遣唐留學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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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唐留學生 (遣唐留學生)은 新羅 에서 黨의 國子監에 派遣된 留學生이다.

歷史 [ 編輯 ]

儒敎의 傳來와 學校敎育의 始作을 전후하여 新羅를 中心으로 한 三國은 다같이 黨에 留學生을 보냈다. 이것은 三國이 모두 黨(唐)의 發達된 學問과 文化를 부지런히 輸入하여, 內外의 文化를 잘 합치고 더 한層 燦爛한 文化를 가지기 위함이었다. 新羅에서는 27代 선덕여왕(善德女王) 9年(640)에 王의 子弟들을 黨의 國子監(國子監)에 留學시켰다. 이때 唐太宗(唐太宗)은 天下의 名儒(名儒)를 불러서 敎授(學官)를 삼고, 學事(學舍)를 1,200簡易나 增築하고, 學生을 3,260名이나 모아놓고 있었다. 그러니 黨의 首都 長安(長安)은 可히 儒學의 中心地가 되어 全아시아 文化의 集中지요, 電波의 中心地가 되었다.신라는 선덕여왕(善德女王) 9年에 唐에 留學生을 보낸 以後, 繼續 王子 以外의 優秀한 學生을 選拔하여 黨에 留學시켰다. 當時 留學期間은 普通 10年이었는데, 이 期間이 차면 歸國하도록 하고, 그 뒤를 이어서 다른 學生을 보냈다. 黨에 遊學하는 學生數가 많을 때는 100餘 名에 達했다. 이것은 문성왕(文聖王) 2年(840)에 滿期된 留學生과 姪子(質子) 等 105名이 同時에 歸國한 事實로도 알 수 있다. 이들 留學生들의 書籍費는 銀貨로 300兩(三百兩)을 本國에서 負擔하였고, 意識(衣食)은 外國 留學生들의 便宜를 돕기 위하여 特別히 設置한 黨의 紅爐社에서 供給하였다.당시 이들 學生들의 識見(識見)의 源泉은 儒敎的 敎養이었다. 그것은 바로 黨에서 留學에 依하여 充足될 수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入黨遊學(入唐留學)은 出世의 길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新羅에서는 黨에 留學生을 奬勵하였으므로 學生들의 往來가 頻繁하게 되어, 헌덕왕(憲德王) 13年(821)에 金雲卿(金雲卿)은 黨의 賓貢科(賓貢科)에 及第하여 士官(仕官)하고, 문성왕 3年(841)에 歸國하였다. 그 後 黨 末에 이르기까지 科擧에 及第한 사람은 58名으로, 그 中 文名(文名)을 날린 사람은 최치원(崔致遠)·김가기(金可記) 外에 朴仁範(朴仁範)은 時(詩)로, 金惡(金渥)은 예(禮)로 有名했고, 崔致遠의 從弟인 최인곤(崔仁滾)은 文士로서 著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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