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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宗 (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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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宗
光宗
高麗 皇帝
광종의 능인 헌릉
光宗의 陵인 獻陵
第4代 高麗 國王
高麗 皇帝
在位 949年 4月 18日 ~ 975年 7月 9日 (陽曆)
前任 定宗
後任 警鐘
이름
왕소(王昭)
廟號 光宗(光宗)
시호 홍도선열평세숙헌의효강혜대성대왕
(弘道宣烈平世肅憲懿孝康惠大成大王)
陵號 獻陵 (憲陵)
年號 廣德 (光德), 준풍 (峻豊)
身上情報
出生日 925年
死亡日 975年 7月 9日 ( 975-07-09 ) (陽曆) (50歲)
父親 太祖
母親 申命淳性王后 劉氏
配偶者 대목왕후 皇甫氏
子女 2男 3女
警鐘 , 孝火太子
천추전否認 , 寶貨宮夫人 , 문덕왕후
宗敎 佛敎

光宗 (光宗, 925年 ~ 975年 7月 9日 ( 陰曆 5月 23日 [1] , 율리우스력 7月 4日 )은 高麗 의 第4代 國王 이자 皇帝(在位: 949年 4月 18日 ( 陰曆 3月 13日 , 율리우스력 4月 13日 ) ~ 975年 7月 9日 )이다.

(昭), 는 逸話(日華), 廟號 光宗 (光宗), 시호 홍도선열평세숙헌의효강혜대성대왕 (弘道宣烈平世肅憲懿孝康惠大成大王), 陵戶는 獻陵 (憲陵)이다. 太祖 의 넷째 아들, 申命淳性王后 劉氏(劉氏)의 셋째 아들로서 夭折한 王太, 定宗 의 동생이다. 後는 대목왕후 皇甫氏(皇甫氏)로 太祖와 신정왕후 의 딸로 異腹누이이며, 後宮인 경화궁부인 林氏 (慶和宮夫人)는 異服兄인 惠宗 의 딸이다.

949年 3月 冬服 兄 定宗의 線위를 받아 卽位하였다. 中國 의 年號를 使用하지 않고 廣德 · 준풍 等의 獨自的인 年號를 使用하였고, 後周 로부터 過去制度 를 받아들여 처음 過去를 實施하였다. 奴婢按檢法으로 不當하게 奴婢가 된 良民들을 釋放하였고, 民生安定과 百姓救恤에 힘을 썼다. 이 모든 것은 結局 豪族 勢力 弱化와 王權 强化라는 目的과도 맞닿아있었는데, 過去 試驗 으로 選拔된 官僚들과 後周 에서 歸化한 官僚들을 통해 豪族 勢力을 牽制하고 王權을 强化하는 한便 官服 制度를 새로 制定하여 朝廷의 紀綱을 바로 잡았다. 佛敎 奬勵에도 關心을 갖고 寺刹의 重建과 重修를 支援하였다.

生涯 [ 編輯 ]

卽位 以前 [ 編輯 ]

出生과 生涯 初盤 [ 編輯 ]

925年 , 太祖와 申命淳性王后 劉氏(劉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同腹兄弟로는 兄 太子 태(泰)와 兄 定宗이 있었고, 동생인 문원대왕 情(貞), 憎痛局社, 新羅 敬順王 의 後妻家 된 누이 낙랑공주 , 女同生 興邦公州 等이 있었다. 慰勞는 兄 太子 무(武)와 太子 태(泰), 太子 요 (堯)가 있었으므로 그는 王位繼承權에서 멀리 있었다. 그러나 惠宗이 病弱하고, 冬服 兄인 太子 態가 일찍 夭折하면서 그는 兄 요와 함께 有力 王位繼承權者가 되었다.

왕소는 親兄인 正宗과는 判異하게 다른 性格의 所有者였다. 그는 性格이 豪宕하고 果敢하면서도 한便으로 신중하였다. 최승로 의 坪에 依하면 '定宗이 固執이 세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性品인데 反해 光宗은 緻密하고 조심스럽지만, 機會를 잡았을 땐 果敢하게 밀어붙이는 大汎한 性格이었다. [2] '한다. 그는 뛰어난 容貌와 優秀한 資質을 갖고 있어 太祖로부터도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2] 한다.

太子 時節에 그는 正宗과 더불어 王室 勢力의 核心 人物이었고, 朴수京 ·박수문 兄弟와 왕식렴 等의 書經 勢力과도 親分이 두터웠다. [3] 그 때문에 왕규 박술희 가 이끄는 開京 勢力을 除去하는 데 많은 役割을 하였으며, 定宗 의 卽位에도 至大한 貢獻을 하였다. 王位를 두고 벌어진 暗鬪劇 사이에서 豪族들의 도움을 받아 生命을 保全할 수 있었지만 그는 各自 自己 家門의 外孫이나 緣故者를 王位로 끌어올리려는 豪族들을 보고 除去해야 될 對象 또는 潛在的인 敵으로 보고 있었다.

太祖는 豪族들을 牽制할 目的으로 異腹男妹들 사이의 族內婚을 시켰는데, 그는 이福 女同生이자 신정왕후 所生인 대목왕후 皇甫氏와 結婚하였다. 異腹 女同生이었지만 그女는 外家의 姓을 따랐고 外할아버지 황보提供 의 姓을 따라 皇甫氏라 稱하게 되었다. 대목왕후 에게서 2男 3女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 孝火太子는 夭折하고 첫째 아들 太子 株價 뒷날의 警鐘 이 된다. 딸은 천추전否認 , 寶貨宮夫人 , 흥덕願郡夫人이 있는데 셋째딸인 흥덕願郡夫人은 흥덕願群 왕규와 結婚하여 딸을 두었으나 다시 成宗 에게 再嫁한다.

太祖가 子息들을 이福 兄弟끼리 結婚시킨 것은 新羅 王族의 風習에 따른 것이었다. [4] 이는 王室 血統의 純粹性을 維持하고 同時에 王權을 안정시키기 위한 配慮였다. 왕이 族外婚을 했을 境遇 王權이 外戚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 [4] 이라는 王建의 計算이 作用했다. 그는 異服兄 惠宗과도 親分을 가지면서 書經勢力과 惠宗 사이에 橋梁 役割을 하였다. [3] 이는 惠宗이 書經勢力과 和合을 圖謀하기 위해 自身을 딸을 왕소의 두 番째 夫人으로 媤집 보낸 것으로도 確認된다. [2]

潛在的 王位 繼承者 [ 編輯 ]

943年 太祖 의 事後 有力한 王位 繼承權者로 注目되었고, 왕규 로부터 王位를 노린다는 疑心을 받게 된다. 왕규 에 依해 王位를 노린다는 告變을 듣게 된 惠宗은 그를 試驗하였고, 이어 944年 의화왕후 所生인 自身의 嫡女 경화궁부인 林氏(慶和宮夫人 林氏)를 後宮으로 주었다. 그러나 그는 徹底히 本心을 숨겼고, 뚜렷한 嫌疑가 없었으므로 惠宗은 그를 除去할 수 없었다.

945年 冬服 親兄인 定宗 이 卽位하였다. 卽位 後半 病에 시달리던 定宗 은 自身의 죽음을 豫感하자 自身의 唯一한 아들 경춘援軍 이 아닌 동생 소에게 宣威 하기로 일찍부터 마음 먹었다. 949年 陰曆 3月 13日 病席에 누운 定宗 이 죽자 光宗은 25살의 나이로 卽位하였다.

當時 有力한 豪族들, 自身의 外家인 忠州 柳氏와 妻家인 黃州 皇甫氏 朴수京 · 박수문 兄弟의 평산 朴氏 勢力은 光宗의 後見勢力이었고, 淸州 金氏 亦是 定宗 時代 以後 高麗 朝廷에 比較的 好意的인 立場이었다. [2] 많은 豪族 勢力을 등에 업은 德分에 惠宗 事後때처럼 卽位 初盤 開京과 書經 의 文武官吏들이 殺傷 되는 混亂이 있었지만 빨리 收拾할 수 있었다. 卽位 直後 그는 百姓과 豪族들의 不滿을 샀던 兄 定宗 의 畢生의 課業인 書經 으로의 1首都 遷都 計劃을 卽時 取消시켰다.

治世 [ 編輯 ]

卽位 初盤 [ 編輯 ]

949年 8月 對光 朴수京 等에게 命하여 各 功臣에게 쌀을 差等 있게 나누어 주고 이때 支給된 給料를 標準 祿俸으로 定하였다. 또한 原보 食晦, 元尹 新疆 等에게 命하여 各 州, 郡, 縣에서 稅金으로 바치는 細工의 額數를 定하게 하였다. 平柱의 豪族 박수문 , 朴수京 兄弟는 定宗 事後 光宗의 卽位를 積極 支持했는데, 이들의 勢力이 莫强하였으므로 光宗은 自己 家門의 外孫이나 緣故者를 王位로 앉히려는 다른 豪族들을 牽制한다.

950年 (光宗 1年) 1月 司天臺의 僧侶가 光宗에게 德을 쌓으라고 아뢰자 이때로부터 光宗은 恒常 貞觀政要 를 읽었다 한다. 이어 그는 中國 의 年號를 使用하지 않고 광덕(光德)이라는 獨自的인 年號를 公表하였다. 長靑鎭에 性을 修築하고, 同年 가을에는 威化鎭에 城을 쌓았다. 光宗은 卽位 初盤 7年間 政局을 무던히 지켜보며 王權을 强化시킬 方法을 摸索하고 있었다. [2] 그는 一旦 國內의 政局 主導權을 豪族들에게 내주고 조용히 政治的 基盤을 닦아나갔다. [2] 그가 가장 먼저 關心을 기울인 것은 政治的 能力을 기르는 일이었다. [2] 이를 위해 그는 唐나라 太宗 이 自身의 臣下들과 政治 討論을 벌인 內容을 記錄한 貞觀政要 를 熟讀하였다. [2]

貞觀政要 唐나라 皇帝들의 治世 敎科書 구실을 했는데, 光宗 亦是 이 冊을 통하여 君主가 나아가야 할 行動方向을 세우고 政策 立案 및 臣下를 多스리를 方法을 배울 수 있었다. [5] 卽位 初盤에는 後漢 後周 에도 形式的으로 朝貢을 바치며 衝突을 自制하였다. 951年 後周 가 중원의 盟主로 浮上하자 光宗은 그해 12月 부터 다시 後周 의 年號를 利用하기 始作하였다. [5] 光宗이 후주의 年號를 使用한 것은 外交的 經路를 利用해 餘震 거란 을 警戒하기 위함이었다. 當時 거란은 虎視眈眈 高麗 侵略을 노리고 있었는데, 高麗는 그들의 侵略을 막기 위해 중원의 한족들과 敦篤한 外交關係를 形成할 必要가 있었다. [5]

951年 부터 후주의 年號를 使用하자 後周 側은 1車路 光宗을 考慮國王에 冊封하는 正式 冊封使를 보내왔고, 다시 2車路 光宗을 檢校太絲로 봉하여 高麗 百官들의 服飾을 中國式으로 바꾸기 위해 冊封使를 다시 보내왔다. [6] 當時 冊封使는 설문우였고 그를 따라온 策士 中 雙機 等이 있었는데, 光宗은 雙機 等이 後周 太祖 를 도와 改革作業을 한 人物들임을 알고 이들과 面談, 高麗 로 誘致하려 努力하였다. 豪族을 牽制할 親衛勢力이 不足했던 그는 後註에서 歸化한 人士들과 後날 그 中 한사람인 雙機의 建議로 選拔한 科擧 及第者 出身 人材들로 親衛勢力을 構成한다.

權力 分散과 集中化 [ 編輯 ]

光宗은 强力한 中央集權體制를 實現하고자 하는 野心이 剛한 人物이었는데, [7] 그는 中央軍을 凌駕하는 軍事力을 가진 豪族의 除去를 計劃 [7] 하였다. 卽位 初期에는 豪族들의 支持가 必要하였기에 豪族들에게 權限을 附與하였으나 太子 時節 豪族들이 自己 家門의 緣故가 있는 太子를 위에 올리기 위해 暗鬪를 벌이는 것을 지켜본 그는 豪族들의 肅淸을 決心한다. 光宗은 高麗 王朝 成立 初期의 功臣들과 豪族들의 勢力을 약화시켜 王權의 强化와 中央集權的 國家體制 確立, 國家의 財政 基盤 安定을 위한 果敢한 改革 政策을 推進하였다. 卽位한 後, 光宗은 國初에 王室을 위해 功을 세운 공역자를 定해 差等을 두어 쌀을 支給하였는데, 이는 自身의 支持勢力을 確固히 다지기 위함이었다.

民心安定策 [ 編輯 ]

光宗은 政治的 力量과 對外的 位相을 提高하는 것 以外에도 民心 安定에 많은 努力을 기울였다. [5] 民心을 안정시키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政策이라도 失敗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兄 定宗의 書經 遷都 推進過程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던 그는 民心을 얻는 것이 곧 힘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5] 光宗은 民心 安定策을 佛敎를 통해 推進하였다. 그는 951年 대봉은사를 開城 南쪽에 세워 太祖의 冥福을 비는 원당으로 하고, 불일사를 東쪽에 세워 申命淳性王后 [5] 의 冥福을 비는 원당으로 삼았다.

954年 에는 申命淳性王后의 冥福을 빌기 위해 숭선사를 創建하였으며, 華嚴宗 僧侶 均如 와 交分을 갖고 그의 '性狀融會(性相融會)' 思想을 받아들였다. [8] 聖像融和思想이란 一種의 佛敎 宗派融合策으로, 當時 佛敎 敎宗 이 隆盛했는데, 敎宗 內에서도 成宗과 相從이 있었다. 成宗의 代表的인 宗團은 華嚴宗이었고, 相從의 代表的인 宗團은 法相宗이었다. 이 두 宗團의 特徵은 痢疾 集團을 統合할 수 있는 融和的이고 普遍的인 原理를 追求하고 있다는 點이다. [8] 均如는 바로 이 原理를 통하여 民心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다고 보았고, 光宗이 이에 積極 同調했다. [8] 光宗은 이들 宗團이 融和的이고 普遍的인 原理를 追求하고 있다는 點을 注目, 華嚴宗과 法相宗界 僧侶들과도 자주 面談하며 民心을 不審 으로 團結시킬 方案을 講究했다.

均如 의 性狀融會 思想은 華嚴宗과 法相宗을 하나의 思想으로 이끌어내자는 論理였다. 當時 華嚴宗과 法相宗을 信奉하고 있던 사람들은 大槪 中小 豪族이나 平民들이었는데, 對豪族을 警戒하던 光宗은 中小豪族들과 平民들의 힘을 키울 料量으로 두 宗派의 融會를 試圖하였던 것이다. 953年 (光宗 4年) 華嚴宗 僧侶 兼神이 國師로 封해지기도 했다. 이같은 華嚴宗, 法相宗 奬勵와 融和政策은 곧 中小 豪族들의 支持를 얻게 되고, 反對로 大富豪들의 佛敎的 基盤을 무너트리는 役割을 했다. [8]

또한 그는 百姓들을 위한 救護 및 醫療機關인 濟危寶 를 設置하여 가난한 사람과 病者들을 救濟하기 위해 努力했다. 光宗에 批判的인 최승로 조차 光宗이 賤한 사람이라고 버리지 않고 불쌍한 이들에게 惠澤을 베푼 德分에 그의 初期 治世를 두말할 나위 없는 太平聖代였다고 稱頌하였다.

改革 政策 [ 編輯 ]

外國 人材 迎入 [ 編輯 ]

956年 後周 에서 보내온 冊封使 설문우 를 따라 온 雙機 等에게 魅了된 光宗은 이들을 高麗로 迎入할 計劃을 세운다. 中國 出身 歸化人이던 王戎 을 통해 中國 의 情勢를 어느 程度 接했던 그는 후주의 改革을 主導한 人物들의 存在를 알게 되고 그들 中 一部가 설문우를 따라 高麗로 오자 이들과 對話하고 이들을 迎入하려 하였다.

2次 冊封使의 隨行員으로 高麗 에 當到한 雙氣는 얼마 後 病에 걸려서 使臣 一行과 함께 中國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를 두고 미리 計劃된 일이었다는 視角도 있다. [6] 卽 '臥病을 핑계하여 還國夏至 않고 있다가 使臣 一行이 돌아간 다음에 光宗과 대면한다는 計算이었을 것이다. [6] ' 冊封使 一行이 돌아간 뒤 雙氣는 病床에서 일어났고, 바로 光宗과 대면하게 된다. 雙機를 만난 光宗은 그의 改革的인 性向과 뛰어난 識見에 感歎하여 後周 의 世宗에게 國書를 보내 雙機를 高麗의 臣下로 삼을 수 있도록 하게 해달라고 [6] 要請한다. 후주의 雙氣는 高麗 朝廷에 電擊 登用된다. [9] 그 뒤로도 光宗은 사람을 보내 後周 의 改革을 擔當했던 人物들을 만나보도록 公式, 非公式 使節과 留學生들을 派遣한다.

雙機 後周 에서 歸化하게 되는 人物로, 後周 太祖 의 治下에서 竊盜巡官, 將仕郞 , 時(試) 대리평사 等을 지냈다. 時대리평사는 試驗 을 主管하는 管理였기 때문에 過去 制度 에 對한 知識이 많은 人物이었다 [6] 光宗은 儒學에 正統下 新進 儒學者 들도 함께 登用하여 過去 試驗을 出題할 理論, 主題 等을 準備하게 한다.

雙氣는 그에게 豪族들의 士兵을 革罷시킬 것을 建議한다. 雙機가 들고 나온 戰略이 바로 競爭者의 强點에서 弱點을 찾는 戰略이었다. 豪族들이 거느리고 있던 士兵은 豪族들에게는 가장 큰 强點이지만 가장 큰 弱點이었다. [7] '豪族들이 거느린 士兵은 戰爭에서 敗하여 捕虜로 잡혀온 奴婢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豪族들에게 목숨을 걸고 [7] 충성할 수 밖에 없는 狀況이었다. [10] ' 이 點을 把握한 光宗은 奴婢들의 解放을 꾀한다.

955年 對象 王戎 이 周나라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이때 光宗은 周나라의 人材를 招聘해오라는 密命을 내린 듯 하다. 王戎 亦是 中國에서 歸化한 人物이었기 때문에 光宗의 이러한 要求에 쉽게 順應했던 것이다. [6] 光宗은 雙機 以外에도 함께 왔던 後周 의 學士들을 高麗에 줄 것을 後周 世宗 에게 請하여 承諾받는다. 親衛勢力이 없었던 그는 中國 人 出身 歸化人들을 통해 自身의 親衛勢力을 構成하였다. 여기에 歸化人 中 한사람인 雙機의 建議로 實施된 過去 로 뽑아들인 人材들을 通해 親衛勢力을 한層 强化하였다.

改革 政治 始作 [ 編輯 ]

雙機 는 登用 當時 電擊的으로 원보의 官職에 오른다. 이 때문에 豪族들의 反撥이 甚했지만 光宗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光宗은 오히려 그를 다시 한림 學士 로 昇格시켜 學問과 關聯된 業務를 管掌하게 했다. [9]

그는 黨 太宗의 治世와 後周 太祖의 治世에 關心을 두었다. 後周 太祖는 諸侯國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唐나라 制度를 模範으로 科擧制를 비롯한 一連의 改革政策을 實施했고, 그 結果 王權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6] 雙氣는 强力한 王權의 確立을 主唱하였다. 雙氣는 高麗 朝廷이 少數의 特定 門閥家門에 依해 모든 것이 掌握된 것을 指摘하고, 門閥家門의 勢力形成 革罷가 必要하다고 建議하였다.

光宗度 當代의 후주의 改革 消息을 진작에 듣고 있었기 때문에 高麗도 後註를 模範으로 改革을 推進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6] 一部 豪族들이 自己 家門의 外孫이나 緣故地를 推戴하려는 擇軍 試圖를 한 것을 經驗하면서 威脅을 느끼기도 했다. 또한 豪族들이 外戚과 開國功臣 等 功臣의 地位를 利用하여 온갖 權力을 獨占한 것 亦是 厭症을 느끼게 하였다. 또한 光宗은 中國 大陸이 5大 10國 으로 混亂을 거듭한 點과 日本 이 여러 地方局으로 分裂된 點, 北方에는 거란족 女眞族 이 對峙하고 後渤海 國이 거란 高麗 의 緩衝地帶 役割을 하는 等의 國際情勢는 外勢의 內政干涉이 없이 改革을 遂行할 絶好의 機會라고 判斷했다.

奴婢按檢法 [ 編輯 ]

956年 에는 奴婢按檢法 (奴婢按檢法)을 實施하였다. 奴婢按檢法 은 奴婢들의 實態를 把握하여 不當하게 奴婢가 된 者들을 解放시키는 一種의 奴隸 해方法이다. 當時 豪族들이 거느리고 있던 奴婢의 相當數는 高麗의 三國統一戰爭 過程에서 捕虜로 붙잡힌 良人이거나 對豪族의 强壓에 依해 奴婢로 轉落한 사람들로서 豪族들의 經濟的, 武力的 基盤이었다. [11] 또한 豪族들이 士兵을 거느릴 수 있는 人力動員의 源泉이기도 했다. 奴婢按檢法으로 많은 奴婢들이 元來의 身分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豪族들의 經濟的, 武力的 基盤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11] 豪族들은 陳情書와 上疏를 올리고 光宗에게 抗議했다. 그러나 光宗은 雙機를 비롯한 後周 歸化人 出身들을 登用하고, 豪族들과 豪族 勢力 人士들을 파면, 解任하는 것으로 맞對應했다.

956年 奴婢按檢法 이 公布되자 高麗의 統一戰爭으로 捕虜가 되어 洋人에서 奴婢로 轉落한 사람들은 모두 洋人으로 身分 回復되었다. [12] 奴婢에서 解放되는 方法은 簡單하여, 奴婢 스스로가 自身이 過去에 良人 身分이었다는 것을 官衙에 申告하기만 하면 바로 良人으로 復歸할 수 있었던 것이다. [12] 光宗은 豪族 들의 反撥을 豫想하여 奴婢들의 官廳 出入을 막지 못하도록 命하였다. 豪族 中 自身의 奴婢가 거짓을 告하는 것이라고 無辜하는 豪族들에게 不利益을 주었고, 元來 良人 出身이던 奴婢들의 身分回復이 繼續되었다.

많은 數의 奴婢를 所有하고 있던 對豪族들은 엄청난 打擊을 입었다. 功臣田 을 耕作하는 代價로 奴婢 로부터 받던 稅金을 더 以上 받을 수 없었고, 士兵의 數도 激減되었다. [13] 豪族들은 가난한 平民들을 對象으로 小作農 으로 부리게 된다. 그러나 光宗은 小作農을 奴婢처럼 부리는가의 與否를 御史臺 의 管理와 側近 勢力을 派遣하여 監視하였다.

豪族勢力 弱化와 相對的 王權 强化 [ 編輯 ]

豪族들은 奴婢按檢法 實施에 거세게 反撥했다. 光宗의 비 대목왕후 까지 이 일에 나섰다. [11] 豪族들은 모든 힘을 動員하여 光宗을 壓迫하였고, 先代 帝王들의 妻族들度 加勢하였다. [12] 하지만 光宗은 決코 意志를 꺾지 않았다. [12] 光宗은 대목왕후 의 諫言까지 뿌리치고 이 法을 더욱 强力하게 施行하였다. [11] 奴婢按檢法이 實施됨으로써 豪族들은 經濟 基盤인 奴婢의 相當數를 잃었고, 科擧制 實施로 新進官僚들에게 官職을 내줘야 하는 狀況이 到來하였다. [11] 이와 비슷한 政策은 아버지 太祖도 마련한 적이 있었지만 豪族들의 强力한 反撥로 中途에 政策을 다. [12] 그러나 光宗은 달랐다. 光宗은 이미 7年 동안의 民心安定策을 통해 百姓들의 支持를 받고 있었고, 豪族들과 싸울 만한 政治的 基盤도 마련했기 때문이었다. [12]

奴婢뿐만 아니라 奴婢와 같은 處地에 있던 極貧한 良人들 亦是 大大的인 歡迎을 하였고, 新進官僚나 武將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對豪族들만이 强力하게 抵抗했지만 時代的 大勢와 光宗의 强力한 意志 때문에 별다른 效果를 거두지 못했다. [13] 그러나 豪族들은 自身의 家門이나 地域과 緣故가 있던 王子들의 推戴를 企圖했고 光宗은 豪族의 肅淸을 計劃하게 된다.

奴婢身分에서 解放된 豪族의 士兵들 亦是 이제 더以上 豪族을 위해 목숨을 바칠 理由가 없어졌고 곳곳에서 豪族들로부터 離脫하게 되었다. [10] 士兵이 없어진 豪族은 秋風落葉과 같은 微弱한 存在가 되었고 이때 光宗은 軍事力을 앞세워 모든 豪族들을 制壓하고 高麗의 强力한 中央集權體制를 構築하였다. [10] 豪族의 立地가 弱해진 反面, 國家는 稅金이 늘어나고 兵卒의 數字가 增加하면서 結果的으로 王權이 伸張되어 中央集權的 體制 確立의 基盤이 마련되었다. [13] 이로써 功臣이나 豪族의 經濟的·軍事的 基盤은 크게 弱化되고, 奴婢들이 洋人으로 身分이 上昇하여 租稅와 賦役의 義務를 지게 되었으므로 國家의 財政 基盤과 王權이 安定되어갔다.

그러나 豪族 들은 繼續 反撥했다. 奴婢로 있던 者가 自身의 옛 主人을 헐뜯고 辱하는 일로 싸움이 벌어지는 事件도 잇따라 터졌고, 奴婢와 良人 階層의 離叛으로 身分秩序가 紊亂해저 社會的 土臺가 흔들리는 樣相도 一部 發生했다. [13] 또한 光宗 近位勢力과 豪族勢力間의 衝突로 인해 政界의 大混亂이 일어나기도 했다. [13] 結局 이 玉의 티를 빌미로 豪族 들은 奴婢按檢法 撤廢를 持續的으로 主張했고, 경종대에 다시 肥大해진 그들의 힘에 밀려 제6대 成宗 奴婢還賤法 으로 良人으로 回復된 大部分의 사람들을 奴婢로 道路 환천시키고 만다. [13]

過去 制度 導入 [ 編輯 ]

光宗은 門閥貴族, 代代孫孫 家門에 依해 官職을 世襲하거나 金錢으로 官職을 賣買하는 門閥貴族의 世襲을 防止하고자 中國 에서 實施되는 科擧試驗에 關心을 가졌다. 이어 光宗은 使臣을 後註에 派遣하여 過去 制度의 施行을 알아보게 하기도 했다. 中國의 科擧制度를 接한 그는 過去制度에 對해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됐고, 953年 후주와 本格的인 外交關係가 樹立된 以後부터 積極的으로 推進되었다.

이때 後註에 使臣을 보내 高麗國王으로 冊封을 받기도 했다. 후주로부터 高麗國王으로 公認된 光宗은 955年 太祖 곽위에 이어 第2代 王으로 오른 世宗에게 歸化人 왕륭을 보내 土産物을 膳物하고 후주의 政局에 對해 昭詳히 傳해 듣는다. [8] 그리고 후주의 狀況이 高麗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닭은 그는 대리평사를 지낸 雙機를 高麗로 끌어들인다. [8] 雙氣는 後注意 使臣으로 往來한 설문우 의 一行으로 高麗 에 왔다. [8] 이때 光宗은 雙機와 對話를 나누게 되는데, 그의 思想과 知識에 共感하게 된다. [8] 이어 世宗에게 雙機를 自身의 臣下로 줄 것을 要請해 承諾받는다.

雙氣는 後周 太祖의 王權强化作業에 깊숙히 關與한 人物이었기 때문에 後註에서 이뤄졌던 一連의 社會改革을 高麗에서 再現할 수 있다고 判斷했다. 雙機의 이러한 考慮改革論은 光宗을 흥분시켰다. 光宗은 이미 오래前부터 王權强化策을 講究하고 있었지만 自身의 政策을 隨行, 支持해줄 마땅한 人物을 찾지 못한 터였다. [11]

956年 後註에 使臣을 보냈고, 後註는 答禮로 將作監 설문우 를 보내 光宗을 開府儀同三司檢校太史(開府義同三司檢校太師)에 봉하였다. 世宗의 敎書를 받은 뒤 光宗은 命하여 百官의 衣冠을 中國 制度에 따라 하게 하였다. 그런데 설문우를 따라온 후주의 前 竊盜巡官 대리평사 雙機(雙冀)가 病으로 歸國하지 못하고 머무르게 되었다. 雙機와의 對話를 통해 過去 制度 에 對한 情報를 알게 되었고, 그의 學識에 感歎한 光宗은 後註에 表文을 올려 雙機를 自身의 參謀로 삼게 해줄 것을 要請하여 성사시켰다. 雙氣는 歸化하여 高麗人이 되었고 그는 雙機 等을 最側近으로 登用하였다. 또한 後注意 滅亡과 5大 10國 의 滅亡 後 옛 5代 10國 나라의 官僚들을 積極 考慮로 誘致, 迎入하였다.

958年 雙機의 建議로 科擧를 施行하였다. 그해 5月 에 後周(後周)에서 高麗로 歸化한 翰林學士 雙機(雙冀)를 公車로 임명하여 처음으로 過去 制度를 實施하여 豪族 以外의 人材를 登用하였다.

過去制度 實施와 制度 整備 [ 編輯 ]

奴婢按檢法 實施로 豪族의 힘이 弱化되고 相對的으로 王權이 强化되자 光宗은 958年 '科擧制 導入'이라는 爆彈宣言을 하였다. [11] 958年 (光宗 9年) 5月 光宗은 마침내 雙機를 知貢擧(知貢擧)로 任命하고 詩, 部(賦), 송(頌), 冊(策)으로써 眞사 甲科에 2名, 明經科에 3名, 服業(卜業)科에 2名을 選拔했다. [9] 新羅 時代에 一部 施行되었다가 廢止된 過去 制度를 다시 實施함과 同時에 本格的으로 過去 制度를 主管하여 定着하게 한다. 이때 最初로 眞사 甲科에 合格한 人物은 최섬 外 1人(眞肯)이었다. [9] 788年 新羅 元聖王 때에 科擧 制度인 讀書三品科를 導入했다가 얼마못가 豪族들의 反撥과 壓力行使, 王權弱化로 廢止된 것을 그는 記憶하고 있었다. 豪族들의 反撥과 出身 成分을 알 수 없는 人物들을 함부로 登用한다는 反對에도 그는 繼續 過去를 主管하였고, 徐徐히 過去 合格者의 數를 늘려 過去 制度로 進出한 官僚들의 數를 늘려나갔다.

過去制度 導入은 豪族들이 中心이 된 功臣勢力에게 크나큰 打擊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高麗의 建國과 統一 過程에서 專攻을 세웠거나 武力을 提供한 勢力이었기 때문에 武人들이 大多數였다. [11] 때문에 學問을 基盤으로 하는 過去制度 實施 [11] 는 그들 子弟들의 政界 進出을 制度的으로 封鎖하는 裝置가 되었다. 958年 5月 光宗은 過去 制度를 통해 實力있는 人事를 人材로 選拔하겠다고 公表하였다. 試驗으로 人材를 選拔하는 것이며 門閥이나 財力으로 差別을 두지 않는다고 公表했다. 이는 朝廷 內에서 豪族의 專橫을 막을 새로운 勢力을 키우기 위한 方法이었다.

처음 過去가 實施된 지 2年 後인 960年 에는 時, 部, 송만 가지고 다시 試驗을 쳤고, 以後 4年 뒤에는 다시 試驗科目을 調整하여 964年 時, 部, 송, 時務策을 가지고 試驗을 쳤다. [9] 그는 雙機 에게 命하여 時務策이라는 것을 試驗 科目으로 追加하여 當時 社會의 狀況과 改革 方案을 具體的으로 說明하도록 했다.

이처럼 時務策을 試驗科目으로 採擇한 事實들을 통해 改革에 걸맞은 人士에 對한 光宗의 熱望이 얼마나 剛했는지 알 수 있다. [9] 光宗은 過去 制度를 통하여 全國에 學校가 세워지고 學風이 일어나길 바랐다. [9] 또한 문치적 官僚體制가 갖춰지길 願했는데, 繼續된 過去 試驗으로 高麗 全國에 이 같은 雰圍氣가 造成되어 그의 뜻이 이뤄진다. [14] 過去 制度의 導入으로 優秀한 人材들의 中國 流出을 막는 한便 過去로 選拔된 新進 官僚들을 大幅 自身의 側近 勢力으로 拔擢한다. 門閥과 背景이 없었던 이들 新進官僚들은 光宗에게 絶對的으로 依存하였다.

文科 武科 外에도 僧侶 들이 凝視하는 勝과(僧科) 亦是 採擇했다. 僧侶의 國家 考試 制度인 僧科로는 從船(宗選)과 大選(大選)을 指定, 從船은 叢林線(叢林選)이라고도 하며 各 宗派 안에서 行하는 것이고, 從船의 合格者들은 國家에서 凝視하는 僧侶考試 大選에 應試할 수 있는 資格이 附與되었다. 國家에서 實施하는 本考査 大選은 크게 禪宗選(禪宗選)과 敎宗選(敎宗選)으로 나누어졌는데, 禪宗選은 主로 광명사(廣明寺)에서, 敎宗選은 主로 王輪寺(王輪寺)에서 實施되었다. 이 僧科는 高麗 末까지 繼續 이어졌다. 過去 試驗으로 選拔한 人材들은 人脈과 背景이 없었으므로 쉽게 그의 側近勢力으로 成長할 수 있었다. 또한 百官의 品階에 따른 官服의 複製(服制)를 制定하여 官僚의 序列을 體系的으로 整備하였다. 또한 僧侶들의 品階를 指定하여 大德(大德)·臺詞(大師)·重大事(重大師)·三重大師(三重大師)·善射(禪師)·大禪師(大禪師) 等의 禪宗法界(禪宗法階)와 大德·臺詞·重大事·三重大師·首座(首座)·僧統(僧統)의 敎宗 法階 等 僧侶들의 階級도 親히 指定하였다.

그러나 改革 過程에서 中國 에서 歸化해온 勢力에게 지나치게 많은 힘을 실어주어 內國 官僚들의 怨望을 들었다. [15] 또한 官吏의 複製를 制定하여 官等에 따라 紫色, 單色, 比色, 綠色으로 序列을 區分케 하였다.

官服 制定 [ 編輯 ]

960年 光宗은 直接 百官의 官服制度를 制定한다. [16] 이미 956年 설문우가 考慮를 訪問했을 때 이미 후주의 世宗이 高麗의 空腹을 中國式 으로 整備하라고 했지만 이뤄지지 못하다가 이때에 비로소 官服制度를 確立한 것이다. [16]

959年 光宗은 후주의 雙鐵과 一團의 歸化人들을 朝廷에 끌어들인다. [16]

960年 3月 遲滯없이 官服 制度를 確定했다. [17] 當時의 官服은 新羅의 것을 그대로 使用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持續된 統一戰爭과 豪族들의 影響力 增大로 序列에 따른 官服은 確定되지 못했다. 序列이 낮아도 富裕하면 좋은 옷을 입었고, 序列이 높아도 가난하면 보잘것 없는 옷을 걸쳐야 했다. 二는 序列에 關係 없이 財政的으로 豐富한 者가 恒常 優位에 있는 듯한 印象을 줄 수밖에 없었다. 光宗은 이처럼 無秩序한 服裝이 朝廷의 紀綱을 흐트리고 王의 權威를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地位에 따라 모든 公僕의 色깔을 달리하게 하였다. 元尹 異常은 紫蔘(紫色 웃옷), 中斷頃 異常은 丹蔘(붉은 色 웃옷), 度項硬 以上은 비삼(眞紅色 웃옷), 소주府 異常은 綠上(綠色 웃옷)을 着用토록 하였다. [17] 官服을 4가지 色으로 區分한 것은 새로운 官僚體制의 誕生과 王을 中心으로 한 調整 體系의 確立을 의미한다. [17]

對中國 外交 政策 [ 編輯 ]

邊方을 修築하여 동북면과 서북면의 城郭을 補修, 重建하는 한便 中國 科의 外交關係를 敦篤히 하였다. 951年 後註에 使臣을 派遣, 歸還한 뒤 그해 12月 후주의 年號를 施行하였으며 以後 꾸준히 後註에 使臣과 貢物을 보냈다. 952年 봄에는 廣評侍郞 西峯을 後註에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다. 953年 後註에서 使臣으로 위僞經 王淵과 長斫所感 餘啓殯을 보내, 後周 世宗으로부터 光宗을 特進 檢嬌態保社 지절 現逃走 都督 衝 大義軍事 兼 御史大夫 高麗國王(特進檢校太保使持節玄州都督充大義軍使兼御使大夫高麗國王)으로 冊封하는 敎書를 받았다.

955年 對象 王戎을 後註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고, 廣評侍郞 淳質을 後註에 보내어 共濟의 卽位를 敬賀하였고, 956年 後註는 將作監 설문우를 보내 光宗을 開府儀同三司檢校太史(開府義同三司檢校太師)로 封하였고, 이때부터 후주의 服飾과 制度를 導入, 百官의 衣冠을 中國 制度에 따라 하게 하였다. 959年 봄 左丞 王矜誇 左尹 황보威光을 後註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고 그해 가을 다시 使臣을 後註에 보냈다. 후주에서도 959年 左孝위大將軍 大橋를 보냈고, 그해 겨울 다시 使臣을 後註에 보냈다. 960年 후주의 詩語 淸州수 雙鐵, 高麗에 왔고 雙機를 左丞으로 임명하였다.

稱帝 建元 [ 編輯 ]

960年 에는 中國 에 使臣을 보내 佛經을 求해오게 했는데, 그해 五月 의 第5代 皇帝 轉宿 (錢瞞, 錢弘?)李 使臣을 보내어 《天台론소》(天台論疏)의 交戰과 그 밖의 佛殿을 보내왔다.

後株價 沒落하고 宋나라가 일어나 霸權을 다투기 始作, 光宗은 이 같은 中國의 混亂이 繼續되자 후주의 年號를 버리고 다시 960年 (光宗 11年)부터 '준풍'이라는 獨自的인 年號를 使用한다. [15] 또한 開京을 皇帝의 首都인 黃道(皇都)로 改稱하여 皇帝(皇帝)의 面貌를 갖췄다. [15] 그는 自身을 皇帝의 地位에 올려놓음으로써 스스로가 絶對 權力者임을 臣下들에게 주입시키려 했다. [17] 이에 따라 豪族들은 光宗의 絶對 權力에 挑戰하게 되었고, 光宗은 無慈悲한 肅淸作業을 통해 恐怖政治를 實施함으로써 自身에게 挑戰하는 모든 權力과 對決해 나간다. [17]

그러다가 宋나라 가 後註를 무너트린 後 安定을 찾고 國家의 기틀을 確立하자 963年 12月 부터 宋나라의 年號를 使用했다.

王權 强化와 政敵 肅淸 [ 編輯 ]

親衛勢力의 强化 [ 編輯 ]

過去 制度 施行에 核心的인 役割을 했던 雙氣는 光宗의 信任이 두터워지자 더욱더 많은 中國人 들을 歸化시켜 高麗 調整으로 끌어들인다. [14] 勢力 基盤이 弱했고 新進官僚들만으로 親衛 勢力의 構成이 힘들다고 判斷한 그는 繼續的으로 中國의 人材들을 迎入하려 한다. 5大 10國이 宋나라에 滅亡, 統合되면서 各 나라들의 官僚, 學者, 亡命客들 亦是 高麗 로 積極的으로 受容한다.

科擧制가 처음 復活된 이듬해인 959年 雙氣는 自身의 아버지 雙鐵 을 高麗로 불러들였고, 光宗은 雙鐵을 左丞으로 임명하여 改革作業에 同參시킨다. [14] 또한 쌍씨 富者가 高麗의 實勢로 떠오르자 많은 中國人들이 高麗로 歸化하였고, 光宗은 그들 大部分을 管理로 任用하였다. [14] 光宗은 이들을 통해 親衛勢力을 構成하고 豪族 들을 牽制하게 했다.

光宗이 歸化人들을 積極 迎入, 誘致하는데는 親衛勢力 强化 外에 다른 理由도 있었다. 그는 奴婢按檢法을 實施, 强行함으로써 內國의 豪族들과는 등을 돌린 狀態였다. [14] 그런데 朝廷은 그들에 依해 거의 掌握된 狀態였다. 이 때문에 豪族을 牽制할 새로운 臣下들이 必要했고, 光宗은 雙機를 비롯한 歸化人들로 그 자리를 메웠다. [14] 歸化人들을 積極 重用한 光宗은 豪族들의 집과 別莊을 빼앗거나 沒收한 뒤 이들 歸化 臣下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歸化人들을 지나치게 重用한 나머지 光宗은 內國 臣下들의 집을 빼앗아 歸化人들에게 支給하기도 했다. 內國의 臣下들은 歸化人들에 對한 光宗의 지나친 大宇에 反撥했는데, 그 代表的인 사람이 서필 이었다. [14] 自宅과 別莊을 强制로 빼앗긴 것에 不滿을 품은 豪族들은 이들 臣下들과 힘을 합치거나 뒤에서 操縱하면서 光宗의 歸化인 優待 政策을 批判하고, 萬百姓의 어버이가 되기를 抛棄하고 勢力을 形成하려 한다며 光宗을 批判하게 된다.

서필은 光宗의 行動을 못마땅히 여겼다. [14] 그래서 光宗에게 自身의 집을 바치겠다고 말한다. [16] 光宗이 그 理由를 묻자 自身이 죽고 난 뒤에 子孫들 臺에서 집을 빼앗길 바에야 미리 그 집을 바치는 것이 賢明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對答한다. 이에 光宗은 憤怒하지만 나중에는 서필의 말이 옳음을 깨닭고 다시는 臣下들의 집을 빼앗지 않았다고 한다. [16] 그러나 豪族들의 집과 別莊은 繼續해서 빼앗는다.

光宗은 執權 내내 歸化人들을 爲主로 政治를 펼쳤으며, 이에 豪族들이 反撥하자 苛酷한 肅淸作業을 벌여 恐怖政治를 實施하게 된다. [16] 後日 최승로 는 이 일에 對하여 光宗을 批判하고 있다. 光宗의 지나친 歸化人 任用으로 內國人이 설 자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歸化人과 內國人의 政權 對立이 加速化되는 바람에 政局이 혼란스러워졌다는 것이다. [14]

王族 肅淸 [ 編輯 ]

光宗은 王權의 强化에 걸림돌이거나 自身에게 挑戰한다는 疑心이 드는 人物에게는 冷酷하였다. 光宗은 豪族과 大臣들 뿐만 아니라 骨肉과 宗室에 對해서도 王權 强化에 障礙要素가 된다고 생각하면 果敢히 除去하였던 것 같다. [18] 光宗은 惠宗의 아들 흥화窮窘 과 冬服 兄인 定宗의 아들 경춘援軍 을 逆謀에 關聯되었다 하여 處刑시키고, 甚至於는 自身의 아들이자 太子인 週(景宗)를 疑心할 程度로 逆謀에 敏感해졌다. [19]

945年 惠宗의 아들 흥화窮窘 [20] 은 惠宗이 죽자 出宮하여 어머니와 함께 절에서 살다가 後에 光宗 卽位 後 경화궁부인을 따라 宮으로 들어가 함께 살았다. 그러나 960年 以後 벌어진 王族 肅淸때에 이福 조카이자 妻男인 흥화궁군을 處刑했고 定宗의 아들인 경춘援軍 도 處刑했다. 그 밖에 太祖의 15庶子인 효은태자 亦是 群小輩와 사귀면서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는 理由로 處刑하였다.

효은태자는 그 이름이 傳하지 않는다. [21] 或은 東洋郡(東陽君)이라고도 불렀는데 性格이 亂暴하였으며 作黨하여 反逆을 꾸미려는 뜻을 품고 있었으므로 光宗이 死藥을 내렸다. 그의 아들 王임(王琳)과 王政(王禎)은 孝恩 이 自決할 때 어렸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여 도망칠 수 있었다. [22]

효은태자는 이름이 王원으로 東洋大君으로도 부르는데, 太祖의 後宮이자 高麗의 開國功臣인 유금필의 딸인 동양원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光宗은 異腹同生 효은태자 王원을 性格이 亂暴하였으며 作黨하여 反逆을 꾸미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22] , 群小輩들과 親하게 지내면서 다른 뜻을 품었다 [22] 는 理由로 處刑하였다. 當時의 狀況을 崔承老는 記錄으로 남겼다.

庚申年( 960年 , 光宗 11年)에서 乙亥年( 975年 , 光宗 26年)까지의 16年間은 奸惡한 者들이 다투어 進出하여 讒訴가 크게 일어나니 君子는 몸둘 곳이 없고, 小人만이 제뜻대로 되었다. 甚至於 子息이 父母를 거역하고 種이 그 主人을 告訴하기까지 하여 上下가 마음을 합치지 못하고 옛 臣下들과 이름난 將帥들이 次例로 죽음을 當하고 骨肉과 姻戚도 모두 滅하였다. 하물며 惠宗이 능히 兄弟를 保全한 日課 定宗이 능히 나라와 家門을 保存한 일은 恩惠와 義理를 論한다면 重하다고 이를 수 있는데, 두 王 모두 다 아들 하나만이 있었는데도 王은 그 生命마저 保全치 못하게 하였다.

또 末年에 이르러서는 自己의 아들까지도 疑心하고 꺼렸다. 그런 까닭에 警鐘은 太子로 있을 때 恒常 不安에 떨다가 다행스럽게도 王位를 繼承하게 되었다. 아! 어찌 처음에는 잘하여 좋은 名譽를 얻었는데 뒤에 잘하지 못하여 이地境에 이르렀는지 참으로 痛歎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19]

958年 부터 過去制度로 選拔한 人材들과 獨自的으로 育成한 親衛隊인 示威軍卒을 통해 宮闕을 掌握, 文武 兩面으로 王權을 强化하고 뒷받침하는 勢力基盤이 되었으며, 이들을 背景으로 政治的 敵對勢力을 果敢하게 肅淸할 수 있었다. 960年 開京 黃道 로 改稱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별다른 嫌疑가 없던 自身의 첫째 아들 州를 갑자기 疑心하기 始作하였다. 그러나 孝火太子 의 夭折로 王子 週는 목숨을 扶持할 수 있었다.

軍制 改革 [ 編輯 ]

豪族들에게서 奴婢들을 釋放, 解放시킴으로써 士兵들의 數를 縮小시키게 했다. 그러나 그는 豪族들의 士兵을 完全히 沒收할 생각을 했지만 奴婢按檢法으로 豪族들의 反撥이 繼續되었으므로 士兵 沒收 計劃은 白紙化시킨다.

960年 (光宗 11年) 初 그는 그의 政策에 反撥하는 豪族, 功臣勢力의 肅淸을 計劃한다. 光宗 11年부터는 새로운 王權 强化政策에 不滿을 품은 勳舊 大臣이나 豪族 勢力을 本格的으로 逐出, 肅淸하기 始作했다. 이와 이울러 豪族들의 軍事力을 약화시키고 王權을 뒷받침할 만한 새로운 制度的 措處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23]

高麗 의 建國 以來 秉權 掌握의 最高 機關으로서 有功豪族들의 牙城이었을 巡軍府 (循軍部)가 軍部로 改編되었고 侍衛軍(侍衛軍)인 內軍(內軍)李 王權强化를 뒷받침하는 掌衛部(掌衛部)로 改編되었다. [23] 또한 物藏省(物藏省)李 보천(寶泉)群으로 바뀌어저 王城示威軍卒의 增加에 따른 郡守를 擔當한 것은 모두 王權强化와 密接한 關聯을 맺는 것이다. [23] 또한 宮闕에 兵力을 增員하여 二重, 三重으로 護衛하는 同時에 軍部 內 豪族勢力을 大幅 解任, 罷免함으로써 豪族勢力의 軍權 强化와 萬一에 事態에 對備한 暗殺可能性을 事前에 遮斷하였다.

961年 王宮을 增築하기 위해 大規模 土木工事를 計劃하고 自身의 5寸 堂叔 王肉의 집으로 臨時 居處를 옮긴다.

1次 豪族 肅淸 [ 編輯 ]

豪族 肅淸의 始發點은 960年 에 평농敍事(評農書史) 權臣 [24] 이 對象(大相) 準紅(俊弘)과 左丞(佐丞) 왕동(王同)을 逆謀 嫌疑로 告變하면서부터였다. [19] 對象 準洪이나 左丞 王等은 各其 4품과 3品에 該當되는 關係를 가진 사람들로서 當時 相當한 實力者 [25] 의 한사람이었다.

親鞠을 斷行한 後 光宗은 이들을 귀양 보냈으며 이때부터 讒訴하는 사람이 많아 罪없이 죽는 사람도 많았다. 準洪과 왕동이 쫓겨나고 光宗의 周邊에 對한 境界는 더욱 强化됐다. [19] 準紅 等이 除去된 後 犧牲된 사람은 너무도 많아 따로 臨時 獄舍 를 設置할 程度였다. [25]

평농敍事(評農書史) 權臣이 讒訴하기를 對象(大相) 準紅, 左丞(佐丞) 왕동 等이 逆謀를 꾸민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내쫓았다. 이때부터 阿諂하는 者들이 得勢하여 忠誠心 있고 賢良한 사람들을 謀陷하였으며 奴婢가 제 主人을 고소하고, 아들이 제 아비를 讒訴하여 監獄이 恒常 가득 차게 되었다. 이리하여 따로 臨時 監獄까지 設置하였다. 罪 없이 잡혀가는 者가 繼續 생겨나고 猜忌하는 버릇이 날로 심해졌다. 王室의 一族들度 많이 잡혀 죽었고 王의 외아들 州(胄)까지도 亦是 疑心을 받아 王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게 되니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敢히 마주 않아서 이야기도 하지 못하였다. [25]
 
— 高麗史 卷 2, 光宗 11年朝 記事

高麗史 等에 依하면 이 事件 以後부터 "讒訴하고 阿諂하는 無理가 뜻을 얻어 忠良(忠良)韓 사람을 謀陷하고, 種이 그 上典을 告訴하며, 子息이 그 父母를 讒訴하여 監獄이 恒常 가득 차서 따로 家屋(假獄)을 設置하게 되었으며, 罪없이 살육당하는 者가 줄을 이었다"고 記錄하였다. 이 時期부터 豪族勢力에 對한 無慈悲한 肅淸이 始作되었으며 이러한 肅淸으로 光宗 自身도 身邊의 威脅을 느껴 아들까지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以後 功臣들에게 官職에서 내쫓거나 새로운 官職을 주지 않았고, 光宗의 政策에 反對하거나 다른 王子君의 背景勢力人 外戚 勢力 豪族들을 全面 肅淸, 處刑한다. 그리고 卽位 初 自身을 도왔던 平柱의 朴氏까지 除去하게 된다.

그러나 豪族 들이 肅淸되자 豪族들은 反旗를 들었고, 光宗은 身邊에 威脅을 느낀다. 961年 王宮을 修理, 營建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는 堂叔인 王陸(王育)의 집으로 옮겨간다. 이때의 离宮은 功臣肅淸의 雜音을 避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다. [26] 光宗은 王宮 增築을 目的으로 耳語하였으나 '王陸가로의 이어가 豪族들의 거센 反撥로부터 光宗 自身을 지키기 위해 取해졌다고 하는 見解 [18] '가 있다. 964年 王肉의 司祭로 이어했다가 還宮하면서 詔書를 내렸다. [26]

2次 豪族 肅淸 [ 編輯 ]

961年 堂叔 王肉의 집으로 移住한 以後 一時的으로 豪族 肅淸을 中斷한다. 그러나 964年 (光宗 15) 光宗의 卽位를 도왔으나 그의 政策에 反撥하던 平柱 의 豪族 사도 朴수京 (朴守卿)一家를 肅淸한다. 964年 내린 調書에서 그는 不條理와 問題가 있으면 기탄없이 말하라고 한다.

오랫동안 离宮(離宮)에 있으면서 百官이 일을 아뢰는 것을 내가 親히 듣지 않는 것이 많으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或是 疑心하고 막힘이 있을까 念慮한다. 이제는 宮闕의 修理가 끝났으므로 正使를 들을 곳이 있으니 모든 百官들은 各其 自己의 일을 操心하여 그 前대로 나와서 아뢰도록 하라. 물고기와 물의 關係처럼 君臣이 즐거움을 같이 하여 서로 막힘이 없도록 하라. [26]
 
— 高麗史 卷 2, 光宗 14年朝 記事

이에 依하면 君臣이 함께 즐겨 君臣間에 막힘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26] 그런데 朴수京 家門에서 그에 對한 不滿 輿論이 터져나왔다. 光宗은 바로 사도 朴수京 의 아들 僧位(承位), 勝景(承景), 勝禮(承禮) 兄弟를 投獄했다가 死刑에 處하였고, 아들들의 投獄과 處刑 消息을 接한 朴수京 亦是 그해 8月 病이 惡化되어 死亡하여 沒落하였다. 朴수京 家門을 肅淸한 理由는 光宗에 依한 豪族抑壓政策에 對한 朴수京 家門의 不滿의 吐露였다. [26] 이어 惠宗 청주원부인 (淸州院夫人)과 定宗 청주남원부인 (淸州南院夫人)의 親庭아버지이며 淸州의 豪族인 原보 김긍률(金兢律) 亦是 肅淸되었다.

970年 (光宗 21年) 봄에는 최지몽 (崔知夢)을 肅淸하였다. 그해 봄 귀法師 를 訪問한 光宗은 여기에서 술에 醉한 채로 發言을 한 최지몽 을 降等시키고 外地로 내쫓은 것이다.

일찍이 光宗을 따라 귀法師 에 갔다가 술에 醉하여 禮를 잃은 罪로 降等되어 外걸縣(?傑縣)에 가서 11年이나 있다가 警鐘 5年에 召喚되어 對光, 內議令에 除授되었다. [18]
 
— 高麗史 卷 92, 최지몽展

최지몽 은 死刑당하지는 않았지만 光宗이 죽고 5年이 지난 뒤에야 警鐘 에 依해 復職된다. 최지몽 이 술에 醉해서 한 發言의 內容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後代의 學者들은 그가 光宗의 改革에 不滿을 터트렸을 것이라 推定하고 있다. '그가 어떠한 內容으로 罪를 얻었는지 그것을 具體的으로 알 수는 없지만 이도 亦是 光宗의 改革에 對한 이야기를 하였다가 光宗의 노여움을 사게 된 것이라 보인다. [18] '는 見解와 '그가( 최지몽 ) 得罪하여 貶黜되었다는 事實은 곧 그가 勳신숙장의 系列로서 光宗의 귀法師 를 통한 社會的 支持勢力의 擴大祈禱를 反對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한다. [27] '고 推定한다.

執權 後半期의 光宗은 王權을 威脅하는 勢力이면 어느 누구를 가리지 않고 肅淸을 敢行했다. [15] 이 때문에 豪族들은 驛道로 몰리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렸고, 한便으론 光宗에 對한 不滿을 高調시켰다. [15] 高麗史 의 列傳 최승로便에 依하면 "옛 功臣과 將帥들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고, 警鐘이 卽位할 때 살아 남은 사람은 40餘名 뿐이었다"고 傳한다.

太祖 삼한功臣이 3,200名 [28] 이었는데 光宗 末年에 가면 이들 功臣 또는 功臣가 사람은 40餘 名만 남았다는 것이다.

中國의 混亂期 [ 編輯 ]

趙匡胤 을 일으켜 猛威를 떨치는 한便 後周 는 沒落의 길을 걷고 있었다. [16] 959年 후주의 詩語로 있던 雙철이 갑자기 高麗로 來往하여 高麗의 臣下가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16]

후주의 混亂을 틈타 獨自的인 年號를 使用하였지만, 宋나라 가 建國하면서 다시 宋나라 와의 外交關係를 再開한다. 962年 겨울 廣評侍郞 이흥우를 宋나라 에 보냈고, 963年 12月부터는 宋의 年號를 使用하였다. 12月에 宋나라에서 策命使 試鑽 을 보냈으나 暴雨와 風浪을 만나 使節團을 태운 배가 坐礁되고 試鑽 만이 暴雨 속에서 홀로 살아 남아 當到했다. 光宗은 親히 나가 試鑽 을 맞이한 뒤 試鑽을 盛大한 歡迎會를 베풀어 厚待하고 慰勞하여 되돌려보냈다. 965年 2月 王族인 大勝 內棒令 往路를 宋에 보냈다. 宋나라에서도 和答으로 往路에게 相서 左僕射의 式實封 3百號를 내렸다. 972年 2月 8日 內衣시랑 서희를 宋에 보냈다.

또한 宋나라와 公式 貿易 關係를 締結했다. 開京 에서 30里 길인 禮成江 浦口의 碧瀾渡이다. [29] 光宗 때 宋나라 와의 公式 貿易 關係가 열린 以後부터 國際的인 貿易港으로 크게 자리잡게 [29] 되었다.

中國의 情勢 變化에 光宗은 隨時로 情報를 接하며 敏感하게 對應하였다. 거란 族은 太祖 때 修交를 拒絶한 일에 怏心을 품고 邊方을 掠奪할 兆朕을 보였고, 女眞族 은 每年 그에게 使節을 보내 貢物을 바쳤지만 그는 女眞族 도 不信하였다. 光宗은 後周 , 宋나라 와의 敦篤한 外交關係를 바탕으로 거란 , 餘震 族 勢力을 牽制하였다.

佛敎 奬勵 [ 編輯 ]

思想的 統合을 目的으로 佛敎 를 積極 奬勵하기도 했고, 各地의 寺刹 重修와 供養 施主에 積極的으로 活動하였다. 953年 華嚴宗 僧侶 謙愼을 國師로 封하였다. 以後 謙愼의 入籍 以後 慧炬를 招聘하여 國使로 삼는다.

960年 (光宗 11年)에는 慧炬國師 (惠居國師)가 漆谷 의 古刹 度덕암 을 臺重修하여 칠성암(七星庵)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史跡이 傳해온다. 當時 高麗 光宗은 慧炬國師 를 王師로 모시려고 여러 番 사람을 보냈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고 한다. [30] 光宗이 親히 御駕를 몰아 度덕암 으로 와 慧炬國師 를 王師로 모실 것을 勸했으나 또다시 거절당했다. 이에 光宗이 돌아가려 가자 大使는 ‘이것도 俗世의 因緣’이라며 며칠間 쉬면서 속病을 고치시라 했다. 그래서 光宗은 여기에서 3日間 쉬면서 절에 있던 샘물을 服用했더니 씻은 듯이 속病이 나았다고 한다. [30]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이 샘물을 어정수 (御井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아직도 極樂寶殿 뒤便에 샘물이 남아있다. 이 일로 光宗은 절에 對한 支援을 아끼지 않아 이 절을 칠성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後世사람들이 어정수를 藥物이라 부르고 있다. [30]

963年 귀法師 (歸法寺)를 創建하고, 이곳에 濟危寶(濟危寶)를 設置하여 各種 法會와 再會를 開設하는 等, 積極的인 佛敎政策을 펴나간 것은 이와 密接한 聯關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卽, 귀법사의 僧侶 均如(均如)·彈文(坦文) 等을 통하여 豪族勢力에 反撥하는 一般民衆들을 包攝하고, 改革을 支持해주는 社會的 勢力으로 삼고자 하였다. [31] 968年 에는 忠淸道 論山 에 慧命이 灌燭寺 를 創建할 때 支援하였다.

967年 에는 최행귀에게 命하여 均如의 보현원十가를 漢文으로 飜譯케 하였다. 968年 (光宗 19)에는 高僧들을 나라의 스승으로 招聘하여 局社·王師의 理事制度(二師制度)가 始作되었다. 光宗은 慧炬(惠居)를 國使로 삼아 홍화사 (弘化寺)· 삼귀사 (三歸寺)· 유암사 (遊巖寺) 等의 절의 創建을 全幅的으로 支援하였고, 彈文(坦文)을 王師로 삼았으며 974年 에 慧炬가 죽자 彈文 을 國使로 삼았다. 잇단 王族과 豪族들의 處刑으로 洶洶해진 民心을 佛敎 法會 等을 통해 달래려 했다. 그러나 佛敎 僧侶들 사이에서도 內紛이 發生한다. 968年 (光宗 19年) 均如가 다른 뜻을 품었다는 理由로 告發당하고 彈文이 귀법사를 掌握한다. [32]

한便 970年(光宗 21年)부터는 忠淸南道 論山 에 大規模의 石佛을 重修하였다. 이 石佛은 光宗 生前에는 完工을 못보고 1006年 (穆宗 9年)에 이르는 37年이라는 오랜 不辭 끝에 完成되었다. [33] 石佛彫刻 工事가 수월하지 않자 苦悶하던 혜명 스님의 눈에 어린 아이가 흙을 가지고 '부처를 모시는 놀이'를 하는 光景이 눈에 띄었다. 모래를 쌓고나서 그 위에 부처를 세우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아 그 方法을 適用해 佛像을 세우게 된 것이다. [33]

光宗이 이처럼 커다란 彌勒佛을 造成하게 한 理由는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王權確立의 必要性이 切實했기 때문에 自身의 王權을 誇示하는 象徵物로 巨大한 부처를 造成하게 한 것이다. 彌勒佛을 建設할 마땅한 場所로는 옛 백제를 그리워하는 流民들에게 이젠 새 王朝가 열렸음을 상기시켜주기 위해 後百濟의 故土 論山이 그 場所로 적합했던 것이다.

生涯 後半 [ 編輯 ]

961年 4月 洪水가 나자 光宗은 宮闕 守護와 復元의 目的으로 水營圖鑑(修營都監)을 設置하고 堂叔인 정광(正匡) 王陸(王育)의 집으로 居處를 옮긴다. [34]

한便, 佛敎를 信奉하였으며, 國防에 留意하여 東北系(東北界)·西北系(西北界)에 많은 城을 쌓았다. 西北系에는 장청(長靑)·위화(威化)·茂朱(撫州)·안삭(安朔)·濕홀(濕忽)·頌聲(松城)·樂陵(樂陵)·運籌(雲州)·信徒(信都)·안융(安戎) 等 主로 平南·北地方에 築城(築城)하였고, 東北界에는 장평(長平)·박평(博平)·高柱(高州)·火酒(和州) 等, 主로 只今의 咸鏡南道 地方에 築成하였다.

965年 2月 첫째 아들 (後日의 警鐘 )를 太子로 冊封하고, 長生殿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光宗은 自身의 아들인 太子 週 또한 疑心하였지만 둘째 아들 孝火 太子가 夭折한 關係로 太子 週 以外엔 王位를 물려줄 다른 아들이 없었다.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恐怖에 사로잡혔던 太子 週 는 一切 自身의 뜻을 外部로 表出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光宗 末年에 이르러서는 世上이 어지럽고 刑杖이 잇달아서 歷世(歷世) 勳臣俶裝이 죽음을 며치 못했던 바 경종대에 살아남은 구신은 겨우 40餘 名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28] 965年 7月 에는 그의 側近이었던 內議令 서필 이 病死하였다. 以後 그의 佛敎 에 對한 依存度가 높아졌다. 968年 惡夢을 꾼 後 齋會를 열었으며 放生所를 두고 屠殺 禁止令을 내렸다.

971年 12月 高麗 에 地震이 發生하였다. 各地의 豪族과 百姓들은 王의 탓으로 돌렸고, 이를 겨우 收拾하였으나 972年 2月 다시 大地震이 發生하였다. 이 무렵 그는 惡夢을 꾸고 그해 8月 罪囚들을 大大的으로 赦免하는 對赦免令을 내렸다. 972年 말 內衣시랑 서희 를 冊封奏請使로 宋나라 에 派遣하여, 宋나라 皇帝로부터 詔勅으로 光宗에게 食邑과 稱號를 받고, 冊封奏請使로 派遣된 서희 , 최業 , 강례 , 遺恩 等도 特別히 宋나라 의 官爵을 除授받고, 宋나라의 年號를 쓰기 始作하였다.

最後 [ 編輯 ]

973年 咸鏡南道 長平鎭, 박평진과 高柱에 城을 쌓았고, 신도성을 修築하였다.

974年 (光宗 25年) 洋酒 자재암 의 重水를 命하여 각규臺詞가 重唱케 했다. [35] 그해, 書經 사람 戀歌(緣可)가 反逆을 꾀하려다가 發覺되어 處刑하였다. 그해 局社 慧炬 가 76歲로 死亡하자 彈文 을 國使로 삼았다. 그러나 彈文 975年 3月 病으로 76歲를 一期로 死亡한다.

975年 여름 갑자기 病患이 나서 그해 5月 에 몸져누웠고, 며칠 뒤 開京 皇宮의 正寢(正寢)에서 崩御하였다. 그의 나이 享年 51歲였다. 廟號(廟號)는 光宗(光宗)으로 하고 大聲(大成)이라는 諡號를 올리고, 陵은 京畿道 開豐郡 에 位置한 獻陵(憲陵)이다.

評價와 批判 [ 編輯 ]

王이 卽位한 처음에는 臣下를 禮遇하고 政治를 賢明하게 處決했으며 가난하고 弱한 者를 돌보아 주고 선비들을 尊重했다. 밤낮으로 쉼 없이 政務에 힘쓰니 거의 太平聖代가 찾아온 듯 했다. 그러나 中盤 以後로는 讒訴를 믿어 사람들을 많이 處刑시켰고 지나치게 佛敎를 信奉했으며 竊盜없이 사치한 生活을 했다.
 
— 高麗史 卷 2, 光宗 26年朝 記事
“光宗은 아랫사람을 例로 對하였고 사람을 알아 보았으며, 親하고 貴한 사람에게 치우치지 않고 호강(豪?)韓 者는 恒常 꺾었으며, 소천(疎賤)한 사람을 버리지 않고 환과(鰥寡)를 돌보아 生氣를 북돋아 주었다. 卽位한 해로부터 8年까지는 政治와 敎化가 맑고 公平하였으며 刑罰과 床이 알맞았다. 雙機가 登用된 以後로는 文士(文士)를 높이고 重히 여겨 殷禮(恩禮)가 지나쳤다. 이로 말미암아 재주 없는 者들이 함부로 벼슬길에 나와 次例가 없이 뛰어올랐으며, 株式(酒食)과 잔치 놀이가 連이어 끊어지지 않았다. 南쪽과 北쪽의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 다투어 套의(投依)하기를 願하고 厚生(後生)李 다투어 벼슬길에 나오고, 옛 德이 있는 사람들이 漸漸 衰盡하여졌다.

다시는 抒情(庶政)을 부지런히 하지 않고 臣僚를 接見하지도 않았으므로 時期가 날로 甚하고 君臣 사이의 議論이 날로 막혀서 是正(時政)의 得失을 敢히 말하는 者가 없었다. 더구나 部處의 일을 惑信하고 法文(法門)을 過重하게 하여, 오로지 收復(壽福)을 救하고 祈禱만을 일삼아 限度가 있는 財力을 다하고 限度가 없는 因緣을 지으며, 스스로 支存(至尊)을 가볍게 하고 작은 線(善)을 짓기를 좋아하였다.

宮室은 반드시 制度보다 넘치게 짓고 複式(服飾)은 모름지기 호화스러움을 다하며, 土木의 工事를 알맞은 때에 아니하고 꾸미는 일은 쉬는 날이 없었다. 末年에 와서는 無罪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庚申年으로부터 을해년에 이르기까지 16年 間에는 奸凶이 다투어 나오고 讒訴와 헐뜯음이 크게 일어나니, 君子는 容納될 곳이 없었고, 小人은 활개를 쳤다. 드디어 子息이 父母를 거역하고 種이 그 主人을 論駁하기까지 되어 上下가 서로 마음이 떠나고 君臣(君臣)은 解弛(解弛)해졌으며, 구신(舊臣)과 俶裝(宿將)李 次例로 죽임을 當하고 骨肉 親戚이 모두 滅亡되었다. 더구나 惠宗이 兄弟를 잘 保全하고 正宗이 放歌(邦家)를 잘 保存한 것은 恩惠나 義理로 論할 것 같으면 무겁다 할 만한데, 釀造(兩朝)가 모두 아들 하나만 있었는데 그들의 聲明(性命)을 保存치 못하게 하였으니, 그의 德을 갚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다시 그들의 怨恨을 깊이 맺었던 것이다. 또 末年에 이르러서는 自己의 한 아들까지도 疑心하고 꺼렸으므로 警鐘(景宗)李 東宮에 있을 적에 매양 便安치 못해 하였는데 多幸히 王位는 잇게 되었다. 아, 어찌 처음에는 線(善)하였으면서 뒤에는 善하지 못함이 이에 이르렀는가?”

 
— 高麗史 최승로 列傳, 崔承老의 光宗에 對한 評

評價 [ 編輯 ]

高麗史節要 에 依하면 익재 이제현 은 그를 評하기를 "過去를 設置하여 선비를 뽑은 일은, 光宗이 本來 文(文)의 剪芽함을 가지고 風俗을 변화시키려 했던 뜻을 보았음이 있고서 雙機 亦是 그 뜻을 받들어 따라서 그 아름다움을 이루었으니, 도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有以見光宗之雅 有用文化俗之意 而冀亦將順 以成其美 不可謂無補也)"라고 評하였다.

光宗의 果敢한 改革政策은 結果的으로 豪族 勢力을 약화시키고 王權을 안정시키는 役割을 하였다. [15] 또한 科擧制를 통하여 新進勢力이 大擧 登場함으로써 政治權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으며, 文化的으로도 中國의 새로운 文物을 받아들여 獨自的인 發展을 일궈냈다. [15] 惠宗과 定宗은 各各 박술희(朴述熙)와 왕식렴(王式廉)으로 대표되는 다른 强力한 勢力基盤에 依支하여 王權을 扶持하였으나, 光宗은 獨自的인 勢力基盤을 쌓아 王權을 確保하는 데 힘썼다. 權臣·富豪의 勢力을 누르기 위해 近親結婚을 奬勵하고 外戚의 弊를 없애려 했다. [36] 光宗은 高麗 初期 王權强化를 위하여 가장 끈氣 있고 精力的으로 努力하여 큰 成果를 거둔 國王으로 注目된다. [37]

그가 過去 制度 를 本格 導入, 定着시켜서 實力에 따른 人材登用의 길을 確立했다는 評價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身分的 制約이 많던 新羅 時代 에도 최치원 等 六頭品 官僚들이 學問을 바탕으로 政界에 進出하여 많은 業績을 남겼고, 신문왕 이 國學을 設立하고(682년), 元聖王이 讀書三品科를 設置하여( 788年 ) 留學을 振作시켜 놓았기에 可能한 일이다. 하지만 光宗에 依해 過去 制度가 本格 導入되지 않았다면 試驗에 依해서 管理를 登用하는 制度는 쉽게 마련될 수 없었을 것이다. [14] '라는 評이다.

批判 [ 編輯 ]

光宗의 改革政治는 새 王朝의 國家體制와 政治秩序를 이루는 데 寄與했다는 點에서 評價할만하나, 改革의 範圍가 主로 政治에 限定되어 中央의 政界改編에 置重한 結果, 地方制度 改編이나 廣範圍한 經濟·社會的 制度의 改編은 相對的으로 微弱했다. 이것은 後代에도 影響을 미쳐 當場 本格的인 道 改編이나 軍事 體系의 整備만 해도 成宗 때부터나 겨우 이뤄지게 되는데, 何必 이때 遼나라에서 蕭遜寧이 쳐들어오게 되고 이것은 當時 高麗의 劣惡한 行政力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契機가 된다.

그는 改革 過程에서 歸化人들을 지나치게 優待해 內國 官僚들의 怨望을 들었으며, 豪族은 勿論 血肉과 親姻戚에 對해서도 自己에 對한 敵對 行爲의 可能性을 恒常 警戒하고, 逆謀를 다스리는 過程에서 臣下들은 勿論 家族과 親戚마저 함부로 죽이는 弊端을 남겼다. [15] 數 많은 豪族들과 이福아우인 효은태자, 조카인 惠宗의 아들 흥화군, 定宗의 아들 경춘援軍 等 王族들이 肅淸을 當하였고 그로 인해 政治的, 社會的으로 不安과 混亂이 加重됐다.

奴婢按檢法 施行이 가져온 副作用도 存在하였다. 奴婢로 있던 者가 自身의 옛 主人을 헐뜯고 辱하는 일로 싸움이 벌어지는 事件도 잇따라 터졌고, 그 時代 基準으론 奴婢와 良人 階層의 離叛으로 身分 秩序가 紊亂해저 社會的 土臺가 흔들리는 樣相도 一部 發生했다. [13] 또한 光宗 近衛 勢力과 豪族 勢力間의 衝突로 인해 政界의 大混亂이 일어나기도 했다. [13]

中期 以後 奢侈와 지나친 政敵 牽制, 피의 肅淸 等이 어우러지는데, 960年 평농敍事(評農書史) 權臣 [24] 이 對象(大相) 準紅(俊弘) 等의 逆謀를 告變한 以後 이를 빌미로 豪族들을 大量으로 肅淸하였고, 異服兄 惠宗의 아들 흥화窮窘 , 同腹兄 定宗의 아들 경춘援軍 , 太祖의 庶子인 異腹同生 효은태자 等을 處刑하였고 甚至於 自身의 長男인 太子 週 亦是 疑心하여 葛藤을 벌이게 된다.

기타 [ 編輯 ]

奴婢按檢法 이 豪族들의 經濟的 基盤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科擧制 는 豪族들의 政治的 基盤을 약화시킬 目的으로 施行한 政治構造 改革案이었다. [13] 高麗 建國 以後 豪族 中心의 功臣들에 依해 主導되던 調整에 過去를 거친 新進官僚들을 등장시킴으로써 豪族들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同時에 中央集權的 統治體制를 確立하려는 革命的 試圖였던 것이다. [13]

家族 關係 [ 編輯 ]

出生 死亡
高麗 第4代 國王 光宗 大聲大王
光宗 大成大王
925年 生日 未詳
고려 高麗 開京 停戰   
975年 7月 4日 ( 陰曆 5月 23日 ) (50歲)
고려 高麗 開京 本宮 正寢

父母 [ 編輯 ]

本館 生沒年 父母 備考
太祖
太祖
開城 877年 - 943年 世祖
世祖
위숙왕후 韓氏
威肅王后 韓氏
初代 國王
申命淳性王后 劉氏
神明順成王后 劉氏
忠州 未詳 유긍달
劉兢達
未詳


王后 [ 編輯 ]

시호 本館 生沒年 父母 備考
王后 대목왕후 皇甫氏
大穆王后 皇甫氏
黃州 未詳 太祖
太祖
신정왕후 皇甫氏
神靜王后 皇甫氏
  

後宮 [ 編輯 ]

시호 本館 生沒年 父母 備考
否認 경화궁부인 林氏
慶和宮夫人 林氏
鎭川 惠宗
惠宗
의화왕후 林氏
義和王后 林氏
顯妣 金氏
賢妃 金氏
[38]
未詳 未詳

王子 [ 編輯 ]

軍號 이름 生沒年 生母 配偶者 備考
1 警鐘
景宗

?
955年 - 981年 대목왕후 皇甫氏 헌숙왕후 金氏
獻肅王后 金氏
헌의왕후 劉氏
獻懿王后 劉氏
헌애왕후 皇甫氏
獻哀王后 皇甫氏
헌정왕후 皇甫氏
獻貞王后 皇甫氏
第5代 國王
2 孝火太子
孝和太子
未詳 未詳 대목왕후 皇甫氏 未詳

王女 [ 編輯 ]

爵號 生沒年 生母 配偶者 備考
1 천추전否認
千秋殿夫人
未詳 대목왕후 皇甫氏 천추전群
千秋殿君
2 寶貨宮夫人
寶華宮夫人
未詳 대목왕후 皇甫氏 未詳
3 문덕왕후
文德王后
未詳 대목왕후 皇甫氏 홍덕원群
弘德院君
成宗
成宗
成宗의 第1王後


光宗이 登場하는 作品 [ 編輯 ]

書籍 [ 編輯 ]

  • 김창현, 《光宗의 帝國》(푸른역사, 2003)
  • 황선영, 《나말여초 政治製圖士 硏究》 (국학자료원, 2002)
  •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들녘, 1996)
  • 이기백 外, 《高麗光宗 硏究》 (일조각, 1990)
  • 일조각, 《韓國史 市民講座 第13輯》 (일조각, 1997)
  • 韓國人物史硏究院, 《이야기 考慮王朝實錄:上》 (圖書出版 타오름, 2009)
  • 홍석연, 《이야기 高麗王朝野史》 (圖書出版 삶課벗, 2008)
  • 이은식, 《이야기 高麗王朝 實錄》 (圖書出版 淸穆山, 2008)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高麗史》勢가2
  2.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78페이지
  3.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77페이지
  4.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85페이지
  5.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79페이지
  6.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91페이지
  7. 곽준식, 《마케팅 리더십》 (圖書出版 살림, 2005) 23페이지
  8.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80페이지
  9.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92페이지
  10. 곽준식, 《마케팅 리더십》 (圖書出版 살림, 2005) 24페이지
  11.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81페이지
  12.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89페이지
  13.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90페이지
  14.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93페이지
  15.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83페이지
  16.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94페이지
  17.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95페이지
  18. 박경자, 《高麗時代 鄕里硏究》(국학자료원, 2001) 129페이지
  19.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82페이지
  20. 이福 兄의 아들이면서 同時에 妻男이 된다.
  21. 開城王氏 族譜에 이름이 傳하는데 이름은 王원 (王垣)이다.
  22. 박경자, 《高麗時代 鄕里硏究》(국학자료원, 2001) 130페이지
  23. 박경자, 《高麗時代 鄕里硏究》(국학자료원, 2001) 126페이지
  24. Daum 知識 http://durl.kr/5fyrth
  25. 박경자, 《高麗時代 鄕里硏究》(국학자료원, 2001) 127페이지
  26. 박경자, 《高麗時代 鄕里硏究》(국학자료원, 2001) 128페이지
  27. 이기백 外, 《高麗光宗 硏究》 (일조각, 1990) 100페이지
  28. 박경자, 《高麗時代 鄕里硏究》(국학자료원, 2001) 131페이지
  29. 한국역사연구회, 《高麗時代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청년사, 2005) 158페이지
  30. 度덕암 創建背景 및 說話
  31. “高麗 光宗” . 2012年 7月 1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7年 7月 11日에 確認함 .  
  32. 김창현, 光宗의 帝國 (푸른역사, 2003) 361
  33. 마음속에 고요한 오솔길 하나 내고 싶거든 - 오마이뉴스
  34. “KBS 大河드라마 '帝國의 아침 ' . 2007年 8月 2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3月 10日에 確認함 .  
  35. 逍遙山:가을丹楓으로 有名...10月 丹楓祝祭 開催
  36. 글로벌稅契對百科 》, 〈高麗의 統一〉
  37. “네이트” . 2012年 7月 1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7年 7月 11日에 確認함 .  
  38. 高麗史 》 卷5 世가 勸第5 > 顯宗(顯宗) 20年 (1029年 11月)
    光宗 宮人을 追增하다
    경오 光宗(光宗)의 宮人(宮人) 金氏(金氏)를 顯妣(賢妃)로 追贈하였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