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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壁 틈에 끼워 둔 寸志 보면 눈물 납니다”|주간동아

週刊東亞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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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壁 틈에 끼워 둔 寸志 보면 눈물 납니다”

‘名醫에서 命醫로’ 신완식 요셉의원 義務院長

  • 入力 2017-12-19 14: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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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태식 기자]

    [홍태식 記者]

    “제가 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게, 여기 化粧室에 종이 手巾을 備置하기 始作한 거예요. 제가 처음 왔을 때는 빨아서 쓰는 천 手巾이 걸려 있었거든요. 그걸 바꿔놓고 얼마나 좋았는지. 只今도 한 番씩 볼 때마다 ‘그래, 나 참 잘했다’고 생각해요.” 

    老醫師가 ‘허허’ 소리 내 웃었다. 얼굴 가득 少年 같은 微笑가 번졌다. 신완식(67·寫眞) 요셉의원 義務院長이다.
     
    서울 永登浦區 경인로100길. 이른바 ‘쪽방’李 모여 있는 서울 都心 속 板子村 한가운데 露宿人과 行旅者를 위한 無料 慈善 病院 요셉의원이 있다. 申 院長은 이곳에서 8年 넘게 無償 醫療奉仕를 하고 있다. 內科, 一般外科, 神經精神科, 齒科 等 20餘 個 診療科의 自願奉仕 醫師 가운데 唯一한 常勤者다. 다른 醫師들은 大學病院이나 個人病院에서 診療를 보는 틈틈이 요셉의원을 찾아 患者를 돌본다. 그러나 申 院長은 2009年 가톨릭대 여의도성모병원 內科 課長職을 내려놓은 뒤 아예 요셉의원으로 옮겨왔다. 以後 只今까지 일하면서 보람찼던 일, 자랑스러운 記憶에 對해 물은 참이었다. 그가 처음 꺼낸 것이 ‘종이 手巾’ 얘기였다. 大學敎授 時節 우리나라 最高 ‘感染疾患 專門家’로 불리던 人物다운 對答이긴 했다. 

    2003年 ‘東亞日報’에 실렸던 申 院長 關聯 記事를 보자. 동아일보는 그를 ‘名醫’로 紹介하며 이렇게 썼다. 

    ‘免疫機能이 低下된 患者에게서 생기는 感染疾患을 治療하는 分野의 國內 最高 權威者. 世界的 學術誌에 白血病, 再生不良性貧血 患者 等의 抗癌治療 및 造血母細胞移植 戰後 發生하는 感染疾患에 對한 論文을 50餘 篇 發表했다. 有限醫學賞, 松村 지석영 GSK醫學賞 等을 받았다. 大韓感染學會 會長, 大韓醫眞菌學會 副會長, 韓國學術振興財團指定 重點硏究所支援事業 責任者 等을 맡고 있다.’ 

    申 院長은 이런 醫師였다. 그가 이같은 榮光을 뒤로하고 둥지를 튼 곳이 요셉의원이다. 그는 이곳에서 自身이 하루에도 100名 넘게 찾아오는 가난한 患者들을, 그들의 惡臭와 騷亂과 때로는 暴力까지 견뎌가며 治療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記憶에 남는 患者가 있지 않으시냐”는 質問에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한番은 어느 할머니가 오셨는데 냄새가 너무 甚한 거예요. 到底히 診察을 할 수가 없어서 ‘할머니, 沐浴하고 오시면 아주 잘 봐 드리고 좋은 藥도 드릴게요’ 했어요. 여기 1層에 沐浴室이 있거든요. 그 옆에는 後援者들이 보내준 옷가지들을 保管해둔 곳이 있어 갈아입을 옷도 받을 수 있고요. 그 할머니가 그날은 그렇게 씻고 옷 갈아입은 뒤 診療를 보고 가셨어요. 그러고는 며칠 뒤 다시 病院에 왔는데, 이番엔 머리핀을 꽂고 오신 거예요. ‘저 예뻐요?’ 하면서. 하하.” 

    이런 患者도 있었다고 한다. 

    “제가 大學에만 오래 있어 처음엔 사람 對하는 게 좀 어려웠어요. 꼬박꼬박 尊待하고 距離를 두니 患者들도 좀 不便했겠죠.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하루는 제가 자주 본 분한테 ‘어이, 동생’ 하고 말을 걸었어요. ‘동생, 몸은 좀 나아졌어? 지난番에 어디 관뒀다더니 다시 就職했나?’ 그랬더니 이분이 갑자기 주르륵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여기 오는 분들이 겉으로 아주 두꺼운, 딴딴한 코트를 입고 있는데 그거 한 꺼풀만 벗겨내면 속살이 말할 수 없이 여려요. 只今까지 누구 한 사람 自己를 그렇게 생각해주고 記憶해준 사람이 없었던 거죠. 그 뒤부터는 좀 親해졌다고 생각했는지 저를 보면 ‘院長님 握手해요’ ‘우리 뽀뽀 한番 해요’ 막 그러고…. 아, 얼굴에 콧물자국이 다 보이고 입에서는 술 냄새가 나는데 逃亡갈 수도 없고 이걸 어쩌나…, 했던 그 記憶이 나네요. 허허.” 

    申 院長은 요셉의원에서 이런 患者들을 만났다. 國民醫療保險制度를 運營 中인 우리나라에서 모든 國民은 原則的으로 全國 어느 病院에서든 願하는 治療를 받을 수 있다. 治療費는 大部分 國家가 負擔하고, 個人이 내는 一部 費用도 必要한 境遇 國家에 代納을 要請할 수 있다. 이게 ‘原則’이다.

    “더 나이 들기 前 奉仕해야지”

    [홍태식 기자]

    [홍태식 記者]

    그러나 現實은 다르다. 갖가지 理由로 住民登錄이 없는 사람, 國民醫療保險料를 長期間 滯納한 사람, 不法滯留 外國人 等 ‘例外’에 屬한 이가 적잖다. 이들 中 相當數는 劣惡한 住居 與件과 食生活 탓에 深刻한 健康 問題를 안고 있지만, 全國 어느 病院도 맘 便히 찾아가지 못한다. 바로 이들을 위해 열려 있는 곳이 요셉의원이다. 

    1987年 故(故) 선우경식 初代院長(內科專門醫)李 門을 연 이 空間은 30年間 國家 支援 없이 오직 後援者와 奉仕者만의 힘으로 患者 64萬 名 以上(9月 末 現在)을 無料 診療해왔다. 2008年 鮮于 院長이 別世한 後 요셉의원을 맡게 된 申 院長도 이 ‘偉大한 歷史’의 한 部分을 擔當한 이다. 

    2009年 그가 가톨릭대 여의도성모병원에 辭表를 냈을 때부터 ‘요셉의원行’을 念頭에 둔 건 아니라고 한다. 當時엔 그저 ‘어디서 무엇을 하든 月給을 받지 않고 奉仕하며 살겠노라’고만 마음먹은 狀態였다. 아직 停年까지 적잖은 時間이 남았고 病院에서 內科 課長·細胞治療事業團長 等 各種 補職도 맡고 있을 때 왜 그런 決心을 했는지 물었다. 그는 ‘平素 尊敬하던 정희영 敎授님’ 얘기를 꺼냈다. 우리나라 感染內科 分野의 先驅者로 申 院長의 恩師였던 鄭 前 가톨릭대 醫大 敎授는 停年退任 當時 弟子들에게 “退任하면 奉仕活動을 하고 싶었는데 나이가 드니 그게 쉽지 않네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뒤 申 院長은 ‘奉仕에도 때가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健康이 許諾할 때 醫療奉仕를 始作하기로 決心한 理由다. 

    “제가 가톨릭 信者인데 가톨릭에서는 自己犧牲이 없으면 奉仕로 여기지 않는 雰圍氣가 있어요. 그때부터 ‘내가 제대로 奉仕하려면 學校를 그만둬야겠구나’ 생각했죠. 그러자면 若干의 經濟力, 共同體 適應力 等을 차근차근 準備해야겠다고도 생각했고요. 또 重要한 게 周圍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알리는 거였어요. 食口들이 놀라지 않도록 機會가 될 때마다 ‘나는 停年까지 일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되풀이했죠.” 

    그리고 예순이 되기 前 그는 마침내 ‘事故를 쳤다’. 申 院長의 表現 그대로다. 病院에 辭表를 내고 최영식 當時 가톨릭중앙의료원腸(新婦)에게 人事하러 갔을 때 崔 神父가 權限 자리가 요셉의원이었다. 鮮于 院長 別世 後 病院 運營이 難航을 겪고 있을 때였다. 申 院長은 두말하지 않고 崔 神父의 뜻에 따랐다. 그것이 오늘로 이어졌다. 

    “제 나름 準備를 한다고 했는데도 처음엔 힘든 面이 없지 않았어요. 一旦 病院에서 풍기는 獨特한 냄새부터 適應이 잘 안 됐죠. 大學病院에만 있던 저에겐 잘 씻지 않고 알코올에 찌든 분들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좀 낯설었어요. 그리고 여기 患者는 大部分 社會에서 賤待와 冷笑를 받아온 분들이라 憤怒 臨界値가 매우 낮아요. 診療가 조금만 늦어져도 自身을 無視한다고 생각하고 火를 내죠. 診療室 앞 琉璃나 거울을 막 두드려 부수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瞬間들도 있었어요.” 

    申 院長의 얘기를 듣는데 이날 午前 요셉의원 入口에 들어설 때 눈에 띈 玄關 앞 案內文 內容이 떠올랐다. ‘술 드신 분은 診療가 안 됩니다. 協助 付託드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요셉의원이 地域住民의 自活을 위해 運營하는 音樂治療프로그램 敎室 入口에도 ‘飮酒 狀態에서는 入場할 수 없습니다. 參與者 모두가 間食을 나눌 수 있도록 配慮합니다’라는 案內文이 붙어 있었다. 辛酸한 삶에 지친 이들은 쉬이 剛愎해지고 낯선 사람에게 날을 세울 수 있다. 初期엔 그 對象이 申 院長이었던 셈이다. 

    “한番은 이런 일도 있었죠. 요셉의원에 오래 다니던 慢性疾患者를 진료한 뒤 ‘그동안 이런 藥을 드셨는데 이番부터 約 處方을 좀 바꾸겠습니다’ 말씀드리니 버럭 火를 내는 거예요. ‘나는 只今까지 선우경식 院長님 藥을 먹고 잘 살았다. 네가 뭔데 갑자기 藥을 바꾸겠다는 거냐. 前에 먹은 그 藥 그대로, 딱 그렇게 내놓아라.’ 왜 이렇게까지 얘기하나 싶어 唐慌했어요. 생각해보니 그때는 제가 낯설고 싫었던 거죠. 不安하기도 하고. 無料 診療를 받는 患者들은 고마워하는 마음 한便으로, ‘내가 空짜 患者라고 함부로 對하지는 않을까. 엉터리 診療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도 갖고 계시거든요. 그런 壁을 차근차근 깨나가면서 患者 속으로 조금씩 들어가다 보니 時間이 이렇게 흘렀습니다.”

    世上에서 가장 아름다운 寸志

    그러면서 申 院長은 비로소 껍데기를 벗은 이들의 맨살을 만나게 됐다. 그 안은 말할 수 없이 여리고 따뜻했다.
     
    “여기 病院이 낡고 오래된 建物이라 壁 곳곳에 틈이 있죠. 그런 데를 虛套루 보면 안 돼요. 가끔 그 속에서 돈이 나오거든요.” 

    처음엔 무슨 말인지 理解할 수 없었다. 申 院長이 다시 說明했다. 

    “患者들이 그 속에 슬쩍 돈을 넣어놓고 가요. 얼굴 보고 돈 주기는 쑥스러운데, 또 어떻게든 고마움을 表示하고는 싶으니까요. 種種 쪽紙도 같이 나와요. ‘로또 5等에 當籤돼 돈이 좀 생겼습니다’ 같은 거요. 無料 診療를 받고 가면서 그렇게 1000원짜리, 5000원짜리 마음을 病院 壁 틈에 밀어 넣는 거죠. 초콜릿 하나, 껌 하나 들고 와 診療 冊床에 슬쩍 올려놓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 걸 받으면 참…. 正말 눈물 나는 寸志죠.” 

    그래서 申 院長은 이곳에서 얻은 가장 所重한 因緣을 ‘患者들’이라고 했다. 

    “大學病院이나 個人病院에서 하루 終日 일하고 退勤 後 이리로 달려와 저녁 7時부터 9時까지 또 患者들을 돌보는 醫師 先生님들, 아무런 代價 없이 患者를 맞고 淸掃하고 露宿人들에게 理髮, 食事 提供, 沐浴 奉仕까지 해주는 奉仕者분들을 만난 것도 正말 感謝한 일이죠. 그리고 國庫 補助 하나 없이 이 많은 患者를 治療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우리 後援者분들도요. 요셉의원의 두 軸은 奉仕와 後援입니다. 그분들과 함께 이곳에 있는 것 自體가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 過程에서 申 院長 自身도 참 많이 變했다. 그는 요셉醫院에 온 뒤 가장 많이 하는 말이 ‘安寧하세요’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예전엔 하기보다 들을 일이 더 많은 말이었어요. 그런데 여기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먼저 人事드리는 것, 그리고 마음을 다해 感謝를 表現하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누구를 뵙든 먼저 人事하고 感謝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表情이 많이 밝아졌다는 얘기를 들어요.” 

    申 院長의 요즘 苦悶은 요셉의원이 있는 地域이 再開發을 앞두고 있다는 點이다. 이 建物이 헐리면 오직 이곳에 依支하던 많은 患者를 어디서 돌봐야 할지 걱정이다. 다른 한便으로는 요셉의원에서 健康을 되찾은 患者들이 다시 世上에 뛰어들고 스스로 生計를 꾸릴 수 있도록 自活의 기틀을 마련해주고 싶은 欲心이 커지고 있다. 요셉의원 義務院長을 처음 맡을 때 鄭鎭奭 當時 樞機卿이 付託했던, ‘全人的인 治療’의 完成은 結局 自活을 돕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率直히 ‘저 다음’에 對한 걱정도 좀 있습니다. 우리 요셉의원의 가장 큰 問題가 ‘代打’가 없다는 거예요. 저뿐 아니라 奉仕者들도 하루 빠지면 代身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休暇조차 못 가는 境遇가 많습니다. 大學病院의 境遇 어느 날 갑자기 한 분이 돌아가셔도 티가 잘 안 나잖아요. 벌써 누군가 그 일을 代身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여기는 그게 안 돼요. 그게 恒常 問題예요.” 

    勿論 申 院長은 앞으로도 繼續 요셉의원에서 일할 생각이다. 그의 꿈이 ‘이 世上 逍風 끝나는 날’까지 요셉의원 奉仕를 繼續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自身이 일할 수 없는 瞬間이 올 때를 생각하면 種種 아찔할 때가 있다고 했다. 

    “아마도 제가 여기 있으니 只今은 누구도 ‘제가 先生님의 뒤를 이어 院長 할게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죠. 그런데 저는 괜찮아요. 뜻있는 분이 있다면 제게 슬쩍 귀띔해주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 일 하고 싶다’고요. 언젠가 이 일을 이어갈 수 있는 분을 만나게 된다면 참 기쁠 것 같습니다.”

    露宿人의 親舊, 요셉의원

    요셉의원은 봉사자와 후원자, 환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사진 제공 · 요셉의원]

    요셉의원은 奉仕者와 後援者, 患者가 함께 만들어가는 空間이다. [寫眞 提供?·?요셉의원]

    요셉의원은 高(故) 선우경식 初代院長(1945~2008)李 1987年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처음 門을 연 後 줄곧 露宿人, 行旅者, 貧民의 病院으로 歷史를 이어왔다. 設立 10年 後인 97年 永登浦區 板子村의 3層짜리 빨간 甓돌 建物에 새로 둥지를 틀고 올해로 20年이 됐다. 

    이곳에선 每日 內科, 一般外科, 整形外科, 神經精神科, 耳鼻咽喉科, 眼科, 皮膚科, 齒科 等 20餘 個 診療科에서 自願奉仕 醫師들이 午後 1時부터 5時, 저녁 7時부터 9時까지 患者를 진료한다. 宗敎 彈壓을 避해 韓國에 入國했으나 難民 地位를 인정받지 못한 狀態에서 아들은 勞動 中 負傷, 며느리는 結核, 孫女는 心臟穿孔 等 갖가지 疾病에 시달리고 있는 파키스탄 50代 難民 等 韓國 社會에서 어떤 福祉惠澤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요셉의원 門을 두드린다. 

    이곳에서는 醫師뿐 아니라 여러 自願奉仕者가 이들의 生活을 돌보고, 關係 部處를 搜所聞해 住民登錄을 회복시키거나 醫療保護對象者가 되도록 하는 等 갖가지 도움도 提供한다. 現在 신완식 院長 外에도 每달 100餘 名의 醫療奉仕者와 훨씬 더 많은 數의 一般 奉仕者가 함께 病院을 꾸려가고 있다. 申 院長은 “住民登錄이 생기면 다른 病院에 얼마든지 갈 수 있다. 우리는 좀 더 좋은 環境에서 治療받으라고 그분들을 다른 病院에 보내드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오곤 한다. 요셉의원에서는 奉仕者들이 모든 이에게 ‘님’字를 붙이고 最大限 人間的으로 待遇하는데, 다른 病院에 가면 ‘저런 사람이 여기 왜 왔지’ 하는 不便한 視線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요셉의원에서 病을 이기고 마음의 慰勞를 받은 사람이 自活에 成功한 뒤 奉仕者나 後援者가 돼 요셉의원으로 돌아오는 境遇도 많다. 요셉의원 스토리에 感動받은 이들이 自發的으로 後援에 나서기도 한다. 廢止를 줍는 老夫婦가 收益金의 20%를 每달 後援하거나, 90代 老人이 平生 아껴온 金半指를 後援金으로 내놓는 等 가슴 찡한 이야기도 많다. 1997年 요셉醫院 以前 當時 선우경식 初代院長은 “後援者가 3000名만 돼도 좋겠다”고 했다. 12月 13日 現在 後援者는 1萬550名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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