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遁走曲(遁走曲) 80年代|新東亞

李文烈 長篇小說

遁走曲(遁走曲) 80年代

第1部 / 帝國에 비끼는 노을 (3話) 地方新聞社

  • 入力 2017-09-10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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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休暇철이 絶頂이어서인지 距離는 좀 閑暇했다. 出勤時間 都心 버스停留所에서 내려도 거리 이쪽저쪽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그쯤에서 ‘工場’ 사람을 한두 名 만나 人事말을 건넸을 만큼 新聞社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도, 사람의 往來는 말할 것도 없고 自動車의 郊行조차 드문드문했다.

    時計를 보니 出勤 時間 正刻에 가까웠다. 新聞社가 그렇게 깐깐하게 出退勤 時間을 따지는 곳은 아니었으나, 그는 習慣的으로 걸음을 빨리해 길을 건너고 街路樹 그늘을 헤치듯 中央桶을 지나 正刻을 넘기지 않고 玄關門을 밀 수 있었다.

    “아이고, 李兄은 休暇도 없는가배. 8月 初旬인데 아직 休暇를 떠나지 못하믄 이番 여름 避暑는 언제 하노?”

    日帝 때 建物이라 充分하게 採光窓을 내지 못한 守衛室에서 불쑥 누가 나와 길을 가로막듯 그렇게 물었다. 그가 움찔하며 보니 ‘最小限 次長’이었다.



    벌써 아득하게 느껴지는 3年 前 修習記者 첫날, 動機 다섯이 各其 死守(先輩記者)를 따라 出入處를 돌고 2層 編輯局으로 돌아온 뒤의 일이었다. 아직 冊床도 配定받지 못한 編輯局 구석 벤치에 굳어 앉아 있던 그들이 暫時 아래層 玄關 쪽 層階站에 나와 담배를 피우며 잡담하고 있는데 누가 玄關門 쪽에서 올라와 점잖게 그들을 꾸짖고 갔다. 編輯局으로 들어가는 層階站은 新入記者들이 담배를 물고 ‘右往左往하거나’ ‘끼리끼리 모여’ ‘킬킬거리는’ 곳이 아니라는 제법 峻嚴한 訓示였다.

    넥타이까지 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래위가 맞는 正裝에 만만찮은 貫祿이 엿보이는 中年이라 그들 다섯은 누군지도 모르고, 反省文이라도 쓰라면 쓸 듯 謝罪하고 함부로 버린 꽁초까지 주워 그 자리를 떠났다. 編輯局으로 쫓겨 들어온 뒤에야 그中 하나가 訓示한 사람의 身分에 疑問을 품었으나, 그 사이 눈치 빠른 것으로 定評이 난 다른 動機 하나가 自身 있게 말했다.

    “우리 新聞社 先밸 巨野. 最小限 次長.”

    그런데 오래잖아 新聞社에서 그의 職責은 水位高, 끗발 좋은 情報部隊의 下士官으로 오래 勤務하다가 무슨 일로 옷을 벗게 된 사람이라는 것까지 알려졌다. 하지만 그날 收拾을 나갔던 다섯뿐만 아니라, 編輯局 안에 남아서 일을 배운 動機들에게까지도 그는 오래도록 ‘最小限 次長’으로만 記憶되었다.

    “아, 예. 그동안 서울 좀 들락거리느라, 休暇 마이가리를 많이 해서요.”

    平素 日本말을 많이 섞어 쓰는 ‘最小限 次長’의 말버릇을 따라 그가 그렇게 받았다.

    “내 보이 우리 工場 大빵이나 오야지 級은 도로시(도리어) 李兄이 그렇게 펄럭거리고 서울이다, 中央이다, 불래(불려) 댕기는 걸 좋아하는 눈치던데. 말이사 바른 말이지, 李兄이 여기 모두 낯 내주는 基 얼마라꼬. 내 이래도 한때 ‘사상계’ 檢閱했던 사람이라요. 요새도 여기저기 李兄 글 나오는 거 내 다 읽어보고 있구마. 無斷히 淸光(淸狂) 부리지 말고 늦디라도 休暇는 단디 찾아 먹으소.”

    곧 죽어도 이形이고, ‘해라’ 같은 ‘하소’였으나 그는 別로 고까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위로 띠 同甲이 되는 걸 내세우는 그의 나이보다도, 特務部隊에서의 끗발 좋던 王年이 이제는 永樂이라고 해도 좋을 그의 삶에 길게 드리우고 있는 어떤 스산한 그림자 때문이었다.

    新聞社 建物은 日帝 때는 消防署로 썼던 建物인데, 解放 後 暫時 택시會社로 쓰였다가 動亂 뒤 韓國 가톨릭교회가 그 新聞社 大株主가 되면서 引受해 그때까지 社屋으로 써오고 있었다. 日帝 때 官公署 建物이 大槪 그렇듯이 西洋 近代 建築樣式을 이것저것 折衷한 形態였지만, 精誠 들여 짓고 功들여 마감해 밖에서 보면 雄壯하지는 않아도 제대로 지은 石造建物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內部도 마찬가지, 붉은 甓돌에 두껍게 몰타르를 입혀 灰漆한 것이라도 强度 높인 시멘트에 꼼꼼한 미장이 잘 어우러져, 제대로 다듬어 짜 맞춘 石造建物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거기다가 값싼 大理石이나 흔한 花崗巖, 쑥돌 따위를 잘 다듬어 精巧하게 맞춰 넣고 군데군데 놋쇠 테로 이음매를 하여 潤氣 나게 갈아둔 바닥은 西洋 武道場을 연상시킬 만큼 豪華스럽게까지 느껴졌다.

    2層인데도 밖에서 보면 이웃의 粗雜한 現代式 建物 3層 높이와 맞먹는 層高(層高) 또한 印象的이었다. 든든한 木製 欄干이 휘어져 있는 層階 가운데 제법 널찍한 層階站을 두어 植民地 官公署의 威容을 더함과 아울러 보는 이의 눈을 시원하게 했다. 그 무렵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樣式과 資材에다 그 時節 日本人 特有의 精誠과 自負心이 스며 있어서인지 지은 지 50年 넘은 낡은 建物이라는 느낌은 別로 없었다.

    그날따라 層階站에 머물러 새삼스러운 氣分으로 1層 玄關 로비 쪽을 내려다보다가 퍼뜩 늦었다는 생각이 들어 종종걸음 치듯 編輯局에 올라가니 編輯部 쪽은 部長 包含 아홉 자리가 다 차 있었다. 休暇가 둘 있을 텐데, 하며 자리를 둘러보던 그는 비어 있어야 할 두 자리를 채운 이들을 알아보고 멈칫하며 部長 쪽을 돌아보았다. 部長이 그의 물음에 對答하듯 말했다.

    “25期 新入記者 中에 여기 이 두 사람은 이番 한 달, 우리 編輯部에서 收拾을 받을 끼요. 보자, 이짝에 헤띵구(헤딩) 하나 제대로 할 것 같은 親舊는 백준기 氏, 그리고 저쪽 美人은 손하린 氏, 이제 新入記者 歡迎會 한 지도 한 달포 지냈으니 이 두 後輩 履歷들은 그間 大綱 들어 알 끼요.”

    눈길은 자리를 찾아 앉는 그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해놓고, 이番에는 여럿을 돌아보며 編輯部에서 가장 勤務年限이 짧은 끄트머리 두 基(期)를 고르는 것 같더니 그쪽으로 무얼 툭툭 던져주듯 말했다.

    “거기, 尹兄 21基地? 그리고 그쪽 22期 李兄이 그다음 旗手가 되고. 이番 25期 修習은 둘이 師授가 되어 하나씩 맡고 編輯이 뭔지나 알게 해주소. 特히 李兄은 이 日까지 바쁘다고 내뺄 窮理 말고. 이番 달은 休暇 때문에 編輯部는 모두 옴짝달싹 못하게 됐으니까.”

    그제야 그도 그 두 修習記者를 하나씩 살펴보았다. 백진기는 드물게 서울에서 名門 大學을 나온 親舊였고, 손하린은 地方 師範大 出身으로 가까운 都市 女學校에서 잠깐 敎鞭을 잡은 經歷이 있는 것으로 들었다. 그러나 軍 服務를 마쳐서 그런지 나이는 백진기 쪽이 훨씬 위로 보였다.

    이어 始作된 編輯會議는 그날따라 길어져서 첫판人 스포츠面 技士가 部長 앞에 수북이 쌓일 때까지도 늘어졌다. 9時가 넘어 더는 編輯을 미룰 수 없는 때가 되자 部長은 비로소 記事더미를 그쪽으로 쓸어 밀어주며 말했다.

    “李兄, 이거 가지고 가서 스포츠面 始作하소. 通信使에서 들어온 外信 쪽도 챙기고. 톱은 잘 알지요? 大鵬期(大鵬旗) 高校 野球 決勝戰. 우리 新聞社가 主催인 만큼 미다시(見出·標題)를 요코(橫·가로쓰기) 2段으로 詩커머이(시커멓게) 처발라도 괜찮을 끼요. 나머지는 靑龍旗高 黃金獅子機高 확 내리 깔아삐고(버리고). 그리고 以下는 알아서 그려보시압.”

    2.
    그날 紙面을 위해 들어온 本誌 記者 作成 地域 스포츠 記事들과 通信社에서 넘겨준 外信 및 前날 主要 中央紙 記事 要約한 油印物, 그리고 下端 廣告 推定斷水에 揷入 廣告 種類와 個數 따위가 添附된 業務局 回覽 等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自己 冊床으로 돌아온 그는 서둘러 編輯에 들어갔다. 編輯用으로 놓아둔 卓上時計를 보니, 9時 10分. 始作이 平素보다 몇 分 늦어졌지만 10時 마감이 걱정될 만한 지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날따라 공연히 뭔가에 내몰리는 氣分이 들어 먼저 通信으로 들어온 外信과 前日 中央紙 重要 記事 拔萃 要約부터 훑어보았다. 반드시 스포츠面 톱기사 附近에다 올려야 할 外信이나 參考, 敷衍해야 할 中央紙 記事는 特別히 없었다.

    다음은 各種 國內 競技 決勝戰 記事와 競技場의 事件 事故. 그쪽 亦是 반드시 特大 湖水 標題나 7段記事로 뽑아 세울 만한 게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 바람에 別 抵抗感 없이 그는 部長이 指定한 톱기사를 받아들였다. 그 봄 경북고가 傳統의 黃金獅子機 高校野球大會에서 優勝했을 때보다 더 크게 第1回 大鵬期大會의 優勝을 톱기사로 밀어 올릴 수 있었다. 大鵬期는 그들 新聞社가 그해 創設한 高校野球 全國大會로, 第1回 優勝者인 서울 배재고는 그 때문에 數十 年 傳統의 黃金獅子氣를 차지한 地域 名門高보다 그날 編輯에서는 한層 더 뜨거운 喝采를 받았다.

    그렇게 톱기사가 決定되자 中間 톱 以下의 編輯은 平素의 慣行처럼 機械的으로 處理되었다. 좀 별난 일이 있다면 再昨年 니카라과 大陸間 國際컵 野球大會 韓國 優勝을 追憶하며, 바로 그 傳해 茶盞 속의 颱風으로 끝난 ‘韓國프로野球 準備 委員會’의 野心滿滿한 企劃이 霧散된 것을 哀惜해하는 投稿를 받아준 것이었다. 强勁한 ‘時機尙早論’으로 1976年 韓國 프로野球의 出發을 막은 韓國野球協會의 短見을 돌이켜보는 짧은 隨筆 같은 回顧談이 있어 5段 박스 記事로 다루어보았다. 그리고 내친김이라, 그前에는 別로 건들지 않았던 美國 프로野球 記事 하나를 2段으로 키워 下段에 슬며시 끼워 넣었다.

    그런데 더블헤더 最長時間이란 記事 題目을 뽑다 自身도 그런 狀態를 잘 理解하지 못해 暫時 머뭇거리며 그 말의 元뜻을 찾아보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등 뒤에서 가벼운 人기척이 느껴졌다. 別생각 없이 힐끗 돌아보니 손하린이 왼便으로 한 발짝쯤 떨어진 곳에 비스듬히 붙어 서서 이제 막 水星 色鉛筆로 시퍼렇게 分解되어가는 그의 編輯紙面을 바라보고 있다가 가볍게 움찔하며 물러서는 시늉을 했다.

    “아니, 孫 記者 여기서 웬일이요? 뭘 하고 있어요?”

    “編輯 收拾하고 있어요. 妨害될까 봐 가만히.”

    그러고 보니 그女 곁에는 백진기가 등을 맞대듯 붙어 서서 왼便으로 비스듬히 尹 記者를 지켜보고 있었다. 기수는 하나 빨라도 나이는 두 살이나 어려 어정쩡한 사이로 지내는 尹 記者는 國際面 編輯을 맡고 있는데, 이제 막 내려 받은 記事더미를 나름으로 이리저리 分類하고 있었다. 손으로 쓴 記事보다는 거친 油印物과 타이프라이터 用紙, 그리고 世界地圖 한 部分이나 크고 작은 黑白寫眞 따위가 더 많은 編輯 資料였다.

    “部長님이 配置한 거요?”

    部長자리를 바라보다 자리가 빈 것을 보고 그가 손 記者에게 바로 물었다.

    “아뇨, 部長님도 따로 定해주시지 않고, 先輩님들도 불러주시지 않아 저희끼리 配置했어요.”

    “저희끼리라, 自家 配置라…. 그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네.”

    “가위 바위 褓로 했어요. 제가 이겨 이 先輩님을 고른 거고요. 구실은 나이도 있고 旣婚이시라 제가 이리저리 따라다녀도 부담되지 않을 것 같다고.”

    唐突한 아이구나…. 그러나 그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오히려 더 無表情하게 되어 말했다.

    “그렇다면 둘 모두 編輯局 밖에 나가 바람이나 쐬고 오시오. 나는 只今부터 한 10分쯤은 머리 터지게 판을 마무리해야 할 形便이고, 저기 尹兄도 이제 한 50分은 아무 딴생각 안 날 거요. 編輯 收拾 그거 꼭 해야 되는 거라면 午後에나 봅시다. 젖은 新聞紙에 水星 色鉛筆로 환漆하는 法이라도 일러드리지.”

    그러고는 다시 마무리에 들어갔다.  

    正말로 그의 스포츠面 編輯은 그로부터 正確히 10分 뒤에 끝났다. 마지막으로 남은 1段 記事들까지 구석구석 꼼꼼하게 分配한 뒤 空間 나는 대로 와리코미(行間 揷入 廣告)까지 채워 넣은 그가 廣告面으로 新聞 아래쪽 5段만 비운 編輯 設計圖面과 該當 記事들을 工務局으로 넘기고 돌아오니 壁時計가 10時 5分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그제야 冊床 한구석으로 밀어두었던 재떨이를 꺼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編輯部 사람들이 담배를 태우는 態度는 大綱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編輯 始作부터 끝날 때까지 줄곧 담배를 달아 물고 일하는 方式이고, 다른 하나는 오히려 한 面 編輯을 始作해서 끝날 때까지 全혀 담배를 피우지 않다가, 끝나면 한 床 차리듯 재떨이와 담배 라이터 파이프 성냥에 손手巾까지 조금이라도 吸煙과 關聯되는 所持品을 있는 대로 方今 치운 冊床 위에 벌여놓고 꽁초와 손끝이 노랗게 찌들도록 태워대는 方式이다. 어떤 이는 그게 新聞 編輯을 精神勞動에 가까운 것으로 여기느냐 肉體勞動에 가까운 것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나뉘게 된 것이라 하는데, 그는 아마도 肉體勞動으로 보는 쪽에 가까워 編輯에 集中해야 할 때는 아예 담배를 물지 않았다.

    갑자기 編輯部 電話가 울린 것은 그가 編輯 끝난 뒤의 담배를 맛있게 한 대 태우고 거의 필터까지 타들어간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있을 때였다. 그가 電話를 받자 相對가 바로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활기찬 목소리로 自身을 밝혔다.

    “나 中央公社 量(梁) 代理요. 그間 잘 지냈소?”

    中央公社는 中央公園 近處에 있는 自身의 所屬 警察署를 뜻하고 代理라는 職級도 刑事라는 呼稱 代身에 量이 가끔씩 詐稱하는 金融機關의 職級이었다.

    “아, 예. 班長님. 그런데 요새 어째 뜸하십니다. 5月에 다녀가시고 처음인 것 같은데.”

    그도 애써 어두운 느낌을 털며 되도록 밝은 목소리로 그렇게 받았다. 班長은 그가 孃에게 붙여주는 또 다른 職級이었다.

    “그래서 이 記者를 한番 만나볼라 카는 거 아이요? 이따가 點心 먹고 1時쯤에 그 짝(쪽)으로 갈 테이 오랜만에 얼굴 한番 睥睨(보여)주소. 거 어디 경복(慶福)인가 뭔가 하는 茶房 말이라. 그짝 工場 地下層 野불테기(옆쪽)에.”

    경복茶房은 其實 新聞社 地下室이 아니라 이웃 商家 建物의 地下인데, 그도 가끔씩은 自己네 新聞社 地下로 錯覺하며 드나들었다. 그 建物이 워낙 新聞社와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 가면 新聞社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럽시다아. 午後 1時부터는 編輯局 資料室에 눌러앉아 있을 테니 더 이르거나 늦어지면 그리로 電話注視高.”

    3.
    아시아的 王朝國家의 별난 遺物이라고도 할 수 있는 緣坐制란 것이 그의 삶에 具體的으로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大學校에 進學한 첫해 늦봄이었다. 新聞廣告를 통해 高位職 公務員으로 推定되는 어느 家庭집에 入住 家庭敎師 자리를 얻은 그는 난生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그래도 딴에는 精誠 들여 아이들을 가르쳤다. 中學校 1學年 男學生과 3學年 女學生 男妹였는데 아이들도 잘 따라주어 첫 番째 報酬를 받던 날만 해도 1000원이나 加外돈을 얹어줄 만큼 後代를 받았다. 男妹의 月末考査 成跡이 前보다 越等히 나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서먹한 雰圍氣로 두 番째 事例를 받은 지 며칠 안 돼 그 집 師母님이 조용히 그를 부르더니 무언가 몹시 難處한 表情으로 말했다.

    “學生 或是 前에 어디 다른 大學 다니다가 退學당한 적 있으세요? 데모 같은 거로다.”

    “아뇨, 入學이 同期들보다 한 해 늦어지긴 했지만 退學당한 적은 없는데요. 더구나 學生 데모 같은 걸로는.”

    “거 참, 異常하네요. 그런데 이달에 왜 또 찾아와서 그러지?”

    “뭐가요? 누가 찾아와서 그러는데요?”

    “警察이었어요. 뭐라더라? 對共(對共)部署에서 나왔다는데 別것 다 꼬치꼬치 캐묻더라고요.”

    “예?”

    그는 그렇게 反問하면서도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누가 무얼 더 仔細히 말해준 것도 아닌데 그는 갑자기 모든 걸 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왔다. 어머니나 兄님만 찾아다니는 줄 알았던 그들이 드디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마치 오래前부터 豫定되어 있던  일처럼 그런 그들의 訪問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房門이 뒷날 經驗하게 될 것처럼 그렇게 徹底하고 定期的으로 따라붙을 줄은 몰랐다. 그 學期에 쫓기듯 家庭敎師 자리를 옮겨보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어김없이 따라왔고, 2學期 들어 入住 家庭敎師 代身 그룹 指導를 해도 自身을 살피는 눈길은 오래지 않아 感知되었다. 나중 學校를 그만두고 작은 寺刹에 寄食하거나 외딴 亭子 또는 山속 才士(齋舍) 같은 곳에서 自炊를 할 때도 그랬고, 軍隊처럼 確固한 그들의 制度 속에 編入되어 있을 때조차 自身을 뒤따르는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尾行을 따라붙거나 불러다 審問하는 形態는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의식되는 그들의 눈길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社會로 나와 크건 작건 集團에 所屬하게 되고 무언가 實際的인 일로 사람들과 去來하게 되면서 그 눈길은 다시 壓迫의 形態로 그의 삶에 끼어들기 始作했다. 이를테면 入試學院에서 講師 노릇 할 때, 어느 午後 別 頉 없이 몇 時間 軟鋼(連講) 잘하고 講師室로 돌아온 그에게 學院 院長이나 總務 或은 同僚 講師들이 前에 없이 무언가 꺼림칙해하면서도 好奇心 어린 눈길을 보이면 그는 이내 알아차렸다. 누군가 自身이 없는 學院 敎務室을 헤집고 다니며 別것 아닌 探問으로 上司나 同僚 講師들을 들쑤셔놓았음을.

    行動에서의 特異事項. 性向에서의 特異事項. 表現에서의 特異事項. 敎友에서의 特異事項. 居住와 移轉에서의 特異事項 또 무슨무슨 特異事項. 그리고 그 끝에는 參考事項입니다. 그 사람이 무슨 대단한 罪를 저지른 것은 아니고요. 하지만 事前에 把握은 되어 있어야 해서…. 그에게는 우리가 와서 묻고 갔다고 말하지 마십쇼. 史上 監視나 政治 査察로 비치면 서로 不便해집니다. 日帝 때 要視察(要視察) 制度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때부터 그는 上司나 同僚 講師들에게 너무 깊이 사귀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隱然中에 刻印된다. 그리고 언제나는 아니지만 그 시답잖은 探問은 잦은 그의 移職 或은 前職의 原因이 되고는 했다.

    編輯 마감이 11時인 尹 記者가 編輯을 마치고 工務局으로 내려가 판을 앉히는 것을 보러 갔다가 그날따라 빨라진 地方版 1刷까지 보고 오는 바람에 平素보다 조금 늦어진 點心 食事는 午後 1時가 가까워서야 끝이 났다. 처음으로 師授가 된 둘이 修習記者 둘을 챙겨 함께 點心을 하는 바람에 자리가 좀 길어진 것 같았다.

    그가 編輯局으로 돌아와 時計를 보니 1時 어름에 量 刑事를 만날 때까지 時間을 쓰기가 어정쩡했다. 여느 때처럼 資料室에 올라가 冊을 보기에는 너무 짧았고, 그렇다고 그대로 멍청하게 앉아 기다리고 있기에는 또 길었다. 그가 갑자기 緣坐制(連坐制)와 關聯된 옛일을 떠올리게 된 것은 아마도 漠然히 兩 刑事를 기다리는 꼴이 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서른이 되던 해 마지막 職場이라고 고른 新聞社에서 最終 合格 通知를 받자마자 그는 다시 그의 擔當이 한 달에 한 番씩 自身이 없는 新聞社에 찾아와서 아래위 가리지 않고 그 종잡을 수 없는 探問을 하고 다니는 想像에 먼저 진저리쳤다. 新聞社가 學院이나 一般 職場과는 다르겠지만, 警察이 그렇게 휘젓고 간 뒤의 그 異常한 雰圍氣가 새로 始作하는 그의 삶을 함부로 헝클어놓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또 그래서는 正말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出勤 닷새 만인가, 收拾을 따라 나서기 前에 그는 스스로 大邱서 出入 先輩를 찾아가 人事를 하고 거꾸로 한 사람 手配를 付託했다. 거기 對共界(對共係)에 靑雲 考試學院 講師 이휴를 擔當하던 刑事를 알아봐달라는 內容이었다. 한 10年 緣坐制에 시달리는 동안에 그도 自身의 擔當이 어디 있는지는 大綱 알고 있었다. 마지막 職場人 靑雲考試學院이 大邱서(署) 管轄인 洞네에 있었으니, 거기로 찾아오던 刑事도 大邱西에 勤務하고 있을 것이란 推測이었는데, 正말로 그랬다.

    “긴가민가했는데, 알아보니 바로 거기 있더만. 양민석 刑事라고. 근데 어떻게 알았오? 그 親舊가 거기 있는 줄. 그리고 그 親舊가 이 記者에게 어떻게 해주면 되오?”

    先輩가 그렇게 묻자 그는 暫時 멈칫했다. 瞬間 여러 가지 回避나 迂廻의 구실이 떠올랐으나 그는 이내 그 先輩의 善意에 依支해보기로 하고 正直을 最善의 政策으로 삼았다.

    “아버지 일로 對共系의 査察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番에도 또 내가 없을 때 新聞社에 와서 別 重要하지도 않은 探問으로 職場 雰圍氣를 흐려놓을까 봐 걱정입니다. 차라리 내가 먼저 찾아가 그와 約定을 맺고 그가 내게 궁금한 게 있을 때마다 自進 出頭하는 方式으로 解決해 보았으면 합니다.”

    “아버님 일은 나도 量 刑事에게 들었소. 그런데 아버님이 越北하실 때 李兄은 잘해야 두세 살이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嚴重한 級數의 動向 査察을 받게 된 거요? 뭐, 維新 때 빡세게 데모라도 했소?”

    “짧은 大學 時節이었지만. 저는 데모 近處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끼어들어 오히려 그 親舊들을 더 險惡한 處地에 빠지게 만들까 봐. 따라서 저도 漠然히 뭔가 分類에 錯誤가 있어 不當하게 第 要視察 等級이 오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까닭도 달리 斟酌 가는 데가 있습니다.”

    “무슨 斟酌?”

    “아버님이 越北하실 때가 서른여섯이셨으니, 이제는 예순을 훌쩍 넘으셨습니다만 南派(南派)의 可能性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지난 50年代 60年代에는 훨씬 더 그 可能性이 높았고요. 아마도 그 可能性이 제 査察 等級을 높였을 겁니다. 내가 자라 南派된 아버지가 接線(接線)할 만한 成年이 되어갈수록.”

    “제법 그럴듯한 推測이오만 아닐 수도 있을 거요. 戰爭 끝난 지가 언젠데, 더구나 그쪽에는 아직도 워낙 誤謬나 誤判, 誤認이 많아서…. 하지만 自進 出頭는 다시 생각해보시오. 우리 工場 體面도 있지, 어디 記者가 무슨 끔찍한 現行犯도 아닌데, 末端 서(署) 刑事係에 달마다 自進 出頭한다는 거요? 그러지 말고 내 約束 잡아줄 테니 밖에서 量 刑事 한番 만나 適當히 調整해보시오. 그쪽도 이제는 그렇게 李兄을 막보지는 못할 거요.”

    그래서 量 刑事를 처음 만난 것이 이제 곧 그를 만나게 될 경복茶房이었다. 그 社會部 先輩가 무슨 말로 얼렀는지 거의 羊 刑事가 그를 찾아보러 오는 形局이었는데, 만나서 보니 以前 考試 學院時節부터 그를 擔當했던 사람이 아니라, 近來 자리를 옮겨와서 그를 引受引繼받은 後任이었다. 量 刑事는 下級 情報刑事의 여러 特徵을 고루 갖춘 사람이었으나 人性만은 그가 바라던 바에 가까웠다. 그동안의 어려움을 말하자마자, 그는 거의 憤慨하듯 人情머리 없는 同僚들의 動向報告 作成 要領을 나무라며 그의 提案을 誠意 있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거기서 둘 사이에 이루어진 約定이 그의 動向 報告書는 每달 한 番 그 茶房에서 둘만의 問答으로 作成한다는 것이었다.
    처음 몇 달 量 刑事는 제법 設問用紙 같은 것을 만들어 와서 보고서 作成의 基礎로 삼았다. 그러나 1年이 가고 2年이 가면서 直接 訪問은 두 달에 한 番씩으로 건너뛰고 어떤 때는 電話 몇 마디로 確認을 代身하더니 이番에는 석 달 만에 만나러 오는 길이었다.
    그의 回想이 그쯤 이르렀을 무렵 때맞춰 電話벨이 울렸다. 量 刑事의 電話였다.
    “이 記者, 나 只今 여기 와 있구마. 씰데없이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한 5分 늦었네.”

    4.
    神通찮은 照明에 담배煙氣까지 끼어선지 茶房 入口에 들어서도 兩 刑事가 얼른 눈에 띄지 않아 두리번거리는데 한쪽 便에서 누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李兄, 여기요, 여기.”

    그가 소리 나는 쪽을 보니 난데없이 허름한 노타이에 麥藁帽子를 덮어쓴 量 刑事였다.

    “아이고 兩 代理님 오랜만입니다.”

    그가 좀 誇張되게 반가움을 表示하고 맞은便에 앉으며 우스개 삼아 한마디 덧붙였다.

    “요새 中央公社 形便이 영 神通찮은 模樣입니다. 이거 웬 雙八年(短期 4288年·西紀 1955年)도 玉洋木 노타이에 麥藁帽子까지 쓰시고.”

    “더럽고 좁은 구멍으로 僅僅이 나온 놈이 무신 큰 龍脈(용코) 있나.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來日같이 맨날 그 模樣 그 꼴로 살다 보이, 볕 뜨거운 날은 땀에 前 노타이에 밀짚帽子 덮어쓰고 댕기는 수도 있제.”

    電話할 때의 快活한 音聲과는 달리 어딘가 좀 지치고 풀이 죽은 音聲이었다. 그도 더는 弄調로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조금 正色하고 물었다.

    “많이 바쁘신 模樣이군요. 量 代理님 같은 분이 바빠지는 世上 그거 別로 안 좋은데.”

    “맞지러. 이형도 이마이(이만큼) 자리 잡아 사는데 어느 쪽이든 世上 時끄러버 좋을 꺼 하나도 없구마는.”

    “世上 시끄럽다니요? 大邱가요? 아무리 洞네북이 되어가는 維新(維新)이지만 嶺南 霸權主義가 시퍼런 大邱에서까지야.”

    그가 조금은 시치미를 떼고 있다는 느낌에 憫惘하면서도 짐짓 그렇게 反問해보았다. 그러자 孃 刑事가 前에 없이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李兄, 참말로 記者 맞나? 嶺南 霸權主義가 무신 鬼神 씻나락 까먹는 소린지 모리겠다마는, 참말로 大邱가 어떤지 알기나 하능교? 여기는 日帝 때 朝鮮의 모스코바였고, 解放 後 左翼暴動 1號가 大邱 10·1暴動이라. 아이, 여러 말 말고 몇 해 前 인혁당(人革黨) 事件도 있잖능교? 死刑만 여덟이라꼬, 여덟. 大邱라꼬 絶對로 만만찮구마.”

    “이 地方에서 난 國務總理가 몇 名이고, 國會議長 國會議員에 長官에 安企部長 檢察總長이 얼마나 되는지도 생각해보세요. 將軍과 警察 總帥도.”

    “어쨋기나.”

    量 刑事가 그렇게 말을 끊어놓고 前에 없이 手帖까지 꺼내 메모를 살피면서 물었다.

    “오랜만에 몇 個 다시 한 番 確認이나 해두자. 첫째로 그라이(그러니) 아직은 어디 딴 데로 옮기 갈 생각 없단 말이제? 글치만 새로 좋은 職場 생기믄 다를 수도 있잖능교? 서울 어디 큰 會社에서 月給 많이 줄 테이 오라 칸다던가. 東亞 朝鮮 아이믄 中央이라도.”

    꼭 얼마 前 서울에서 黃 先輩와 나눈 얘기를 엿듣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그는 공연히 唐慌하며, 그러나 작은 일도 감추지 않겠다는 覺悟로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직 그런 提案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또 그런 提案이 있다고 해도 當場 움직이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것저것 맞춰보고 옮길 만해야 옮기지요. 그리고 萬若 그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누구보다도 兩 刑事님께 먼저 알리겠습니다.”

    “아니 뭐, 異形한테 그런 다짐 받자는 건 아니고…. 居家다가 그런 前職, 移職이 아니고도 住居를 옮길 일은 있을 끼요.”

    “맞습니다. 專業 作家로 살 作定을 하고 文筆 活動이 보다 容易한 서울로 옮길 수도 있겠지요. 新聞社를 그만두고. 하지만 그것도 아직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서울에 家族이 便히 살 만한 집 한 칸이 마련 안 되면 쉽게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또 그 反對로 職業을 바꾼다 해도 한동안 居住 移轉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家族을 옮기는 게 영 自信 없으면, 얼마間 家族은 只今처럼 大邱에 두고 나 혼자 서울에 寄食하며 大邱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法도 있겠지요. 高速버스와 無窮花號 모두 네 時間이면 오갈 수 있는 世上이니까요.”

    그가 그렇게까지 나오자 量 刑事도 만족스러워하는 語調로 우스개를 던지듯 마무리했다.

    “에헤이, 보이(보니), 李兄도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은가배. 禹쨋든 身分 變動이나 居住 移轉이 있으면 그때그때 바로 알콰(알려)주소. 아(애) 방우 猛글지 말고. 그라고.”

    그래놓고 잠깐 무언가를 망설이다가 作定한 듯 덧붙였다.

    “禹쨋든 이건 우리 오래된 藥조니까, 情報 交換이나 人的(人的) 接觸 기타 特異 動向 있으면 꼭 連絡 잊지 마소. 特히 椿府丈 關聯 事項은.”

    하고 보니 自身의 말이 너무 薄情한 게 아닌가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동안 나를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德分에 이 몇 年은 마음 便히 지냈습니다.”

    그가 眞心으로 그런 監査까지 덧붙였다. 그 말에 量 刑事가 時計를 보더니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얼 聯想하는지 가볍게 이맛살까지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자. 그라믄 마, 다음에 봅시다. 보자… 뭐, 達成公園 어느 모팅이라꼬? 女多書 어예(어떻게) 글로(그리로) 가믄 좋으꼬? 이것들 가마이 보이(보니) 分明히 속은 밸間(빨간) 것들인데, 뻑 하믄 人權이고, 自由化요, 民主化에, 色 쓴다 캐봐야 維新撤廢나, 分配平等 따우(따위) 粉紅도 못 되는 살색이라 카이, 내 참 더럽고 같잖아서. 이 꼬라지 하고 글마들(그놈아들) 새에 끼에(끼어). 언제까정 구경만 해야 되는 기고. 우쨋튼 洞, 李兄. 그라믄 잘 있으소 이만.”

    5.
    12時를 앞뒤 해서 地方版이 나오고, 午後 1時 무렵 해서 市內版 마지막 矯正 校閱이 끝나 校閱部까지 빠지면, 市內版 初版이 나올 때까지 編輯局은 한동안 조용해진다. 有價誌 最多 17萬 部, 道內 스무남은 軍部(郡府)에 한 10萬 풀어 먹이고 新聞社 所在 直轄市에 街販(街販) 包含 7萬 部假量 까는 脂肪 夕刊新聞社의 日常이었다.

    그가 編輯局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제 막 市內版 初版이 나올 무렵이라 그 조용함이 깨진 뒤였다. 編輯局 內勤 部署 데스크 곳곳에 點心 食事 뒤의 나른함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이제 곧 그날 街販으로 거리에 쏟아질 初刷를 기다리고 있었다. 編輯不渡 마찬가지, 마지막 檢討가 남았다는 듯 編輯局 안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데스크에 몰려 있었다. 그도 비어 있는 自身의 자리에 가 앉았다. 그런데 이番에는 맞은便에 앉게 된 백진기의 얼굴에 까닭 모를 웃음氣가 가득해 自身도 모르게 물었다.

    “白兄, 무슨 좋은 일 있소?”

    “아임다. 조금 前에 尹 先輩님한테서 編輯 收拾 맛을 봤는데 그게….”

    그러고는 다시 참지 못해 가벼운 웃음소리까지 냈다. 그걸 보고 弄談 잘하는 次長이 全혀 웃음氣 없이 한마디 했다.

    “보이 ‘紅島 뚝’ 했구마는.”

    ‘紅島 뚝’은 ‘홍도야 울지 마라’ 일곱 者를 석 字로 줄인 말이었다. ‘미다시(見出)’를 뽑는다고 해서 記事 題目을 만들 때 되도록 文章은 짧아야 하는데, 그때 文章의 音節 數를 줄이는 方式으로 新聞社는 傳統的으로 ‘紅島 뚝’을 가장 效果的인 本보기로 들었다.

    次長의 그 한마디에 저마다 그런 式의 硏磨를 거친 編輯部 先輩 記者들이 編輯 收拾을 補助라도 하듯 우스개 삼아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놈아 그거, 대번(멀리 못 가) 뿌뜰었다(붙들었다)’는 陵同一 때는 ‘답삭’이고 피동일 때는 ‘덜미’였다. 이를 테면 ‘소매치기 답삭’ ‘詐欺꾼 덜미’ 또 ‘갑자기 덤벼들어 무언가로 세게 치고 所持品 빼앗아 달아나기’란 强盜 行脚을 위해서는 ‘퍽치기’란 新造語가 생겨났고, ‘生떼를 쓰며 잡아떼다’ 또는 ‘頑强히 否認하다’는 똑같이 ‘오리발’ 세 音節로 處理되었다. ‘受賂 嫌疑에 오리발.’
    마지막은 간밤 술에 醉해 ‘땅에 毆打를 當하야’ 얼굴을 갈아붙이고 나온 先輩 하나가 工務局 말로 그 話題에 ‘視野게(마감질)’를 했다.

    “그라믄 ‘와리코미’ 넣는 것도 배웠겠네. 이런 거 記事 새새(사이사이)로 여기저기 빈줄野(適當히 調整해서) 낑가(끼워)넣는 法.”
    왼뺨 折半이 넘게 絆創膏와 一回用 밴드로 治粧하고도 군데군데 打撲傷의 痕跡까지는 다 감추지 못한 自己 얼굴의 傷處들과 멍을 가리키며 술꾼 先輩가 하는 소리였다. 낮지만 왁자한 웃음으로 멀리서 보기에는 編輯部가 자못 和氣靄靄한 雰圍氣를 演出하고 있는데, 드디어 使喚 녀석이 市內版 初刷를 돌리기 始作했다.

    內勤 部署들은 저마다 그 판에 關與한 自身의 몫을 點檢하느라 新聞에 얼굴을 묻듯 熱中해 들여다보았다. 그 바람에 暫時 編輯局은 데스크마다 妙한 耽讀의 雰圍氣로 조용해졌다. 그런데 채 5分도 지나기 前이었다. 갑자기 編輯局長 冊床에 퍽, 하고 무슨 書類 뭉치를 패대기치는 소리가 나더니 뒤이어 누군가의 거친 辱說이 튀어나왔다.

    “어이, 강덕현이, 너 新聞 이렇게밖에 만들 수 없어?”

    그가 놀라 그쪽을 보니 編輯局長 冊床에서 하나 건너 데스크를 차리고 있는 政治部長이 方今 나온 그날値 市內版을 몇 部 구겨 編輯局長 冊床 위에 팽개치며 내지르는 소리였다. 천둥벼락이 쳐도 앉은 자리에서 꿈쩍 않는다는 編輯局長이 눈만 멀뚱멀뚱하며 그런 政治部長을 건너보았다.

    “뭘?”

    그가 보기에는 꼭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한마디지만 아주 느직한 말套로. 政治部長이 더욱 날 선 목소리로 몰아세웠다.
    “아무리 (엠바고) 約束을 깨고 우리 新聞만 特惠分讓子 名單을 發表하는 기라 카지만, 發表를 할라 카믄 바로 해야지, 이기 뭐꼬? 저어(저희) 洞네 나쁜 놈들은 다 빼고, 서울 놈들도 박통 部랄 잡고 알랑거리는 놈들 또 봐주고. 엉, 次 띠고(떼고) 抛 띠고….”
    “그래도 할 만하믄, 車包 띠고 뚜는 수도 있지 머. 於此彼 뻐꿈뻐꿈韓(숭숭 뚫린) 名單.”

    編輯局長이 듣기 답답할 만큼 느릿느릿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놓고 슬그머니 椅子를 뒤로 돌려 등을 보이며 앉았다. 政治部長이 이番에는 허리에 두 손까지 올린 채 編輯局長의 넓적한 등짝과 머리칼이 半도 안 남은 뒤통수에 대고 막말에 가까운 批判을 퍼부어댔지만 더는 아무런 對應이 없어 是非는 漸漸 戱化的인 樣相으로 變해갔다.

    “政治部長 저 兩班, 저래도 되는 깁니까? 局長하고 旗手 差異가 좀 나던데.”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몇 期 先輩 하나가 누구에게 묻는다기보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車掌이 비슷한 語套로 그 말을 받았다.

    “머, 3期하고 6忌祭. 數字로는 세 旗手 差異지만 實地(實際)는 한 騎手 차이나 마찬가지라. 그해 가톨릭에서 財團 맡던 해 社勢를 擴充하면서 한 해에 3期, 4期 합쳐 다섯을  뽑았고, 이듬해 다시 5期, 6期 셋씩 더 뽑아 4·19 무렵의 그 黃金 트리오를 만들었제.”

    “그때 저 兩班들 참말로 대단했다꼬. 나중에 서울로 不利(拂戾) 올라가 中央紙 發行人까지 지낸 蒙求(夢丘) 先生 모시고 政治 社會 經濟 三銃士로 안 날맀나? 저기 只今 저 두 兩班하고, 서울로 올라가 論說委員 지내는 김충조 氏 하고. 거다가 나(나이)도 期數하고는 달라 姜 局長님이 오히려 張 部長보다 한 살 적을걸. 그래다 보이, 그 騎手로 아직 우리 工場에 남은 대여섯은 그냥 한 덩거리(덩어리)로 너나들이 하고 지내는 사이 같더라꼬.”

    그들과 뚝 떨어져 10期를 넘긴 編輯部長이 가운데 끼어들어 그렇게 整理해놓고는 自己 앞에 펼쳐져 있는 그날 市內版 初刷를 덮었다. 當場 急하게 판을 갈아야 할 만큼 큰 失手나 반드시 그날 新聞에 얹어야 할 새 뉴스는 없는 듯했다. 그때 백진기가 그래도 未盡한 듯 물었다.

    “局長님도 어지간하지만 政治部長님 性品 한番 대단하시네요. 前에는 뭐 하신 분인데요?”

    “前에 뭐 하다니? 正式 旗手로 入社試驗 봐서 서른 안 돼 우리 工場 들어왔는데. 그 性質? 그거는 뭐 쪼매 깨끄라운(까다로운) 데가 있지만, 대낮 編輯部 데스크에 旄倪 앉아 흉보듯이 쑤군거릴 얘기는 아인(아닌) 같고오.”

    部長이 그렇게 말을 자르다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아, 참. 오늘 같은 날은 아매(아마) 編輯局 會食이 있을 끼요. 最小限 紅扇루(紅仙樓) 오일大宴(五日大宴)으로다. 別일 없으면 退勤하는 대로 거기 가서 골뱅이(다슬기)오이冷菜와 牛囊湯에 紅扇明紬나 마시다가 히입(헤어집)시다. 21期 以下, 特히 收拾 분들 빠지지 말고.”

    紅扇루는 秋氏 城에 紅扇이라는 이름을 가진 40代 中盤 아주머니가 예순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하나 데리고 하는 술집이었다. 新聞社에서 中央桶을 따라 南쪽으로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이는 대로로 들면 廉賣인지 煙煤인지 하는 이름의 在來式 市場 골목을 만나게 되고, 그 골목을 지나면 야트막한 山등성이에 기댄 庶民 洞네 발치 어디에 看板도 없이 술을 파는 옛날 酒幕 같은 집이 있었다. 以前에는 酒母의 이름을 따 그저 홍선집이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新聞社 編輯部가 단골로 드나들면서 미다시 뽑는 데 드는 솜씨로 昇格시킨 屋號가 紅扇壘였다.

    지난 3年 그는 적어도 百番은 新聞社에서 紅扇壘로 갔는데 한 番도 車를 타고 간 記憶이 없다, 나중에 가늠해보니 市內버스로 두 停留場 程度, 걸으면 한 20分 걸리는 距離였는데, 알 수 없는 일은 大邱의 炎天과 酷寒을 헤치고 갈 때조차 그 길이 이웃집 가듯 하기에는 좀 멀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全혀 들지 않은 點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出發부터가 異常했다. 午後 4時쯤 編輯部 마감會議 끝내고 바로 紅扇壘로 出發한 팀도 있는 것 같았으나, 그는 收拾 後輩 둘을 맡아 工務局부터 차분히 見學시키면서 대낮부터 泥醉 狀態가 되어 저지를 수 있는 失手 或은 醜態를 避했다. 틈틈이 ‘낮술에 醉해도 애비는 알아보자’고 외치며 마셨건만, 恭敬해야 할 아비가 없어서인지, 初저녁부터 遺體離脫로 狼狽를 본 게 한두 番이던가. 지난여름에도 ‘午後 4時 半의 시원한 麥酒 한盞’을 하러 갔다가 웬 되다 만 詩人이 洋酒 한 甁을 들고 나와 간을 치는 바람에 저녁 8時 混雜한 반월당 四거리에서 交通整理를 自請해 점잖은 編輯部 말套로 ‘中人(衆人)의 嚬蹙’을 산 적도 있다.

    그에게 洪船樓에 늦게 갈 口實을 만들어주기 위해 그날 두 修習記者는 뜨거운 여름 午後 4時의 工務局을 한 時間 가까이나 끌려다니며 抽象的인 編輯이 具體的인 組版을 거쳐 新聞으로 印刷되어 나오는 過程을 돌아봐야 했다. 大統領과 共和黨과 朴正熙는 왜 漢字로 석 字씩 묶여 特別하게 製作되는지, 그걸 犬統領(犬統領)과 共産黨(共産黨)과 朴正熙(朴貞姬)로 뽑아 ‘共産黨 總裁’ 朴正熙를 만들거나 ‘朴正熙 犬統領’을 만든 植字工은 어떤 일을 當했는지를 낄낄거리며 듣는 재미도 있었지만. 너무 親切한 製作部 專門家를 만나 別 쓸모도 없는 커트龍 銅版(銅版) 뜨는 法을 한참이나 實習까지 해가며 들어야 하는 不祥事를 만나기도 했다.

    이러구러 그들 셋이 紅扇壘로 出發한 것은 午後 6時를 20分 남긴 때였다. 그런데 이番에는 新聞社에서 紅扇壘까지의 距離가 前 같지 않게 그의 心思를 건드렸다. 8月 初 午後 6時頃이 아직 덥고 볕도 따가운 時間이기는 하지만 그게 紅扇루 가는 길을 그렇게 멀고 힘들게 만들지는 몰랐다. 몇 番이나 멈춰 서서 택시를 기다려보자고 提案하다 손하린의 懇曲한 挽留를 듣고서야 겨우 뭔가로 誇張된 마음을 가다듬었다.

    “先輩님 正말로 저희 괜찮아요. 學生 때도 이보다 더 먼 길 맨날 걸어서 다녔다고요. 그렇게 未安해하지 마세요.”

    아무래도 그런 손하린이 그의 까닭 없이 誇張되고 屈曲 甚한 感情의 原因이 되고 있는 듯했다. 문득 그걸 깨닫고 무연히 눈길을 돌리는 데 멀지 않은 곳에 紅扇壘의 七 벗겨진 함석지붕이 보였다.

    新聞社 사람들은 屋號만 巨創하게 樓閣의 班列에 올려놓고 정작 酒母인 추홍선은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秋 마담’이라고만 불렀다. 秋 마담의 出身에 對해서는 두 갈래 說이 있었다. 하나는 그女가 當時까지도 大邱의 一級 料亭인 태화관의 색시로 60年代 後半까지 술자리에 나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70年代 初盤까지도 태화관 廚房 料理部에서 熟水(熟手)로 일했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大槪 뒤쪽을 믿는 눈치였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 모습이 달라졌다 해도 그 生김으로는 옛날 명월관 다음 태화관이라던 一級 料亭의 색시가 되기는 어려웠을 거란 推測이 優勢한 데다, 값싸고 대단찮은 材料로 모두가 맛나하면서도 쉬 물리지 않는 按酒를 만들어내는 料理 솜씨는 一流 料亭의 熟水였다는 電力을 더 믿을 만하게 해주었다.



    이를테면, 얼기 直前의 草綠빛 다슬기 肉水에 삶은 다슬기 속을 半쯤 말고 잘게 썬 오이채를 띄운 골뱅이 冷菜나 亦是 삶은 다슬기 속과 미나리와 향기로운 季節 山菜를 매콤하고 짭짤하게 무쳐내는 골뱅이 무침은 大邱 아니라 이 나라 어딜 가도 그 값으로는 맛볼 수 없는 別味였다. 또 소의 洋物(陽物)을 中心으로 附近의 몇 가지 값싼 副産物과 조개 낙지 오징어 따위 그때그때 市場에 나는 海産物 若干을 主材料로 하고 몇 가지 菜蔬를 더해 그女만의 祕法으로 끓여낸 禹莨菪(牛囊湯)과 소의 千葉, 間, 등골에 肉膾 若干을 곁들인 千葉肉膾 같은 것도 그 값으로는 어디 가서도 그만한 別味를 맛보기 어려운 ‘紅扇루 特選’이었다. 그리고 다른 按酒는 뒷날 그의 記憶에 남은 게 別로 없다, 누구 입에나 잘 맞는 김치와 마른 가자미 볶음, 그리고 季節에 따라 한두 가지 더 놓이는 나물 접시 말고는.

    마당으로 들어서니 어떤 말보다 秋 마담 찾는 소리가 더 자주 들렸는데, 그 다음이 按酒 注文이었다. 秋 마담의 많지 않은 메뉴를 한꺼번에 다 請하는 것 같았다. 四方 열린 門으로 살펴보니 紅扇壘를 통째 接受하기로 作定했는지 미닫이를 들어내 훤하게 이어진 單칸 마루와 두 칸 長房에 벌써 여남은 名이나 앉아 김치와 마른 가자미 볶음만 놓고 막걸리를 퍼 마시고 있었다. 그中에 編輯部는 그들 셋을 빼고는 이미 다 나와 있는 거 같았다.

    “아이, 이 記者는 收拾도 課外시키나? 아까 나오다 보이, 5時가 다 돼 아무도 없는 工務局에서 收拾들 데불고 뭐 했노? 지는 編輯 收拾도 안 하고 編輯記者 먼저 돼가(되어서) 收拾은 나중에 해놓고.”

    마루로 올라서는 그를 보고 입 險하기로 소문난 法曹 出入 洪 先輩가 왼쪽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가는 特有의 웃음과 함께 빈정거렸다. 그 곁에 앉았던 編輯部 先輩가 後來者삼배(後來者三盃) 代身 新聞社 傳統의 ‘다짜고짜 세 大砲’를 執行했다. 옛날같이 큰 국 沙鉢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는 대폿盞이라고 불리던 中間 沙鉢로 紅扇名酒(紅仙銘酒)라고 불리는 막걸리가 석 盞이었다.

    이따금 盞을 멈추고 숨 고르기를 해가며 그는 近來에야 구경하게 된 紅扇名酒 빚어지는 過程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 또한 編輯部 솜씨임에 분명한 紅扇明紬란 이름은 아무 特徵 없는 隣近 술都家 막걸리가 秋 마담의 특별한 管理를 받아 며칠 더 익으면서 더해지는 별난 맛 때문에 붙여졌다. 紅扇루 부엌 뒷門 쪽으로 한 坪 程度 佳作을 달아낸 곳에 부뚜막처럼 조금 높인 옛날 두멍 자리가 있었는데, 秋 마담은 거기에 닷 말들이 獨 세 個를 묻고 하루 間隔으로 술都家 술을 채워 적어도 사흘은 더 익힌 뒤에야 손님들 술床에 올렸다. 그리고 餘分을 어떻게 處理하는지는 모르지만 닷새를 넘긴 술을 술床에 올리는 일은 없었다.

    거기다가 아주 印象的이었던 것은 그 세 술독의 官吏였다. 언젠가 좀 일찍 洪船樓에 간 그는 秋 마담이 마른 대야에 朝鮮종이 뭉친 것을 넣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無心코 묻자 그女가 그냥 지나가면서 對答했다.

    “오늘 都家 술 받아 넣을 毒 말리러 가요. 이걸 독 안에 넣고 불을 붙이면 毒 숨筒에 밴 술 찌꺼기나 잡냄새를 모두 잡을 수 있거든요. 새 술이 군맛 없이 좀 더 익을 수 있게.”

    編輯部 中心의 오일대聯으로 굳어져 간다 싶어지자 술자리는 쉽게 무르익었다. 그 뒤에 다른 部署에서 贊助로 나온 先輩들이 더 있어 모인 사람이 그 새 스무 名을 훌쩍 넘어도 編輯局 全體 會食 때처럼 社會가 나서거나 配置와 整頓의 氣流에 내몰리는 氣分 없이 저마다 앉은 자리에서 거리낌 없이 取해갔다. 그도 7時를 넘기면서부터는 漸次 얼얼하게 술이 올랐다. 編輯部 先輩들이 모인 곳에 收拾 둘을 떼어놓고, 그래도 마음 便한 入社 同期들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本格的인 戰鬪 모드에 들어갔다.

    編輯部長이 그날 밤 會食의 主人公으로 斟酌하고 기다려온 두 사람, 政治部長과 編輯局長은 9時가 가까워서야 紅扇壘로 왔다. 둘이 어디서 만나 마셨는지 어깨를 맞대고 비틀거리며 들어왔는데, 벌써 혀끝들이 말려들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紅扇壘로 들어설 때 반짝 緊張했으나 그사이 마신 술이 있어선지 以內 아른아른한 銘旌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날 밤 通禁을 앞두고 서로를 재촉해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까지, 그가 記憶하는 意味 있는 말은 그의 자리에서 두어 賞 저쪽에 자리 잡은 政治部長과 編輯局長이 酒酊처럼 웅얼웅얼 주고받던 몇 마디였다.

    …니한테 먹은 마음이 있었던 거는 아이다. 안다. 우리가 왜 이리 洪孃洪孃(흐물흐물) 무질러져 앉게 됐는지 모리겠다. 글케(그러게). 그때 우리 셋이 마음먹으믄 못 잡을 눔 없었다. 朴正熙도 地方紙 中에서 우리 新聞은 꼭 훑어본다꼬 안 카드나. 그래이 뭐하노. 世上은 하마 이마이(이만큼) 흘러 왔뿌랬는데. 맞다, 이제는 우리가 人冷(是非) 걸어봤자 죽자꼬 덤벼드는 저녁 모기만큼도 안 여긴다. 꼭 글打(그렇다). 河馬 18年, 百姓들에게는 먹는 게 하늘이라꼬, 그거 나아지는 거 보고 참을라 캐도 千弗 난다. 오늘 일 똑 덕현이 니 보고 성낸 거는 아이다. 왠지 그래라도 안 하믄 내가 이대로 주질러 앉아뿌는 같아서. 나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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