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化粧品 原料의 成分과 製造過程을 알아야 企劃이나 마케팅에서도 競爭力이 생긴다고 생각했어요. 大企業에 當然히 가고 싶지만 中小企業부터 就業해서 올라가야 할 것 같아요.”
대성 氏 누나 윤송이 氏(22)는 인도네시아에 韓國 化粧品을 알리는 ‘K뷰티’ 專門家를 꿈꾼다. 皮膚가 나빠졌을 때 韓國 化粧品으로 治療하며 K뷰티의 꿈을 키웠다. 그래서 한 大學 바이오化粧品科에 다닌다.
“于先 韓國 化粧品 會社에서 經驗을 쌓을 거예요. 그 後에 韓國 化粧品 市場과 인도네시아 化粧品 市場을 連結하는 役割을 해보고 싶어요.”
송이 氏의 또 다른 꿈은 韓國에서 繼續 살기. 親舊들에겐 當然하지만 송이 氏에겐 當然하지 않은 일이다. 家族들이 어머니의 故鄕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 홀로서기가 힘들지라도 송이 氏는 혼자라도 남을 생각이다.
“인도네시아는 오래 살아보지 않아서 故鄕이라고 느껴지진 않아요. 제가 韓國人이라는 게 자랑스러워요. 韓國에서 안 태어났으면 슬펐을 程度로 韓國에서 사는 게 너무 좋아요.”
송이 氏가 直接 여러가지 香을 組合해 만든 香水.
꿈을 이야기할 땐 똑 부러진다. 하지만 戀愛할 땐 말 못할 苦悶으로 끙끙 앓기도 한다. 4年 前 男子親舊를 사귀기 始作했을 때가 그랬다. 송이 氏는 外貌나 말套 모두 平凡한 韓國人. 男子親舊는 송이 氏가 移住民 2歲란 걸 몰랐다. ‘우리 엄마, 인도네시아 사람이야.’ 이 말은 繼續 獨白으로만 머물렀다.
“빨리 말해야 할 것 같았어요. 追憶을 더 많이 쌓기 前에…. 男子親舊가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
偶然히 告白의 機會가 왔다. “나 엄마랑 姨母 結婚式에 參席하러 인도네시아에 가.” 송이 氏의 말에 男子親舊가 操心스레 물었다. 엄마가 인도네시아人이냐고. 송이 氏는 맞다고 했다. 그렇게 송이 氏는 4年 間 사랑을 키우고 있다.
송이 氏가 苦悶한 데에는 理由가 있었다. 같은 인도네시아系 韓國人 親舊가 移住民 2歲란 事實 때문에 男子親舊와 헤어졌다. 3年이나 사귄 사이었는데도 그렇게 남이 됐다. “男子親舊가 自己 家族한테 ‘네 엄마 韓國 사람이라고 하라’고 强要했대요.” 그래서 더욱 송이 氏는 告白하기가 쉽지 않았다. 獨白과 告白 사이를 數없이 오갔다.
송이 氏의 苦悶은 어릴 때부터 뿌리를 키웠다. 學校 班 親舊들에게 當付할 때도 있었다. “우리 엄마 外國人인 거 祕密로 해줘.”
송이 씨의 세 살 무렵 모습(왼쪽 寫眞)과 高等學生 時節. 윤송이 氏 提供
송이 氏는 자라며 자꾸 그렇게 祕密이 생겼다. 아픈 經驗이 알알이 마음에 박혔다. 先生님은 授業 時間에 多文化 家庭 이야기가 나올 때 물었다. “송이 學生이 多文化 家庭이죠?” 班 親舊들의 視線이 송이 氏에게 쏠렸다. 송이 氏는 그 先生님이 너무 미웠다. ‘그냥 넘어가면 좋겠는데 굳이 내 이름을 言及해야 하나.’ ‘多文化라고 刻印시켜야 하나.’
學校에서 비슷한 移住背景 親舊들은 種種 이름을 잃었다. 先生님들은 이름 代身 이렇게 부르곤 했다. “야, 인도네시아!” “야, 中國!”
傷處가 쌓이며 입은 닫혔다. “傷處가 없었다면 저도 堂堂하게 말을 했겠죠. 움츠러드니까 바로 말하지 못하고, 돌려서 말하려 하고. 제가 그런 性格이에요.”
엄마 에코 氏는 송이 氏에게 고맙다. 아픔을 딛고 잘 자라줘서. 高等學生 때 用돈을 스스로 벌던 딸이다. 알아서 進路도, 大學도 定했다.
딸에게 祕密인 엄마, 皮膚色도 言語도 다른 學父母. 쉽지 않은 길이었다. 冷帶의 視線이 많았다. 韓國人 男便과 사랑에 빠져 合法的으로 韓國에 왔을 뿐인데 말이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只今까지 송이의 初, 中, 高等學校 擔任先生님을 모두 記憶할 程度로 學校를 자주 찾아갔어요. 親舊들을 隨時로 집으로 불러 맛있는 걸 해줬어요. 正말 最善을 다했어요.” 學校에 찾아가 先生님 말이 理解가 안 되면 男便에게 바로 電話해 先生님에게 바꿔줬다. 初等學校 3學年 때 한 先生님은 ‘인도네시아 飮食을 싸 와 달라’고 했다. 에코 氏는 부지런히 볶음麵을 만들어 송이 氏를 통해 보냈다. 송이 氏에겐 愉快하지 않은 記憶이다.
아빠 刑官 氏(58)는 아내를 더 아끼고 尊重하려 했다. 그게 最高의 敎育이라고 여겼다. 아이들이 한글을 배우기 始作할 땐 엄마 이름을 아빠 이름보다 먼저 외우게 했다.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집 사람이 애들을 情感 있게 잘 키워줘서 恒常 고마워요.”
安山市 外國人住民相談支援센터에서 勤務 中인 에코 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