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敞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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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敞 戰鬪
後三國 時代 의 一部
날짜 930年
場所
結果 高麗 의 勝利로 傳貰 逆轉
交戰國
高麗 後百濟
指揮官
王建
유금필
김선평
권행
장정필
甄萱
身檢
兵力
不明 不明
被害 規模
不明 8000名 戰死

高敞 戰鬪 (古昌 戰鬪)는 930年 新羅 高敞 (現在 安東 )에서 高麗 王建 後百濟 甄萱 이 치른 決戰으로 927年 公算 同數 戰鬪 와 함께 後三國 時代 重要한 戰鬪로 꼽히며, 王建 이 勝利해 後三國 統一의 基盤을 다지고 後百濟 는 衰退했다.

背景 [ 編輯 ]

927年 9月 後百濟 軍은 甄萱 이 親히 이끌고 公算 同數 戰鬪 에서 王建 을 事實上 사로잡았고, 王建 의 主要 部長인 신숭겸 , 김락 , 전이갑 · 전의갑 兄弟 等을 戰士시키고 大勝을 거둔다. 公算 同數 戰鬪 以後 士氣가 오른 後백제군은 930年 7月 甄萱 이 直接 甲兵 5000名을 이끌고 出征, 義城部 를 攻擊해 陷落시켰고 그곳의 星州이자 王建의 支持者였던 洪術 李 戰死했다. 그 해 930年 12月 後百濟軍은 交通의 要衝地 高敞 으로 몰려들었고 이에 王建 은 그곳을 지키기 위해 軍隊를 이끌고 있었다.

戰鬪 過程 [ 編輯 ]

王建 高敞 에 오자 高敞 豪族 김선평 , 권행 [1] , 장정필 等은 聖民들을 이끌고 王建 에게 投降하였다. 김선평 , 권행 , 장정필 等은 軍隊와 食糧을 대주었고 高麗軍은 먼저 後百濟軍의 食糧 普及대로 攻擊해 補給路를 끊었고 王建 은 大軍을 이끌고 高敞 竝算으로 進擊해 3~4日 間의 接戰 끝에 高敞 地域의 地方 豪族들의 支持를 얻은 高麗軍이 後백제군 8000名을 射殺하고 大勝을 거두었고 結局 後百濟가 降伏을 하였다.

結果 및 影響 [ 編輯 ]

이 決定的인 戰鬪로 後三國 의 版圖는 바뀌었고 慶尙道 一帶의 甄萱 勢力을 몰아낼 수 있었으며, 이어서 영안 (現在 安東市 풍산읍 ), 河谷 (現在 安東 附近), 송생 (現在 靑松 ), 職名 (現在 安東 附近) 等 30고을과 東海岸 地方의 名酒 (現在 江陵 )에서 興例 (現在 蔚山 )에 이르는 100個의 性이 王建에게 歸附했다. 新羅 경순왕 王建 에게 祝賀 便紙를 보내며, 慇懃히 降伏할 뜻을 보였다. 高麗 는 이 戰鬪로 後三國 統一의 基盤을 마련했고 그 後 後三國을 統一한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元來는 김행으로 新羅 王族 出身이었지만, 高敞 戰鬪 以後 王建이 그에게 權氏 姓을 하사하였다고 傳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