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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重權, “歷史戰爭에서 保守가 이기는 길, 民草들 獻身 속에서 찾아야” [陳重權의 直說-11]|週刊東亞

週刊東亞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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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重權, “歷史戰爭에서 保守가 이기는 길, 民草들 獻身 속에서 찾아야” [陳重權의 直說-11]

  • 陳重權 前 東洋代 敎授

    入力 2020-08-11 17: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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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陳重權 前 東洋代 敎授.

    ‘週刊東亞’는 進步論客 陳重權 前 東洋代 敎授의 韓國 政治에 對한 날카로운 分析이 담긴 寄稿文을 每週 火曜日 午後, 온라인을 通해 公開한다. <編輯者 週>

    얼마 前 統合黨 정경희 議員이 議員會館이 ‘大韓民國 나라 만들기 1919~1948’이라는 題目의 討論會를 열었다. 몇 年 前 뉴라이트가 觸發시킨 建國節 論爭을 再點火하려고 한 것이다. 이 자리에는 ‘極右’로 分類될 만한 人士들이 多數 參席해 차마 들어주기 힘든 말의 盛饌을 펼쳤다. 多幸히 未來統合黨에서는 이 退行的 움직임에 線을 그었다. 金炳玟 政綱政策 TF 委員長은 “大韓民國 憲法 前文에 明示된 3·1運動으로 建立된 大韓民國 臨時政府의 法統을 否定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며, 黨 一角의 이런 움직임이 統合黨의 公式的 立場이 아님을 分明히 했다.

    歷史戰爭의 戰士

    歷史戰爭의 砲門을 연 것은 元來 김무성 前 議員이었다. 有力한 次期 大權走者로 여겨지던 2013年 8月 그가 開設한 ‘近現代史 硏究敎室’에는 議員 100名과 院外 黨協委員長 19名이 參與했다. 이 모임은 單番에 새누리당의 最大系派로 떠올랐다. 그 자리에서 김무성 議員은 “左派와의 歷史戰爭을 勝利로 종식시켜야 한다”며 宣戰布告를 했다. 左派들이 “자랑스러운 우리 歷史를 못난 歷史로 卑下”해 왔다는 것이다. 이는 過去를 反省하자는 主張을 ‘自虐史觀’이라 非難해온 日本右翼의 論理를 빼닮았다. 마침 2次 아베 政權의 出帆으로 日本의 右傾化가 本格化하는 時點이기도 했다. 

    같은 해 11月 김무성 議員은 “大韓民國의 自負心과 正體性을 찾기 爲해” 歷史敎科書를 國定으로 轉換하자고 提議한다. 이 提案은 곧 朴槿惠 政權의 政策이 되어, 2014年 敎學社 敎科書가 出刊된다. 하지만 이를 敎科書로 쓰겠다고 한 學校는 全國에서 15橋에 不過했고, 그나마 學生과 學父母, 地域 市民團體들의 抗議로 줄줄이 採擇을 撤回하게 된다. 마지막 남은 慶山 문명고는 새 政府가 出帆하면서 硏究學校 指定이 取消된다. 歷史戰爭은 右翼의 悽慘한 敗北로 끝났다. 自己들이 政權을 잡고 있던 時節에도 失敗한 試圖를 왜 이 時點에 다시 꺼내드는지 理解할 수가 없다. 

    勿論 戰爭이 完全히 끝난 것은 아니다. 舞臺는 民間으로 옮겨졌다. 最近 이영훈 敎授가 쓴 ‘反日種族主義’가 韓日 外交葛藤을 背景으로 10萬 部 以上 팔려나갔다. 이른바 ‘植民地近代化論’의 主唱者인 著者는 當然히 反省하지 않는 日本 政府를 向한 韓國人의 反感을 理解하지 못한다. 그래서 韓日間 葛藤의 原因을 韓國人에게로, 卽 저 멀리 샤머니즘 信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韓國人의 文化的 DNA 탓으로 돌린다. 이 論理 亦是 그 原形은 日本의 右翼의 것이다. 現在 ‘反日種族主義’는 日本 社會에서 主로 韓國人에 對한 人種的 偏見을 强化하는 데에 活用되고 있다.



    民族史觀과 植民史觀

    이영훈 敎授가 屬한 ‘落星垈硏究所’는 안병직 敎授가 만든 것이다. 安 敎授는 ‘植民地下에서 資本主義의 發展은 不可能하다’는 ‘植民地 反封建社會論’의 主唱者였다(이 理論의 實踐的 結論은 勿論 反美自主化 鬪爭이다). 하지만 日帝의 植民地 朝鮮에도 資本主義의 發展은 있었고, 米帝의 植民地 南韓에서도 資本主義는 飛躍的으로 發展했다. 이 明白한 事實 앞에서 그의 理論은 무너지고 만다. 이 境遇 그냥 ‘植民地下에서도 資本主義的 發展은 可能하다’고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는 反對의 劇으로 달려가 ‘植民地였기 때문에 資本主義的 發展이 可能했다’고 말하기 始作했다. 

    이것이 이른바 ‘植民地 近代化論’이다. 近代的 技術과 資本이 들어왔는데 植民地 社會라고 發展을 못 할 理는 없다. 하지만 民族主義 理念에 사로잡힌 이들은 (初期의 안병직처럼) 日本과 美國이 發展을 沮害하여 韓國이 反封建 社會에 머물러 있다는 非現實的 認識을 갖고 있었다. 植民地 近代化論者들은 民族主義 史觀의 盲點을 파고든다. 그들은 日帝强占期에도 生産性 向上과 人口增加 等 發展이 이루어졌다는 事實을 여러 資料로 ‘實證’韓 後, 거기서 異常한 結論으로 飛躍한다. ‘日本이 植民支配를 통해 韓國의 近代化에 寄與했다.’ 그러니 이를 認定하고 感謝하라는 것이다. 

    民族主義 史觀은 學問을 理念에 從屬視졌다. 하지만 그 代案이 ‘植民地近代化論’일 수는 없다. 植民地 近代化論者들은 朝鮮의 封建的 生産力과 日帝 下의 近代的 生産力을 比較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方法이 아니다. 그 比較가 穩當하려면, 獨立國 朝鮮의 近代化와 植民地 朝鮮의 近代化를 比較해야 할 게다. 하지만 電子는 오직 ‘家庭’으로만 存在하기에 이 比較는 實證이 不可能하다. 實證主義者들에게 實證할 수 없는 것은 곧 存在하지 않는 것. 植民地近代化論者들이 種種 日本의 植民支配가 朝鮮의 祝福이었다는 極端的 主張으로 치닫는 것은 이와 關聯이 있다.

    裁判 解放前後事

    學問에서 ‘實證’은 매우 重要하다. 하지만 ‘實證主義’(positivism)는 그 自體가 民族主義 못지않은 이데올로기다. 이는 이영훈 敎授가 ‘李承晩學堂’을 이끄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民族主義者들의 認識이 親日派가 得勢하던 解放前後事에 固着돼 있다면, 그것을 批判하는 이영훈 敎授의 視角 亦是 如前히 李承晩이 單獨政府를 樹立하던 그 時節에 가 있다. 民族史觀이나 植民史觀이나 實은 오래前에 그 歷史的 妥當性을 잃은 두 個의 極端的 主張에 不過하다. ‘從北左派’와 ‘土着倭寇’의 두 牌로 나뉘어 서로 搖亂하게 싸우는 것은 事實 與野 兩쪽의 少數 極端的 支持層뿐이다. 

    NL 運動圈의 少數 極端的 分派를 除外하고, 오늘날 ‘民族的 正統性이 北韓에 있다’거나, ‘大韓民國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國家’라고 主張하는 이들은 없다. 大部分의 市民은 美蘇冷戰의 構造 속에서 李承晩의 單獨政府 樹立은 어쩔 수 없는 選擇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위해서 굳이 植民史觀을 받아들일 必要는 없다. 大多數의 國民은 親日派들이 解放 後 反共主義者로 變身하여 이 나라의 歷史를 굴절시킨 것을 容納하지 않는다. 그들은 歷史의 淸算은 이루어져야 하며, 過去에 親日을 했던 이들이 적어도 그 事實을 告白하고 反省해야 한다고 믿는다. 

    김영삼 政權이 ‘歷史 바로 세우기’에 나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業績을 何必 그의 後裔인 김무성 前 議員이 뒤엎으려 한 것은 매우 異常한 일이다. 워낙 退行的인 試圖라 그 戰爭은 結局 保守의 敗北로 끝났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植民地近代化論이나 反日種族主義 談論으로 市民들을 說得할 수는 없다. 그것으로 民族主義 史觀을 이길 수도 없다. 오늘날의 民族史觀은 過去의 NL 運動圈 버전처럼 그렇게 粗野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意味에서 정경희 議員이 國會에 뉴라이트 人士들을 데려와 歷史戰爭을 再開한 것은 여러모로 不適切한 일이었다.

    建國節과 國富 論爭

    事實 이 論爭은 아주 오래 前에 始作된 것이다. 2006年 7月 이영훈 敎授는 한 新聞社 寄稿글에서 大韓民國 政府가 樹立된 1948年 8月 15日 建國日로 規定하자고 提案한다. 하지만 그가 ‘國富’로 推仰하는 李承晩 大統領 自身은 정작 大韓民國의 建國일을 1948年으로 보지 않았다. 그가 制定한 制憲憲法은 1919年의 幾微三一運動을 建國으로, 1948年의 政府樹立을 ‘再建’으로 規定하고 있다. “悠久한 歷史와 傳統에 빛나는 우리들 大韓國民은 幾微 三一運動으로 大韓民國을 建立하여 世界에 宣布한 偉大한 獨立精神을 繼承하여 이제 民主獨立國家를 再建함에 있어서….” 

    問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뉴라이트에서 1948年을 建國日로 삼으려 하는 것은 그 以前에는 大韓民國이 存在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럼 當時의 朝鮮은 무엇이었는가? 當然히 日本帝國의 一部일 수밖에 없다. 建國節을 制定하자는 提案은 結局 韓日合邦이 合法的이었다고 말하는 隱密한 方式일 뿐이다. 親日 前歷者들에게는 솔깃한 主張이 아닐 수 없다. 大韓民國이 없었다면 親日은 賣國이 아니게 된다. 나라가 있어야 팔아먹을 게 아닌가. 게다가 日本이 朝鮮의 近代化를 도왔다는 認識이 합쳐지면 親日은 猝地에 祖國 近代化를 위한 努力으로 遁甲해 버린다. 

    이런 論理的 陷穽 때문에 정경희 議員이 始作한 建國節 論爭은 結局 保守를 덫에 빠드릴 것이다. 이런 이에게 公薦을 줬다는 것은 統合黨이 아직 뉴라이트의 影響에서 完全히 自由롭지 못하다는 뜻이리라. 勿論 執權 與黨의 一部 政治人들이 民族主義 理念의 偏向에서 빠져 있는 것은 事實이다. 靑瓦臺 民情首席이 SNS에 “竹槍가”를 올리고, 執權 與黨의 議員들이 親日派 破墓 法案을 發議하는 等 退行的 行動을 하는 것도 事實이다. 하지만 이를 批判하기 위해 굳이 歷史修正主義를 받아들일 必要는 없다. 保守는 다시 김영삼 政權의 ‘歷史 바로 세우기’로 돌아가야 한다. 

    國家의 正體性을 確保하기 위해 養아버지를 모실 必要는 없다. 大韓民國의 正體性을 만든 것은 ‘國父’라 불리는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日帝와 맞서 싸운 것은 이 땅의 百姓들이었고, 北韓의 侵略에 맞서 싸운 것도 이 땅의 民草들이었다. 고된 勞動과 아픈 犧牲으로 産業化를 이룩한 것은 이 땅의 勞動者들이었고, 軍部獨裁에 對抗해 民主主義를 爭取한 것 亦是 이 땅의 市民들이었다. 바로 그들이 오늘의 大韓民國을 만들었고, 앞으로도 그들이 이 나라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保守가 찾는 大韓民國의 正體性은 이 이름 없는 市民들의 犧牲과 獻身과 努力 속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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