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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새들의 지렁이 잡이|新東亞

뽑새들의 지렁이 잡이

  • 글: 강기영

    入力 2003-02-25 18: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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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뽑새들의  지렁이  잡이
    ‘지렁이 잡으실 분! 좋은 農場 多數確保 現金支給 初步者 歡迎’平素 習慣대로 新聞 廣告欄을 훑어보던 나는 어느 날 稀罕한 廣告文句에 視線이 멎었다. 지렁이 잡으실 분? 캐나다 토론토로 移民을 온 뒤 내겐 新聞 廣告欄을 샅샅이 훑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이미 파라과이를 中心으로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넘나들며 8年間 他國땅에서 살았으니 캐나다는 再移民인 셈이다. 그間 劣惡한 環境에서 苦生도 했지만 그 代價로 돈도 모았고 移民 經歷도 제법 붙어, 처음부터 서두르지는 말자고 作定했다.

    흔한 말로 구렁이가 되었다고 할까. 移民生活이라는 게 팔팔 날뛴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게 아님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노는 게 가진 돈을 안 까먹는 最善의 方策이라는 말이 格言이 됐을까. 잘 모르면서 無理하게 서두르다가는 더 큰 損害를 보게 마련이었다.

    꼭 그런 理由는 아니지만 캐나다에서의 生活은 始作부터 좀 餘裕가 있었다. 恰似 海兵隊를 除隊하고 다시 陸軍에 入隊하는 氣分이었다. 南美 僑胞들은 그곳의 劣惡한 狀況에 빗대어 스스로를 海兵隊로 自處한다. 그에 비해 캐나다는 軍紀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陸軍쯤에 該當된다 하여 캐나다살이를 若干 쉬우리라 생각하는 것이 事實이었다.

    그런데 時間이 지나면서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始作했다. 于先 돈 씀씀이가 장난이 아니었다. 캐나다와 南美의 國民所得이 열 倍程度 差異가 나는데 돈의 쓰임새도 그와 比例했다. 처음부터 支出을 줄여야겠다고 안달했건만 한 달이 지나자 파라과이에서라면 一 年은 살 수 있는 돈이 날아갔다. 돈이란 所得이 높은 나라에서 벌어 낮은 나라에서 써야 한다는 平凡한 理致가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더 답답한 것은 캐나다에서 사람 사귀기가 힘들다는 點이었다. 파라과이는 賃金이 낮아 職場生活을 하는 僑民이 드물고 大槪가 衣類와 관계된 自營業을 한다. 直接 勞動力은 原住民을 利用하고 僑民은 흔한 말로 社長님이 되어 時間 餘裕가 생긴다. 元旦 供給에서 그 原緞을 자르는 일, 裁斷된 옷감을 박아 옷을 完成시키는 過程을 거쳐 옷을 파는 日까지 全過程에 韓國 僑民이 서로 連結되다 보니 僑民 間에 交流가 頻繁할 수밖에 없다.



    그에 反해 캐나다 僑胞들은 社會의 下層構造에서 直接 몸으로 뛰다 보니 經濟的 餘裕가 있는 사람들도 몹시 바쁜 生活을 하고 있었다. 또 僑胞 사이에 職業의 有機的 連帶가 없는 탓인지 ‘家族’말고는 別 關心이 없어 보였다. 韓人이 運營하는 商店에 일부러 들락거려 보았지만, 特別 顧客으로 待遇할 뿐 津한 同胞愛는 느낄 수 없었다.

    ‘나도 지렁이는 좀 아는데…’

    “여보세요!”

    電話 發信音이 繼續 이어져도 應答이 없어 끊으려는 참에 受話器 저便에서 느릿한 音聲이 들려왔다. 조금은 귀찮다는 듯한 乾燥한 音聲은 자다 깬 것임에 분명했다. 時計를 보았다. 午後 두 時. 벌건 대낮에 낮잠을 즐기는 사람과 禮儀를 갖추어가며 通話를 한다는 게 썩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내 쪽에 事情이 있다 보니 조금 참기로 했다.

    “지렁이를 잡는다고 해서 電話를 드렸는데요.”

    “네, 그러세요? 어디서 픽업하면 될까요?”

    밑도 끝도 없이 單番에 만나자는 얘기부터 나왔다.

    “事實은 移民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지렁이를 어떻게 잡는지도 모르고요.”

    조금의 親切과 配慮 같은 것을 바랐는데 電話 속의 人物은 最小限의 事務的 禮儀도 無視하고 건성으로 對答했다.

    “住所가 어딘데요?”

    住所를 말하자 蛇足을 달지도 않고 알겠다며 午後 여섯 時까지 門 앞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내 意向은 묻지도 않고 一方的이었다. 簡單하게 情報나 얻어보려던 電話가 一瀉千里로 進展되자 오히려 곤혹스러웠다. 오늘과 來日은 볼일이 있다는 핑계로 다음날 같은 時間으로 約束을 定했다. 그래도 뭔가 準備해야 할 것이 있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相對는 長靴와 비옷을 準備하라고 마지못해 일러주고는 一方的으로 電話를 끊었다. 지렁이는 어디 가서 어떻게 잡는지 따위의 雜多한 궁금症은 물어볼 틈도 없었다. 말하자면 電話 한 通話로 簡單히 就職이 된 셈인데 정작 내가 할 일이 어떤 것인지 全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믿는 구석은 지렁이를 만지는 일이라면 어느 程度 自身이 있다는 것이었다. 파라과이로 移民 가서 지렁이를 미끼로 낚시를 해본 經驗이 있었다.

    새로 온 移民者나 庶民을 相對로 恒常 바겐세일을 하는 割引賣場을 뒤져 長靴와 비옷을 救했다. 粗雜하지만 값이 싼 ‘메이드 認 차이나’ 製品이었다. 하지만 삽이나 곡괭이로 땅을 파서 지렁이를 잡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方法이 있는 건지 도무지 感을 잡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가끔 雜동사니를 사던 僑胞 便宜店에 들러 손님이 뜸할 때를 기다렸다. 語塞함을 감추려 내 딴에는 너스레까지 떨다가 슬쩍 話題를 지렁이로 돌렸다.

    “지렁이를 잡는 일이요? 經驗삼아 해보는 것도 괜찮지요. 처음에는 다 그러면서 始作하는 거지요. 只今 僑胞 社會의 터主大監들 中 뽑새 出身이 어디 한둘입니까?”

    “그럼 社長님께서도…?”

    “아닙니다, 나는. 우리 집사람이 하루 밤 나갔다가 氣怯을 하고 속옷까지 적셨으니 뽑새 出身이랄 것도 없지요.”

    便宜店 主人은 겉으로 본 느낌과는 달리 率直한 데가 있었다. 어느 程度 成功하고 보니 移民 草創期에 겪은 苦生이 부끄러울 것도 없는 模樣이다.

    “뽑새라니요, 그건 뭡니까?”

    “지렁이를 땅에서 뽑는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죠. 나같이 가게에서 計算器를 찍으면 찍새, 바닥을 닦는 淸掃 일은 딱새라 하죠. 아마 맨주먹으로 移民 와 밑바닥부터 기었다는 自嘲 섞인 말일 겝니다.”

    남의 가게 店員으로 짐을 나르고 計算器도 찍으면서 始作해 結局 큰 가게의 主人이 되었으니 그 苦生이 漠然하게나마 斟酌됐고 그에 對한 先入見도 어느 程度 가셨다. 그리고 지렁이는 땅을 파서 잡는 게 아니라 밤에 밖으로 기어나온 것을 손으로 잡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名色이 就職이라고 出勤時間까지 定해졌지만 나를 데리러 온다는 사람의 이름이나 人相着衣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서성이는 내 앞에 時間만은 正確하게 낡은 밴 트럭 한 臺가 와서 멈췄다. 트럭은 낡기도 했지만 方今 戰爭터를 뚫고 온 軍用車輛처럼 진흙과 먼지가 덕지덕지 덮여 있었다. 말쑥한 차림의 人波 속을 누더기를 걸친 거렁뱅이가 闊步하는 格이었다. 이 트럭처럼 내 人生이 진흙탕으로 빠져드는 게 아닌가 하는 不吉한 豫感이 잠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車에 오르자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언젠가 큰 비가 지나고 濕氣가 눅눅히 밴 뒷골목에서 쓰레기桶 옆을 지날 때 맡았던 生鮮 냄새와 비슷했다. 運轉대를 잡고 있는 사람은 이런 雰圍氣에 썩 잘 어울렸다. 豫想대로 몸집이 크고 살집이 좋은 게 좀 鈍해 보였다.

    “他쇼!”

    생긴 대로였다. 멋대가리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길바닥에서 만났지만 그래도 初面이고 앞으로 因緣을 만들어갈 텐데 너무하다 싶었다. 그는 別달리 할 말이 없다는 態度였지만 그렇다고 나도 똑같을 수는 없었다. 나이를 짚어보니 나와 비슷하거나 두어 살 아래로 보였다. 나 亦是 남의 脾胃를 맞추는 데 익숙한 便은 아니지만 그런 것을 가릴 狀況이 아니었다. 이러저러한 내 넋두리에 默默히 運轉대를 잡고 있던 그가 아주 딴전을 치지는 않았는지, 내 말이 暫時 쉬어갈 무렵 自身을 紹介했다.

    “나 具社長입니다.”

    生氣潑剌한 미스 次

    몇 番인가 커브를 돌아 茶는 平凡한 家庭집 앞에 멈췄다. 나처럼 約束이 있었는지 車가 멎기 무섭게 ‘安寧하세요’라는 人事말을 던지며 젊은 女子가 올라왔다. 키는 작은 便이지만 통통하고 生氣潑剌한 몸놀림이 輕快했다. 내가 무엇을 하러 가는 身分인지도 잊은 채 옷매무새를 만지려다 머쓱해졌다. ‘내 나이가 몇인데…’

    알을 낳으러 河川으로 올라오는 鰱魚는 生殖機能 外에 다른 機能은 이미 退化되어 있다. 消化機能도 停止되어 胃 속이 말끔히 비어 있다. 그런데도 앞에서 먹이 같은 것이 움직이면 平素 習慣대로 달려들어 攻擊한다. 鰱魚낚시에서 별난 미끼를 다 쓸 수 있는 것도 鰱魚의 이런 習性 때문이다. 젊고 魅力的인 女子를 보면 나이를 먹어도 緊張되는 것은 이런 鰱魚의 習性과 相通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 타신 아저씬가보다. 安寧하세요, 미스 車예요. 그런데 오늘은 아저씨한테 자리를 뺏겼네.”

    그러고 보니 나는 運轉席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고, 트럭에서 자리다운 자리는 이것 하나뿐이었다. 琉璃窓은 앞과 뒤쪽에만 있었다. 뒷자리로 가는 젊은 아가씨를 보며 나는 어정쩡할 수밖에 없었다. 應當 앞자리를 젊은 아가씨에게 讓步해야겠지만, 나이로 따져서 선뜻 應할 것 같지 않았다.

    自動車는 골목골목을 돌고 돌며 나말고도 다섯 名을 더 태우고 나서야 市內를 빠져나갔다. 都市 外郭으로 나가자 道路도 넓어지며 듬성듬성 아파트 群落이 보였다. 토론토에 온 지 한 달이 지났지만 都市 外郭으로 나오기는 처음이었다.

    都市 外郭으로 빠져나가자 建物의 規模가 漸漸 커지며 깨끗해져 나 혼자만 속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자리를 미스 車에게 讓步하지 않은 걸 多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敎授님의 講義 內容을 놓치지 않으려는 模範生처럼 큰길의 表紙가 나올 때마다 그 이름을 記憶하느라 온 精神을 쏟았다. 머리 속에 白紙를 펼쳐놓고 略圖까지 그려나갔다.

    미스 車가 車에 오를 땐 豫想이 빗나가는 줄 알았다. ‘지렁이잡이’로 돈벌이에 나서는 사람이라면 후줄근한 勞動者風日 거라고 豫想했는데, 그女의 外貌가 出衆했기 때문이다. 生疏한 일을 나가며 凄凉한 氣分에 젖어 있던 나에게 그女는 적지 않은 慰安을 주었다. ‘저렇게 멋쟁이 아가씨가 하는 일이라면 지렁이잡이도 어엿한 職業일 것이다.’ 그러나 市內를 돌며 한 사람 한 사람 태울 때마다 처음 豫想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車는 하이웨이를 한時間 班을 내달린 뒤 갓길로 빠졌다. 到着한 곳은 골프場이었다. 이미 어두워진 골프場은 아무도 없이 寂寞했다. 넓은 駐車場 한 便에 車를 세우고 앞뒤 門을 열자 사람들이 내렸다. 밴 트럭 뒷門과 椅子 사이의 空間은 지렁이를 잡을 때 쓰는 道具로 가득했다. 미스 車를 爲始해 네댓 名은 주섬주섬 道具를 챙겼지만 서너 名은 나와 같이 멀뚱하게 서 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도 나와 같은 初行者였다. 具社長은 初步者들을 세워놓고 指示 事項을 說明했다. 자유스러운 雰圍氣였지만 初步者들은 訓鍊所에 막 끌려온 新兵들처럼 고분고분했다.

    뽑새들의  지렁이  잡이
    날씨가 더워지며 本格的인 지렁이철이 되었다. 가까운 골프場에는 여러 臺의 車에서 사람을 풀어 북새통이 되기도 했다. 사람이 많으니 問題가 생기기도 했는데 지렁이 도둑이 골칫거리였다. 이곳을 주름잡던 韓人僑胞들은 이미 손을 뗀 狀態이고, 代身 東南亞에서 밀려온 이들의 판이 되었다.

    500마리씩 담은 지렁이자루는 一一이 갖고 다닐 수가 없어 標的이 될 만한 나무 밑에 모아두게 마련이다. 지렁이 잡는 데 精神이 팔려 기다 보면 種種 엉뚱한 곳에 있을 때가 있다. 그것을 아는 도둑들이 고양이처럼 기어와 훔쳐가버리면 어디 대고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廣告 內容과는 달리 舊社長은 좋은 農場이나 골프場을 多數 確保해 놓고 있지 못했다. 작은 農場들이 있기는 했으나, 農事철이 되어 콩이나 옥수수를 심고 나니 죽으나 사나 골프場밖에 없었다.

    農場 지렁이는 잡기 쉬워 모두 歡迎했지만 農事철이라는 季節的 限界가 있었다. 골프場 지렁이는 잔디 뿌리 때문에 잘 빠져 나오지 않는 代身 발소리에 느린 便이고, 農場 지렁이는 물렁한 흙이라 잘 빠져 나오지만 代身 빨랐다. 그래도 大多數가 農場 지렁이를 選好했다.

    지렁이는 토론토에서도 北쪽과 西쪽에서만 잡힌다. 北쪽과 西쪽으로 300km에서만 많이 잡힌다니 異常한 노릇이었다. 어째서 다 같은 땅인데 토론토에서만, 그것도 北쪽과 西쪽에서만 많이 잡히는 것일까. 具社長은 캐나다에서가 아니라 ‘世界에서 가장 좋다고’까지 토론토 지렁이를 내세웠다.

    모두가 떠날 準備를 하다

    여름이 깊어지자 토론토의 날씨는 韓國과 달리 비가 오지 않았다. 오더라도 땅 속까지 적시지 못하고 가랑가랑해 지렁이의 作況이 줄어들었다. 單價는 올랐지만 收入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여름에는 낮의 길이가 훨씬 길어져 지렁이 잡는 時間이 그만큼 짧아졌다.

    반갑게도 미스터 리에게 永住權이 나와 그는 제대로 된 工場에 就職을 했다. 하지만 놀이삼아 週末이면 때때로 夫婦가 함께 나와 副收入을 올렸다. 正常軌道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그 동안 일을 쉬는 날이면 鄭兄 집을 訪問하는 사이가 되었고 술도 가끔 마셨다. 그와는 앞으로 오랫동안 親舊가 될 것 같은 豫感이 들었다. 無骨好人이랄까. 勞動 現場에서 뼈가 굵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거친 데가 없었다. 本人 말로도 싸움질이나 쌍소리 한番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神父님으로 만들려던 天主敎 家庭의 背景 때문이리라. 아무래도 鼎形네는 조용하고 賢明한 夫人이 그 代身 主演을 맡아야 할 일이 많아 보였다. 이미 여러 위니펙 出身 女子들이 整形 婦人을 큰언니로 부르며 따랐다.

    드디어 鼎形에게도 永住權이 發給됐다. 이제 그도 슬슬 떠날 準備를 할 수 있었다.

    “定型, 이제 領主權도 나왔으니 앞으로 뭘 하실 겁니까?”

    “글쎄요. 나는 해먹던 鎔接 일이나 繼續했음 좋겠는데 親戚들이 장사를 하라고 하네요. 經驗보다도 英語가 이 模樣이니 원….”

    四寸들이 定型을 믿고 한 말은 아닐 게다. 믿는다면 鄭兄 쪽이 아니고 그 夫人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鄭兄은 出勤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六兄弟 四寸들이지만 밑으로 셋은 동생이어서 定型의 序列은 딱 中間이었다. 그러나 나이상 序列은 따질게 못 되는 게 칼자루를 쥔 쪽이 그 쪽이니,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갈 수밖에 없는 處地였다. 때로는 訓戒까지 들으며 끌려다니다 보면 慇懃히 부아가 났던 模樣이다. 가시 없는 定型이지만 오래 된 사람의 눈으로 새로 移民 온 사람이 얼마나 寒心하게 보이는지를 鄭兄은 理解하지 못했다.

    그런 定型이 어느 날 귀가 솔깃한 情報를 갖고 왔다.

    “신발修繕소가 하나 있는데 四寸들 末路는 괜찮아 보인답디다. 근데 난 영 自信이 없어서요.”

    내 英語實力을 두고 勸하는 말이었다. 內容을 들어보니 내가 念頭에 두었던 條件과 大江 맞아떨어졌다. 一週日에 이틀은 쉬는데다 크리스마스 때까지 4個月間 일을 배우며 損益을 計算해보고 그때 가서 買入을 決定하는 條件이에서 더 마음에 끌렸다. 게다가 基本給을 조금 더해 俸給도 준다고 했다.

    이보다 더 좋은 條件은 없어 보였다. 요모조모 따져봐도 밑지는 데가 없었다. 그래도 損害보는 것은 時間인데 最小限 最低賃金은 쳐줄 模樣이니 내 立場에서 虛送歲月이라고만 볼 수도 없었다. 나는 어렵지 않게 結論을 내렸다. 勿論 生疏한 신발修繕의 作業을 내가 堪當할 수 있는가는 直接 눈으로 보아야 했다. 暫時 高等學校 時節 古木나무 밑에서 신발이나 가방을 꿰매고 앉았던 신기료 할아버지 눈앞에 떠올랐다.

    “아무래도 강형이 移民 先輩니까 먼저 자리를 잡으쇼. 나도 뒤따라 갈 테니….”

    鄭兄은 신발修繕所를 찾아가는 버스 안에서 비슷한 소리를 서너 番이나 했다. 四寸을 따라다니며 自尊心이 傷해서인지, 慇懃히 나에게 期待는 눈치였다.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었다.

    신발修繕소는 淸掃를 하지 않아서 지저분했으나 劣惡한 南美에서 눈높이를 限껏 낮춘 내게는 큰 問題가 되지 않았다. 한자리에서 25年을 했다니 장사가 아니라 職場이었을 게다. 主人은 이탈리아 老人이었는데 意外로 이탈리아語와 스페인語가 半쯤은 통해서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修繕이라 하여도 모든 걸 機械로 作業했다. 가게의 要求價格도 全혀 無理가 없었다.

    나는 時計를 25年 前으로 되돌려놓고, 그 자리에 나를 세워보았다. 老人은 壁에 빼곡히 붙였던 빛바랜 寫眞을 모두 떼어간다. 代身 그 자리에 나의 아름다운 寫眞을 그려본다. 피아노를 치는 아이들, 家庭用 미니밴, 잔디밭이 딸린 單獨住宅…. 하나하나 예쁘게 채워진다.

    一旦 지렁이잡이를 끝내야겠다고 決心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갑자기 일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서야 밤마다 조금씩 망가진 골病이 몸 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불쑥 破片처럼 밀고 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됐다. 허리가 빠지는 痛症과 눈알이 튀어나오는 壓迫感은 經驗이 쌓여도 나아지지 않았다. 후텁지근한 날은 數없이 달려드는 모기떼를 避하려고 겨울 점퍼까지 껴입고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에 흠뻑 젖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나는 먹을 게 없어 이 짓을 하는 건 아니다’고 數없이 뇌까렸다.

    잊지 못할 所重한 追憶

    지렁이잡이가 苦痛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車를 타고 내렸던 수많은 얼굴들. 그들은 앞으로 어느 곳에서 만나도 반갑게 人事를 나눌 것이다. 기막힌 事緣이 있어 남들 다 자는 밤을 새우며 지렁이를 잡았지만 다시 만날 때는 모두 다른 모습일게다. 골프場에 있는 蓮못에서 손가락 크기의 물고기를 잡아 매운湯을 끓여 술盞을 기울였던 일도 오래 記憶에 남을 것이다. 공친 날이면 일찍 撤收하여 차이나타운에서 夜食을 먹던 즐거움도 記憶할 것이다. 나이아가라 瀑布에 딸린 公園에서 도둑지렁이를 잡은 追憶도 잊지 못할 것이다. 60年 前에도 똑같은 方式으로 지렁이를 잡았다는 그리스 할머니들, 只今도 여름이면 날아와 한 밑천씩 잡아가는 여든 살 老軀들의 魔術師 같은 絢爛한 손놀림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PS : 미스 車가 지렁이 트럭의 衝突 事故로 病院에 入院했다는 消息을 接한 때는 신발修繕所에서 한참 技術을 익혀가던 무렵이었다. 손끝에 밴 풀물이 말끔히 벗겨진 代身 손톱 밑에는 까만 때가 끼어 있었다. 그女는 이 事故로 脊椎를 다쳐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휠체어 身世를 지게 되었다. 그러나 내 지렁이 體驗記 겉張에는 퉁기듯 生氣 있게 車에 오르던 스물세 살 미스 車의 모습이 退色되지 않고 있다.

    “플래시는 各自가 사야 되는데 現金이 없으면 나중에 지렁이 값에서 빼면 되고 乾電池도 마찬가집니다. 오픈한 지 2週밖에 안 되고 아직 추워서 많이 잡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只今은 더울 때를 準備해서 演習게임을 한다 생각하면 便할 겁니다. 처음 며칠만 넘기면 되는데 사람들이 참지를 못해요. 어제도 두 名이 새로 탔는데 오늘 안 나와 플래시 값만 날렸어요.”

    말套로 보아 오래 붙어 있는 사람이 드문 模樣이었다. 하루 이틀 나오다 그만두는 사람이 많다 보니 첫 通話에서 一一이 곰살맞게 對할 수 없음이 조금은 理解됐다. 밤을 새워야 하니 낮에 잠을 자는 것도 當然했다.

    지렁이잡이는 說明만으로는 그야말로 簡單했다. 어두워진 땅에 플래시를 비춰 지렁이가 밖으로 나와 있으면 잡는 것이다. 삽이나 다른 연장은 必要 없었다. 그런데 實狀은 그리 簡單치가 않았다. 플래시는 이마에 다는 鑛山用을 使用했다. 한 곳에서만 잡는 게 아니라 자리를 繼續 移動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담는 桶을 옮기며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오른쪽 발목 위 정강이에 고무밴드로 깡筒을 固定시켜 잡은 지렁이를 넣었다. 왼쪽 발에도 똑같은 깡筒을 달았는데, 거기에는 톱밥을 넣어 두었다가 지렁이가 미끄러우면 손끝에 조금씩 묻혀 使用했다.

    準備를 마친 ‘뽑새’들은 금세 怪常한 모습으로 變했다. 나는 그런 服裝을 본 적도, 想像한 적도 없었다. 工事판의 勞動者나 논밭의 農夫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이건 거렁뱅이 中에도 完全 相距렁뱅이였다. 兩쪽 발에 거지의 象徵인 깡筒을 찼으니…. 미스 車도 例外는 아니었다. 열흘 先輩라고 完全武裝을 하는데 初步者들이 힐끔힐끔 보며 흉내를 낼 만큼 能熟했지만 몰골은 다를 게 없었다. 아리따운 아가씨의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女의 등에는 주먹 세 個 크기의 突出物이 달려 있어 마치 곱추 같아 보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6볼트 乾電池를 하룻밤 내내 쓰면 以內 흐릿해지니 두세 個를 直列로 連結해 나머지까지 말끔하게 쓰려고 조끼의 등에 지고 다니는 것이다.

    具社長은 지렁이를 잡는 자질구레한 要領까지 일러주지는 않았다. 알아서 해보라는 눈치였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한 臺씩 붙여 물고 어쩌고 하는 사이에 날이 完全히 어두워졌다. 그때서야 누군가 解散命令이라도 내린 것처럼 사람들은 비척이며 흩어졌다. 처음 온 사람들은 하루라도 먼저 온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발에 단 깡筒 두 個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덜렁거려 不便했다. 플래시를 머리에 固定시킨 고무줄 벨트는 너무 팽팽해 兩眉間이 옥죄어왔다. 한쪽 주머니에 넣은 4角 乾電池의 무게 탓인지 옷도 以內 뒤틀렸다.

    ‘자, 이제 始作이구나…’

    나는 멀리서 미스 車의 뒤를 따랐다. 그女는 허리를 구부려 플래시를 땅에 비추며 이리저리 옮겨다녔다. 그러고는 잡은 지렁이를 오른쪽 깡筒에 넣었다. 그女가 먼 곳으로 옮겨간 뒤 나는 담배를 한 臺 붙여 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空氣 때문인지 반짝이는 별들이 今方이라도 쏟아져내릴 것만 같았다.

    ‘자, 이제 始作이구나….’

    마음을 다잡으며 플래시의 스위치를 눌렀다. 불빛이 直進하여 멀리 서 있는 몇 그루 나무 속으로 박혔다. 플래시 빛은 생각보다 밝았다. 나도 미스 車처럼 허리를 굽혀 빛을 땅에다 비췄다. 意外로 運身할 수 있는 面積이 넓어 보였다. 잔디 사이에 섞인 민들레 꽃대가 鮮明히 識別되었다. 나는 목의 가늠과 불빛의 움직임을 익히느라 이곳저곳을 비춰보았다. 몇 番 練習하니 불빛의 調節은 어렵지 않았다. 지렁이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或是나 하고 미스 車가 있던 곳으로 자리를 옮겨 플래시를 켜자 瞬間的으로 지렁이 같은 것들이 보였는데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불빛을 옆으로 돌리자 亦是 비슷한 狀況이 繼續됐다. 다시 천천히 불빛을 옮겨보았다. 半쯤 나온 지렁이 두 마리가 보였다. 손을 뻗는 사이 구멍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다음엔 잽싸게 손을 뻗어 엄지손가락으로 지렁이를 눌렀다. 천천히 검指까지 合勢하여 지렁이를 잡았다. 힘을 주어 뽑았으나 땅에 박힌 꼬리가 쉽게 빠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손끝에서 지렁이가 꼼지락거리는 느낌이 오더니 쭉 빠져나갔다. 미끄러웠다. 빠져나간 지렁이는 瞬息間에 사라졌다. 어이가 없었다. 손끝에 지렁이의 미끄러운 粘液이 묻었다. ‘아, 톱밥!’ 나는 그제서야 톱밥을 생각했다. 손끝에 톱밥을 묻히니 粘液은 사라지고 까끌까끌 톱밥이 묻었다.

    다시 方向을 틀어 불빛을 옮기자 亦是 몇 마리의 지렁이가 보였다. 지렁이들은 손가락 두세 마디 길이만 밖으로 나왔고 꼬리 쪽은 하나같이 땅에 박혀 있었다. 그 中 길게 나온 놈을 골라 누르니 톱밥 때문에 미끄러지지는 않았지만 쉽게 빠져나오지 않고 버티다 끊어져버렸다. 꼬리가 땅 속에서 갈고리에라도 걸려 있는지 당기면 고무줄처럼 늘어나다가 툭툭 끊어졌다.

    千辛萬苦 끝에 한 마리를 穩全하게 뽑아낸 것은 대여섯 番의 失手를 反復한 後였다. 처음으로 잡은 지렁이를 들고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커다란 놈이었다. 8年의 낚시 經驗을 통해 지렁이를 떡 주무르듯 한 나였지만 징그러운 느낌을 받았다. 드넓은 골프場에서 하찮은 지렁이 한 마리를 잡아들고 이렇게 感傷的이 될 줄은 몰랐다. 進取的이지 못한 性格 탓에 한番 始作한 일은 쉽게 그만두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니기 일쑤였다. 그런 나 自身을 잘 알기 때문에 지렁이와의 因緣도 얼마間 繼續되리라는 豫感이 들었다. 지렁이 한 마리를 커다란 깡筒에 넣으며 虛荒한 생각도 들었지만 깡筒 속에 ‘딸깍’하고 떨어지는 感觸이 新鮮했다.

    지렁이는 땅 밖으로 나와 있다가도 人기척을 내거나 불빛을 들이대면 瞬息間에 땅 속으로 들어갔다. 될 수 있으면 조용히 움직이며 머리를 천천히 돌려 불빛을 살그머니 옮기며 미처 들어가지 못한 지렁이를 찍어 눌러야 한다. 먼저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검指로 맞잡아 천천히 당기면 쓰윽하고 빠져나왔다. 勿論 손끝에 톱밥 묻히기를 잊어서는 허탕이었다. 조금만 無理하게 당기면 영낙없이 끊어졌다. 그렇다고 無酌定 천천히 당길 수만도 없는 일. 말하자면 適當한 힘으로 당겨야 하는데, 그 ‘適當’이라는 程度가 쉽게 익혀지지 않았다.

    첫날은 새벽 어둠이 걷힐 때가지 기었는데도 채 半 깡筒을 채우지 못했다. 온 몸이 뻐근했다. 지렁이를 잡는 姿勢는 한 가지밖에 없다. 앉을 수도, 그렇다고 설 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바로 그 姿勢, 몸으로 取할 수 있는 가장 不便한 姿勢였다.

    軍隊에서 흔히 氣合으로 쓰이는 一名 오리걸음은 차라리 兩班이다. 이 걸음으로는 機動性이 鈍할 수밖에 없어 自然히 엉덩이를 조금 올리게 되었다. 그러자 발걸음이 便했고 騷音도 줄일 수 있었지만 종아리와 허벅지 筋肉에 無理가 왔다. 上體를 구부려 이마의 플래시로 땅을 비추다 보면 더 不便한 것은 눈이었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몰려 화끈거렸고, 눈알은 今方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壓力을 느꼈다. 처음에는 한참을 버티다 허리를 펴 休息을 取하며 담배 한 臺를 붙여 물었지만 버티는 時間이 차츰 짧아졌다. 이미 東트기 前에 담배 한 匣이 完全히 바닥났다.

    새가 울기 始作하면 나오라는 具社長의 말이 생각나 되짚어 나가려던 나는 暫時 어리둥절했다. 지렁이 잡는 일에만 沒頭해 기다 보니 엉뚱한 곳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잖아도 길을 잃을까 걱정하여 단단히 刻印해놓은 地點과는 正反對였고 距離도 相當히 멀었다. 어두울 때 찾아나가려 했다면 한참 헤맸을 것이다.

    새들은 어떻게 時間을 아는지 寂寞을 깨고 이곳저곳에서 울기 始作했다. 곧이어 날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稀罕하게도 새 소리가 들리자 지렁이들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끝없이 펼쳐진 잔디밭은 언제 지렁이들이 나왔었나 싶게 고요했다. 具社長은 車 안에서 잠을 잤는지 얼굴이 푸석푸석해 보였다.

    트럭 지붕 위에 가득 실려 있는 두負板 같은 나무 箱子는 지렁이 담는 그릇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뒤쪽에 있는 箱子만으로도 充分했다. 날씨 때문에 지렁이가 많이 잡히지 않기도 했지만 大槪가 初步者다 보니 제대로 잡은 사람이 몇 안 되었다. 古參 格인 미스 車가 第一 많은 여섯 깡筒을 잡았다. 初步者들은 놀라는 눈치였지만 具社長의 얼굴엔 아무런 表情이 없었다. 그 程度는 別것 아니라는 듯.

    “생각보다 많이 잡았네요.”

    驅使腸이 내 깡筒을 들여다보더니 건성은 아닌 듯 말했다. 初步者 中에는 單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내가 잡은 지렁이의 마릿數가 궁금했다. 마릿數로 세어서 돈을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쉽게 셀 수도 없는 지렁이의 머릿數를 어떻게 計算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計算方法은 意外로 簡單했다. 깡筒 위에서 1인치 程度 비었으면 그게 500마리였다. 나는 내 斟酌이 너무 빗나가 놀랐다. 예전 우물에서 물을 풀 때 흔히 두레박으로 쓰던 3.8ℓ짜리 큰 깡筒 가득히 담긴 지렁이가 500마리밖에 안 된다니….

    아내에 등 떠밀려 또 골프場으로

    具社長은 사람마다 잡은 지렁이 數字를 手帖에 적고 돈은 一週日에 한 番씩 計算한다 했다. 지렁이를 담았던 깡筒은 깨끗하게 비워 물氣를 除去했다. 톱밥은 물에 젖어 덩어리진 것들은 골라 버리고 나머지는 한데 모아 큰 자루에 넣었다. 잡은 지렁이는 精誠을 들여 꼼꼼히 챙겼다. 잘못 處理하면 다른 것까지 죽어 今方 썩는다고 했다. 먼저 豆腐 모板 같은 箱子에 지렁이 500마리를 쏟아놓은 다음 거기에 톱밥을 0.5ℓ쯤 뿌렸다. 그리고 떡고물을 묻히듯 휘휘 저으니 지렁이는 톱밥을 뒤집어쓰고 대굴대굴 굴러다녔다.

    톱밭에 버무려진 지렁이는 몸을 늘여 밑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서로들 밑으로 들어가려고 惹端이다 보니 箱子 안은 지렁이로 부글부글 끓었다. 지렁이는 그렇게 자리를 잡으며 밑으로 가라앉았다. 죽은 지렁이는 골라내고 豆腐 모板처럼 차곡차곡 쌓으니 하루 作業이 끝났다. 열 판이면 5000마리, 스무 판이면 萬마리…. 計算하기도 쉬웠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車輛이 뜸한 길을 올 때와는 反對로 되짚어 달렸다. 밤을 새운 一行은 파김치가 되어 채 하이웨이로 들어서기도 前에 골아 떨어져 코를 고는 사람도 있었다. 올 때와는 反對로 내가 第一 늦게 車에서 내렸다.

    집으로 돌아오자 疲勞가 掩襲해왔다. 間或 밤낚시를 가서 밤을 새운 적도 있었지만 그건 神仙놀음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정작 잠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은 더욱 말똥해졌다. 꼭 무엇에 홀렸던 것 같았다. 밤을 새워 골프場을 기며 지렁이를 잡는 사람이 있으리라곤 想像조차 못해본 일이었다.

    일을 繼續하느냐 마느냐를 決定 내리지 못한 채 잠이 들었을 때 舊社長에게서 電話가 왔었나보다. 아내는 짧게 픽업時間만 傳해주었다. 어제와 같은 時間, 같은 場所였다. 나는 等 떠밀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間 쉰다 해도 當場 먹고 살기가 어려운 形便은 아닌데도, 아내는 無酌定 논다고 생각해서인지 慇懃히 勞心焦思하는 눈치였다. 두 살, 네 살바기 애들의 어미로 自身은 돈벌이에 나설 形便이 못 되다 보니 더욱 그랬는지 모른다.

    大衆交通을 利用할 心算으로 집을 求하러 돌아다니다가 낡았지만 交通만큼은 便利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地下鐵 ‘倍더스트’驛과 ‘크리스티’驛의 中間地點이었다. 그러니 地下鐵을 타고 내릴 때 兩쪽 驛을 모두 利用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아내가 英語學校에 다니며 데리고 다니던 두 아들 녀석이 눈이 퉁퉁 부어서 돌아왔다.

    “엄마는 나빠! 맥도널드 안 사주려고 크리스티에서만 내려.”

    아이들은 맥도널드 햄버거가 꽤 먹고 싶은 模樣이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햄버거 값을 아끼려고 商店이 있는 배더스트役을 避해 다녔던 模樣이다. 그런 아내가 김밥을 말고 있었다. 나는 애써 힘든 내色을 하지 않았고 아내 亦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새로운 일을 始作하는 男便에 對한 期待로 김밥을 말고 있는 아내에게 蛇足을 달 수 없는 일이었다. 設使 일을 그만두려고 作定했어도 이런 狀況이 되면 누구라도 안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트럭에 올라타보니 어제 탔던 사람 中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代身 鄭兄 內外와 ‘미세스 리’로 불리는 女人이 새로 同乘했다. 慶尙道 사투리가 억세고 活潑한 미세스 리와, 다부지면서도 차분히 가라앉은 雰圍氣의 定型 內外가 타자 車 안의 雰圍氣는 많이 바뀌었다. 그女는 귓속말은 決코 하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다. 든든한 미드필더가 必要한 곳으로 착착 공을 配給해 재미난 蹴球 競技를 이끌어가듯, 미세스 理는 初面이나 다름없이 語塞해하던 사람을 덩달아 親하게 만들었다.

    “가마이 있다꼬 누가 賞을 줌니꺼.”

    미세스 리는 끝에다 ‘賞을 줍니꺼’라는 말을 달고 다녔다. 미스 車와 이들은 모두 親分이 있는 사이였다. 미스 車를 통해서 새로 타게 되었으리라 斟酌했다. 그女는 定型을 兄夫라 불렀다. 그런데도 鄭兄은 妻弟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버티고 앉아만 있었다. 王초랄까 乾達世界의 兄님이라고 할까. 몸으로 世上事와 부딪치며 살아온 人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女들이 對話 中에 언니라는 呼稱을 자주 쓰는 것으로 보아 因緣이 깊은 사이로 보였다.

    作業準備는 前날과 똑같이 反復되었다. 처음 나온 미세스 里의 뒷바라지는 미스 車가 맡았고, 鄭兄은 語塞한 듯 곁눈질을 하다가 슬그머니 내 쪽으로 붙었다. 하루지만 해본 肝이 있다고 내가 示範을 보이는 格이 되었고, 鄭兄은 나를 따랐다. 鼎形夫人은 지렁이를 잡으러 온 게 아닌 듯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거지가 따로 없네!”

    鄭兄은 帽子를 쓰고 오지 않아서 러닝셔츠를 벗어 劍道選手처럼 머리에 감았다고. 그 위에 플래시 벨트를 맸다. 맨머리에 그냥 벨트를 매면 땀이 배고 옥죄기 때문이다. 허리띠에는 6볼트짜리 묵직한 死角 乾電池를 방망이手榴彈 차듯 매어 달고, 발에도 3.8ℓ들이 깡筒을 足쇠처럼 찬다. 普通 사람의 아내라면 男便이 宇宙服度 아니고 이런 怪常한 거지의 몰골로 變해갈 때, 憐憫의 情이거나 絶望으로 슬픈 表情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定型 夫人은 冷靜하리만치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어찌 보면 그런 處身이 가까운 사람에게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當事者에 對한 賢明한 配慮일는지도 모른다.

    “거지가 따로 없네!”

    語塞했던지 定型이 한마디 거들었다.

    다리에 깡筒을 차니 종아리 神經이 저려왔다. 前날 맸던 고무밴드 자리가 손가락 두께로 陷沒됐는데 그 자리에 다시 밴드를 買戾니 몹시 저렸다. 고무밴드란 게 自動車 속 타이어를 大略 3cm 너비로 粗雜하게 잘라놓은 것이라서 제대로 맞는 사이즈가 없었다.

    눈치를 보던 定型이 슬그머니 내 쪽으로 붙어 우리는 自然스레 한 組가 되었다. 온몸의 筋肉이 안 아픈 데가 없어 자주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일을 마치고 보니 놀랍게도 네 깡筒, 無慮 2000마리나 잡았다. 지렁이는 느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좀 誇張하면 世上에 지렁이처럼 빠른 것이 없다. 번개 같다거나 눈 깜짝할 새라는 말이 지렁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고무줄을 늘였다가 한 쪽을 놓으면 瞬息間에 줄어들 듯 지렁이가 逃亡가는 模樣도 꼭 그랬다. 크기도 普通이 아니어서 갓 뽑아 길어졌을 때가 平均 20cm 程度이고 가끔은 30cm에 達하는 놈들도 있었다. 勿論 收縮되면 굵어지고 길이는 半으로 줄지만 몸을 全部 밖으로 드러내는 지렁이는 없었다. 半쯤만 밖으로 나왔다가 무슨 기척이 있으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고무줄처럼 퉁겨 사라졌다.

    뽑새들의  지렁이  잡이
    不過 이틀째인데 500마리 깡筒을 채워 비닐 封紙에 담아내기를 네 番 했으니 2000마리가 틀림없었다. 혼자서 대견한 마음이 들어 어린아이처럼 누구에게 稱讚이라도 듣고 싶은 心情이었다. 그런데 自動車로 돌아와 箱子에 담는 마무리 作業을 하는데 問題가 생겼다. 비닐封紙에 담아놓은 탓에 밑에 깔려있는 지렁이가 숨을 쉬지 못하여 折半이 窒息死해버린 것이다.

    驅使腸이 言質을 주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脫出을 막는다고 入口까지 꽁꽁 묶어놓아 被害가 더욱 甚했다. 돈으로 치면 얼마 안 되지만 크나큰 挫折을 맛보았다. 그러고 보니 미스 車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모기 網으로 만든 신발주머니 模樣의 지렁이자루를 갖고 있었다. 위에는 끈을 길게 달아 주머니 入口를 칭칭 동여매놓으면 지렁이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끈의 一部는 運搬할 때 손잡이로 쓰였다.

    “아시는 줄 알았죠. 大槪 집에서 아주머니들이 만들거든요.”

    具社長度 徹底히 못박아놓지 못한 게 未安한 模樣이었다. 내겐 오히려 지렁이 같은 하찮은 微物도 숨을 쉬어야 산다는 事實이 새삼스러웠다. 具社長은 날씨가 더워지면 얼굴이나 손에 모기藥을 바르는데 잘못해서 한 방울이라도 묻으면 지렁이가 全滅할 수 있다는 事實도 일러주었다.

    이런 光景을 한 발 물러서서 조용히 바라보던 鄭兄 夫人이 미스 車와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定型을 통하여 지렁이자루는 自己가 만들어드릴 테니 걱정 마시라는 뜻을 傳해왔다. 天常 내가 만들어야 할 텐데 裁縫틀度 없고 또 모기網은 어디서 사야 하는지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意外였다.

    “집사람이 미싱 技術者거든요.”

    定型의 말을 듣고서야 疑訝함이 풀렸다. 내가 目禮를 하자 그女도 答禮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層階도 오르지 못할 만큼 다리가 아팠다. 다운타운의 오래된 집들이 大槪 그렇듯이 層階는 狹小하고 가파르다. 雜동사니를 넣은 손가방度 주체하기 어려웠다. 할 수 없이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왼손으로 欄干을 잡은 채 오른손으로 발을 받쳐 올리며 겨우 層階를 올라갔다. 이런 모습을 家族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될수록 조용히 움직였다. 밤새껏 지렁이를 주무른 손은 열 番을 씻어도 비릿한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正말 냄새가 가시지 않는 건지, 내 코에 냄새가 밴 것인지 區別되지 않았다.

    便器에 앉을 땐 補助物에 依支해야 할 만큼 허벅지에도 알이 박혔다. 종아리에도 알이 박혔지만 굳이 내色하지 않았다. 時間이 지나면 自然히 좋아질텐데 그런 일로 아내 앞에 초라해지기는 싫었다. 層階는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욱 힘들다. 무릎關節이 잘 꺾이지 않아 兩손으로 欄干을 잡은 채 뻗정다리로 내려가야 했다.

    다음날 豫想대로 整形 夫人은 보이지 않고 政形만 나왔다. 온몸이 매맞은 사람처럼 녹초가 된 나와는 달리 鄭兄은 逍風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멀쩡했다. 整形 夫人이 만들어 보내온 지렁이자루는 規格을 맞추어 百貨店에 納品하는 物品처럼 반듯했다. 함부로 헤집어 지저분한 지렁이를 담기엔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鄭兄은 지렁이잡이에 목을 매는 形便인 것 같지는 않았다. 나에게도 자잘한 神經을 쓰지 않게 해 便했다. 나는 靈惡해서 맺고 끊기를 잘하는 사람이나, 公과 私를 明確히 區分하는 사람에게는 늘 緊張해서 주눅이 드는 便이다. 술자리에서도 中間에 자리를 뜰 일이 있으면 슬그머니 없어지는 그런 性格의 사람들에게 好感이 갔다. 定型이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鄭兄은 내가 한 깡筒을 채우고 ‘담배 한 대 핍시다’ 하면, 自己 깡筒은 介意치 않고 ‘그럽시다’ 하고 맞장구를 치는 便이었다. 그저 時間 죽이기나 하는 模樣새였다.

    그런데 異常한 것은 나중에 보면 나와 비슷하게 지렁이를 잡았는데도 힘들어하는 氣色이 없다는 點이었다. 처음 얼마間은 모두들 안 아픈 데가 없어 끙끙거리는데 鄭兄은 달랐다. 우린 正式으로 人事를 튼 적은 없지만 가까운 사이가 되어갔다. 바람이 불거나 달 밝은 날은 지렁이가 나오지 않는다더니 그 말대로 보름달이 구름도 없는 하늘에 떠오르자 正말로 지렁이는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가끔 눈에 띄는 것들도 겨우 손가락 한 마디나 나왔다가 불빛이 닿기가 무섭게 사라졌다.

    定型과 나는 큰 圓을 그리며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자리를 잡았다. 마침 蓮못이 있어 裝飾用으로 組立한 돌에 걸쳐 앉았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景致였다. 蓮못에서는 도랑으로 물 빠져나가는 소리가 졸졸 들렸다. 골프場의 잔디는 草原의 丘陵처럼 물결치며 달빛에 드러났다. 군데군데 무리진 나무숲은 더욱 짙어 보였다.

    “한盞 하실라우? 술 좀 있는데.”

    마침 위스키 500cc病을 갖고 온 게 있어 가방에서 꺼냈다. 눈만 감으면 지렁이의 歡迎 때문에 깊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어 盞 마셔두려고 갖고 온 위스키였다.

    “그럽시다. 그러잖아도 생각나던 참인데.”

    鄭兄은 格式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먼저 한盞을 따르니 辭讓하는 法도 없이 한입에 털어넣은 다음 答盞을 보내왔다.

    “독한데요, 이놈의 위스키는….”

    처음 파라과이로 移民 갔을 때가 떠올랐다. 날씨는 連日 40°C를 넘는 殺人的인 더위에 모든 게 甚難해 술을 마시는 일이 잦았다. 燒酒에 길들여진 나에게 麥酒는 너무 싱겁고, 위스키는 너무 毒해서 그것마저 甚難했다.

    鄭兄도 캐나다에 온 지 6個月밖에 안 됐다고 했다. 身上에 關한 얘기를 하다보니 술盞이 매끄러웠다. 얼음도 없는 위스키가 미지근해 더 毒했지만 김밥 按酒가 제格이었다.

    “이깐 게 무슨 일이나 되나요? 어떤 날은 하루 終日 줄에 매달려 일을 할 때도 있었는데…”

    鄭兄은 韓國에서 鎔接工으로 일했다고 한다. 나는 學校와 다방 이야기, 鄭兄은 工事판과 대폿집 얘기밖에 몰라 共通點이 없었지만 時間을 죽이는 데는 그게 오히려 흥미로웠다. 鄭兄은 여섯 살 때 父母兄弟를 모두 잃어 孤兒가 되었다. 早失父母한 것이 오히려 多幸인지 내 斟酌과는 달리 肉親의 情을 그리워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남 얘기하듯 차분히 이어갔다. 늘 혀를 차며 안쓰러워하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큰아버지에 依託하게 되었다. 篤實한 가톨릭 信者인 큰아버지는 定型을 神父로 만들려 했는데 八字가 아니었던지 그해에 마침 學生募集이 없었다.

    “자리잡는 대로 招請할 테니 軍隊부터 다녀오거라”

    큰아버지가 아르헨티나로 移民을 떠나면서 鼎形에게 한 約束이었다. 膝下에 떡대 같은 아들 여섯을 두었다 해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丁氏네 六兄弟’로 잘 알려진 어른이 바로 定型의 큰아버지였다. 거기에서 자리를 잡자 이番에는 아들들이 하나씩 캐나다로 再移民을 떠났다. 食口가 많다 보니 그 時間이 여러 해 걸려 定型의 이민도 뒤로 미루어졌다. 안 갈 수도 있는 軍隊를 마친 鄭兄은 無作定 移民만을 기다리고 있기도 따분해서 鎔接일을 배웠는데 一流 技術者가 될 때까지도 감감 無消息이었다. 캐나다 移民 門이 자꾸 좁아졌기 때문이다.

    “生前 떠돌다 들어앉으려니 假定이라는 게 미치게 답답합디다. 마누라는 낯선 女子 같아 語塞하기만 하고, 이렇게 지렁이를 잡는답시고 나오니 살 것 같습니다.”

    定型이 지렁이 잡기에 悠悠自適 나선 理由였다. 整形 內外는 늦게 結婚해 이제 4個月째인 新婚夫婦였다. 鄭兄은 내 집이라고 어디다 居處를 定해놓고 석 달 以上 살아본 적이 없다 했다.

    술이 바닥나자 우리는 어느새 오래된 親舊가 되었다. 하루쯤 공치기로 하고 일찍 復歸했다. 다른 사람들도 事情이 우리와 비슷했던지 거의가 나와서 나머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같이 完全히 공을 친 사람은 없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길을 떠나니 마치 午前 授業만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學生처럼 마음이 들떴다.

    “來日은 날씨가 좋답니다.”

    正確히 말하자면 새벽에 돌아와 저녁에 나가니 같은 날인데도 具社長은 꼭 來日이라고 말했다. 具社長은 돌아오는 동안 “來日은 날씨가 좋다”는 말을 서너 番 反復했다.

    具社長의 말과는 달리 午後가 되면서 날씨가 꾸물거리더니 間或 빗발까지 보였다. 그 동안 쉬지 않았고 날씨도 안 좋아 하루쯤 젖혀볼까 하다가, 一週日値 지렁이 값을 받는 날임이 떠올랐다. 돈 때문에 나가는 건 아니나 얼마나 벌었는지 몹시 궁금했다.

    그런데 날씨와는 달리 지렁이가 꽤 많이 나와 있었다. 어렵지 않게 세 깡筒 1500마리를 잡자 드디어 비가 굵어졌다. 鄭兄은 비옷을 準備하지 않아 이내 온몸이 비에 젖었다. 定型을 配慮하여 裝備를 거뒀다. 駐車場으로 나가보니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具社長마저 車를 몰아 어디론가 가버려 비를 避할 마땅한 場所도 없었다. 具社長은 사람들을 내려놓고 다시 車를 몰고 갔다가, 作業이 끝날 때쯤 돌아올 때가 많았다. 기다려도 그는 좀체 돌아오지 않았다. 날씨까지 추워져 몸이 덜덜 떨렸다.

    “갑시다.”

    定型이 두 손으로 喇叭을 만들어 몇 番 소리를 질렀지만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具社長은 그렇다 치고 원, 사람들이 참!”

    그대로 턱없이 기다리느니 차라리 가까운 곳에서 지렁이를 잡으며 기다리는 便이 덜 無聊할 것 같았다. 그런데 땅에 플래시를 들이대자 啞然失色할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잔디가 온통 지렁이판이었다. 마치 여기저기 라면을 吐해낸 것처럼 지렁이들이 널려 있었다. 처음에는 자루에 잡아 넣은 지렁이가 쏟아져나온 걸로 錯覺할 程度였다.

    鄭兄도 나처럼 섬뜩한 생각이 드는지 말을 잊고 暫時 서 있었다. 都大體 땅 속에 얼마나 많은 지렁이가 있기에 온 잔디밭을 벌겋게 뒤덮는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具社長의 말이 생각났다. 지렁이 잡는 사람들에게는 날씨가 좋다는 말이 反對로 비가 온다는 뜻이었음을….

    하루에 4500마리를 잡다

    아침에 作業을 끝내고 보니 無慮 아홉 자루, 4500마리나 되었다. 스스로 놀랄 程度로 대단한 記錄이었다. 새벽이 되자 비는 그쳤다. 마침 지게 작대기같이 알맞은 막대기가 있어 兩쪽에 다섯 자루, 네 자루를 나누어 매달고 보니 막대가 휠 程度로 무거웠다. 어림잡아도 30kg이 넘는 무게였다.

    定型과 나는 우리만 감쪽같이 많이 잡은 듯한 우쭐한 마음이었는데, 나오는 사람마다 그 以上이었다. 미스 次는 無慮 萬마리를 넘겨 定型이 運搬을 도와줘야 했다. 미세스 理도 잡은 지렁이가 무거워 두 番에 걸쳐 運搬해 왔다. 女子는 오줌을 눌 때 앉아서 누어 지렁이를 잘 잡는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더니 正말로 지렁이에 關한 限 女子가 斷然 優勢했다.

    男子들은 한 깡筒을 잡아 놓고 허리부터 펴서 담배 한 臺를 붙이며 軍隊式으로 10分間 休息하는 데 비해, 女子들은 쉴 때에도 앉아서 쉬었다. 農事를 지어본 經驗이 있다는 金氏가 金을 賣渡 女子가 훨씬 잘 맨다고 덧붙였다. 男子들은 일어설 때 한 番에 벌떡 못 일어나고 손을 받쳐 조금씩 허리를 펴나갔다. 그런데 女子들은 달랐다. 허리를 툭툭 쥐어박으면 그만이었다.

    지렁이에 톱밥을 섞어 箱子에 매다는 뒷일을 모두 도왔는데도 時間이 곱절이나 걸렸다. 모두들 녹초가 되었다. 골프場은 언제 그랬냐 싶게 파란 잔디가 펼쳐졌다. 간밤에 꼭 꿈을 꾼 것 같았다. 비옷을 걸쳤다지만 젖기는 마찬가지였다. 비에 젖었는지 땀에 젖었는지 속옷까지 完全히 젖은 빨래였다. 車 안은 男子 냄새와 女子 냄새와 비릿한 지렁이 냄새가 뒤섞여 역겨웠다. 하지만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그런 냄새에는 이골이 났고 오늘은 기다리던 俸給날이기 때문이다.

    驅使腸이 이름이 적힌 封套를 돌렸다. 一週日 치였다. 캐나다에서 처음 벌어보는 돈이라 感懷가 새로웠다.

    ‘8(千마리)x 24($)=$192.00’

    겉封에 計算書 內容이 적혀 있었다. 지렁이는 1000마리當 24달러이고 내가 그 동안 잡은 지렁이가 모두 8000마리였다. 지렁이 값은 定해져 있지 않고 隨時로 變하는 데 大略 4달러쯤 한다. 캐나다 最低 賃金이 時間當 6달러를 조금 넘겼으니 30時間 程度 일한 金額이었다. 처음이라 그렇지 職場生活보다 못할 것 같지 않았다. 當場 미스 車나 미세스 리는 오늘 하루 벌이만으로도 職場生活 週給만큼 번 셈이었다.

    ‘밥이 없어 이 짓을 한다면 참으로 서글프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지렁이잡이를 當分間 繼續하리라고 作定했다. 가진 돈 덜 축내고, 낮 時間에 일도 볼 수 있고, 또 쉬고 싶으면 나가지 않는다고 누가 干涉할 사람도 없었다. 더구나 身分이 確實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安城맞춤이었다. 지렁이에 맛들이면 아무 일도 못한다더니, 아주 허튼 소리만도 아닐 성싶었다.

    캐나다에 居住하는 韓人의 職業은 크게 ‘그로서리(Grocery)’라 불리는 미니슈퍼와 職場生活 두가지다. 나는 英語를 몰라도 할 수 있다는 그로署理는 아예 考慮對象에서 除外시켰다. 파라과이에서 休日없이 하루 열다섯 時間 일하는 구멍가게에 鶴을 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이들 나이가 어려 勞動力이 問題였다. 아이들이 좀 컸으면 勞動力이 ‘하나 半’이라도 되겠지만 나는 完全히 ‘하나’에 不過했다. 勿論 職場이라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最低賃金 近處의 不安定한 雜일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음도 잘 알고 있다. 設使 能力 있는 사람을 알아 어느 職場이든 마련해줄 테니 마음대로 골라보라는 幸運이 찾아온대도, 내 英語實力으로 選擇할 수 있는 職場의 限界를 잘 알고 있었다. 結局 내가 찾아야 하는 職業은 10萬달러 程度 投資해서 ‘밥걱정’이나 면할 수 있는 ‘小規模 事業’이라는 結論이 나왔다. 單 險하고 힘든 일은 괜찮지만 時間이 많이 所要된다면 그것도 除外된다. 問題는 이런 事業을 어떻게 찾느냐였다.

    지렁이잡이도 時間이 지나며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밤을 꼬박 새우고 낮에 자야 하는 두더지生活이 고통스러웠다. 疲困하고 졸려도 눈을 감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睡眠狀態와 깨어 있는 사이의 꼭 中間에서 맴돌았다. 집안의 움직임이 또렷이 感知되어 잠 속으로 빠져들지 못하면서 稀罕하게, 四方에서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꿈이 繼續되었다.

    잔디밭이 아니라 머리 속에 窟을 뚫어놓고 高速道路에 車輛이 往來하듯 벌건 지렁이들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마디마디 지렁이의 收縮과 弛緩이 크게 擴大되어 또렷하게 떠올랐다. 어떤 때는 지렁이들이 등을 떠받치고 올라와 괴로워하다 깨어보면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러나 트럭의 덜컥거림이 자장歌가 되어 단잠에 빠지기까지 그렇게 많은 時間이 必要하지 않았다.

    지렁이를 主로 골프場에서 雜誌만 가끔은 農場에서도 잡았다. 토론토에선 잔디가 있는 곳에 지렁이가 있었다. 어떤 柳經驗 아주머니는 비가 오면 自己 집 庭園이나 가까운 公園에서 대여섯 깡筒씩 잡아 副收入을 올리기도 했다. 먼 곳으로 갈 때는 세 時間도 걸리지만 普通은 두 時間 以內의 距離였다. 처음에는 서너 時間을 貨物 칸 같은 車 안에서 보내는 게 그렇게도 無料하더니 車의 律動이 자장歌가 되면서 깨어보면 어느새 目的地에 와 있곤 했다.

    달리는 노래房 스타 ‘강춘이’

    그래도 가끔은 車안에서 흥겨운 파티가 벌어질 때도 있었다. 特히 아줌마들이 타는 날이 그랬다. 아줌마들이라고 하지만 還甲을 넘긴 사람들도 많은데, 우습게 보았다간 큰코다친다. 바로 뽑새의 援助 格인 百戰 老將들이다. 이들은 심심풀이로 가끔씩 나오는데 이들이 타면 于先 먹을거리가 豐富하다. 떡도 인절미나 빈대떡 等 多樣하고 참기름을 듬뿍 바른 참나물度 곁들인다. 勿論 空짜는 아니다.

    “자, 참기름들 목구멍에 발랐음 노래부터 한 曲調씩 돌려!”

    往年에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쿵짜라 쿵짝’에서 용케 버티던 사람도 어르신 아줌마들 앞에서는 용쓸 재주가 없다. 하지만 韓國 사람 둘 以上이 모이면 노래 잘하는 사람 하나는 있게 마련. 강춘이가 그런 사람이었다. 노래는 못하는 사람도 苦役이겠지만 들어주는 일도 普通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강춘이가 나타나면서 그런 苦役이 말끔히 가셨다. 노래를 어찌 그렇게 구성지게 뽑는지, 또 무슨 노래를 그리 많이 알고 있는지. 그의 노래는 洗練味와는 距離가 있었지만 구성지게 꺾어 넘기기는 羅勳兒도 저리가라할 程度였다.

    流行歌 歌詞라는 게 누구에게나 한때는 自己의 失戀얘기를 그대로 옮겨 쓴 것 같아 가슴 저리지만, 강춘이야말로 그렇게 보였다. ‘…술에 타서 마시고…’ 라든가 ‘야윈 두 뺨에 흘러내릴 때’ 같은 句節을 뽑을 때는 그대로 울어버릴 것 같았다. 스물일곱의 펄펄한 靑年이 무슨 恨이 있는 것일까. 그런데 實際로 그랬다. 강춘이는 失戀中이었다. 그 對象이 놀랍게도 미스 車였다. 장끼와 까투리가 한 쌍일 것 같지 않은 外貌를 가진 것처럼, 미스 車와 강춘이가 풍기는 雰圍氣도 많이 달랐다. 둘 사이에는 세련된 女子와 성실한 男子의 不協和音 같은 게 한눈에 보였다.

    具社長度 아줌마들 앞에서는 脈을 못추었다. 지렁이잡이에서 舊社長은 새까만 後輩에 不過했다. 아줌마들이 타면 그 날은 好況이었다. 그만큼 아줌마들은 하늘 한 番만 쳐다보면 諸葛亮처럼 그 날의 作況을 기막히게 알아내는 道士들이었다. 즐거운 觀光旅行을 떠나는 婦女會員처럼 먹고 마시며 시끄럽던 아줌마들이지만 아침에 돌아와보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돈에 戀戀하지는 않아 고생스레 빗속에서 잡아야 하는 날은 나오지 않았다.

    “글쎄, 한 十年 하니까 지렁이 냄새가 맡아지데. 놀고 있는 소리도 들리고….”

    우스갯소리겠지만 그런 感覺이 생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바꾸어 땅바닥을 기었을까 생각하니 肅然해졌다.

    1960年代 後半 海外 人力市場을 開拓하며 많은 젊은이가 西獨으로 外貨벌이를 떠났다. 男子는 鑛夫로, 女子는 看護員이나 看護補助員으로 나섰다. 그들은 契約이 滿了되자 故國으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제3국으로 視線을 돌려 삶의 터전을 開拓하기도 했다. 그때 많은 사람이 캐나다로 흘러왔는데 그들이 캐나다 移民의 開拓者이다. 草創期 移民者의 苦生은 미루어 斟酌할 만하다. 意思疏通이 不可能한 낯선 나라에서 榮州資格 없이, 때로는 숨어다니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밑바닥 일뿐이었다. 용케 職場을 잡은 사람도 한 푼의 돈이라도 더 벌려고 지렁이를 안 잡아본 사람이 없을 程度였다. 쉬는 날은 勿論이고 낮에는 職場, 밤에는 지렁이雜技의 두 職業을 同時에 뛰다 쓰러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사람이나 지렁이나 何如튼 밝히는 놈부터 작살난단 말야.”

    짓궂은 男子 하나가 慇懃히 女子 들으라고 陰凶을 떤다. 처음엔 그 많은 지렁이가 왜 밤마다 밖으로 나오는지 疑訝했지만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理由는 今方 알 수 있었다. 바로 交尾를 하러 나오는 것이었다. 사람은 하루살이나 굼벵이 지렁이 같은 下等生物을 하찮게 보지만, 지렁이의 交尾만큼은 그게 아니다. 精力이라면 四足을 못쓰는 사람이 본다면 군침을 흘릴 것이다. 急한 놈은 날이 채 저물기도 前에 벌써 기어나온다. 게으른 놈까지 나올 놈이 다 나오면 주둥이를 뾰족하게 뽑아서 입질을 始作한다.

    分明 지렁이는 雌雄同體라고 生物時間에 배웠던 記憶이 있는데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암수가 따로 있든 한 몸이든 두 마리가 交尾를 한다는 것은 儼然한 事實이었다. 지렁이가 人物 보고 宮合을 맞추지는 않겠지만 블루스 한 曲에 녹아 흐물거리는 꽃뱀이나 제비보다 오히려 뜸을 더 들인다. 그렇게 사랑에 成功하면 날 새는 것도 모르고 無我之境에 빠져든다. 새들에게 쪼아 먹히는 녀석도 不知其數다. 交尾中인 지렁이는 플래시를 비추어도 世上 모르고 붙어 있다. 女子들은 凶하다고 내숭을 떨지만 一擧兩得이란 말이 바로 交尾中인 지렁이를 잡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지렁이 주제에 每日 붙으며 約올리네.”

    강춘이가 투덜거렸다. 自己 處地를 빗대어 하는 말 같았다. 강춘이가 車에 타자 미스 車는 거북했던지 다른 車로 옮겨탔다.

    미세스 理도 들쭉날쭉이었다. 좋은 파트타임 職業을 잡았기 때문이다. 代身 男便인 미스터 리가 合流했다. 알고 보니 鄭兄 夫人이나 미스 車, 미세스 理는 모두 캐나다 南部 위니펙 出身으로 男便들은 永住權이 없었다. 全部들 고만고만한 新婚으로 永住權을 기다리는 中이었다.

    강춘이와 미스 車의 異常한 關係

    캐나다 南部에 위니펙이라는 조그만 都市가 있는데 몇 年 前 미싱技術者로 韓國 未婚女性 數百 名을 招請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全部가 採用되지는 않았다. 韓國 僑民이라고는 數十 世代에 不過한 地方都市에 數百 名의 젊은 아가씨들을 쏟아놨으니 위니펙은 그야말로 꽃밭이 되어버렸다. 마침 위니펙에 미스터 張이라는 靑年이 있었다. 그런대로 자리 잡은 家族들 德에 學校를 마치고 車까지 굴리며 빈둥대던 미스터 張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消息이었다.

    採用이 되었던 사람도 强制性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緣故가 있는 사람부터 차츰 토론토로 밀려들었다. 職場보다도 北極 白곰까지 내려올 程度의 추위가 더 問題였다. 英語도 잘하고 自動車도 있고 더구나 하는 일도 없는 미스터 張의 車에는 언제나 아가씨들이 가득 타고 다녔는데, 미스 車道 그 中의 하나였다. 緣故가 없는 아가씨들은 토론토에서 달려간 總角들과 因緣을 맺기도 했다. 鄭兄도 미스터 理도 그 中의 하나였다. 강춘이度 그런 코스를 밟았지만 미스 車에게 張이라는 人物이 있었던 게 問題였다. 觀光비자로 入國하여 結婚을 하였어도 아직 永住權이 나오지 않았고, 勞動許可度 떨어지지 않았으니 正常的인 就業은 不可能했다.

    獨身인 境遇는 結婚을 통해 合法的으로 永住權을 얻을 수 있지만 여러 理由로 永住權을 얻지 못한 사람이 토론토에는 더러 있는 것 같았다. 지렁이잡이야말로 이런 사람들이 돈을 만질 수 있는 第一 손쉬운 일 中의 하나였다. 다들 쉬쉬해서 그렇지 지렁이잡이의 半 以上이 이런 不安定한 身分이었다.

    강춘이에게 미스 車는 儼然히 書類上 家族인데도, 그女에게는 同居 비슷한 生活을 하는 미스터 場이 있었다. 三角關係만으로도 換腸할 노릇인데 永住權을 받자니 강춘이는 끽소리 못하고 아파트 歲의 一部를 대야 했다. 미스 車가 願하지 않더라도 永住權 審査에는 그런 書類가 必要하기 때문이었다. 강춘이는 우물거리지만 미스 次 얘기로는 잠 한番 자지 않았다고 했다. 이 말은 강춘이 쪽에서 보면 ‘잠이라도 한番 자봤으면 덜 抑鬱하겠다’였다.

    미스 茶 쪽에도 理由가 있었다. 큰돈을 支拂하고 僞裝結婚으로 永住權을 取得하는 境遇도 있으니까 강춘이에게 그냥 永住權 하나를 膳物하기로 했다. 單 여기에 강춘이의 役割이 있었다. 미스터 長과의 사랑 싸움에 莫强한 挑戰者 役割을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밀고 당기는 사랑싸움에 기둥書房을 등장시켜 嫉妬心도 誘發시키고 사랑의 妙味도 살리자는 計算이었다. 于先 남의 사랑싸움에 끼여든 강춘이가 안됐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강춘이가 미스 車를 正말로 좋아하고 있다는 事實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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