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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活의 發見〉에 關한 10個의 노트 -홍상수, 〈生活의 發見〉|동아新春文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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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活의 發見〉에 關한 10個의 노트 -홍상수, 〈生活의 發見〉

by   조하형

  • 作品專門
  • 審査評
  • 當選所感
  • 1. 크게 달라진 건 없는 듯하다, 홍상수의 네 番째 映畫, <生活의 發見>의 境遇.

    2. <生活의 發見>은 前作들 中에서도 特히, <오! 修正>의 延長線上에, 있다. 그러나 <오! 修正>이, 記憶의 問題를 통해 日常의 破裂과 主體의 龜裂을 보여 주었다면, 이제, 리얼리티의 地層을 探究하는 考古學的 視線은, '模倣'의 問題로 옮겨간다.

    3. 홍상수는 <오! 修正>以後, 모더니즘的 眞摯함 代身 그로테스크한 遊戱를 擇한 듯하다, 가볍고 輕快하게 殘忍해지는. 映畫는 如前히, '유럽 모더니즘' 映畫의 外樣, 그러니까 로드 무비적 設定이라든가 偶然에 對한 關心, 이야기性의 弱化와 같은 特性을 가지고 있지만, 그 裏面에 있는 것은 어떤, 포스트모던的 空虛다.

    4. 스타일의 一貫性은 이番에도, 變함 없이, 貫徹된다 : 固定 숏의 統一性 속에서, 게으르게 목을 돌리는 듯한 패닝 숏, 높이 自體를 바라보는 듯한 付勘 숏, 무심하기 짝이 없는 롱 숏. 에피소드2에서, 경수가 성우와 함께 오솔길을 올라가는 씬은, 映畫全體 스타일을 壓縮的으로, 보여준다. 카메라는 窓門처럼 떠 있고, 時計圈으로 들어온 人物들을 따라 微風에 흔들린 듯, 패닝하지만 決코, 그들을 끝까지 쫓아가진 않는다. 카메라가 捕捉한 건, 對象의 痕跡이거나 人物이 아닌 것과의 差異였고, 카메라를 움직인 건 '바람 같은 것'이었다, 決코, 目標物을 쫓는 意志가 아니었다. 그렇게, 人間의 눈과 달리 取捨選擇하지 않는 카메라는, 視線의 焦點을 分散시키는 畵面을, 創出한다. 그래서, 半美學的 武器畵面에 '美學的으로' 再現되는 건, 日常의 高엔트로피 狀態, 그 自體다.

    5. 中心不在의 미쟝센, 擴散된 내러티브가 일으키는 效果는, 우리를 秩序에 對한 강박증 患者로 만든다. 우리는 意味를 捕捉하기 위해, 映畫가 進行되는 方向을 따라 가면서도 隨時로, 그 反對方向으로, 逆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처럼 鈍한 사람은 映畫를 두 番 봐야, 同時代性의 構造가 두 女子의 便紙에서 같은 文章을 記述하고 있다는 걸, 發見할 수 있다. 그러나 나처럼 鈍한 사람은 두 番을 봐도, 春川 오리배에서 만난 人間이 선영의 男便인지 아닌지는 絶對로, 모른다. 내러티브로 還元 不可能한 剩餘들, 그리고 맥거핀들로 인해, 우리는 忘却과 不必要한 記憶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振動한다, 그 結果, 意味는 繼續 '미끄러지고', '엎질러진다'.

    6. <生活의 發見>에서, 模倣의 次元은 段階的으로, 擴大된다 - 文章(:말)에서, 몸(:行動), 世界(:舌禍, 내러티브)로. 그런데, 唐나라 때의 내러티브가 21世紀 慶州에서 反復된다는 것은, 이 映畫의 世界觀을 端的으로 보여준다. 홍상수는 歷史를 空間化하면서 祈願의 問題를 括弧치고, 패턴들의 模倣, 組合만 反復되는 世界를 暗示한다. 에피소드7의 '世尊菩薩'은, 模倣의 전단계를 再演하는, '살아있는 構造'다 ; 몸에 칼댈 일이 있다는 式의 常套的인 神話소들이 組合되면서, 경수라는 神話, 경수라는 텍스트가 構成된다. 무당의 말, 무당의 行動, 무당의 내러티브는, 過去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7. 模倣의 모티프가 全景化 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文學的 裝置'를 통해서다. 映畫는 일곱 個의 에피소드로 分節되고, 各各의 에피소드에는, 서브타이틀 字幕이 붙어 있다. 하지만, 내러티브의 分節은 대단히, 恣意的이다. 그 人爲的 特異點들 때문에, 記憶의 錯亂, 關心對象의 混亂, 時間의 非均質的 흐름과 같은 效果들이 發生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건 아무래도, '경수가 回轉門의 뱀을 떠올리다'란 文章을 揷入하기 위해 選擇된, 形式으로 보인다. 그 文章이 決定的으로 플래시 백 效果를 일으키면서, 마지막 瞬間, 테마를 전경화하는 것이다. 이건 逆으로, 플롯 床에서 테마가 제대로 形象化되지 못했기 때문에 外삽이 必要했다고 하는, 反證일 수도 있다.

    8. 지라르에 依하면, 欲望은 언제나 중개된, 模倣된 欲望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主體가 自身의 獨創性을 主張할 때, 지라르는 그것을, '浪漫的 거짓'이라 불렀다, '小說的 眞實'에 對備하여. <生活의 發見>은 그런, 浪漫的 거짓의 態度에 메스를, 갖다 댄다. 그러나, 差異를 지우는 模倣이 暴力的인 아노미 狀態에 到達하게 된다는 지라르的 宿命으로 나아가는 代身, 先驗的인 模倣의 救助에 穿鑿하면서, 主體 自體를 問題삼는다. 그 結果, 喜劇的 悲劇이 誕生한다.

    9. <生活의 發見>의 라스트 씬 : 若干 낮은 카메라에 捕捉된 大門은, 通過할 수 없는 門, 門이 아닌 壁이다. 그런데, 이 狀況을 支配하는 건 反復되는 내러티브다. 이 壁이 門이 되려면, 回轉門 내러티브가 아닌 새로운 내러티브가 必要한데, 그건 不可能하다, 새로운 에피스테메가 주어지지 않는 限. 경수는 結局, 뱀의 패러디가 된다. 그는 回轉門 내러티브的 主體가 됨으로서, 혼란스러운 狀況을 敍事的 次元으로 統合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確實히, 모방되는 삶을 통해 存在論的 安定感을 獲得하고, 反復되는 패턴을 통해 正體性을 確保한다. 그리고 그런 過程을 통해, 救助의 監獄에 監禁된다. 패러디로서의 主體, 그것은 結局, 主體性으로부터 疏外된 主體, 破裂된 主體에 不過하다. 하지만, 代案은 없다. 경수는 씁쓸한 表情으로 돌아서고, 빗줄기가 쇠窓살처럼 내려꽂힐 뿐이다.

    0. 或은, 10.

    그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조하형

    조하형

    本名 조윤형

    1970年 釜山 出生

    1996年 高麗大 經營學科 3學年 中退

  • 강한섭(서울藝術大學 敎授, 映畫評論家)

    應募作은 모두 22篇. 그中 無慮 9篇이 이창동 監督論이나 그의 最新作 [오아시스]에 對한 作品論이었다. 그래서 于先 그 9篇을 끄집어내 읽기 始作했다. 韓國 社會의 暴力, 純粹의 破壞 그리고 카프카的인 變身을 主題로 監督論을 펼치는가하면 甚至於는 오아시스 그림의 洋탄자가 왜 바닥에 깔리지 않고 壁에 결려있는지를 論하는 應募作도 눈에 띄었다. "야, 映畫를 이렇게도 解釋할 수 있구나!"하는 感歎詞가 절로 나올 程度였다. 그러나 映畫에 對한 解釋과 이를 글로 풀어내는 表現力이 調和를 이룬 批評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비(非) 이창동 系列의 應募作들을 들추기 始作했다. 김기덕 監督의 [나쁜 男子]와 홍상수 監督의 [生活의 發見]을 다룬 應募作이 各其 3篇씩이고 나머지 7篇은 요즘 話題가 되고 있는 映畫에 關心이 없다는 듯 非主流의 作品世界를 孤獨하게 追跡하고 있었다. 여기서 一旦 다음의 3篇에 注目하게 되었다. OOO 氏의 '로드무비:不連續的 斷層을 찾아가다'와 [성냥팔이 少女의 再臨]을 다룬 방혜진氏의 '矛盾을 넘어선 祝祭의 場' 그리고 [나쁜 男子]를 中心으로 한 조하형氏의 '傷處는 터지지만 아프지는 않다'.

    '로드무비...'는 映畫의 技術的 側面에 對한 知識을 바탕으로 모더니즘的인 映畫 스타일을 세련되게 解釋한 評論이었다. 그러나 [로드무비]라는 個別 映畫 텍스트 批評과 함께 '로드무비'라는 小장르 批評으로도 읽힐 수 있다는 點이 短點이었다. 방혜진氏의 評論은 映畫에 對한 따듯한 愛情과 차분한 論理展開가 印象的이었다. 作品을 作品으로 보지 않고 지나치게 商業的인 興行과 聯關시키는 昨今의 批評 흐름에 비켜서서 映畫를 窮極的으로 作家主義 觀點에서 읽어내는 美德이 있었다. 그러나 映畫를 지나치게 個人 映畫監督의 創作物로 解釋하는 點이 마음에 걸렸다. 이에 비해 조하형氏의 應募作은 該博한 人文學的 知識과 華麗한 文章力이 單番에 視線을 固定시키는 글이었다.

    너무 華麗하면 처음에는 쏠리던 마음이 變하기도 쉽다. 그래서 일부러 情을 떼고 數日을 쉬고 다시 3篇을 읽었다. 傷處의 모티브를 가지고 김기덕의 映畫를 解釋한 조하형氏의 評論은 자칫 觀念의 論理로 元來 批評의 對象이 된 作品과는 直接的인 關係가 없는 새로운 映畫를 만드는 誤謬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만한 分析과 文章力이 堂堂한 自信感 속에서 表現된 應募作도 드물다고 判斷되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當選作으로 定했다.
  • 조하형

    조하형

    本名 조윤형

    1970年 釜山 出生

    1996年 高麗大 經營學科 3學年 中退

    感氣 몸살로 몸이 결딴나 있는데, 世界 저便에서 한 通의 電話가 왔다. 그 電話 때문에 只今, '稀罕한 장르'의 글을 쓰고 있다. 뭐라고, 쓸 것인가. 머릿속이 半은 녹아버린 것 같은데 뭐라고, 쓸 것인가. 이런 장르의 글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쓴 글은 事實 니체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 出發했고, 거기서 끝났다.

    "傷處 內部에도 治癒力은 있는 法…… 다음의 格言은 오랫동안 내 座右銘이었는데, 나는 이 格言의 出處를 識者적 好奇心에는 알려주지 않았다 : 傷處에 依해 精神이 成長하고 새 힘이 솟는다." ('偶像의 黃昏', 序文 中에서) 나는 미처 豫想하지 못했다. 내 글이 選擇될 確率은, 全國에서 나 혼자 投稿했을 確率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쓰고 싶은 대로 썼다, 오직, 뭔가를 懇切히 쓰고 싶었기 때문에.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時間도, 있는 法이므로. 그러고 나서, 뭔가를 썼다는 事實自體를 잊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甚한 感氣 때문에 제 精神이 아닐 수도 있겠는데, 世界 저便까지 몸이 擴張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건 기쁨이었고 同時에, 두려움이기도 했다.

    나도, 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에 關해 떠들기는, 쉽다. 正말로 어려운 건, 實際로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내가 꿈꾸는 건, 이거다 :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에 關한 것이, 實際로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에 接近하는 것, 極限까지.

    審査委員님들께 眞心으로 感謝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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