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得臣
(金得臣,
1604年
12月 8日
(
陰曆 10月 18日
)) ~
1684年
10月 8日
(
陰曆 8月 30日
))은 朝鮮 中期의 文人이자 詩人이다. 字는 자공(子公), 號는 栢谷(栢谷)이며 本貫은
(舊)安東
이다.
壬辰倭亂
때
第1次 晉州城 戰鬪
를 勝利로 이끈 金時敏은 그의 할아버지이다. 아버지는 慶尙道觀察使를 지낸 김치(金緻)이며, 어머니는 泗川 睦氏(泗川睦氏)이다.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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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天然痘
를 앓았으나 1642年 司馬試에 合格해 進士가 되었고 以後 成均館에 合格했다.
[1]
以後 嘉善大夫에 올라 安風軍(安豊君)에 冊封되었으나
1684年
忠淸道
槐山
땅에서 지내던 中 財物을 노린 明火賊(明火賊)떼에게 被殺되었다. 金得臣의 被殺 消息을 接한
肅宗
은 “明火賊이 師傅(士夫)의 집에 들어가서 人命을 殺害하여 2品 再伸(宰臣)李 칼날에 傷하여 죽었으니, 놀라고 慘酷함을 禁하지 못하겠다. 角진(各鎭)의 討捕使(討捕使)로 하여금 時日을 限定하여 찾아 잡게 하라.”
[2]
라고 命하였다.
그는 10歲에 글을 깨우치기 始作했다. 그는 工夫를 熱心히 하였지만, 몇 時間 前 工夫한 것을 다 잊는 等 學習 內容을 오래 記憶하지 못하여 工夫가 많이 힘들었다. 그의 아버지 김치는 金得臣에게 工夫를 멈추라는 遺言을 남긴 後 世上을 떠났으나 그는 밥을 먹을 때도, 步行할 때도 繼續 冊을 놓지 않으며 冊 한 卷은 11萬 3千餘 番이나 읽고 다른 冊들은 2萬餘 番 읽는 等 엄청난 努力으로 能熟해져 59歲의 나이로 成均館에 合格했다.
金得臣 墓碣銘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
|
재주가 남만 못하다 스스로 限界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鈍한 이도 없겠지만, 結局에는 이름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데 달려있을 따름이다.
[3]
|
”
|
生前에
時
(詩)에 名望이 있었으며 著述이
丙子胡亂
때 많이 타 없어졌으나, 文集인 《백곡집》에는 많은 詩와 散文들이 傳하고 있다.
電氣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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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석,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安風軍 金 공 墓碣銘〉(《백곡집》, 〈附錄〉에 收錄됨; 現存하는 《遺在집》에 실려 있지 않음)
- 김가원, 〈行長初〉(危)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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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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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곡집》, 〈附錄〉, 墓碣銘 및 行長初(行狀草)
- ↑
《肅宗實錄》 卷15, 肅宗 10年(1684年) 9月 6日(技士) 3番째 記事
- ↑
該當 原文은 다음과 같다. "無以才不猶人自?也。莫魯於我。終亦有成。在勉?而已。"(《백곡집》, 〈附錄〉,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