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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炳官 (言論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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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炳官
出生 1934年 7月 24日 ( 1934-07-24 )
日帝 强占期 朝鮮 京城府 鍾路房 季冬
死亡 2008年 2月 25日 ( 2008-02-25 ) (73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江南區 일원동 三星서울病院
死因 食道癌
性別 男性
國籍 大韓民國
本館 蔚山
別稱 號 花亭(化汀)
學歷 고려대학교 經營大學院 MBA
職業 言論人
企業人
前職 東亞日報 名譽會長
父母 金相万 (簿), 고현남(某)
配偶者 안경희
子女 長女 김희령
長男 金在鎬
次男 김재열

金炳官 (金炳琯, 1934年 7月 24日 ~ 2008年 2月 25日 )은 大韓民國의 政治人 家門 이며 言論人 이다. 金性洙 大韓民國 第2代 副統領 의 長孫이다.

1968年 東亞日報 社에 入社해 33年間 新聞 經營의 一線에서 일했으며 販賣國葬, 常務, 專務 等을 거쳐 1989年부터 2001年까지 東亞日報 의 使嗾를 歷任했다. 그 뒤 2001年 隱退하여 東亞日報 名譽會長으로 있었다. 韓國新聞協會 會長, 韓國디지털敎育財團 理事長, 일민文化財團 理事長 等을 지냈고, 1999年부터 2005年까지 고려중앙학원 의 第11代 財團 理事長을 歷任했다.

學歷 [ 編輯 ]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1934年 京城府 에서 인촌 金性洙 의 아들 佚民 金相万 의 長男으로 태어났다. 그는 中央高等學校 高麗大學校 經濟學科를 卒業했다. 湖南 拒否(巨富) 家門의 長孫으로 태어났으나 그는 한때 판소리를 배우기도 했다. 後日 回顧에서 그는 名唱 만정 김소희에게서 한때 가르침을 받은 것을 자랑하기도 했다.

'滿廷(晩汀) 김소희 先生님의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한숨 몰아쉬고) 高나헤~ 成火로구나헤~ 아깝다 내 靑春, 언제 다시 올거나, 철 따라 봄은 가고, 봄 따라 靑春 가니, 오는 白髮을 어이를 할거나…. [1] '

가슴 깊이 醉氣가 젖어들면 구슬프게 ‘흥타령’을 불러젖혔다. [1] 중앙고와 고려대 經濟學科를 卒業하고 1968年 동아일보에 入社해 33年間 新聞 經營의 一線에서 일했다. [2]

할아버지인 金性洙 가 設立한 동아일보에 1968年 入社해 廣告, 販賣, 總務局 等 여러 部署에서 勤務했다. 以後 東亞日報 管理課長 [3] , 管理部 次長 [4] , 廣告部長, 販賣部長, 廣告局 副局長 等을 지냈다. [3]

그 뒤 1977年 東亞日報 販賣局長 및 廣告局長, 1981年 常務理事, 1983年 專務理事 等을 지냈다. [3] 以後 1985年 東亞日報 副社長에 選任된다.

言論, 社會團體 活動 [ 編輯 ]

東亞日報 經營 [ 編輯 ]

아버지 金相万 의 뒤를 이어 東亞日報 經營者가 되었다. 1985年 副社長, 1987年 發行人을 次例로 맡았고, 1989年 3月 東亞日報 代表理事 社長 兼 發行人 [4] 이 되었다.

그가 東亞日報 發行人이 된 1987年 警察이 서울大生 朴鍾哲 君을 고문치사한 事件이 일어났다. 嚴酷했던 그해, 1月 19日子 동아일보는 ‘물拷問 途中 窒息死’ 題下에 1面 全體를 이 事件 關聯 記事로 채웠다. 그뿐 아니라 當時 發行面數 12面 中 6個 面에 걸쳐 國家 公權力의 蠻行을 告發했다. [1] 政府의 報道 中止 壓力에도 그는 屈하지 않았다. 동아일보가 連日 터뜨린 拷問致死 事件 速報는 그해 6月 民主 抗爭 의 起爆劑가 됐다. 그때도 그는 동아일보 記者들의 버팀木이었다. [1] 그러나 이 過程에서 解雇된 職員들의 處遇에는 疏忽하여 批判의 餘地가 되기도 했다.

85年 副社長으로 昇進했고 87年 發行人을 맡았다. [5] 1991年 社長에 再選任된 뒤 1993年 3月 東亞日報 會長을 거쳐 2001年에는 東亞日報 名譽會長으로 就任했다. 韓國新聞協會 會長과 일민文化財團 理事長 等도 歷任했다.

김병관이 東亞日報 發行人이던 1987年 동아일보는 서울대生 박종철君 拷問致死 事件을 特種 報道하고, 以後 第2創刊 宣言 等을 통해 賣出額이 늘어나는 等 社勢를 擴張했다. [3] 서울 忠正路驛 大型 社屋을 建立했고, 光化門에 동아미디어센터를 開設한 것도 김병관이 代表理事로 있던 때였다. 1995年에 동아일보는 86億 원의 黑字를 記錄하기도 했다. [3]

1995年에 中國을 訪問해 리펑(이붕) 總理와의 單獨 會見을 성사시켰고, 1998年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朝鮮아시아太平洋平和委員會 김용순 委員長의 招請을 받아 南側 新聞 經營人으로서는 最初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을 訪問했다. 또 美國의 뉴욕타임스와 日本 아사히 新聞 , 러시아 이즈베스티야 等의 新聞들과 提携를 맺고 國際的 交流를 擴大하기도 했다. [3]

文化, 社會 後援 活動 [ 編輯 ]

1989年 동아일보 社長 時節, 그가 國立劇場과 손잡고 펼친 ‘創作 唱劇運動’은 瘠薄했던 國樂界에 新鮮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1] 海外 巡廻公演을 통해 世界的으로 큰 呼應을 얻은 唱劇 ‘아리랑’을 비롯해 임꺽정, 安重根, 金九, 洪範圖, 全琫準 等이 그의 後援으로 再照明됐다. [1] 또한 南道의 土俗, 民謠를 素材로 한 演劇과 映畫 撮影에도 全幅 後援, 支援해주었다.

1998年 10月 北韓에 다녀온 화정은 私財를 털어 ‘花亭平和財團’과 ‘21世紀 平和硏究所’를 設立했다. 얽히고설킨 韓半島 問題의 解法을 찾기 爲한 것이었다. [1] 그밖에 그는 韓國新聞協會 會長과 韓國디지털敎育財團 理事長 等을 歷任하기도 했다.

生涯 後半 [ 編輯 ]

稅務調査와 名譽會長職 辭退 [ 編輯 ]

1999年 고려대와 中央中高校, 考慮中高校 財團인 고려중앙학원 理事長으로 就任했고, 2001年 2月 社長 오명 에게 東亞日報 會長職을 물려주고 名譽會長에 就任하였으나 政府의 稅務調査가 始作되자 辭退하였다.

동아일보에 변함없는 期待와 愛情, 믿음을 보내고 있는 讀者와 國民에게 心慮를 끼친 데 對해 더할 나위 없는 송구스러움을 느낀다. ...(以下 中略)... 現 狀況에 對한 모든 責任을 지고 移徙와 名譽會長職을 모두 辭任한다. ...(以下 中略)... 동아일보는 이 나라 自由民主主義의 堡壘로서 自由民主主義와 市場經濟의 수호는 讀者들과의 變할 수 없는 約束”이라며 “改革과 合法이라는 이름으로 自由民主主義를 毁損시키려는 勢力에 對해 嚴正한 批判으로 自由民主主義를 지켜달라. [4]

2001年 國民의 政府 當時 稅務調査가 始作되자 一線에서 물러났지만 [5] 2005年 다시 동아일보 名譽會長에 推戴되었고, 그해에는 韓國디지털敎育財團 理事長으로 選任되는 等 敎育 分野에서도 活動했다. 그러나 2001年 7月 國民의 政府 의 東亞日報 稅務 調査 過程에서 夫人 안경희 가 2001年 7月 14日 投身自殺하였다.

文化 藝術과 學生 支援에도 積極 參與하여 苦學生들의 學費를 後援하였고, 民俗文化 硏究에도 支援을 아끼지 않았다. 1990年 唱劇 <아리랑>의 러시아 公演을 支援, 1991年 國民勳章 無窮花章을 받았으며, 1997年 오스트레일리아 모나쉬대학校에서 名譽法學博士, 2001年 日本 와세다 大學 에서 名譽法學博士 學位를 授與 받았다.

2001年 病床에서도 中央中·高校 開校 100周年을 記念하고 人文學 發展을 위해 工事 中이던 ‘人文學博物館’의 工事 進陟 狀況을 直接 챙겼다. [1] 2001年 以後 病席에 있었고, 食道癌 等의 持病이 惡化되었다. 2005年부터 고려중앙학원 常任顧問을 맡아 왔다. [2] 2005年 名譽會長職에 復歸했다. 以後 名譽會長으로 있으면서 韓國新聞協會 會長 等을 歷任했다. [5]

鬪病 [ 編輯 ]

2006年 고려대학교안암병원 에서 食道癌 診斷을 받고 三星서울病院 에서 手術을 받았으나, 癌이 惡化되어 2007年 12月 20日 삼성서울병원에 入院해 鬪病하다 2008年 2月 25日 死亡했다.

事後 [ 編輯 ]

高麗大 花亭體育館에서 花亭 金炳官 先生 葬禮委員會 主管으로 葬禮를 치른 後 葬地는 京畿道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先塋에 묻혔다. [2]

家族 關係 [ 編輯 ]

思想과 信念 [ 編輯 ]

그는 言論社를 運營함에 있어 '이 나라 自由民主主義의 堡壘로서 自由民主主義와 市場經濟의 수호는 讀者들과의 變할 수 없는 約束 [4] '이라는 信念을 가졌다. 그는 '自由民主主義와 市場經濟의 守護'를 義務라 自任하였으며 [4] '改革과 合法이라는 이름으로 自由民主主義를 毁損시키려는 勢力 [4] 에 對한 反撥과 否定的인 視角을 披瀝하였다.

評價와 批判 [ 編輯 ]

肯定的 評價 [ 編輯 ]

鄭鎭奭 한국외국어대 名譽敎授는 그를 기리는 追慕辭에서 "화정 先生에게 동아일보는 3臺를 이어온 영광스러운 家業(家業)인 同時에 벗어던질 수 없는 무거운 十字架였다. 創業主 인촌 金性洙 先生을 中心으로 日帝强占期의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時期에 出發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激動의 歷史를 헤쳐온 歷史 깊은 新聞의 運營을 責任지는 重壓感에서 暫時라도 몸을 避할 수 없는 狀況이었다. [1] "고 評하였다.

이정일 前 國會議員은 화정의 切親한 知人 中 한 名이다. 화정의 夫人 안경희 女史 生前에는 內外가 함께 海外旅行을 자주 다녔다. 李 前 議員의 記憶 속에 화정은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는’ 言論人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李 前 議員의 回顧다.

그분은 不義와 妥協할 수 있는 性格이 아니었다. 虛虛實實 웃더라도 自己 主觀이 분명했다. 平素 술을 좋아했지만 醉中에도 編輯局長이 相議해오면 全혀 흐트러짐 없이 恒常 공정하고 불편부당한 立場에서 冷靜하게 指示했다. 다른 것은 讓步해도 記事에서만큼은 讓步란 없었다. 1990年 노태우 前 大統領 在任 中 3黨 合黨을 할 때도, 김대중 政府 때도 權力에 問題가 있으면 決코 坐視하지 않았다. 言論을 떠나서 다른 무엇을 할 수 없는 분이었다. [1]

그의 初等學校 同窓으로 60年 가까이 喜怒哀樂을 함께한 李尙爀 辯護士는 “투박한 얼굴에 말은 없고 눈만 껌뻑거려 남들에겐 무뚝뚝해 보였겠지만, 잔情이 많은 사람이었다”면서 “어느 旅行地를 가든 1000~2000원 하는 값싼 記念品을 사가지고 와 胡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職員들에게 나눠주곤 했다”고 말했다. [1]

否定的 評價 [ 編輯 ]

軍事 政權의 壓力下에 解雇된 記者들의 處遇에 無關心하여 批判의 對象이 되기도 했다.

東亞투위 事件으로 解職된 記者들로부터 謝過하라는 要求도 끊임없이 받았다. [5] 그러나 그는 謝過하지 않았다. 그의 畢生의 家業이었던 동아일보는 조선일보, 中央日報와 함께 '朝中東'이라는 否定的 이미지로 點綴되어 있기도 하다.

기타 [ 編輯 ]

그의 판소리 實力은 판소리 名唱들에게도 認定되었다. 안숙선 名唱은 “아주 걸쭉하고 自身 있게 잘 부르셨다. 참 멋있는 분이셨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우리 音樂을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 분이셨다”고 回想했다. [1] 그는 身分에 拘礙됨이 없이 民謠 等을 곧잘 부르곤 했다.

‘正論直筆(正論直筆)’과 ‘公船事後(公先私後)’는 그가 平生 지켜온 所信이었다. [1]

李明博 政府 의 初代 外交·安保擔當 首席祕書官을 지낸 김병국 과 四寸 사이이다. 李健熙 와는 子女들끼리 結婚하여 査頓 關係이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前任
채문식
第11·12代 고려중앙학원 理事長
1999年 3月 5日~2005年 6月 15日
後任
현승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