基督敎 美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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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의 最後의 晩餐 (1498年)

基督敎 美術 (Christian art)은 基督敎 主義를 나타낸 宗敎 藝術 이다.

誕生 [ 編輯 ]

紀元 1世紀 初, 基督敎가 생겨난 以來 콘스탄티누스 皇帝에 依해 基督敎 寬容令(寬容令)이 恐怖(311年)되기까지의 300年間 가까이 이 新興宗敎는 歷代 皇帝에게 繼續 迫害를 받았다. 그러나 로마帝國은 制定(帝政) 末期에 가까워짐에 따라 頹廢的 傾向과 國政(國情)의 不安이 높아져, 이러한 가운데 精神的 救濟를 찾는 基督敎人들은 날로 增加해 갔다. 1世紀에서 始作되어, 5世紀頃 東邦에서 비잔틴 美術 , 西方에서는 메로빙거 王朝 美術의 時代가 出現하기까지, 主로 로마를 中心으로 한 基督敎 美術을 初期 基督敎 美術이라고 부른다. 初期 基督敎 美術의 誕生은 두 가지 理由에서 初期 基督敎 自體의 成立보다 相當히 늦게 되었다. 그 첫째 理由는 基督敎의 前身인 유대敎가 偶像崇拜를 禁止하고 있었기 때문에, 初期 神學者 사이에도 그의 옳고그름을 둘러싼 論爭이 있어 宗敎美術로서의 發生이 沮止되었기 때문이다. 그 둘째 理由는 皇帝의 迫害로 인해 公公然한 活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美(美)의 世界를 사랑하는 古典 世界에 살고 있던 基督敎人들은 그들의 美術을 形成해 갔다.

카타콤베의 美術 [ 編輯 ]

迫害를 避한 그들은 地下墓室(地下墓室)에 帝室(祭室)이나 禮拜室을 만들어 每日每日의 信仰生活을 지켜 나갔다. 이 地下 帝室을 카타콤베(Catacombae)라고 부른다. 로마 周邊 特히 아피아 街道(街道)를 따라 만들어진 賞 칼리투스, 都彌틸라, 프레테스에 있는 것이나 로마 市內의 上 아그네第, 프리실라에 있는 것이 有名하나, 나폴리, 시라쿠사, 알렉산드리아 等 로마 以外의 地方에서도 發見되고 있다. 로마 市內에는 信者인 貴族의 私邸(私邸) 地下室에 第실이 만들어져 있는 것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에도 續續 發掘·發見되고 있다. 카타콤베 內部는 地下에 여러 層을 이루면서 縱橫(縱橫)으로 뚫린 坑道(坑道)를 파서 周圍 壁面 곳곳에 獅子(死者)를 모시는 龕室(龕室)을 配置하고, 여기저기 廣場을 만들어 이곳을 그들이 禮拜 場所로 使用하였다. 壁이나 天障은 壁畫나 扶助를 利用하여 裝飾하고 있다. 地下 帝室의 裝飾은 에트루리아 時代의 옛날부터 있었던 習慣이다. 카타콤베의 裝飾 樣式은 時代的으로도 變遷을 겪었다. 初期의 것은 폼페이의 壁畫 等과도 共通點이 많은 헬레니즘 美術의 技術을 利用한 것이었다. 主題(主題)는 神이나 福音書의 內容 自體가 아니고 許多한 象徵을 통한 表現이 行하여졌다. 自己들의 禮拜 場所를 아름답게 裝飾하고, 마음의 平安을 얻으려는, 가장 素朴한 理由에서 생겨난 初期의 裝飾은 植物이나 神話의 世界를 描寫한 世俗的인 것과 別般 差異가 없었다. 그러나 漸次 이러한 主題에 信仰的인 意味가 扶餘되자 單純한 裝飾도 하나의 象徵이 되었다. 흔히 쓰인 象徵的 徒養(圖樣)으로서는 牧者(나는 善한 牧者로다, 요한福音 第10張), 葡萄 무늬(나는 葡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 요한福音 第15張), 어린 羊(보라 神의 어린 羊, 이사야서, 요한福音 第1張) 等은 聖書에서 由來하는 것인데, 이 밖에 田園 風景과 로마 神話에서 取材된 樂園의 그림 等은 基督敎의 天國의 想像圖(想像圖)로서 專用(轉用)되었다. 이러한 牧歌的 表現은 헬레니즘 美術을 그대로 繼承한 것이었다. 이 外에 不朽(不朽)를 나타내는 工作(孔雀), 聖靈 이나 죽은 者의 靈을 天上으로 옮기는 獅子(使者)로서의 비둘기, 復活을 의미하는 不死鳥 等이 基督敎的 象徵으로 自然主義的 表現에 依해 取扱되었다. 時代의 經過에 따라 이러한 象徵的 表現에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노그램 PX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물고기(그리스어로 '神의 아들 예수, 救世主'의 두 文字를 組合하면 물고기의 意味가 된다는 데서 由來된다), 또는 神에게 祈禱하는 人物(오란테), 信者의 上(像) 等 信仰 自體와 相當히 密接한 關係에 있는 表現이 發見된다. 이러한 것들은 어느 것이나 先覺(線刻)이나 一種의 프레스코로써 表現되었다. 카타콤베의 美術은 4世紀 初(初), 基督敎가 公認되어 地上에 나온 後에도 5世紀頃까지 繼續하여 製作되었다.

바실리카式 敎會堂 [ 編輯 ]

313年 밀라노 勅令 에 依해 地上으로 나온 基督敎人들은 사도 殉敎 의 땅을 비롯하여 要素에 敎會堂을 建設하였다. 基督敎 敎會와 古典時代의 宗敎的 神殿 사이의 커다란 差異點은 後者가 單純히 神이 居處하는 집인 데 對해, 前者는 神의 住居인 同時에 信徒가 그곳에 모여 禮拜上의 意識이나 集會를 行하는 場所였던 點에 있었다. 따라서 前者는 帝室(祭室) 以外에 보다 큰 空間이 必要하였다. 初期 基督敎가 採擇한 敎會 建築의 한 樣式은 바실리카式(式)이었다. 古代史에 去來所(去來所)·裁判所 等,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公共建物 形式과 類似하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바실리카式 會堂(會堂)의 起源은 近年에는 敎徒 迫害가 적었던 오리엔트 地方에 있던 敎會 建築과, 이탈리아 南部 캄파니아 地方의 民家(民家) 樣式이 區(舊)바실리카에 相互 影響을 준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이 形式은 그 後 中世를 통해 敎會 建築의 原形(原型)이 되는 重要한 것이었다. 一般的으로 平面도(平面圖)에서는 于先 敎會堂 前面(前面)에 넓은 아트리엄(前庭)이 있고, 여기에는 性천분수(聖泉噴水)가 있는 수가 많다. 다음 入口에는 懺悔者(懺悔者)가 머무는 작은 房인 나르텍스가 있고 그 안쪽에 本堂(本堂)이 있게 된다. 黨內는 入口에서 祭壇까지 잇닿은 좁고 긴 네이브를 사이에 두고 兩側으로 一列(一列) 또는 2列의 階段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줄지은 기둥으로 나뉘어 있다. 祭壇 앞에는 僧侶가 儀式을 行하기 위한 場所인 비머가 네이브와 直角으로 폭넓게 交叉되어 있다. 비머는 후세, 特히 中世의 트랜세프트(左右에 붙은 廊下)로 發展하여, 十字形 플랜을 構成한다. 後期에는 비머 앞에 聖歌隊席(聖歌隊席)李 놓인다. 또한 帝室(祭室)의 後篇은 半圓形(半圓形)으로 튀어나오게 한 애프스로 되어 있다. 構造는 古代 바실리카와 마찬가지로 네이브가 아일보다 높고, 여기에 採鑛(採光)을 위한 높은 窓이 있다. 기둥은 네이브의 酒癖(主壁)을 받치기 위해 槍과 平行으로 세워졌으나 아치 構造가 發展됨에 따라 기둥 사이는 넓어진다. 지붕은 처음에는 木造(木造)의 朴公 形態였으나 後에 石彫의 아치 構造로 發展하였다. 애프스의 지붕(石造) 內部 및 帝室과 네이브를 區分하는 아치형 部分에는 모자이크 裝飾이 되어 있다. 바실리카式(式)의 主된 例로는 콘스탄티누스 皇帝가 세운 城 피에트로 人 바티카노, 라테라爐의 城(聖) 조반니, 性 파울로 폴리 레 무라(폴리 레 무라는 성외란 뜻) 等이 있으나 모두 그 後의 改築(改築)으로 原形(原型)을 볼 수 없으며 오히려 5世紀에 建立된 城(聖) 마리아 마지오레 寺院, 性 사비나 寺院, 性 클레멘테 寺院에서 그 例를 찾을 수 있다.

集中樣式 [ 編輯 ]

初期 基督敎 時代의 또 다른 建築 方式으로 集中式이 있다. 로마 時代의 廟堂(廟堂)·浴堂(浴堂)·申前 等으로부터 發達하여, 主로 세례당(洗禮堂)의 建築樣式으로 쓰였다. 기둥의 熱(列)을 圓形으로 配置하고 둥근 지붕을 씌우는 원당(円堂) 또는 八角堂(八角堂) 形式이다. 로마의 性(聖) 콘스탄차는 墓室(墓室)로부터 改築한 集中式의 좋은 例이다. 아르메니아나 소(小)아시아는 일찍부터 基督敎國(敎國)李 되었고 또 돔 形式이 發展된 곳으로서 獨特한 돔 建築이 있었던 것 같다. 오래된 것은 다 消失되었으나 이것이 비잔틴 美術에 끼친 影響은 至大한 것이었다.

모자이크 [ 編輯 ]

이들 敎會 建築은 이탈리아의 剛한 日光을 避하여 두꺼운 壁으로 덮여 있으나, 이러한 큰 壁面을 메우는 데 가장 많이 쓰인 것은 모자이크였다. 이집트에서 始作되어 폼페이나 엘코라노를 거쳐 發達된 모자이크화(畵)는 힘찬 線(線)과 호화로움을 表現하는 點에, 새로이 勢力을 넓혀가는 基督敎 美術의 精神과 東方的인 趣向에 적합한 바가 있었다. 初期의 作品에는 아직 카타콤베와 共通되는 헬레니즘的 牧歌的(牧歌的), 또는 裝飾的인 素朴한 象徵性을 나타내는 것이 있었으나, 4世紀 말의 산타 푸덴齒牙나에는 12師徒에 둘러싸인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거리와 골고다 언덕에 서 있는 十字架를 눈앞에 그리는 場面이 있다. 또한 5世紀 初의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 寺院 西쪽에 新·舊約 聖書가 壁面에 圖解(圖解)되어 있다. 이것은 基督敎가 國家 保護下에 積極的인 態度로써 새로운 權威로 登場해 간다는 事實의 表現인데, 表現 方法은 오히려 從來의 自然的 形體를 追求하는 事實的 方法을 벗어나 印象的·抽象的인 것이 된다. 이것은 形體의 簡潔과 强調를 통하여 交椅(敎義) 說明을 容易한 것으로 하는 同時에, 基督敎 信仰의 母體가 된 東邦(東方)의 傳統이기도 하였다.

工藝 [ 編輯 ]

初期 基督敎 美術에서 조각은 거의 그 重要性이 認定되지 못하고, 主要한 것으로는 고작 <善한 牧者>란 大理石像(3世紀 末)李 알려져 있다. 또한 工藝에도 뛰어난 것은 드물고, 大槪 로마 時代의 것을 繼承하고 있는 實情이다. 基督敎的 意味를 갖는 象徵的인 道上(圖像)이 그려진 琉璃 提起(祭器) 等에 多少 볼 만한 것이 있을 뿐이다. 그밖에 小아시아山(産)이라고 생각되는 象牙(象牙)나 金公(金工)의 提起類(祭器類)가 4世紀 以後 조금씩 나타났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