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癡呆 演技로 好評, 톱스타 演技先生 홍유진의 再發見|여성동아

PEOPLE

寶石 같은 俳優

癡呆 演技로 好評, 톱스타 演技先生 홍유진의 再發見

글 정혜연 記者 寫眞 지호영 記者

2010. 03. 16

임성한 作家의 新作 ‘保釋비빔밥’에서 癡呆 演技로 注目받는 中堅 탤런트 홍유진. 77年 TBC 公採 탤런트로 데뷔한 그는 美國에서 煙氣心理學 博士 學位를 받고 歸國, 동덕여대 放送演藝學科 敎授로 일하고 있다. 그의 人生은 煙氣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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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한 눈빛으로 앉아 있다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多急하게 ‘팔찌’를 찾는 中年 女人. 홍유진(55)은 MBC 週末 드라마 ‘保釋비빔밥’에서 젊은 나이에 癡呆를 앓는 ‘伊太利’ 役을 맡아 보는 이로 하여금 애잔한 마음을 갖게 하는 熱演을 펼치고 있다. 放送 初盤에는 多少 生疏한 얼굴이라 그다지 注目을 받지 못했지만 이제는 홍유진을 빼고 이 드라마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가 敎授로 在職 中인 同德女大를 찾았을 때 放學임에도 不拘하고 學科 일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에게 人氣를 實感하느냐고 묻자 밝게 웃으며 “感謝한 일”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關心을 가져주시는 것 같아요. 요즘은 早期 癡呆에 걸리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제 나이 또래 분들도 有心히 보시더라고요. 最近에 食堂에 갔더니 飮食을 더 챙겨주면서 우스개로 ‘빨리 나으세요’라고 말하는 아주머니도 계셨어요(웃음).”
홍유진은 77年 TBC 公採 탤런트 18期로 데뷔했다. 10年 동안 드라마 撮影을 하다가 美國에서 博士 學位를 받고 돌아온 뒤로 이番 드라마에 出演하기 前까지는 講義에만 專念했다. 後學 養成에 힘쓰다 불현듯 드라마에 出演한 理由가 궁금했다. 그는 “백호민 監督이 直接 찾아와 眞摯하게 出演을 提議해 拒絶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百 監督이 硏究室로 찾아와 어떤 作品인지 왜 나를 캐스팅하고 싶어 하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時間 동안 하고 갔어요. 박근형 先生님을 비롯해서 한진희·한혜숙 先輩가 出演한다고 하더라고요. 오래前부터 알던 분들이라 같이 하면 재미있겠다 싶어 하겠다고 했죠. 講義만 하다가 敎養 있고 優雅한 財閥家 師母님을 演技하려고 하니 처음에는 좀 緊張됐는데 차츰 適應됐어요(웃음).”
그의 出演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弟子들이었다. 동덕여대 放送演藝學科 1期生으로 그에게 배운 박경림·박진희 等 많은 弟子가 應援의 메시지를 보내줬다고. 그는 “現在 가르치고 있는 學生들에게도 龜鑑이 되는 것 같아 氣分 좋다”고 말했다.

父母 反對 무릅쓰고 演映科 進學, 公採 탤런트로 쉴 새 없이 일해
홍유진은 初等學生 時節부터 演技者를 꿈꿨다. 慶北 문경초등학교를 다니던 當時 故 朴正熙 大統領이 一年에 몇 次例 初等學校를 訪問하는 行事가 있었다. 그때마다 學藝會가 열렸는데 재주가 많던 그는 발레며 合奏, 獨唱을 할 機會를 얻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재주를 뽐낼 때면 喜悅을 느꼈다”며 그 時節을 回想했다.
才能 있는 아이로 인정받으며 中·高等學校 時節부터 漠然하게 이쪽으로 나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의 父母는 安定的인 職業인 敎師가 되기를 願했다고. 萬若 演劇映畫科에 進學한다면 財政的인 支援을 하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았을 程度였다.
“그래도 하고 싶어서 固執을 꺾지 않았어요. 熱心히 準備한 德分인지 한양대 演劇映畫科를 奬學生으로 들어갔어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집에서 全혀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生活費를 제 손으로 벌어야 했죠. 於此彼 演技를 繼續할 거면 이걸로 돈을 벌어야 되겠다 싶어서 東洋放送 公採 탤런트 試驗을 봤는데 運 좋게 合格했어요.”
탤런트가 不足하던 時節이라 그는 어린이 連續劇부터 反共 드라마까지 온갖 放送에 動員돼 撮影을 해야 했다. 그 當時 出演했던 드라마만 3百 便이 넘는다. 當時 함께 入社한 탤런트는 김영철과 고 임성민 두 사람뿐이었다. 김영철과는 個人的으로 連絡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가끔 만나면 반갑게 人事하며 지난 時節을 이야기하곤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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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番 드라마를 撮影하면서 달라진 作業 環境에 많이 놀랐다는 이야기를 했다. 扮裝이며 衣裳을 스스로 準備해 撮影支援 버스를 타고 다니며 드라마를 찍어야 했던 時節과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 江南의 美容室에서 머리를 하고, 스타일리스트가 準備해준 衣裳을 입은 뒤 매니저가 運轉하는 車를 탄 채 撮影場을 오가는 後輩 演技者들을 보며 隔世之感을 느낀다고 한다.
公採 탤런트로 10年쯤 일했을 때, 매너리즘을 느끼던 그에게 世上을 크게 볼 機會가 찾아왔다. TBC에서 主催하는 美國 巡廻公演에 參與하게 된 것. 넓은 世上에서 자유롭게 工夫하는 韓人留學生들을 만난 그는 韓國에 돌아와서 留學을 準備하기 始作했다.
“韓國에 오자마자 중앙대 新聞放送學科 碩士 過程에 志願했어요. 工夫를 하면서 留學을 갈 만한 學校를 알아봤고, 學位를 받은 直後 出演한 作品을 錄畫한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美國으로 갔죠. 커다란 褓따리를 들고 더듬거리는 英語로 入學을 許可해달라고 말하는 東洋 女子를 學科長이 잘 봐주셔서 願하던 學校에 合格할 수 있었죠.”
뉴욕大學校大學院 演劇心理學科에 들어간 그는 入學과 同時에 難關에 부딪혔다. 몸짓으로 表現하는 實技 授業은 따라갈 수 있었지만 理論 授業은 英語 實力이 달려 理解할 수 없었다. 그는 “冊에 있는 英語가 글字가 아닌 그림으로 보였다”며 웃음 지었다. 한 學期 동안 랭귀지 스쿨을 다니며 必死的으로 英語를 익힌 後 어렵사리 授業에 參席할 수 있었다.



5年 만에 博士 學位 받고 歸國해 李榮愛·이서진 等 指導
願하고 바라던 工夫였지만 하면 할수록 어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때문에 初盤에는 博士 學位까지는 焉敢生心 꿈도 꾸지 않았다고. 그저 每日같이 演技의 새로운 面을 알아가는 게 좋았다고 한다.
“學校에 앉아서 工夫할 때 安息을 느꼈어요. 德分에 즐겁게 工夫했는데 世上을 보는 視角도 달라지더군요. 작은 事物이나 偶然히 지나치는 狀況에서도 색다른 感情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時間이 흐르고 어느 날 敎授님이 博士 資格試驗을 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게 제 人生 最大 고비가 될 줄은 想像도 못했죠(웃음).”
美國의 大學은 入學하기보다 卒業하기가 더 어렵다. 그는 自身이 論文을 낼 때마다 指導 敎授가 事事件件 指摘을 하자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고 回想했다. 어느 날은 띄어쓰기 하나로 트집을 잡는 바람에 속이 傷해서 水道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도 했다고. 하지만 열매는 달았다. 그의 論文이 通過되던 날, 指導 敎授는 샴페인을 터뜨리며 眞心으로 같이 기뻐해줬다고 한다. 그는 “샴페인 한盞에 疲困이 눈 녹듯 사라지는 느낌이었다”며 웃었다.
91年 韓國에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偶然히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記者를 만나 近況을 이야기하면서 以後 그는 言論을 통해 ‘博士 學位를 받은 最初의 탤런트’로 알려졌다. 以後 여기저기에서 涉外 要請이 들어와 다큐멘터리·라디오 프로그램 等에서 進行者로 活躍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講義 要請도 많이 들어오기 始作했다고.
“歸國한 뒤 인터뷰를 하면서 ‘홍유진 心理드라마 硏究所’를 차릴 計劃이라고 말했는데 意外로 問議가 많이 들어왔어요. 漠然하게 생각만 한 것을 말한 건데 일이 커졌죠(웃음). 公務員 硏修院, 銀杏 같은 곳에서 特講 要請이 와서 講義를 하곤 했어요. 그리고 旣成 俳優들 再敎育도 했죠. 그때 李榮愛 명세빈 이서진 이지훈 等을 가르쳤어요. 이영애氏를 除外하고는 다들 데뷔하기 前이었어요. 이영애氏는 演技者로 막 데뷔했을 때라 드라마 撮影 中에 發聲부터 基本技를 닦도록 가르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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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위) 뉴욕大에서 受學하던 時節, 그를 酷毒하게 가르쳤던 로버트 랜디 敎授. 이제는 그를 찾아 韓國을 訪問할 程度로 각별한 사이가 됐다.



그가 演技 指導를 하는 것으로 放送街에서 입所聞을 타자 동덕여대에서 連絡이 왔다. 放送演藝學科가 新設되는데 敎授로 일해줄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다. 後學 養成에 關心이 많던 그는 欣快히 提議에 應했다. 門을 열었을 때 박경림 박진희 이재은 박시은 等 많은 이가 支援했고 그 德에 이름을 알리게 됐다. 以後로 남상미 김아중 임주은 等 이름이 알려진 弟子들도 同德女大를 거쳐갔다.
第一 記憶에 남는 弟子를 묻자 그는 躊躇 없이 박경림을 꼽았다. 1期生은 모두 記憶에 남지만 박경림은 아버지와 關聯된 에피소드 때문에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어느 날 그의 硏究室을 찾은 박경림의 아버지가 휑한 壁面을 한참 동안 보다가 줄자로 사이즈를 재더니 “往年에 木手 일을 했는데 敎授님께 冊欌을 짜드리고 싶다”고 말한 뒤 正말로 冊欌을 보내왔다고 한다.

癡呆 演技할 때마다 어머니 생각에 눈물 흘려
時間이 남을 때면 餘暇時間을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했다. 그러자 그는 “어머니를 뵈러 간다”고 말했다. 7年 前 癡呆 症狀이 惡化돼 療養院에 入院한 어머니를 한 달에 두 番씩 찾아가 함께 時間을 보낸다고 한다.
“엄마가 癡呆에 걸린 時點부터 癡呆를 工夫하기 始作했어요. 그 德에 癡呆 걸린 사람의 腦構造가 어떤지, 어떻게 看護해야 하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런데 공교롭게 癡呆 演技를 하게 돼 따로 工夫할 必要 없을 程度로 도움이 됐죠.”
그는 사람들이 自身의 癡呆 演技를 稱讚할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고 한다. 初等學校 때 舞臺에 서고 싶어 하는 딸을 위해 빚을 내서 옷을 만들어준 걸 잊을 수 없다고. 그는 “늘 사랑을 받기만 했는데 當身의 마지막 瞬間에도 내가 癡呆 演技를 잘할 수 있도록 膳物을 하신 것 같다”며 눈물을 흘렸다.
“늘 精神을 놓고 계시는데 가끔 제 얼굴을 알아보실 때가 있어요. 말도 하지 않고 저를 안고 눈물을 보이세요. 그 짧은 瞬間이 얼마나 感謝한지 몰라요. 살아 계시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요.”
平生을 꿋꿋하고 强靭하게 살아온 그는 이제는 사랑의 感情을 나누며 살고 싶다고 한다. 友情이 됐든 사랑이 됐든 知人들을 비롯해 어려운 이와 마음을 나눌 때면 살아 있는 것에 感謝하게 된다고.
“남들이 보기에는 苦悶, 걱정 없이 成功한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몰라요. 그런 面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父母님 앞에서도 씩씩한 척하기만 했는데 어느 날 ‘왜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니’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게 서운한 일인 줄 正말 몰랐어요. 無條件 잘하고 成功한 모습을 보여야 좋아하실 거라 생각했거든요. 이제는 그렇게 살기보다는 周邊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幸福하게 살려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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