 다 담으면 아무것도 못해” -2016年 2月 22日 미디어오늘 조윤호 記者
  24. 더民主 現役 金光珍·이윤석 公薦 脫落 Archived 2016年 3月 21日 - 웨이백 머신 -2016年 3月 19日 서울경제신문 박형윤 記者
  25. 안철수 “金鍾仁은 모두까기 짜르” 激昂 -2016年 3月 10日 한겨레 新聞 송경화 記者
  26. 金鍾仁 “安哲秀, 大選候補 생각 못 벗어나 統合 反對” -2016年 3月 3日 聯合뉴스 記事
  27. 칸막이 公薦 等으로 指彈 받은 이 方式의 境遇 A그룹이 候補가 B그룹의 候補보다 得票가 적게 나와도 1~10位圈에 配定되는 境遇가 생긴다.
  28. "金鍾仁, 黨憲까지 어겨가며 셀프公薦" 非難 거세 -2016年 3月 21日 아시아뉴스通信 곽정일 記者
  29. 鄭淸來 트위터, 連日 金鍾仁 直擊 "가만히 있으라? 더民主 가만히 있으면 '政權交替' 沈沒" -2016年 4月 19日 머니위크 서대웅 記者
  30. 盧 大統領, "美國의 도움 꼭 必要" -2003年 5月 13日 프레시안 임경구 記者
  31. 金鍾仁, ‘朴正熙 最側近’의 姻戚… 깐깐한 江골 - 2012年 10月 29日 한겨레 新聞 政治面
  32. 황철환. 洪準杓 "천안함爆沈 不正人事 非對委 둬야 하나" . 聯合뉴스. 2011年 12月 29日.
  33. 황희진. 鄭淸來 "동화은행 賂物事件 金鍾仁, 킹메이커 아니라 킥메이커" . 每日新聞. 2021年 11月 12日.
  34. 非常對策委員長으로 迎入.
  35. 大韓民國 第21代 國會議員 選擧 總括選擧對策委員長으로 迎入.
  36. 國民의힘 總括選對委員長 活動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문태준
第24代 保健社會部 長官
1989年 7月 19日~1990年 3月 19日
後任
金正秀
前任
文在寅
더불어民主黨 非常對策委員會 代表
2016年 1月 26日~2016年 8月 27日
後任
秋美愛
前任
黃敎安 (黨代表)
沈在哲 (代表權限代行)
朱豪英 (代表權限代行)
未來統合黨 非常對策委員長
2020年 5月 27日~2020年 9月 2日(黨名變更)
後任
金鍾仁
前任
金鍾仁
國民의힘 非常對策委員長
2020年 9月 2日~2021年 4月 8日
後任
朱豪英 (代表權限代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