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섬
은
서울特別市
城東區
聖水洞
一帶의
氾濫原
으로, 地帶가 낮아
漢江
에 洪水가 날 때마다 물길이 생겨 섬처럼 보였기에 섬이라고 하였다. 1980年代 初 漢江綜合開發事業에 依하여 漢江을 直講化(直江化)하면서 南쪽의 많은 部分이 잘려 나갔고, 堤防을 쌓으면서 完全한 陸地化가 이루어졌다.
地名 由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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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섬은 元來 ‘둑도’, ‘뚝도(纛島)’, ‘獨島(纛島)’ 或은 ‘살곶이罰’로도 불렸는데, 이 이름에 對하여 여러 가지의 由來가 傳한다. 于先
太宗
李芳遠
이 王位에 登極한 지 2年 後
無學大師
의 懇請으로
1402年
咸興에 가 있던
太祖 李成桂
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데, 뚝섬 가까이에 到着한 太祖가 쏜 화살을
太宗
이 遮日을 치려고 세운 기둥 뒤로 避하였고, 이에 화살이 기둥에 꽂힌 벌판이라는 뜻에서 살곶이罰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다른 由來는 이 一帶가 朝鮮 時代 王의 사냥터로 자주 利用되었는데, 王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 象徵인 毒氣(纛旗)를 벌판에 꽂았다는 데에서 ‘獨島(纛島)’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 밖에 軍士들이 활쏘기 等 武藝 訓鍊을 하던 벌판이어서 살곶이罰이라고 불렀다는 由來가 있다.
[1]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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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관평(箭串坪). (《
大東輿地圖
》 1첩 8面)
朝鮮 時代에는
漢城府
南部
두模倣(豆毛坊) 前關係(箭串契)의 前關東(箭串洞)이었다. 漢城 隣近에서 景致가 좋은 열 가지 場所, 卽 經度十英(京都十詠)의 하나로 꼽혀 ‘全校心房(箭郊尋坊)’으로 불렸다. 성덕情(聖德亭)이라는 亭子가 있었으며, 넓은 벌판에서 王이 사냥하거나 軍士들이 訓鍊하였다. 또 말 牧場이 있었다고 傳한다.
1906年 8月 起工하여 1908年 8月 大韓民國 最初의 上水道 施設인
뚝도水源池
가 完工되었다. 行政 區域은 1911年
京城府
두謀免 獨島界(纛島契)로 改編되었고, 1914年
京畿道
高陽郡
獨島面(纛島面) 西獨道理(西纛島里)·東獨道理(東纛島里)로 分離되었다.
日帝 强占期 뚝섬 一帶에는 왕십리를 背後로 하는 작은 市街地가 들어섰으며, 漢江 周邊은 景致가 좋아 如前히 遊園地로 利用되었다. 1930年 11月 1日
往十里
-
東獨도
間
軌道
人
京城軌道
가 開通되었으며
[2]
, 이 路線은 1932年 10月 11日
東大門
까지 延長되어
[3]
京城 住民의 뚝섬 나들이를 便利하게 하였다. 特히 京城軌道株式會社에서는 軌道車 運營 外의 附帶事業으로 漢江邊에
遊園地
와
水泳場
을 造成한 뒤, 東獨道驛에서
遊園地役
까지 路線을 延長하였다.
[4]
[5]
뚝섬에서 江을 건너
蠶室
,
봉은사
一帶를 둘러보는 코스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1954年 5月 8日
韓國馬事會
에서
東大門區
新設洞
에 있던
서울競馬場
을 以前 設置하였고, 1968年에는
朴正熙
前 大統領에 依하여
골프場
이 들어서기도 하였다. 뚝섬競馬場이라고도 불렸던 서울競馬場은 1989年 果川으로 移轉하였고, 골프場은 1994年 廢業하였다. 以後 2005年
서울숲
이 造成되었다.
[6]
交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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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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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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