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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펑크를 묻거든 크라잉넛을 보게 하라 [音談樂談]|週刊東亞

週刊東亞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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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펑크를 묻거든 크라잉넛을 보게 하라 [音談樂談]

베스트 앨범으로 데뷔 25周年 自祝하는 크라잉넛

  • 金作家 大衆音樂評論家

    noisepop@daum.net

    入力 2020-05-06 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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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잉넛 밤이깊었네. [드럭레코드]

    크라잉넛 밤이깊었네. [드럭레코드]

    크라잉넛이 데뷔 25周年을 맞았다. 멤버 交替 한 番 없이 이만한 歲月을, 그것도 休息 없이 活動한 밴드는 世界的으로도 손에 꼽힌다. 뜻깊은 해를 맞아 그들은 첫 베스트 앨범을 作業 中이다. ‘말 달리자’와 함께 그룹을 代表하는 노래인 ‘밤이 깊었네’를 재녹음해 先公開했다. 베스트 앨범에 들어갈 다른 曲들도 只今 소리로 다시 錄音할 豫定이다.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여러 感情이 밀려온다. 이 노래가 發表된 게 2001年. 19年이 흘렀지만 ‘원숙’이라는 單語는 크라잉넛에게 別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듣는 사람은 時間 隔差를 스스로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特히 그때 홍대 앞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더욱더.

    1996年 ‘드럭’에서 첫 만남

    크라잉넛, 노브레인 합동앨범 96. [드럭레코드]

    크라잉넛, 盧브레인 合同앨범 96. [드럭레코드]

    나도 그中 하나였다. 1996年 末 軍服務 中 休暇를 나와 홍대 앞 클럽 ‘드럭’을 찾아갔다. 그 무렵 新聞 文化面에서 인디 밴드들이 드럭에서 公演한다는 記事를 읽었다. 寫眞만으로도 衝擊이었다. 入隊 前 外國 音樂 雜誌에서나 보던 패션과 헤어스타일이 거기 있었다. 實物을 確認하려고 私服으로 갈아입자마자 찾아갔다. 그라피티가 빼곡한 階段에 펑크족이 가득했다. 衝擊과 두려움이 同時에 느껴졌다. 맨몸으로 사파리에 던져진 氣分이었다. 盧브레인과 크라잉넛의 公演을 봤다. ‘말 달리자’를 처음 들었다. 또 다른 形態의 衝擊이었다. ‘韓國에 이런 노래가 있다고? 와, 끝내주네.’ 1年 後 轉役했고, 그날부터 나는 드럭 ‘죽돌이’가 됐다. 펑크족이 되기로 決心했다. 

    하지만 펑크가 된다는 것은 메탈이나 그런지를 追求하는 것과 次元이 달랐다. 于先 머리부터 그랬다. 헤비메탈 스타일? 無條件 길러서 파마를 하면 얼추 成立한다. 그런지? 斷髮 程度로 기른 後 一週日 以上 감지 않으면 된다. 

    그렇지만 펑크의 象徵은 重力을 거스르는 스파이크 헤어, 卽 攻擊的으로 뾰족뾰족 세운 머리 스타일이다. 왁스와 포마드가 國內에 導入되기 前이라 머리를 세우는 過程은 지난했다. 헤어 젤로 가닥가닥 머리를 세운 後 스프레이를 뿌리거나, 물에 불린 비누를 찍어 발라 세웠다. 前者는 머리가 길면 길수록 時間이 오래 걸렸고, 後者는 소나기라도 내리면 悽慘한 몰골이 됐다. 電子에겐 外出을 爲해 한 時間 半이 必要했으며, 後者에겐 바지 주머니 속에 늘 萬一의 事態에 對備한 비닐封紙가 必要했다(우산을 갖고 다니는 건 ‘가오’가 傷하는 일이었으니까). 

    머리보다 더 힘든 건 패션을 갖추는 일이었다. 日本으로부터 펑크 패션을 輸入해 파는 가게가 있었지만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인터넷 쇼핑도 없던 時節, 方法은 하나였다. DIY(Do It Yourself). 몸매가 받쳐주는 親舊들은 서울 東大門에서 ‘레자(人造가죽)’ 잠바를 사 청계천에서 購入한 ‘찡’을 一一이 박았다. 짧으면 一週日, 길면 한 달이 걸리는 고된 勞動이었다. 어디서 알아냈는지 몰라도 釜山 保稅工場에 가면 日本 輸出用 반디地 바지(罪囚服에서 모티프를 얻어 量 바짓가랑이를 끈으로 連結한 체크무늬 바지)를 살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떼 지어 釜山으로 내려가 被服工場을 뒤졌다.



    險難했던 펑크족의 追憶

    크라잉넛 뮤비. [유튜브 캡쳐]

    크라잉넛 뮤비. [유튜브 캡쳐]

    除隊한 지 얼마 안 된 나에겐 그런 勞動을 할 부지런함도, 釜山까지 내려가 (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옷을 살 熱情도 없었다. 게다가 復學生이 될 處地에 社會的 地位도 考慮해야 했다. 決心했다. 옷은 대충 입고 머리만 제대로 하자. 그리고 포인트만 주자. 바로 허리에 늘어뜨리는 체인이었다. 펑크가 아니더라도 當時 홍대 앞을 根據로 삼은 靑春이라면 누구나 체인을 두르고 다녔다. 그 나름 不良의 象徵이었다. 鐵物店에서 파는 굵은 쇠사슬을 두르면 眞짜 펑크였고, 大部分은 사슬 목걸이 비슷한 걸 着用했다. 이화여대 앞만 가도 쉽게 살 수 있는 액세서리였다. 

    些少한 걸로 포인트를 주긴 싫었다. 조금은 튀고 싶었던 것이다. 집에 아무도 없던 날, 안房 옷걸이에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의 裝飾 벨트였다. 그것도 스테인리스가 아니라 銀으로 보이는 材質이었다. 그 빛에 眩惑된 걸까. 잽싸게 엄마의 벨트를 허리에 길게 늘어뜨리고 집을 나섰다. 不良의 늪에, 펑크의 世界에 入門한 氣分이었다. 

    意氣揚揚하게 드럭으로 向했다. 아이들은 感歎했다. 어떻게 그런 긴 체인을 매달고 다니느냐며. 그도 그럴 것이, 普通 체인은 허리에서 始作해 무릎 조금 위에서 끝나야 멋있다. 그게 標準이다. 그러나 벨트를 체인처럼 둘렀기에 무릎에서 꽤 아래쪽으로 늘어졌다. 短劍 中心의 祭式을 採擇한 軍隊에서 홀로 긴 槍을 들고 나타난 돈키호테였다고나 할까. 그들 옆에 서보고서야 깨달았다. 멋있기보다 우스웠다. 하지만 꿋꿋해지기로 했다. 堂堂히 체인, 아니 벨트를 두르고 다녔다. 

    며칠 後 버스를 탔다. 버스에 올라타는 2個의 階段, 왼발을 디뎌 첫 階段을 올랐다. 그리고 오른발을 디뎠다. 체인이 매달려 있는 바로 그 발이었다. 긴 체인이 무릎에 걸렸다. 出發한 버스 안에서 마치 닭싸움을 하듯 한쪽 발로 깡충깡충 뛰었다. 結果는 自明했다. 꽈당! 체인마저 끊어져 별빛처럼 흩어졌다. 펑크로 가는 길은 너무나 險難했다.

    크라잉넛이 로큰롤 밴드라고?

    크라잉넛 공연. [위키피디아]

    크라잉넛 公演. [위키피디아]

    그 後로도 10年 가까이를 펑크족과 어울려 살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펑크人 적이 없던 것 같다. 周邊人이었고 觀察者였다. 가끔 그때 寫眞을 보면 더욱 그렇다. 誇張되게 흉내 내고 있을 뿐이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뭔가를 바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親舊들은 마냥 즐거워하면서도 正말 熾烈했다. 

    只今의 크라잉넛은 音樂的으로도, 스타일的으로도 펑크와는 距離가 멀다. 그러나 그들이 펑크가 아니라고 한다면 認定하지 못하겠다. 무엇을 어떻게 하건 그들은 펑크다. 비록 스스로를 로큰롤 밴드라 稱해도 말이다. 

    1990年代 크라잉넛을 只今과 比較한다면 박윤식의 목소리는 살포시 두꺼워졌다. 다른 멤버들의 演奏는 當然히 日就月將했다. 하지만 變하지 않은 게 있다. 舞臺에서 모습이다. 酸素가 不足하다고 느껴지던 드럭에서나, 數萬 名을 앞에 둔 舞臺에서나 그들은 觀客을 掌握한다. 소리에도, 動作에도 빈틈이 없다. 1998年 ‘말 달리자’ 뮤직비디오의 모습이 그대로 겹쳐진다. 

    펑크가 무엇인지 說明하려면 꽤 많은 文章이 必要하지만 그들이 있는 限 나는 딱 한 文章으로 말할 수 있다. 크라잉넛을 보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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