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항
(奇大恒,
1519年
~
1564年
)은 朝鮮 中期의 文身이다. 字는 家口(可久), 諡號는 政見(貞堅)이며 本貫은
행주
(幸州)이다. 應敎 基準(奇遵)의 아들로, 學者
기대승
의 4寸型이다. 隻身
이량
의 側近이었으나,
1563年
이량이
許曄
,
이문형
,
기대승
等을 除去하려 하자
심의겸
의 使嗾를 받고 이량 一派의 彈劾, 攻擊을 陣頭指揮하여 沒落시켰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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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6年(明宗 1) 式年文科에 乙科로 及第하여 官職에 올랐다. 그 뒤 三四와 言官 等의 請要職을 두루 歷任하고,
1551年
平安道
暗行御史로 赴任하여 民弊를 살피고 貪官汚吏들을 摘發하고 돌아왔다.
1552年
吏曹正郞, 1553年 司諫院獻納, 1554年 司諫院사간이 되고 이어 弘文館前漢, 直提學을 지냈다. 1556年에는 黃海道觀察使 兼 해주 牧師(黃海道觀察使兼海州牧使)로 나갔다가
1557年
行龍驤衛大護軍에 任命되었다. 그 뒤
明宗
代의 權力者이며
인순왕후
의 外三寸인
이량
의 側近이 되어 活動하였다.
1561年
大司諫으로 在職 中 災變이 닥치자 再便所(災變疏) 6條目을 올려 景天(敬天), 法曹(法祖), 舞鶴(務學), 납간(納諫), 任鉉(任賢), 愛民(愛民)에 힘쓸 것을 建議하였다.
1563年
弘文館
副提學
이 되었는데, 當時 權臣이던
이량
이 아들
이정빈
을
李朝
전랑
으로 앉히려다가 自身이
吏曹判書
였으므로 上皮制로 갈리자,
이정빈
의 親舊
유영길
을 後任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許曄
,
이문형
,
기대승
,
이산해
等이 이를 反對하자
이량
은
大司憲
移監
을 시켜 이들이 牌거리를 만들고 煽動한다고 彈劾하게 했다. 그러나
심의겸
으로부터 이량이 士禍를 일으켜 士類들을 肅淸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심의겸
等과 함께 이量의 行動을 暴露하였다.
이때 이량을 擁護하던
大司憲
移監
을 비롯한
司憲府
의 罪狀도 함께 彈劾하여 이量을
江界
로 귀양보내고,
移監
,
고맹영
,
신사헌
,
김백균
,
신사헌
,
新충헌
等 그 側近들의 官職을 削奪하게는 한便, 새로 登用된 士林들을 擁護하였다. 그 뒤
大司憲
이 되고
李朝
參判
이 되었다가
1564年
共助參判을 거쳐
資憲大夫
로 昇進,
漢城府 判尹
에 拔擢되었으나 곧 死亡했다. 政見(貞堅)의 諡號가 내려졌다. 後날 光海君 時節 領議政을 지낸
기자헌
의 親祖父이기도 하다.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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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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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대항은
정유길
과 平素 親했으나,
정유길
은 그의 死後 그의 妾을 차지하였다.
[1]
이는 隱蔽되다가
1588年
(宣祖 22年) 重峯
조헌
이
同人
들을 彈劾하는 過程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1]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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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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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가
나
다
宣祖實錄 22卷, 宣祖 21年(1588 巫子 / 名 萬曆(萬曆) 16年) 1月 5日(己丑) 1番째記事 "조헌의 上訴를 燒却하고 내리지 않았는데 거기에 실린 東·西 刻印들의 關係와 行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