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다섯 살쯤 된 少年의 눈앞에 처음 보는 光景이 펼쳐진다. 한 살 위인 누나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져 몸을 비틀고 숨을 헉헉거린다. 그는 옆에 누워 누나를 안심시키려고 말을 건다. 안쓰러운 마음이 그에게서 흘러나온다. 그는 누나가 말을 할 수 없는 狀態라는 걸 알지 못하고, 누나가 發作에서 깨어날 때까지 말을 걸며 몸을 쓸어준다.
少年은 알지 못하지만, 分娩 豫定日을 훌쩍 넘겨 태어난 過熟兒人 누나는 豫防接種으로 인한 腦髓膜炎으로 永久的인 障礙를 갖게 되었다. 누나는 普通 學校에 다닐 수도 없게 된다. 그는 아버지가 누나를 障礙人 敎育 施設에 데려다주고 階段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우는 모습을 보고 衝擊을 받는다. 아버지가 운다!
그런 記憶들을 마음속에 담은 少年은 나중에 커서 첼리스트가 되었다.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누나를 極盡히 보살폈다. 父母가 世上을 떠난 後로는 더욱 그랬다. 結婚을 하고도 可能하면 같이 있으려고 했다. 招請받은 演奏旅行에도 늘 같이 갔다. 그럴 때면 첼리스트인 韓國人 아내와 아이들이 房 하나를, 그와 누나가 別途의 더블 룸을 使用하는 것이 慣例가 되었다.
누나는 그가 公演이 끝나고 돌아오면 말했다. “너 正말 잘하더라. 眞짜야.” 그 말이 그를 幸福하게 했다. 누나는 나름대로 熱心히 살았다. 먹고 마시는 日까지 熱心이어서 말려야 할 地境이었다. 웃기도 잘하고 울기도 잘했다. 그는 그런 누나가 예순네 살에 不治의 病에 걸리자, 누나를 데리고 父母님 山所에도 가고 親舊들도 만나고 逍風도 갔다. 누나가 첼로 協奏曲을 듣고 싶다고 하자 혼자서 演奏도 했다. 協奏曲이지만 첼로만으로 연주한들 뭐 어떠랴.
獨逸人 첼리스트 율리우스 베르거의 自傳 에세이集 ‘이슬의 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한 憐憫과 사랑은 大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의 글을 읽고 그의 첼로 演奏를 들으면 妙한 溫氣가 느껴진다. 藝術도, 演奏도 人間的인 溫氣를 前提로 하는 것일까.문학평론가·전북대 碩座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