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尹奉吉 義士 孫女’ 尹柱卿 國民의힘 議員|여성동아

LIFE STYLE

‘尹奉吉 義士 孫女’ 尹柱卿 國民의힘 議員

송화선 記者

2022. 05. 24

올해는 매헌 尹奉吉 義士가 中國 상하이 훙커우 公園에서 日帝 侵略 勢力을 向해 爆彈을 던진 지 꼭 90年 되는 해다. 이를 記念해 매헌의 삶과 哲學을 立體的으로 照明한 ‘매헌 尹奉吉 義士 評傳’李 出刊됐다. 그가 生前에 남긴 日記와 便紙 等 各種 史料가 豐盛하게 담긴 冊을 보며 孫女 尹柱卿 議員은 “‘靑年 尹奉吉’의 꿈이 많은 분들께 傳達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어릴 때는 제 머리 한番 쓰다듬어주지 못한 할아버지가 그리우면서도 怨望스러웠어요. 할아버지 있는 親舊들이 부러웠고요. 좀 더 자라 그분이 남긴 日記와 便紙를 읽으면서 제 할아버지가 아닌 ‘靑年 尹奉吉’의 얼굴을 보게 됐습니다. 할아버지가 ‘상하이 依據’를 하고 돌아가신 때 年歲가 스물네 살이에요. 그 젊은 時節, 할아버지는 自身을 짓누르는 植民地 現實에 苦惱했고, 어떻게든 希望을 만들어내고자 努力하셨죠. 요즘 絶望에 빠진 靑年世代를 볼 때면 그들과 비슷한 나이를 살았던 제 할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尹柱卿(63) ‘國民의힘’ 國會議員은 매헌 尹奉吉(1908?1932) 醫師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매헌은 只今으로부터 꼭 90年 前, 日帝가 中國 상하이에서 開催한 日王 生日 및 戰勝 祝賀 잔치 자리에 爆彈을 던져 世上을 깜짝 놀라게 한 獨立運動家. 이 事件으로 日帝에 依해 銃殺刑을 當하고 殉國했다. 尹 議員은 매헌이 世上에 남긴 아들의 큰딸이다. 아주 어린 時節부터 그에게는 ‘尹奉吉 孫女’라는 꼬리票가 따라다녔다. 그것은 때때로 영광스러운 瞬間을 膳物했지만, 不便을 주거나 侮辱的인 일을 겪게 할 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尹奉吉 義士 孫女”로서의 삶

할아버지가 抗日運動을 하다 돌아가신 걸 언제 아셨나요.

글쎄요. 어린 時節 집에서 할아버지에 對한 이야기를 들은 記憶은 別로 없어요. 할머니(尹奉吉 醫師 夫人)와 아버지 모두 말數가 아주 적으셨거든요. 할아버지 祭祀 때면 親戚들이 오셔서 “네 할아버지는 아주 훌륭한 분이다. 그러니 너는 반드시 잘 자라야 한다”고 다짐하듯 말씀하셨어요. 제가 아래로 동생만 여섯 名 있는 큰딸이라 “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周圍 視線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겠습니다.

學校 가면서 種種 그런 일이 생겼죠. 한番은 親舊들과 다 같이 잘못을 했는데 先生님이 저만 따로 불러 꾸중하시는 거예요. “다른 애들이 다 잘못된 길로 가도 너만은 그러면 안 된다”고요. “너는 尹奉吉 醫師의 孫女 아니냐” 하는 말씀이 부담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學校에서 할아버지 依據에 對해 배울 때 어깨가 으쓱한 적도 있지만, 때로는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어요. 여럿이 있는 자리에서 누군가 제게 뻔히 들릴 만한 목소리로 “그래봤자 사람 죽인 사람인 걸, 뭐 그리 대단하다고…” 하는 걸 들었거든요. 제 어린 時節을 돌아보면 할아버지에 對한 感情은 자랑스러움과 부끄러움 사이, 그 어딘가를 왔다 갔다 한 것 같아요.

머리가 次次 굵어지며 尹 議員은 할머니와 아버지가 每事 왜 그리 조심스러운지, 사람들 앞에서는 限死코 입을 열려 하지 않는지 알게 됐다고 한다. 그 또한 ‘누구의 孫女’가 아닌 ‘尹柱卿’ 이름 석 字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애를 썼다. 梨花女大 學部와 大學院에서 化學을 專攻하고 오랫동안 平凡한 職場人으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尹奉吉 醫師가 남긴 日記와 便紙를 읽으며 문득 할아버지를 새로운 視角으로 바라보게 됐다고 한다.



새로운 視覺이라는 게 뭔가요.

흔히 할아버지 하면 상하이 義擧를 떠올리잖아요. 그것이 正말 큰 事件이고, 우리 獨立運動史에서 높은 評價를 받을 일인 건 분명해요. 하지만 그것을 中心에 두면 할아버지는 ‘대단한 일’을 한 사람, 그래서 나와는 次元이 다른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存在처럼 느껴지거든요. 現實 感覺이 생기지 않는 거죠. 日記와 便紙 속엔 그 義擧를 하기 前, 제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熾烈하게 苦悶했던 할아버지 모습이 담겨 있었어요.

先驅的 農民運動家 靑年 尹奉吉

尹 議員에 따르면 ‘靑年 尹奉吉’은 어머니를 끔찍이 사랑한 아들이고, 아픈 子息을 보면 가슴이 무너지는 아버지이기도 했다. 自身이 나고 자란 農村 마을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意欲도 넘쳤다. 그래서 열여덟 살이던 1926年, 親舊들과 함께 夜學堂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朝鮮人의 80%가 文盲이던 時期다. 그는 이듬해 夜學 敎材로 쓰려고 直接 3卷 分量의 ‘농민독본’을 編纂하기도 했다. ‘東亞日報’가 全國的 次元에서 文盲退治運動을 벌이기 始作한 게 1928年부터이니, 尹奉吉 醫師가 이 分野에서 얼마나 先驅的인 人物이었는지 斟酌할 수 있다.

抗日運動을 하기 前 農民 啓蒙運動부터 하신 거군요.

네. 할아버지는 夜學을 세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農民會도 만드셨어요. 食糧 增産과 副業 奬勵 活動 等을 하셨죠. 日帝强占期 힘겨운 農村 現實을 바꿔보고자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工夫하며 많은 努力을 하셨어요.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狀況이 나아지기는커녕 漸漸 나빠지잖아요. 周圍 사람들이 小作農으로 轉落하고, 日帝의 抑壓은 더욱 거세지고요. 그런 일을 맞닥뜨리며 느낀 絶望感이 日記 곳곳에 남아 있어요.

尹 議員은 이 대목에서 1929年 發生한 咸興水利組合 事件 이야기를 꺼냈다. 그 무렵 日帝는 朝鮮에 길을 내겠다며 멀쩡한 밭을 파헤쳐 자갈을 採取해가곤 했다. 咸鏡道 咸興 農民들이 이에 抗議하며 “밭을 原狀復舊 해달라”고 要求하다 銃에 맞는 일이 벌어졌고, 그 가운데 세 名이 死亡했다. 尹奉吉 醫師는 日記帳에 이 事件을 記錄하며 “이 抑壓 언제 갚을꼬”라고 썼다고 한다.

그런 일이 尹奉吉 義士가 獨立運動에 뛰어드는 契機가 됐을까요.

적잖은 影響을 미쳤겠죠. 좀 더 決定的인 事件은 1929年 3月, 할아버지가 세운 夜學 學藝會 자리에서 벌어졌어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매헌 尹奉吉 義士 評傳’에 잘 記錄돼 있다. 이날 夜學 學生들은 舞臺에 올라 아래와 같은 內容의 人形劇을 선보였다.

“깊은 山속. 같이 가던 토끼와 거북이가 길에서 빵 조각 하나를 주워들고 나누어 먹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힘이 센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나 싱肯벙글 웃으며 接近했다. ‘빵을 이리 내라. 내가 똑같이 半씩 나눠 주겠다’고 말하면서 곧바로 달려들어 빵을 두 조각으로 나눴다. 여우는 한쪽이 더 크다고 말하더니 다른 쪽과 똑같이 만들겠다며 큰 쪽에서 한입 베어 먹었다. 그렇게 하고 나서는 이番엔 저쪽이 더 크다면서 또 한입 떼어 먹었다. 이런 式으로 여우는 빵 全部를 먹어치우고는 ‘거 참 맛있다’고 말한 뒤 싱글벙글 웃으면서 사라졌다.”

누가 봐도 日制를 ‘狡猾한 여우’에 빗댄 것임을 알 수 있다. 夜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日帝가 이 事件을 例事로 넘길 理 없었다. 尹奉吉 醫師는 警察署에 불려가 苦楚를 겪어야 했다. 매헌 評傳 ‘尹奉吉(自由의 불꽃을 목숨으로 피운)’의 著者 김상기 忠南大 敎授는 이 冊에서 “(學藝會 事件을 겪은 뒤 매헌은) 植民地 百姓으로 살기 힘든 現實을 새삼 깨달았고, 農民 啓蒙運動이 成功하려면 民族 獨立이 先行돼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尹奉吉 醫師는 夜學 學生들 앞에서 “우리의 큰 敵인 日本 帝國主義를 파멸시켜 새로이 偉大한 나라와 民族을 建設하자”는 內容의 演說을 했다는 理由로 夜學에서 쫓겨난다. 이어 1930年 3月, 獨立運動에 投身하기로 決心하고 朝鮮을 떠나 中國 상하이 臨時政府를 向한 旅程을 始作한다. 사랑하는 父母와 아내, 子女를 모두 남겨둔 채였다.

“襁褓(襁褓)에 싸인 두 兵丁(兵丁)에게”

尹奉吉 義士가 抗日運動 길에 오르며 붓으로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家生不換·帳簿가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일곱 字를 쓴 事實은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미 집을 나서면서 죽음을 覺悟하신 거죠. 할아버지는 다른 글에서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걸 알면서도 獨立運動에 뛰어든 理由에 對해 이렇게 쓰셨어요. “뻣뻣이 말라가는 三千里錦繡江山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綏化(水火)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대로 泰然히 앉아서 볼 수는 없었다.” 農村 啓蒙運動만으로 世上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뒤, ‘手話에 빠진 사람’을 救해낼 새로운 길로 獨立運動을 擇하신 거죠. 할아버지 글에는 이런 대목도 있어요. “(나의) 鐵拳으로 敵을 卽刻으로 부수려는 覺悟로 사랑하는 父母 兄弟와 아내와 사랑하는 子息 그리고 따뜻한 故鄕 山川을 버리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鴨綠江을 건넜다.”

尹 議員은 尹奉吉 醫師가 남긴 글의 이런 대목을 줄줄 외웠다. 마치 무엇을 보고 읽는 듯 거침이 없었다. 얼마나 여러 番, 읽고 또 읽은 것일까. 그는 “내게는 그것만이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方法이었기 때문”이라며 싱긋 웃었다.

“金九 先生님 아들 김신 先生이 어린 時節, 中國에서 獨立運動하는 아버지가 보내주는 便紙를 받으면 서둘러 郵票 냄새부터 맡았다고 하잖아요. 郵票 뒤에 아버지가 묻힌 침 냄새라도 좀 남아 있을까 싶어서요. 그런 게 子孫의 마음인 것 같아요. 우리 아버지도 어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면, 할머니가 옷欌에 넣어둔 할아버지 便紙를 꺼내 읽어주시곤 했대요. 그 딸인 저도 할아버지 글을 읽으며 할아버지를 만나는 거죠.”

‘매헌 尹奉吉 義士 評傳’에는 바로 이 便紙에 對한 事緣도 담겨 있다. 評傳에 따르면 1930年, 매헌의 어머니가 中國 상하이로 떠난 아들 尹奉吉 義士에게 便紙를 썼다.

“못난 아버지와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可憐한 네 아내 그리고 불쌍한 矛盾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矛盾이는 이웃 두순이에게 ‘너는 아버지가 있으니까 좋겠구나’라고 부러워하고 있단다. 이 말을 듣는 나나 네 아내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구나. 봉길아! 네가 하는 일이 다 옳을 줄 안다만, 제발 한 番만이라도 어미 곁을 다녀갈 수는 없겠느냐.”

이 글 속 ‘矛盾이’는 後날 ‘종’으로 改名한 尹奉吉 醫師의 長男이자 尹 議員의 아버지다. 1927年 태어났으니 이 便紙가 쓰이던 때, 겨우 세 살이었을 것이다. 故鄕에 남은 어린 子息이 아버지를 그리워한다는 消息을 들은 尹 醫師는 어머니에게 自身이 돌아갈 수 없는 理由를 說明하는 便紙를 쓴 뒤, 아들 앞으로 또 한 通의 便紙를 적는다.

“矛盾아, 네가 正말 두순에 對하여 너는 아버지 있으니까 좋겠다고 하였니. (中略) 너는 아비가 없음이 아니다. 너의 아비가 以上의 열매를 따기 위하여 暫時的 逆行을 하는 것이지 몇 年 歲月로 永久的 輾轉(轉展)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矛盾이는 눈물이 있으면 그 눈물을, 피가 있으면 그 피를 흘리고 뿌리어가며 不變性의 意志力으로 訓鍊과 敎養을 시킬 어머니가 있지 아니하느냐. 어머니의 敎養으로 成功한 이를 보건대 西洋으로 萬古英雄 나폴레옹과 고명의 發明家 에디슨, 東洋으로 文學家 孟子가 있다. 後日에 따뜻한 握手와 따뜻한 ‘키스’로 만나자.”

尹奉吉 醫師는 상하이 依據 直前, 죽음을 決心한 뒤 다시 아들 앞으로 便紙를 쓴다. 依據 當時엔 살아 있었으나 幼年期에 일찍 世上을 떠난 둘째 아들까지, 두 名을 對象으로 한 이 便紙 첫머리는 “襁褓(襁褓)에 싸인 두 兵丁(兵丁)에게”로 始作한다. 尹 義士가 아들을 ‘兵丁’이라고 부른 理由는, 그들 또한 언젠가는 日本과 맞서 싸우는 ‘鬪士’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尹 醫師는 이렇게 썼다.

“너희도 萬一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朝鮮을 위하여 勇敢한 鬪士가 되어라. 太極의 旗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盞 술을 부어 놓으라.”

“되찾은 나라를 지키는 것도 獨立運動”

尹奉吉 義士를 비롯한 많은 獨立運動家들이 목숨 바쳐 되찾은 이 나라에서 제가 果然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 90年 前 피로 써 내려간 便紙 內容을 듣고 있으니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제가 할아버지의 글을 읽으며 생각한 게 그런 거였어요. 할아버지도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고, 自身의 자리에서 最善을 다하고자 努力한 靑年이었다고 생각하니 저 또한 더 熱心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죠. 1999年, 3·1運動 80周年 記念으로 光復會 會員分들과 함께 中國 상하이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저는 그때 상하이를 처음 가봤어요. 臨時政府가 있던 그곳은 宏壯히 濕하고 사람을 으슬으슬 떨리게 만드는 氣候더군요. 우리 할아버지에 앞서 얼마나 많은 靑年들이 이곳에 머물며 朝鮮 獨立을 위해 싸웠을까, 할아버지의 죽음 뒤엔 또 얼마나 많은 분들이 낯선 環境과 彈壓을 견디며 싸움을 이어가셨을까. 그분들 德分에 우리가 나라를 되찾아 只今 내가 ‘누구의 孫女’라고 待接받고 사는구나, 생각이 이어지니 모든 게 監査하더라고요. 저 또한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겼고요.

그래서 尹 議員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만 獨立運動이 아니라, 되찾은 나라를 지키는 것도 獨立運動”이라고 믿는다. 그는 이 나라를 靑年 尹奉吉이 꿈꿨듯, 많은 사람이 더불어 잘 사는 世上으로 만들고 싶다는 바람으로 2012年 政治 入門을 決心했다. 2014年 9月 女性으로는 最初로 獨立記念館長을 맡아 3年 3個月間 再任했고, 그 동안 ‘獨立運動家 人名事典 編纂委員會’를 構成해 關聯 硏究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앞장섰다. 2020年 21代 總選을 통해 國會議員(比例代表)이 된 뒤엔 國家報勳處와 獨立記念館 等을 擔當하는 政務委員會에서 活動하고 있다.

政治人으로서 尹 議員의 目標는 獨立運動史 硏究 基盤을 더욱 튼튼이 하는 것, 그리고 한때 補償과 福祉에 치우쳐 있던 ‘報勳’의 槪念을 다시 定立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獨立運動家나 6·25 參戰 勇士뿐 아니라 警察·消防官 等까지 多樣한 分野에서 나라를 위해 獻身한 모든 분들을 尊重하는 方向으로 報勳 政策의 槪念이 바뀌고 있다”며 “報勳이 잘돼야 비로소 外交, 國防, 經濟, 文化 等 모든 分野가 고루 發展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문득 그가 寫眞 撮影 途中 옷깃에 달린 나무 模樣 브로치를 가리키며 일러준 尹奉吉 醫師의 글 한 대목이 떠올랐다. “사람은 왜 사는가. 以上을 이루기 위해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尹 議員은 尹奉吉 義士가 便紙에 썼다는 이 文章을 읊은 뒤 “이 말씀 때문인지 나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참 좋다”고 했다.

윤주경 의원의 옷깃에 일제 강점기 광복군이 사용한 배지가 달려 있다. 윤 의원은 “배지를 보며 할아버지의 꿈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尹柱卿 議員의 옷깃에 日帝 强占期 光復軍이 使用한 배지가 달려 있다. 尹 議員은 “배지를 보며 할아버지의 꿈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오늘 撮影을 準備하며 이 나무 模樣 브로치와 光復軍 배지 두 가지를 챙겨 왔어요. 다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裝飾이라, 議政 活動을 할 때 자주 着用합니다.”

尹 議員이 한 말이다. 그는 인터뷰 내내 입으로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할아버지에 對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尹奉吉 醫師가 어떻게 記憶되기를 바라는지 물었다.

“絶望스러운 狀況에도 決코 勇氣를 잃지 않았던 靑年으로 記憶되기를 바라요. 할아버지가 夜學 敎材로 만드신 冊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世上을 바꾸려거든 내 몸부터 움직여라.’ 이 또한 제가 늘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말씀입니다. 요즘 世上 살기 참 어렵잖아요. 特히 靑年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많이 아파요. 그분들에게 ‘永遠한 靑年 尹奉吉’에 對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할아버지의 글과 삶이 담긴 評傳을 통해 더 많은 분들이 어떤 逆境에도 希望을 잃지 않았던 靑年의 삶을 알게 되길 바랍니다.”

#尹奉吉義士 #상하이依據 #尹柱卿議員 #여성동아

寫眞 홍태식 東亞DB 



  • 推薦 0
  • 댓글 0
  • 目次
  • 共有
댓글 0
닫기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