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新羅 敬順王
新羅 敬順王
樂浪王
경순왕의 실제 어진의 복사본 (조선 후기에 제작)
敬順王의 實際 御眞의 複寫本 (朝鮮 後期에 製作)
第56代 新羅 國王
在位 927年 陰曆 11月 ~ 936年 1月 13日 (陽曆)
前任 경애왕
後任 高麗 太祖
高麗 慶州事審官
在任 935年 ~ 978年 5月 18日
이름
部(傅)
시호 경순(敬順)·曉靄(孝哀)
王號 樂浪王(樂浪王)
爵號 政丞공(政丞公)
身上情報
出生日 897年
出生地 新羅 徐羅伐
死亡日 978年 5月 18日 (80~81歲) (陽曆)
死亡地 高麗 開京
王朝 新羅
父親 新興大王 김효종
母親 계아태후 金氏
配偶者 죽방否認 , 낙랑공주
子女 마의태자 , 김덕지 , 헌숙왕후
宗敎 佛敎
墓所 京畿道 長湍郡 장단면
(現 大韓民國 京畿道 漣川郡 장남면 경순왕릉 )

경순왕 (敬順王, 897年 ~ 978年 陰曆 4月 4日 /陽曆 978年 5月 18日 ( 율리우스력 5月 13日 ))은 新羅 의 第56對利子 新羅의 마지막 君主 이다. 慶州 金氏 의 始祖이며, 在位 期間은 927年 陰曆 11月 ~ 935年 陰曆 12月 12日 이다.

姓은 金(金) 이고, 이름은 部(傅)이며, 諡號는 경순(敬順)이다. 一名 김부대王(金傅大王)이라고도 한다. [1] [2] [3]

出生年度는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서는 出生年度가 記錄되어 있지 않지만 族譜 에 따르면 897年에 태어났다고 記錄되어 있다. [4] 敬順王은 英特한 氣像을 지닌 外貌에 하늘을 업신여길 만한 재주를 지녔다고 한다. [5]

문성왕 의 後孫으로, 할아버지는 의흥大王에 追尊된 김인경 (또는 김실洪, 또는 김관유)이며, 아버지는 新興大王에 追尊된 김효종 이고, 어머니는 계아태후에 追尊된 헌강왕 의 딸이다. [6]

王妃는 죽방否認 으로 [7] 膝下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이 俗稱 마의태자 이고 막내아들은 界磁이다. 이들 王子들은 敬順王이 나라를 高麗 에 兩國하는 것에 反對하여 皆骨山 (現在의 金剛山)으로 들어갔다. [8]

新羅 경명왕 때부터 高麗 에 依支해 後百濟 를 牽制하는 政策을 펼쳐왔는데, 경애왕 도 兄 경명왕 의 친 高麗 政策을 이어받아 927年 正月 高麗 太祖 後百濟 를 攻擊하자 軍士를 출동시켜 高麗 를 도왔다.

927年 11月 後百濟 甄萱 新羅 의 數도 金星을 急襲하여 포석정에서 宴會를 베풀며 놀고 있던 경애왕 을 사로잡아 自殺하게 하고, 경애왕 의 姨從四寸 동생인 金副를 王位에 세우니 그가 경순왕이다. 敬順王은 在位 8年 동안 나라의 힘이 完全히 弱해지고, 國土가 날로 줄어들어 나라를 제대로 이끌 形便이 되지 않았다.

935年 10月 敬順王은 軍神會議를 召集하여 나라를 考慮에 兩國하는 것을 論議하는데 贊成과 反對가 紛紛하여 끝이 없었다. 이에 敬順王은 935年 11月 시랑 金封休를 시켜 降伏을 請하는 國書를 高麗 王建 에게 바치니 千年(紀元前 57年 ~ 935年)의 新羅 는 滅亡했다.

935年 11月 敬順王은 文武百官과 함께 金星을 떠나 송악(只今의 開城)으로 向했는데, 香茶와 寶馬의 行列이 30餘 里에 이어졌다.

敬順王이 松嶽 에 到着하자 太祖 王建 이 그를 맞아 들여 有화궁에 머무르게 하고, 王建 의 큰 딸인 安定熟議公州 (一名 낙랑공주) [9] 및 아홉째 딸인 ‘公主’ [10] 와 다시 婚姻시켜 敬順王을 사위로 삼고 신란宮도 지어주었다. 以後 敬順王은 헌숙왕후 金氏 를 두었다.

敬順王은 高麗 朝廷으로부터 政丞 上柱國 樂浪王에 封해졌는데 그 品位가 太子 보다 높았다. 新羅 慶州 로 改稱하고 食邑으로 下賜받았으며, 金星 事審官 에 任命되어 高麗時代 事審官 制度의 始初가 되었다.

978年 (景宗 3) 陰曆 4月 4日에 죽었다. 高麗 朝廷으로부터 경순 이라 諡號를 받았다. 陵은 新羅 王陵 中에 唯一하게 慶州가 아닌 京畿道 장단에 있다 [11] . 오늘날 京畿道 漣川郡 백학면에 位置하고 있으며, 漣川 경순왕릉은 史跡 第244號로 指定되었다.

生涯 [ 編輯 ]

敬順王은 927年 11月 新羅 第56代 마지막 王으로 卽位하여 8年間 再任하다 後三國의 混亂을 收拾하지 못하고 935年 11月에 나라를 高麗 에 바쳐 降伏하였다.

아버지는 新興大王에 追封된 孝宗 이며, 어머니는 헌강왕 의 딸인 계아태후이다. 仙界는 新羅 문성대王 → 上大等 김안 → 角干 김민공 → 의흥大王 舒發翰 김인경 (一名 김실洪) → 新興大王 大阿飡 김효종 → 경순왕으로 이어진다. [12]

927年 11月 後百濟 甄萱 新羅 의 首都인 金星을 奇襲하여 포석정에서 술잔치를 즐기고 있던 경애왕 을 사로잡아 自決하게 하고, 王妃를 强制로 욕보였다. [13] 그리고 경애왕 의 外四寸 동생인 김부(金傅)를 王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新羅 第56代 王인 敬順王이다.

포석정

敬順王은 경애왕 이 갑작스럽게 죽게 되어 王位에 올랐다. 卽位 初 아버지 大阿飡 김효종 을 新興王에, 할아버지 角干 김인경 을 醫興旺에 各各 追封하였다.

敬順王은 在位 時 領土가 喪失되고 國力이 衰退하여 여러 次例에 걸친 後百濟 의 侵攻과 掠奪로 國家를 어 以上 維持하기가 不可能하다는 事實을 認識하고 亂暴한 甄萱 보다 오히려 王建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0年 以後 新羅 의 仙筆 將軍이 高麗 에 降伏하였다. [14] 高麗 太祖 慶北 高敞 (慶北 安東) 竝算에서 後百濟 와 싸워 크게 勝利하자, 敬順王은 高麗 와 親하게 지내는 政策을 더 强化했다. 後百濟 의 영안, 河谷, 職名, 송생 等 運籌 境內의 30餘 郡縣이 次例로 高麗 에 降伏하였다.

931年 2月 敬順王이 태수 兼用을 보내 高麗 太祖 에게 만날 것을 再次 要請하자 高麗 太祖 가 起兵 50餘 名을 거느리고 徐羅伐(慶州)을 訪問했다. 敬順王은 百官들과 함께 郊外에 나아가 迎接하여 極盡한 禮遇를 하고 宴會를 베풀었다.

敬順王은 술기운이 오르자 高麗 太祖 의 손을 붙잡고 甄萱 때문에 살 수가 없음을 하소연하며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高麗 太祖 는 수 십일을 머물면서 麾下의 軍士들에게 嚴肅하고 공정하여 털끝만큼도 規律을 犯하지 못하게 하였다. [15]

5月에는 高麗 太祖 가 敬順王과 太後 죽방否認 을 비롯한 相國 김유렴 等의 臣下에게 物品을 支給했다. [16]

高麗 太祖 가 돌아갈 때 敬順王은 血性까지 나가서 배웅하고, 四寸 동생인 김유렴 [17] 을 人質로 삼아 따라 보냈다. 都城의 男女들이 感激하여 흐느끼면서 “옛날 甄萱 이 왔을 때에는 虎狼이나 이리를 만난 것 같았는데, 이番 王建 이 왔을 때에는 마치 父母를 만난 것 같다.”고 기뻐했다. [18]

가을 8月에 高麗 太祖 가 使臣을 보내 임금에게 緋緞과 鞍裝을 갖춘 말을 보내주고, 아울러 여러 官僚와 將兵들에게도 差等을 두어 膳物을 주었다.

930年 正月 高麗 는 高敞(古昌, 只今의 慶北 安東) 戰鬪에서 後百濟에 큰 勝利를 거두고, 934年 에는 後百濟가 支配하던 熊進(只今의 忠南 公州) 以北 運籌(只今의 忠南 洪城)의 30個 郡縣이 高麗로 投降했다.

935年 陰曆 6月 甄萱 이 아들 神劍에 依해 全北 금산사에 갇혔다가 高麗 로 도망쳐 投降하는 事件도 벌어졌다. 王建 甄萱 을 받아들여 床보라 높여 부르고, 洋酒(只今의 京畿道 洋酒)를 食邑으로 주며 南宮에 머무르게 했다.

이와 같이 四方의 領土는 다른 나라의 것이 되고 나라 形勢는 孤立되고 弱해져서, 더 以上 스스로의 힘으로 버틸 수 없었다. 高麗 의 勢力은 漸次 커지고, 民心도 新興 國家인 高麗 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高麗 歸順 및 滅亡 [ 編輯 ]

935年 陰曆 10月 敬順王은 軍神會議를 召集하여 高麗 로 投降할 것을 論議하였다. 여러 臣下들이 論議하기를 옳다는 사람도 있고, 옳지 않다고 主張 하는 사람도 있었다.

王子 가 나서서 말하기를 “나라의 存續과 滅亡은 반드시 하늘의 運命에 달려 있으니, 다만 忠臣 醫師들과 함께 民心을 合하여 스스로 굳건히 힘을 다한 뒤에 亡할지언정, 어찌 1千 年의 社稷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敬順王은 “孤立되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서 나라를 保全할 수 없다. 이미 剛하지도 못하고 또 弱하지도 않아 無辜한 百姓들의 肝과 腦가 길에 떨어지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 말하고, 시랑 金封休에게 便紙를 가지고 가서 高麗 太祖 에게 降伏을 請하니, 高麗 太祖 王建은 太上 往哲 等을 보내 迎接하게 했다. 그리하여 新羅 의 千年( 紀元前 57年 ~ 935年 )은 滅亡했다.

兩國에 反對하는 太子 와 界磁는 痛哭을 하면서 王에게 下直 人事를 하고 곧장 皆骨山 (現在의 金剛山)에 들어갔다.

以後 太子 는 바위에 依支해 집을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어 먹다가 一生을 마쳤다고 한다. 동생은 華嚴宗 에 歸依하여 중이 되어 法名을 汎공이라 하고 法修辭와 海印寺 에 머물렀다고 한다. [19]

高麗 歸順 後 [ 編輯 ]

935年 11月 敬順王이 文武百官을 거느리고 徐羅伐을 出發하여 高麗 송악(只今의 開城)으로 向하자 華麗하게 裝飾한 수레가 30里 넘게 이어져 사람들과 道路가 꽉 메이었으며 구경꾼들이 담牆을 두른 듯했다. [20]

敬順王이 往哲 等의 案內를 받아 송악에 到着하자 高麗 太祖 가 郊外에 나와 迎接하며 慰勞하고, 宮闕 東쪽 有화궁에 머물도록 했다.

高麗 太祖 가 敬順王에게 말하기를 “只今 王께서 寡人에게 나라를 주었으니 그것은 매우 큰 恩惠입니다. 願컨대 宗室과 婚姻하여, 丈人과 사위의 좋은 關係를 永遠히 하고자 합니다.”라 하며, 高麗 太祖 가 停電에 文武 百官을 모아놓고 禮를 갖추어 큰딸 安定熟議公州 (一名 낙랑공주) [21] 를 시집보내고 王을 사위로 삼았다. [22] 以後 아홉째 딸인 ‘公主’도 敬順王에게 시집보냈다. [23]

935年 12月 그를 觀光醇化危局功臣 上柱國 樂浪王 政丞공으로 삼아 봉하고, 해마다 祿俸으로 1千섬을 주고, 같이 따라온 官員과 장수들도 모두 다 官職을 주어 登用시켰다. 新羅 慶州 로 고치고 食邑으로 삼도록 하고 慶州 事審官 에 임명하였다. 高麗 時代 事審官 制度의 始初가 되었다.

937年 (太祖 20) 5月 敬順王이 진평왕 이 차던 허리띠로 알려진 聖帝帶를 王建에게 바쳤다. [24] [25]

경순왕度 高麗 太祖 에게 伯父 迊干 김억렴 [26] 의 딸을 勸하여 高麗 太祖 가 後備로 맞이하였는데, 그女가 제5왕후인 신성왕後 金氏 이다. 膝下에 아들은 高麗 安宗 으로 推尊된 왕욱 (王郁)으로 그는 高麗 第8代 王 高麗 顯宗 의 아버지이다.

975年 10月 敬順王은 膝下의 첫째 딸을 高麗 太祖 의 孫子인 高麗 第5代 王인 警鐘 에게 출가시켰는데, 그女가 賢淑王后 金氏 이다. [27]

이 일로 高麗 警鐘 은 敬順王을 特別히 配慮하여 位階를 太子 의 위인 上保寧으로 삼고 食邑과 祿俸을 더해 주었다. 그는 高麗 太祖 부터 高麗 惠宗 · 定宗 · 光宗 · 警鐘 臺까지 5代에 걸쳐 살았으며, 太祖 王建 이 죽은 後에도 王 다음으로 높은 存在로 認識되고 그 影響力이 컸다.

敬順王의 子孫들은 繁昌하였는데, 그中 第8代 高麗 顯宗 新羅 의 外孫으로 王位에 오르게 되었고 그를 繼承한 者들이 모두 그의 子孫들이 繼續 王位를 이어 받았다. 따라서 第7代 高麗 穆宗 以後 卽位한 王들은 모두 新羅 王室의 血統을 이어 받았다.

死亡 [ 編輯 ]

978年 (高麗 警鐘 3) 無人年 4月 4日 붕어 하였다. 諡號를 경순(또는 曉靄라고도 한다.)이라 하였다. 元來 敬順王의 屍身은 다른 新羅 의 王陵이 있는 慶州 로 運柩하려 하였으나, 高麗 王室에서 王의 영구는 都城 밖 100里를 넘을 수 없다고 反對하여 臨津江 을 건너지 못하고 現在의 京畿道 長湍郡 장단면(現 漣川郡 장남면) 南쪽 高浪浦 8里 計座 언덕에 安葬하였다.

家族 關係 [ 編輯 ]

경순왕 家計에 對해 《 三國史記 》· 《三國遺事》· 《高麗史》· 《 東國輿地勝覽 》等에 나와 있으며, 王后 죽방否認 과의 사이에 두 王子를 두었는데, 이들 王子의 이름은 傳하지 않으며, 但只 太子 , 界磁라고만 적혀있다. 界磁는 汎공(梵空)이라는 勝名이 傳한다.

子女 登場(推定) [ 編輯 ]

1784年 開城 어느 山기슭에서 偶然히 發見된 경순왕 4자라는 《김은열 墓誌銘》에 兄은 '일, 굉, 名'이요, 동생은 '重石, 건, 선, 種'이라 한다. 特히 2字 김굉과 4者 김은열은 高麗 太祖 의 外孫인 낙랑공주 王氏 所生으로, 平章事를 歷任하고 功이 있는 新하여서 特別히 障지를 城北 十 里 밖 오룡산 南쪽 三十 里 周邊을 하사해 주었다고 한다. 이듬해 1785年 後孫이라는 慶州 金氏 김사목 이 族譜를 修補하면서 2字 굉을 黃으로, 3者 名을 明宗으로 改名하고 諡號를 지어내는 等 加筆을 甚하게 하였다. 以後 一部 慶州 金氏 族保留에 이들 8者들 이름이 登載되기 始作하였다. 그러나 《김은열 墓誌銘》을 찬(撰)한 사람도 없고 배위 및 生涯 等도 漏落되어 있으며 但只 兄弟 서차만 記述되어 있을 뿐 完全하지 않다는 것이다.

  • 1男 : 김일 [36]
  • 2男 : 김굉(改名 김황) [37]
  • 3男 : 金明(改名 김명종) [38]
  • 4男 : 김은열
  • 5男 : 김중석(改名 김석) [39]
  • 6男 : 김건
  • 7男 : 김선
  • 8男 : 김종(改名 김추) [40]
  • 別子 : 김덕지
  • 2女 : 이금서 (慶州 李氏)에게 出家 [41]
  • 3女 : 黃經(長壽 黃氏)에게 出家 [42]

墓 實戰 및 發見 [ 編輯 ]

敬順王의 墓는 失傳되었다가, 1727年 (英祖 3) 안동인 김굉이 『경순大王葬地』] 라는 6者가 各自된 誌石을 發見하고, 1746年 (英祖 23) 10月 14日 同志 김응호가 京畿道 장단에서 경순왕 『誌石』 및 『神道碑』가 나왔음을 알리는 上疏를 올렸다. 그 後續 措置로 1747年 4月 20日 김성운 江原·忠淸監査), 김응호 (添丁) 等으로 하여금 陵墓를 奉祝하고 墓碑를 다시 세우게 하고, 장단府使 心棒징으로 하여금 致祭하게 하였다. [43]

그로부터 장단部에서는 每年 3月 1日과 10月 1日에 春秋 享祀를 올리고, 官軍으로 하여금 守護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現在의 경순왕릉 모습이 維持 保存되었다. 慶北 慶州 皇南洞의 숭惠展, 河東 청암면의 警遷墓 等에 祭享 되었다.

1748年 (英祖 24) 경순왕릉 隣近 京畿道 漣川郡 장단면 고랑 마을 民家에서 慶州 金氏 김빈과 김굉 等이 『경순왕릉 神道碑』도 發見하였는데, 碑石의 材質은 花崗石을 깎아 만든 것으로 가운데 차돌이 드러나 있다. 碑文은 自然 風化 等으로 甚하게 磨滅되어 全혀 判讀이 不可能한 狀態이며, 碑身 中間과 下段의 一部分에서 10字 "敬順王(敬順王), 金(金), 十月女親支局(十月輿?至國)" 程度만 남아 있다. 碑石의 크기는 높이가 132㎝, 幅이 67㎝, 두께가 15-18㎝이다.

이 비는 6·25 前까지 高浪浦리 市街地에 있었으나 收復 前後 道路邊에 放置되어 오던 것을 1973年 원당리 고랑포초등학교 로 移轉하였다가, 1986年 경순왕릉 淨化事業에 따라 現 位置로 옮겨지고 비각 및 齋室을 새로 建立하였다.

影幀 [ 編輯 ]

경순왕 影幀 ( 1794年 , 이명기作)

敬順王의 御眞을 처음 製作한 것은 統一 新羅 가 滅亡한 直後인 高麗 初였다. [44] 敬順王을 追慕하기 위해 그린 이 御眞은 江原 原州市 鼓子癌에 奉安해 놓았다.

그 後 原本은 사라졌지만 朝鮮時代에 移模한 作品 5點이 傳하고 있다. 5點은 1677年 (肅宗 2年) 江原 원주의 鼓子癌에서 製作한 것, 1749年 慶北 永川 銀海寺 商用癌에서 그린 것, 1794年 肖像畫가 이명기가 銀海寺本을 보고 다시 그린 것, 1904年 (光武 8年) 僧侶 出身 大韓帝國 의 畫家 이진춘이 이명기 本을 보고 다시 그린 것과, 이진춘 本意 抄本 等이다.

이들 御眞 5點은 경순왕 祠堂인 慶北 慶州市 숭惠展 倉庫에 放置돼 오다 2007年 그 存在가 처음 確認됐다. 以後 國立慶州博物館으로 옮겨 委託 保管해 왔지만 그 全貌는 알려지지 않았다. [44]

大韓帝國 時節 그려져 慶尙南道 河東郡 청암면 평촌리 산 107-1 景天墓에 奉安中인 '敬順王 御眞'은 2008年 慶南도 有形文化財 第474號로 指定되었다. [45]

敬順王이 登場한 作品 [ 編輯 ]

TV 드라마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李德一의 古今通義 古今桶의 王朝의 終末 - 中央日報] 2011年 11月 23日子
  2. 諡號가 曉靄(孝哀)라고도 한다.
  3. 《三國遺事》
  4. http://unyangkim.or.kr/50
  5. 《三國遺事》
  6. 《三國史記》에 舒發翰(舒發翰) 김인경 (金仁慶)의 아들 김효종 이 어머니를 奉養하려고 富者집에 自身의 몸을 팔아 종이 된 孝女 지은(知恩)의 몸값을 갚아 良民으로 만들어주자, 정강왕(定康王, 在位 886~887)李 이를 대견하게 여겨 그를 憲康王의 딸과 婚姻시켰다고 하였다.
  7. 一說에 죽방否認(竹房夫人)을 敬順王의 母后(母后. 王의 어머니)라 主張하나, 이는 《 高麗史 》 誤譯(誤譯)에서 바롯된 結果라 할 것이다. 《 高麗史 》는 新羅 滅亡 後 1451年 朝鮮 文宗 1年에 完成된 高麗時代 歷史書로, 高麗 立場에서 新羅 敬順王을 先王으로 보고 그의 王妃인 죽방婦人을 先王 敬順王의 太後(太后)라 記錄하였던 것이다.
  8. 두 아들의 이름은 詐欺에 傳하지 않으며, 첫째 아들을 後代에 마의태자 라 하며, 막내아들은 界磁라고 한다.
  9. 申命淳性王后 柳氏 所生
  10. 성무부인 朴氏 所生
  11. [박종인의 땅의 歷史 高浪浦 좁은 물길에서 1500年 歷史를 보았다 ? 朝鮮日報]
  12. 《三國史記》, 新羅敬順王전비(新羅敬順王殿碑. 1814年)」
  13. 新羅는 第54代 경명왕(景明王, 在位 917∼924) 때부터 高麗의 勢力에 依支해 後百濟를 牽制하려는 政策을 펼쳐왔다. 그래서 927年 正月에 王建이 後百濟를 攻擊하자 軍士를 보내 그를 돕기도 했다.
  14. 新羅 6頭品 出身의 再癌星將軍 최선필(崔善弼) 大將軍을 말한다. 『高麗史』 卷92, 列傳5, 왕순식(王順式) 部 仙筆(善弼)展 參照
  15. 《三國遺事》에는 巫子年 928年(敬順王 2) 3月의 일로 記錄되어 있다.
  16. 《高麗史》 卷2 太祖14年
  17. 金裕廉 또는 金庾廉
  18. 《高麗史》 卷2 太祖14年
  19. 《三國遺事》 第2卷 기이(紀異) 第2 김부대王(金傅大王)
  20. 《三國史記》
  21. 申命淳性王后 劉氏 所生이다.
  22. 《三國遺事》에 敬順王이 自己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산다고 어미에게서 떨어져 사는 난조(鸞鳥)에 比喩해 公主를 신란公州(神鸞公主)라고 고쳐 불렀으며, 諡號를 梟木(孝穆)이라고 했다고 記錄되어 있다.
  23. 성무부인 朴氏 所生이다.
  24. 《高麗史》 高麗 太祖가 新羅의 使臣 김률(金律)에게 “新羅에는 장육金賞(丈六金像)週4)과 9層塔週5) 및 聖帝帶(聖帝帶)라는 세 가지 寶物이 있는데 이 寶物들이 남아 있는 한 나라가 亡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只今 塔과 佛像은 그대로 있으나 聖帝帶는 남아있는지 모르겠다.”고 물었다.
  25. 《三國遺事》에는 天賜玉帶(天賜玉帶)라 記錄되어 있다.
  26. 敬順王의 아버지인 新興大王(神興大王)에 追尊된 孝宗(孝宗)의 동생이다.
  27. 《三國遺事》에는 헌勝皇后(憲承皇后)라 記錄되어 있다.
  28. 《三國史記》
  29. 『新羅敬順王전비』
  30. 《三國遺事》
  31. 《高麗史》에 931年(太祖 14) 高麗 太祖 가 徐羅伐을 訪問하고 돌아가는 길에 新羅王과 太後 죽방婦人을 비롯한 臣下들에게 物品을 나누어 주었다는 記錄을 根據로 敬順王의 母后라는 主張이 있으나 이는 漢文 直譯에서 오는 誤謬라 하겠다. 《高麗史》 敍述 때 敬順王은 前王으로 禮遇하였으며, 그의 王妃를 王의 太後라 記錄하였던 것이다.
  32. 歷史에는 이름이 傳하지 않는다.
  33. 朝鮮朝 末 1814年 慶州 金氏 一問들이 세운 「新羅敬順王전비」에 整備 죽방否認 을 戰費로, 后妃를 낙랑공주 王氏라 하였는데, 이는 自身들의 利害關係에 따라 后妃라 하였을 뿐이지, 敬順王이 高麗에 降伏한 以後 맞아들인 後輩들은 新羅의 王妃도 아니고, 그 膝下의 子女들도 王子나 公主가 아니다.
  34. 《高麗史》에 記錄되어 있음. 어머니에 對해서는 記錄이 없다. 朝鮮朝 末 1814年 慶州 金氏 一問들이 세운 《新羅敬順王전비》에 戰費 죽방否認 所生이라 하는데, 歷史學界에선 낙랑공주 王氏 所生으로 推定하는 것이 定說에 가까우나, 이를 證明할 수 있는 證據가 發見된 것은 아니다.
  35. 高麗 太祖 성무부인 朴氏 所生의 딸로 外祖父는 豪族 朴芝潤이다.
  36. 《新羅敬順王전비》에서는 排斥함
  37. 1814年 《新羅敬順王전비》에서는 排斥함
  38. 1814年 《新羅敬順王전비》에서는 排斥함
  39. 1814年 《新羅敬順王전비》에 記載함
  40. 1814年 《新羅敬順王전비》에 記載함
  41. 1814年 《新羅敬順王전비》에 記載함. 慶州 金氏 帶同報道 같다. 다만 慶州 李氏 大同譜에는 경순왕 3女가 이금서에게 出家한 것으로 되어 있다.
  42. 1814年 《新羅敬順王전비》에 記載함. 慶州 金氏 帶同報道 같다.
  43. 앞面은 『新羅敬順王지릉』, 뒷面은 "新羅 第56代 敬順王은 後唐 天性 2年 巫子(戊子. 928年) 景哀王의 뒤를 이어 王이 되었고 靑苔 乙未(乙未. 935年)에는 考慮에 나라를 넘겼다. 宋나라가 太平하고 나라가 蕃盛하던 景宗 3年(戊寅. 978年) 4月 4日에 世上을 떠나니 경순(敬順)이라는 諡號를 내렸다. 王으로 禮遇해서 장단 南쪽 高浪浦 8里 計座 언덕에 葬事지냈다.", 英祖 23年(丁卯: 1747)에 다시 세웠다.
  44. ‘悲運의 경순왕’ 肖像畫 첫 公開 東亞日報 2010年 6月 2日子
  45. 警遷墓 ‘敬順王 御眞’- 慶南道有形文化財 指定 慶南每日 2008年 12月 8日

外部 링크 [ 編輯 ]

페이스북으로 共有 트위터로 共有 카카오 스토리로 共有 카카오톡으로 共有 밴드로 共有


前 代
경애왕
第56代 新羅 國王
927年 - 935年
後 臺
(王朝 滅亡)
( 高麗 太祖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高麗의 統一"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