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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훈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김승훈

마티아   김승훈   新婦
樞機卿 職責 新堂洞 聖堂, 혜화동 聖堂, 阿峴洞 聖堂, 東豆川 聖堂, 太宗臺 公所, 東大門 聖堂, 홍제동 聖堂, 왕십리 聖堂, 汝矣島洞 聖堂
職責 天主敎正義具現司祭團 代表, 天主敎人權委員會 顧問
聖職
司祭敍品 1962年 12月 21日
서울大敎區
個人情報
出生 1939年 7月 6日 ( 1939-07-06 )
日帝强占期 朝鮮 平安南道 鎭南浦
腺腫 2003年 9月 2日 ( 2003-09-02 ) (64歲)
서울 汝矣島 聖母 病院
安葬地 龍仁 天主敎 聖職者 墓地 北緯 37° 19′ 18″ 東京 127° 08′ 29″  /  北緯 37.321681° 東經 127.141466°  / 37.321681; 127.141466
國籍 大韓民國
敎派 天主敎
父母 김구봉(簿), 이신덕(某)
家族 김승호 (兄), 金淨 (동생), 김승겸(동생), 김영희 (동생), 김보성 (동생)
學歷 성신大學 卒業 (= 現 가톨릭 大學校)

김승훈 (金勝勳, 1939年 7月 6日 ~ 2003年 9月 2日 洗禮名 마티아)은 大韓民國 新婦 다. 1939年 平安南道 鎭南浦 에서 태어나 解放 을 맞아 南으로 내려와 서울 성신大學 을 卒業한 뒤 1962年 서울大敎區 에서 司祭敍品을 받았다. 平生 어렵고 억눌린 사람들을 도왔으며, 1974年 天主敎正義司祭團 을 創立하면서 民主化 運動을 本格的으로 始作했다. [1] 特히 勞動界 權益向上 및 人權保護에 많은 貢獻을 하다가, 肝癌 이 惡化되어 2003年 9月 2日 午前 65歲로 善終하였다. [2]

生涯 [ 編輯 ]

外할아버지 이경모는 平安南道 鎭南浦 財力家로 抗日 運動家를 돕다가 困辱을 치르기도 했으며, 동생은 김승겸이고, 어머니는 이신덕으로 性格이 大汎하고 自身이 옳다고 여기는 일은 推進하는 熱情家였다.

1962年 12月 新堂洞 聖堂 補佐神父로 첫 미사를 執典했다. 1963年 9月 25日 煉炭가스 를 마시고 意識을 잃었으나 20餘日 만에 깨어났다. 以後 ‘煉炭가스 神父님’이라는 別名으로 불렸다. 1964年 말에는 서울小神學校 라틴語 敎師로 發令났다. 性格은 豪放하면서도 따뜻한 便이였으나, 말數도 적고 以北 出身으로 거칠고 투박한 말套 때문에 건방지다는 誤解를 많이 받았다.

서울 혜화동 聖堂, 阿峴洞 聖堂, 京畿道 東豆川 聖堂으로 赴任誌를 옮기는 동안 肺結核에 걸렸다. 갈멜수녀원 에서 療養하다가, 釜山 太宗臺 公所로 休養次 왔다가 몸과 마음을 治癒하고 社會 問題에 눈을 뜨게된다. 그는 이곳을 ‘내 人生에서 하나의 징검다리 같은 곳’이라고 回想했다.

이때 깡牌에게 抑鬱하게 얻어 맞은 露店商 할아버지가 오히려 警察에 拘束되는 事件을 보면서 社會 問題에 關心을 갖게되고, 마침 原州敎區 에서 5.16 奬學會 原州文化放送 과 關聯한 不正 糾彈大會가 始作되자, 太宗代 公所에서도 할아버지 拘束에 抗議하는 祈禱會를 每日 저녁 열게되었다. 太宗臺에서 健康을 되찾자 1972年 1月 서울 新林洞 聖堂 主任神父로 發令받았다.

1962年부터 3年間 繼續된 第2次 바티칸 公議會 는 敎會의 存在 目的이 敎會 自體가 아니라 世上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人間 個人의 尊嚴性과 自由에 對한 認識을 깊이 하고 社會 正義와 平和를 實現하기 위해 敎會가 社會 問題에 積極 參與할 것을 勸奬하게 된다. 韓國 天主敎會도 1966年 5月 〈바티칸公議會와 韓國 敎會〉라는 主敎團 司牧敎書를 통해 이를 積極 支持했다. 이는 當時 朴正熙 의 維新 鐵拳 統治를 받던 1970年代 韓國 敎會에 큰 影響을 基쳤다. 1974年 7月 6日 池學淳 主敎가 拘束되면서 젊은 司祭를 中心으로 1974年 9月 23日 正義具現司祭團 이 公式 出帆하게 되고, 김승훈 神父도 함께 參與한다.

베트남 戰爭 에서 남베트남 이 滅亡하고 緊急措置 9號 가 發表되었고, 明洞聖堂에서 1976年 3月 1日 拘束者 釋放과 3.1精神 實現을 위한 新舊敎 合同미사를 드리는데 김승훈 神父는 緊急措置 9號 撤廢, 維新政權 終熄을 主題로 講論을 했고, 이어 문동환 牧師의 說敎와 李祐汀 敎授의 救國 宣言이 이어졌다. 이 救國 宣言에 署名했던 함석헌 , 함세웅 , 문정현 , 신현봉 等 11名은 拘束되고 김승훈 神父 等 7名은 直接 加擔者가 아니라는 理由로 不拘束 立件되었는데, 司祭團 最年長者인 신현봉과 實質的인 指導者 함세웅이 拘束되어 생긴 空白을 自然스레 메우게되었다. [3]

以後 1979年에는 YWCA 僞裝結婚式 事件 으로 拘束되고, 1980年 김대중 內亂 陰謀 事件 과 關聯되어 54日間 拘禁되었으며, 1982年 韓國敎會社會宣敎協議會 會長을 歷任하던 中 反美聲明書 事件 으로 拘束되었다. 1985年 民主制度爭取 國民宣言 延命 및 發表를 하고, 民主化實踐家族運動 協議會 顧問을 맡았다.

1987年 5.18 光州 民主化 運動 7周忌 記念미사 中 天主敎正義具現司祭團 에서 “박종철君 拷問 致死事件은 造作되었다”는 題目으로 聲明을 發表하여 朴鍾哲 拷問 致死 事件이 造作된 事實을 밝혀 1987年 6月 抗爭 이 始作된 事實로 有名하다. [4] 1988年에는 天主敎正義具現全國司祭團 代表를 歷任하고, 1998年에는 장충聖堂 10周年 記念과 聖母昇天大祝日 미사를 執典하기 위해 司祭 8名과 함께 北韓을 訪問했다.

略歷 [ 編輯 ]

著書 [ 編輯 ]

  • 김승훈 (1999年 11月 29日). 《當身께서 다 아십니다》 (講論모음집) . 빛두레. ISBN   2002840000125 |isbn= 값 確認 必要: invalid prefix ( 도움말 ) .  

事後 [ 編輯 ]

葬禮는 明洞聖堂 에서 金壽煥 樞機卿과 서울大敎區長 鄭鎭奭 大主敎 執典으로 葬禮미사에 이어 民主社會張으로 치뤄졌다. 문규현 神父가 互相人事를 하고, 고은 詩人이 追慕詩를 읽었다. 서울大敎區 龍仁 天主敎 聖職者 墓地에 安葬되었다. 大韓民國 政府에서는 그리스도精神을 바탕으로 勞動·人權運動 및 民主化運動에 寄與한 공을 기려 國民勳章 모란장 을 追敍했다.

各州 [ 編輯 ]

  1. “天主敎 김승훈 神父, 宿患으로 別世” . 한겨레. 2003年 9月 2日.  
  2. 윤석조 (2003年 9月 2日). “고(故) 김승훈 神父에 國民勳章모란장 追敍” . 文化體育觀光部 . 2013年 3月 8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 金起善 (2010年 8月 31日). “神父님, 우리 神父님 김승훈” . 가톨릭뉴스 只今여기 . 2013年 3月 8日에 確認함 .  
  4. 김덕진 (2011年 8月 28日). “꽃이 되신 적이 없는 분, 김승훈 神父” . 가톨릭뉴스 只今여기 . 2013年 3月 8日에 確認함 .  
  5. 天主敎 正義具現司祭團 初代 代表 김승훈神父 腺腫
  6. 正義具現司祭團 新婦一行 平壤到着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