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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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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中年 時節의 함석헌
原語이름 咸錫憲
기타 號(號)는 莘川(信天), 씨알, 바보새
個人情報
出生 1901年 3月 13日 ( 1901-03-13 )
大韓帝國 平安北道 龍川郡
死亡 1989年 2月 4日 ( 1989-02-04 ) (87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鍾路區 서울대학교 病院에서 老患으로 死亡
國籍 大韓民國
敎派 퀘이커
父母 함형택 (簿), 金兄도 (某)
配偶者 황득순
在職 宗敎人
前職 社會運動家, 言論인, 作家, 著述家, 隨筆家
民主統一국민회의 拷問
씨알의 소리 編輯代表委員長
新民黨 拷問
學歷 도쿄 高等師範學校 歷史敎育學科 專門學士

함석헌 (咸錫憲, 1901年 3月 13日 ~ 1989年 2月 4日 )은 大韓民國의 獨立運動家, 宗敎人 , 言論人, 出版人이며 基督敎運動가, 市民社會運動家였다.

主要 履歷 [ 編輯 ]

光復 以後 非暴力 人權 運動을 展開한 人權運動 가, 言論人 , 在野運動家 , 文筆家 로 活躍한 그의 本貫은 江陵 (江陵)이며 號는 莘川(信天), 씨알, 바보새이다.

1919年 3.1 運動 에 參與했다가 退學 當한 後, 事務員과 小學校 敎師 等을 轉轉하다가 1928年 부터 1938年 까지 五山學校 의 敎師를 歷任했다. 以後 敎育, 言論 活動 等에 從事하다가 解放 後, 1947年 越南河였다. 以後에는 聖書 强해 等을 하다가 1956年 부터는 장준하 思想界 에 參與하여 政治, 時事 等에 對한 評論 活動, 信仰 活動, 反獨裁 民主化運動 等을 하였다.

그의 宗敎 는 初期에는 日本 留學 中에 우치무라 간조 의 影響을 받아 無敎會主義 者였다가 中期에는 基督敎 였으나 後期에는 長老會 로 바꾼것이다,

學歷 [ 編輯 ]

生涯 [ 編輯 ]

家族 및 親姻戚 關係 [ 編輯 ]

  • 父母: 함형택(簿, 1880-1941), 金兄도(모)
  • 配偶者: 황득순(1902-1978)
  • 子女
    • 함국용(長男)(1919北韓)
    • 함은수(長女)(1921北韓)
    • 函은삼(次女)(1926- )
    • 사위: 정승림(1924-2012)
      • 外孫: 정광필,정현필
    • 함은자(3女)(1929-2017)
    • 사위: 최진삼(1921-)
      • 外孫: 최응일
    • 함우용(次男)(1931-)
    • 子婦: 양영호
      • 親孫: 함정해
    • 함은화(4女)(1933-)
    • 사위: 서완근
      • 外孫: 鉏천희
    • 함은선(5女)(1940-)
    • 사위: 장기홍(1934-)
      • 外孫: 장수범
  • 兄弟
    • 함석慧(누나)
    • 함석란(누이同生)
    • 함석창(男동생)
    • 함석步(누이同生)(1910-2002)
  • 直系 親姻戚
    • 함일형(5寸 叔父)
    • 함석은(6촌 兄)(1892-1928)

初期 活動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咸錫憲은 1901年 平安北道 용천에서 出生했다. 어려서 堂叔 함일형 (咸一亨)이 세운 漢學 書堂인 삼천재(三遷齋)에서 漢學 을 修學하다가 덕일小學校(德一小學校)에 入學, 1914年 에 덕일小學校를 修了하고 그 해에 양시公立小學校 에 編入하였다가 1916年 양시公立小學校를 卒業했다.

그해 平壤高等普通學校에 進學하였으며 1917年 에 황득순과 結婚하고, 1919年 平壤 高等普通學校 3學年 在學 中에 숭실學校 敎師로 있었던 6寸 兄 함석은 等의 影響으로 學業을 中斷하고 3·1 運動 에 參加한 後, 3.1運動에 對한 反省文을 쓰면 復學시켜 준다는 日本人 校長의 提議를 拒否하고 退學되어 2年間 學業을 中斷한다. 이 時期에 咸錫憲은 水利組合 事務員과 小學校 先生 等을 하게 된다.

靑少年期 [ 編輯 ]

왼쪽이 류영모 , 오른쪽이 함석헌

1921年 함석규 牧師 의 勸誘로 平安北道 井州 (定州)에 있는 五山學校 (五山學校) 3學年에 編入하여 修學했으며, 그곳에서 류영모 를 만나 平生 스승으로 삼았다. 또한 이때 안창호 , 이승훈 , 이광수 , 조만식 等과도 알게되어 그들로부터 民族主義 思想과 實力 養成論의 影響을 받게 된다. 그러나 後日 그는 盲目的인 民族主義와 國家主義에 批判的인 性向으로 돌아서게 된다.

1923年 烏山學校를 卒業하고, 1924年 日本 東京高等師範學校 文科 1部에 入學하여, 우치무라 간조 의 聖書 集會에 參加하여 그의 無敎會主義 를 接했다.

東京高等師範學校 在學 中에 日本人 無敎會主義者 우치무라(內村鑑三)의 聖書硏究에 깊이 影響을 받고 김교신 (金敎臣), 송두용 (宋斗用), 정상훈 (鄭相勳), 유석동 (柳錫東), 양인성 (楊仁性)等과 함께 敎會에 다니지 않고도 信仰을 維持하는 無敎會主義 信仰클럽 을 結成하였다. 1927年 同人誌 《성서조선 聖書朝鮮》 創刊에 參與하고 論客으로 글을 發表하기 始作하였다.

親舊이자 同志인 김교신

1928年 東京高等師範學校 卒業(歷史科 首席)과 同時에 歸國하여 五山學校에서 歷史와 受信을 가르쳤다. 1934年~1935年에 同人誌 《 성서조선 》에서 그의 主著인 〈聖書的 立場에서 본 朝鮮歷史(뜻으로 본 韓國歷史)〉를 連載한다. 1940年 계우회 事件 으로 日本 當局에 依해 投獄되어 平壤 帶同警察署에서 1年間 拘置되었다. [1]

以後 1938年 3月까지 五山學校 의 敎師로 있다가 辭任하였다.

言論, 文筆 活動 [ 編輯 ]

《성서조선》 創刊號 멤버. 뒷줄 오른쪽이 함석헌.

1940年 平安南道 松山(松山)에서 김혁 (金赫)李 運營하는 松山學院 의 理事로 參與하여 活動하다가 계우회 事件 (鷄友會事件)에 連累되어 平安南道 帶同警察署 에 逮捕, 留置場에서 1年間 收監 生活을 하다가 1942年 初 풀려났다. 그러나 1942年 5月 《 성서조선 》(聖書朝鮮) 第 158號(廢刊號)에 실린, 김교신 의 〈組와〉(弔蛙)라는 寓話 로 關聯者가 모두 投獄되는 성서조선 事件 이 發生했다. 이로 因해 성서조선은 廢刊되고, 咸錫憲은 西大門刑務所 에 未決囚로 1943年 4月 1日 까지 1年間 服役하였다(수형번호1588번).

1945年 血盟의 親舊였던, 김교신 이 興南에서 장티푸스 로 別世하고, 그 해 8月 15日 解放을 맞이한다. 解放이 되자 그는 解放이 ‘도둑같이(아무도 모르게) 왔다’고 評하였다. [2] [3]

光復 以後 活動 [ 編輯 ]

解放 直後 [ 編輯 ]

解放 後에는 反共 示威인 新義州 學生示威 의 背後로 指目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當局에 依해 投獄되었다가 蘇聯軍에게서 풀려난 後 1947年 3月 17日 越南河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脫出 前 그는 조만식 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 [4]

1947年 3月부터 YMCA에서 聖書講解를 繼續하고, 以後 聖書 强해와 神學, 宗敎 敵 講演 活動을 하였다. 또한 조만식 의 追慕 活動에도 參與하였다.

政府 樹立 以後 [ 編輯 ]

장준하

1950年 韓國 戰爭 때는 大田을 거쳐 釜山으로 避難갔다가 休戰 後 上京하였다. 以後 1956年 부터 장준하 等의 薦擧로 《 思想界 》를 통해 論客으로 活躍하였다. 1958年 '생각하는 百姓이라야 산다'는 見解를 發表하면서 政府의 政策에 批評을 加하기 始作하였고, 1958年 5月 잡지 <사상계>에 發表한 칼럼 하나는 話題가 되었다.

戰爭이 지나가면 서로 이겼노라 했다. 兄弟 쌈에 서로 이겼노라니 正말 진 것 아닌가? 어떤 勝戰祝賀를 할가? 슬피 울어도 不足한 일인데. 어느 軍人도 어느 將校도 주는 勳章 자랑으로 달고 다녔지 '兄弟를 죽이고 勳章이 무슨 勳章이냐?' 하고 떼어던진 것을 보지 못했다. 로자는 戰爭에 이기면 常禮로 處한다 했건만. 허기는 第二國民兵 事件을 만들어내고 卒兵의 못 밥 깍아서 제 집 짓고 豪奢하는 軍人들께 바래기가 過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라의 울타리인가?
 
— 사상계 1958年 5月號

이 일로 그는 右翼 人士들로부터 批判을 받았다. 그는 또 1959年 6.25 戰爭 關聯者들에 對한 勳章 敍勳 이야기가 나오자 "兄弟를 죽이고도 무슨 勳章이냐"라고 批判하였다. 이 事件을 契機로 國家保安法 違反으로 收監되었다가 풀려났다. "韓國戰爭에 對해 批判하고 戰爭하는 國家와 距離를 두어보려는 牧師를 한 番도 만나지 못한 것이 놀라운 일"이라고 一喝하기도 했다.

第2共和國 時節 [ 編輯 ]

1961年 2月 國土建設團 修了式

1961年 場面 國土建設團 을 創設하고 講師를 招聘할 때, 國土建設要員 精神敎育 擔當 講師로 招聘되었다. 그러나 5·16 軍士 政變 으로 第2共和國 이 崩壞되자 다시 野人으로 되돌아갔다. 1961年 5·16 軍士 政變 이 있자 모두가 沈默하고 있는 그해 7月 思想界에 發表한 政治評論人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통해 辛辣한 批判을 하여 軍政 人士들과 葛藤을 빚기도 했다.

1962年 美國 國務省內 基督敎 信者 政治人들의 特別 招請으로 美國 을 訪問하고 돌아왔다. 訪美하였을 때 퀘이커敎派(Quaker敎派) 人士들과 만나 親分關係를 形成하고 돌아왔다. 以後 1989年 까지 每年 美國 政界의 基督敎 人士들의 招請을 받고 美國을 訪問하기도 했다.

生涯 後半 [ 編輯 ]

左翼 民主化 運動 [ 編輯 ]

第3共和國 出帆 後에는 宗敎人으로서 韓日會談에 反對하는 等 社會運動에 參與했다.

1967年 장준하 國會議員 總選擧 獄中出馬를 支援하기도 하였다. 그는 李承晩 政權 卽, 自由黨 政權 時節부터 左翼 運動에 參與하여 3選 改憲에 反對하였으며 以後 10月 維新 以後 民主化 運動 에 앞장서서 數次例 投獄되었다. 1969年 4月 19日 에는 4.19 10周年 記念 講演을 마친 뒤 沈默 示威에 들어가기도 했다.

1970年 에는 政治, 時事評論을 실은 月刊雜誌 《 씨알의 소리 》를 創刊하였으나 政權의 彈壓을 받기도 했다. 以後 씨알의 소리의 發行人, 編輯人, 主幹 等으로 있으면서, 장준하 等 在野 言論人들을 筆陣으로 迎入하고 1980年 1月 폐간당할 때까지 新進 文人들을 發刊하였으며, 글과 講演 等을 통해 民衆 啓蒙運動을 폈다.

1974年 7月 인혁당 事件 關聯者에 對한 歎願書에 署名하였다. [5]

10·26 事件 以後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大統領 間選制를 固守하자 윤보선 等과 함께 大統領 直選制를 要求하기도 했다. 11月 24日 YWCA 僞裝 結婚式에 參席하였다가 事件에 連累되어 윤보선 과 함께 裁判廷에 섰다. 1980年 1月 YWCA 僞裝結婚式 事件 宣告 公判에 出席하였다. 1980年 1月 25日 首警司 普通軍法會議의 最終上告審에서 윤보선 은 懲役 2年, 咸錫憲은 懲役 1年을 宣告받았으나 後에 復權되었다. 1980年 新軍部 全斗煥 政權의 彈壓으로 《씨알의 소리》는 强制 廢刊되었다가, 1988年 12月 復刊되어 2011年 7月 現在 217號까지 出刊되어오고 있다.

第5共和國 時節 [ 編輯 ]

第5共和國 을 거치면서도 民主化運動을 繼續하다가 1984年 에는 民主統一 국민회의 顧問을 지냈다. 1985年 民主爭取 國民運動本部 拷問이 되었다.

그는 國家主義와 民族主義에 反對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民族統合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對敵이 누군가부터 分明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日本? 美國? 蘇聯? 中共? 아닙니다. 어느 다른 民族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닙니다. 國民을 種으로 만드는 國家至上主義 때문입니다. 이제 政治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統治가 아닙니다. 軍國主義 時代에조차 君臨은 하지만 統治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君主는 그래야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이 民主主義 時代에, 나라의 主人이 民衆이라면서 民衆을 다스리려해서 되겠습니까? 分明히 말합니다. 南北을 區別할 것 없이 只今 있는 政權들은 다스리려는 政權이지 主人인 民衆의 심부름을 하려는 忠實한 政府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設或 統一을 한다해도 그것은 征服이지 統一이 아닙니다. 民衆의 不幸이 더해질 뿐입니다. 나는 그래서 反對합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國家主義와 民族至上主義는 個人으로 하여금 權利와 自由를 스스로 返納하는 主要한 根據가 된다는 것이 그의 見解였다.

1984年 民主爭取國民運動本部 顧問에 委囑됐다. 또한 東亞日報 로부터 第1回 인촌賞을 授與받았다.

末年 [ 編輯 ]

聖書뿐만 아니라 東西洋의 各 古典을 涉獵하여 自身의 思想으로 消化하여, 씨알思想 이라는 非暴力 , 民主 , 平和 理念을 提唱하였다. 非暴力主義 信條로 말미암아 “韓國의 간디”라는 別名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社會 評論뿐만 아니라 《 道德經 》 等의 各種 東洋 古典 주해도 行하였고, 그리고 詩를 創作하기도 했다. 1989年 서울대학교 病院에서 入院, 그해 서울대 病院에서 別世하였다(향년 87歲).

事後 [ 編輯 ]

葬地는 京畿道 漣川郡 전곡읍 간파리의 家族山에 埋葬되었다가, 2002年 獨立有功者로 選定되어 建國褒章 垂訓 以後 墓所가 大田 顯忠院(愛國志士 第3-329 墓域)으로 移葬되었다.

日本 留學 時節 우치무라 간조 의 弟子였던 咸錫憲은 김교신 , 송두용 等과 함께 草創期 韓國 無敎會主義 基督敎 運動을 하였고, 퀘이커 모임( 1961年 1967年 )을 契機로 퀘이커 信者가 되었다. [6] 賞勳으로 1987年 第1回 인촌賞과 2002年 建國褒章을 받았다.

一代記로 《내가 본 함석헌》, 《咸錫憲 評傳》이 있다.

思想과 信念 [ 編輯 ]

無敎會主義 [ 編輯 ]

그는 김교신 等과 함께 無敎會主義 運動을 하기도 했다. 이는 日本 留學 時節, 東京高等師範學校 在學 中에 日本人 無敎會主義者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聖書硏究에 깊이 影響을 받고 김교신 (金敎臣), 송두용 (宋斗用), 정상훈 (鄭相勳) 양인성(梁仁性), 유석동(柳錫東)等과 함께 敎會에 다니지 않고도 信仰을 維持하는 無敎會主義 信仰클럽 을 結成하였다.

歸國 後에도 無敎會主義에 對한 信念을 버리지 않았다. 日本人 神學者 우치무라 간조의 城西集會의 影響을 받은 그는 以後 줄곧 無敎會主義를 主張하게 되었다.

論難 [ 編輯 ]

社會進化論 追從者 論難 [ 編輯 ]

2010年 咸錫憲이 社會進化論 追從者인가 아닌가 하는 內容을 두고 關聯 學界에서 論難이 일고 있다. 2009年 3月 함석헌平和포럼 共同代表인 金映豪 인하대 名譽敎授는 한길사에서 30卷으로 發刊한 ’咸錫憲 著作集’에 실은 글 '咸錫憲 著作集 發刊에 부치는 말'에서 그가 社會進化論者라고 主張했다. 當時 咸錫憲씨알思想硏究院長이던 김영호는 咸錫憲을 社會進化論字로 紹介하며, 함석헌 思想에서 거듭 反復되는 一貫된 主題 가운데 하나로 社會進化論을 들었다. [7]

反論 [ 編輯 ]

이에 對해 咸錫憲이 創刊한 雜誌 ’씨알의 소리’ 編輯委員인 김상봉 전남대 敎授는 '씨알의 소리' 2010年 1~2月號에 反論인 '咸錫憲과 社會進化論의 問題'를 실어 “咸錫憲의 哲學과 社會進化論은 물과 기름처럼 兩立할 수 없는 思想”이라고 反駁했다. [7] 김상봉 敎授는 “社會進化論은 戰爭으로 劣等한 種族이 淘汰되고 相對的으로 優秀한 種族들만이 살아남아 人類가 發展했다는 것”이라며 “社會進化論者들은 弱者가 淘汰되는 것은 自然的인 必然이므로 이를 人爲的으로 막는 것은 自然法則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본다”고 說明했다. [7]

이어 그는 “萬物을 짓고, 萬物을 維持하고, 뜻을 이뤄가는 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한 咸錫憲의 글을 引用하며 함석헌 思想은 ’힘의 哲學’이 아니라 '사랑의 哲學'이기 때문에 社會進化論과 兩立할 수 없다고 反駁했다. [7] 김상봉은 이어 咸錫憲이 ’生命은 나와 남을 區別하지 않는 하나’라고 指摘하였다. 김상봉은 咸錫憲이 平素 民族利己主義와 國家至上主義를 批判했다는 點을 指摘하며 “(함석헌에게) 社會進化論이라는 이름標를 붙이는 것이 可能하지 않다”고 强調했다. [7]

2010年 김영호는 3月 16日 열린 함석헌學會 創立總會 記念 學術發表에서 ’咸錫憲과 社會進化論’이라는 題目의 글을 통해 김상봉 敎授의 主張을 재반박하고 나섰다. 김영호 敎授는 ’咸錫憲은 社會/全體의 進化를 主張하지 않았는가’라는 副題가 달린 이 글을 통해 "김상봉 敎授의 主張은 自身이 쓴 '社會 進化論'을 '社會다윈주의(Social Darwinism)'로 誤解한 것'이라고 反駁하였다. 그에 따르면 ’社會進化論’에는 김상봉 敎授가 받아들인 '社會다윈주의' 말고도 여러 가지 다른 一般論이 있다고 하였다. [7] 그는 咸錫憲이 쓴 “只今까지 생각의 主體는 個人이었지만 앞으로는 커뮤니티이다. 그런 歷史의 進化段階가 只今이다”라는 글을 引用하며 咸錫憲이 全體社會, 곧 人類共同體로서의 社會의 進化를 洞察했다고 强調하였다. [7]

透寫論에 對한 反論 [ 編輯 ]

咸錫憲은 '누가 나처럼 수줍은 놈을 미친놈을 만들어 놓았느냐'라고 하기도 했다. [8]

高麗大學校 化學工學科 敎授를 歷任한 哲學者 金容俊 은 咸錫憲이 哲學者라고 하였다. 그는 "나는 化學 빼고는 다 函先生님한테 배웠다고. 요즘 사람들은 함석헌하면 마치 주먹질만 하는 사람으로 아는데 그것은 넌센스野. 그건 函先生님의 一部分이고 80퍼센트는 道를 찾아 헤맸던 求道者 [8] "라고 하였다.

기타 [ 編輯 ]

  • 그는 韓國 戰爭 直前 戰爭을 豫想하였다 한다. 金容俊 에 依하면 '6.25 바로 一週日 前에 咸錫憲이 “이 百姓들이 왜 이러지. 只今 밑에서는 鎔巖이 이글이글 타오르는데 그 위에 살짝 덮힌 巖盤을 마치 萬歲盤石처럼 여기고 까불고 있으니 이게 언제 터질지 몰라” 하고 말씀을 하시더라 [8] '는 것이다.
  • 1979年 , 1985年 等 2次例에 걸쳐 美國 퀘이커 世界 봉사會 가 咸錫憲을 노벨 平和賞 候補로 推薦했다. AFSC 1947年 노벨 平和賞 을 受賞한 以來로, 노벨 平和賞 候補推薦規定에 따라, 해마다 候補를 推薦해오고 있다. [9]
  • 박노자는 自身의 칼럼 '國家의 殺人'에서 "20世紀 韓半島의 唯一하다 싶은 基督敎的 平和主義 思想家"로 불렀다.

放送 出演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咀嚼 [ 編輯 ]

著書 [ 編輯 ]

  • 聖書的 立場에서 본 朝鮮歷史, 1948
  • 人間革命, 1961
  • 歷史와 民族, 1964
  • 뜻으로 본 韓國歷史 , 1967
  • 統一의 길, 1984
  • 韓國 基督敎는 무엇을 하려는가, 1984
  • <함석헌 著作集> , 2009
  • 詩集, 水平線 너머 , 2009.

飜譯書 [ 編輯 ]

寫眞 [ 編輯 ]

各州 [ 編輯 ]

  1. 함석헌 記念事業會 (2008年 11月 13日). “함석헌 先生의 生涯” . 함석헌 記念事業會 . 2008年 11月 13日에 確認함 .  
  2.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2卷〉 (人物과사상사, 2004) 137쪽.
  3. 함석헌, 《뜻으로 본 韓國歷史》(한길사, 2003) 394쪽.
  4. 以後 曺晩植을 回顧하여 “‘아니’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며 조만식 을 稱頌하기도 했다.
  5. [길을찾아서] 인혁당 家族 돕자 始作된 尾行과 道廳 / 문정현 , 한겨레新聞, 2010年 6月 15日子, 2011年 1月 22日 確認.
  6.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되었나-함석헌 先生의 隨筆
  7. '咸錫憲이 社會進化論子?' 學界 論難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朝鮮日報 2010.04.16
  8. “物件의 科學보다 ‘人間性의 科學’ 發展시켜야지”
  9. 인터뷰 노벨平和賞(平和賞)候補에 推薦된 咸錫憲(咸錫憲)翁 "힘이 正義(正義)가 아니라 正義(正義)가 힘"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