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回 나는 인도네시아系 韓國人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大韓民國 海兵隊로

獨白과 告白 사이

다름은 나의 힘

나는 인도네시아系 韓國人입니다

發刊일 2022年 1月 19日

海兵隊에 入隊하고, 就業 準備를 하고,
남다른 戀愛와 結婚에 苦悶한다.
成人이 된 韓國 移住民 2歲,
‘多重正體性 世代’가 共存으로 向한다

인도네시아에서 大韓民國 海兵隊로

2021年 10月 25日. 海岸가의 칼바람을 호루라기 소리가 꿰뚫었다. 海兵隊 敎育訓鍊團 앞은 入所하는 이들과 家族들로 꽉 찼다. 아들과 父母들은 마스크를 쓴 채 서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지막 瞬間까지. 대성 氏는 그 瞬間까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인스타그램 라이브 畵面 건너엔 인도네시아의 風景과 親舊들이 있었다.

드디어 인도네시아 親舊들과의 離別 人事가 끝났다. 그제야 대성 氏 어머니 에코디르미야띠(에코) 氏(50)가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이런 날이 現實이 될 줄이야.’

에코 氏가 그리지 못한 오늘이었다. 대성 氏는 몇 年 前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인도네시아에선 志願者들만 軍隊를 간다. 떠났던 아들은 海兵隊를 가겠다며 다시 韓國으로 왔다.

“대성이가 高等學校 때 인도네시아로 간 뒤엔 繼續 거기서 살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軍隊는 가야 한다’ ‘나이 들어서 가면 힘드니 大學 前에 海兵隊를 가겠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대성 氏에겐 軍隊는 必須 코스가 아니었다. 대성 氏는 韓國人 아버지, 인도네시아人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인도네시아系 韓國人이다. 大韓民國 國籍을 抛棄하면 인도네시아에 定着할 수 있었다. 그는 왜 굳이 海兵隊를 擇했을까.

에코 氏는 入隊를 앞둔 아들 대성 氏를 꼭 끌어 안았다.

“大韓民國에서 태어났으면 軍隊는 가야한다고 생각했어요. 한 番 가는 軍隊, 멋있게 가자고 생각했죠.” (대성 氏)

“대성이는 眞짜 사나이, 자랑스러운 韓國人이 되고 싶어 했어요.” (에코 氏)

“대성이는 高等學校 때부터 軍隊 간다고 했어요. 恒常 男子로서 인정받고 싶어했죠.” (누나 송이 氏)

大韓民國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眞짜 사나이가 되려고. 대성 氏가 海兵隊를 가는 理由다. 인도네시아에서 바삐 살면서도 잊지 않았다. ‘난 韓國人이다. 軍隊에 가야 한다.’

“다녀올게요!”

대성 氏는 敎育訓鍊團 入口 속으로 훌쩍 사라졌다. 새빨간 바탕에 샛노란 글씨가 새겨진 看板 아래로. 看板의 文句는 ‘海兵隊는 이곳에서 始作된다’. 대성 氏는 속으로 외치지 않았을까. ‘眞짜 韓國人’은 이곳에서 始作된다고.

내 故鄕은 案山, 그리고 스마랑

대성 氏는 2002年 京畿 광명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職場을 따라 光明市, 필리핀, 안산시 等을 오갔다. 그러다가 初等學校 때부터는 쭉 안산시에서 있었다. 安山이 그의 첫 故鄕이다.

“대성이 어머니가 인도네시아 분인 건 初等學校 2學年 運動會 때 알았어요. 어떤 애들은 놀라서 대성이한테 어머니가 外國人이었냐고 물었죠. 하지만 덤덤한 애들이 더 많았어요.”

初等學校 同窓 李允宰 氏는 대성 氏가 손꼽는 ‘切親’이다. 安山 親舊들은 대성 氏가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도 隨時로 連絡했다. “어릴 때부터 '多文化 아이'라고 일부러 멀리하는 雰圍氣는 아니었어요. 좋은 點이 있으면 그걸 보고 사귀죠. 대성이도 그래서 親해졌어요.”

대성 氏에게 變曲點은 中學校 3學年, 2017年에 찾아왔다. 아버지가 다니던 會社가 부도났다. 아버지는 아내의 나라 印度네시아에서 새 機會를 찾고 싶었다. 于先 대성 氏를 2018年 인도네시아로 보냈다.

“대성이가 運動만 좋아하고 工夫를 안 했어요. 韓國은 競爭이 너무 熾烈하니까 外國語라도 배우라고 먼저 보냈죠. 근데 대성이 누나 송이가 韓國에서 大學을 가겠다고 해서 저랑 男便은 韓國에 남게 됐어요.” (에코 氏)

대성 氏는 홀로 인도네시아 者와틍아주 스마랑으로 왔다. 인도네시아의 代表 貿易都市다. 대성 氏는 貿易都市의 國際學校를 擇했다. 인도네시아語와 英語를 同時에 배우기 위해서였다. 이제 ‘安山 원일중 3學年 윤대성’은 ‘서머스타고 1學年 윤대성’이 되었다.

韓國에서 태어난 대성 氏의 어린시절 모습들. 家族 寫眞부터 時計方向으로 幼兒時節, 印尼 高校 籠球部 活動, 印尼 高校 卒業式 寫眞. 윤대성 氏 提供

“이슬람敎人 애들도 있었어요. 처음 갔을 땐 새벽 5時 半에 祈禱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깬 적도 많아요. 라마단(이슬람 禁食聖月) 期間에 같이 金食道 해봤는데 재밌었어요. K팝이나 드라마를 아는 親舊들이 韓國을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德分에 저도 人氣 많았죠.”

서머스타고 先生님들은 大部分 터키,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 寄宿舍엔 인도네시아는 勿論이고 中國,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等 온갖 國籍의 親舊들이 있었다. 대성 氏는 이렇게 3年을 보내며 인도네시아語와 英語에 能熟해졌다. 다양한 文化를 배웠다.

“元來 印度네시아 말은 거의 못해서 맨 땅에 헤딩했어요. 每日 애들이랑 인도네시아語랑 英語로 말하니까 빨리 늘더라고요.”

인도네시아 서머스打 高等學校 卒業張.

대성 氏는 韓國語와 인도네시아語, 英語에 能通한 人材로 돌아왔다. 이른바 ‘多重正體性’ 世代다. 여러 言語와 文化에 익숙하다. 다른 사람, 다른 文化를 잘 받아들이는 世代다.

多重正體性은 꿈을 爲한 ‘스펙’이다.

“돈을 모으면 韓國 親舊들을 불러서 같이 事業할 거예요. 인도네시아에 K팝 틀어주고 韓國 演藝人 寫眞을 걸어놓은 人氣 飮食店이 있거든요. 근데 社長이 中國人이에요. 韓國人인 제가 떡볶이나 불닭 볶음麵처럼 유튜브에서 有名한 韓國 飮食으로 장사하면 더 잘 되지 않을까요?”

‘多重正體性’ 世代

韓國多文化敎育硏究學會에 따르면 多重正體性은 한 사람이 두 가지 以上의 人種과 文化가 만들어낸 여러 要素들을 受容하면서 形成된 正體性이다.

  • 多國籍: 國籍이 여럿이라 여러 國家를 오가며 生活하며

  • 多言語: 言語를 두 가지 以上 驅使한다.

  • 多文化: 여러 나라의 文化에 익숙하고

  • 多受容: 나와 다름을 잘 받아들이고 理解한다.

2000年代 初盤, 結婚移住女性, 移住勞動者 增加 等으로 國內 移住民이 急激히 늘기 始作했다. 이제 이들이 낳은 子女들이 成人으로 훌쩍 자랐다. ‘移住民 2歲’가 學校 울타리를 넘어 社會로 나온다.

移民者 2歲(父母 中 1名 以上이 歸化者이거나 外國人)는 2020年 28萬 名이었다. 2040年엔 2.5倍로 뛴다. 美國을 韓國系, 中國系 美國人이 이끌 듯, 韓國을 인도네시아系, 스리랑카界 韓國人들이 이끄는 날이 올까.

移民者 2歲

28萬名

70萬名

歸化한 內國人

21萬名

54萬名

獨白과 告白 사이

“化粧品 原料의 成分과 製造過程을 알아야 企劃이나 마케팅에서도 競爭力이 생긴다고 생각했어요. 大企業에 當然히 가고 싶지만 中小企業부터 就業해서 올라가야 할 것 같아요.”

대성 氏 누나 윤송이 氏(22)는 인도네시아에 韓國 化粧品을 알리는 ‘K뷰티’ 專門家를 꿈꾼다. 皮膚가 나빠졌을 때 韓國 化粧品으로 治療하며 K뷰티의 꿈을 키웠다. 그래서 한 大學 바이오化粧品科에 다닌다.

“于先 韓國 化粧品 會社에서 經驗을 쌓을 거예요. 그 後에 韓國 化粧品 市場과 인도네시아 化粧品 市場을 連結하는 役割을 해보고 싶어요.”

송이 氏의 또 다른 꿈은 韓國에서 繼續 살기. 親舊들에겐 當然하지만 송이 氏에겐 當然하지 않은 일이다. 家族들이 어머니의 故鄕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 홀로서기가 힘들지라도 송이 氏는 혼자라도 남을 생각이다.

“인도네시아는 오래 살아보지 않아서 故鄕이라고 느껴지진 않아요. 제가 韓國人이라는 게 자랑스러워요. 韓國에서 안 태어났으면 슬펐을 程度로 韓國에서 사는 게 너무 좋아요.”

송이 氏가 直接 여러가지 香을 組合해 만든 香水.

꿈을 이야기할 땐 똑 부러진다. 하지만 戀愛할 땐 말 못할 苦悶으로 끙끙 앓기도 한다. 4年 前 男子親舊를 사귀기 始作했을 때가 그랬다. 송이 氏는 外貌나 말套 모두 平凡한 韓國人. 男子親舊는 송이 氏가 移住民 2歲란 걸 몰랐다. ‘우리 엄마, 인도네시아 사람이야.’ 이 말은 繼續 獨白으로만 머물렀다.

“빨리 말해야 할 것 같았어요. 追憶을 더 많이 쌓기 前에…. 男子親舊가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

偶然히 告白의 機會가 왔다. “나 엄마랑 姨母 結婚式에 參席하러 인도네시아에 가.” 송이 氏의 말에 男子親舊가 操心스레 물었다. 엄마가 인도네시아人이냐고. 송이 氏는 맞다고 했다. 그렇게 송이 氏는 4年 間 사랑을 키우고 있다.

송이 氏가 苦悶한 데에는 理由가 있었다. 같은 인도네시아系 韓國人 親舊가 移住民 2歲란 事實 때문에 男子親舊와 헤어졌다. 3年이나 사귄 사이었는데도 그렇게 남이 됐다. “男子親舊가 自己 家族한테 ‘네 엄마 韓國 사람이라고 하라’고 强要했대요.” 그래서 더욱 송이 氏는 告白하기가 쉽지 않았다. 獨白과 告白 사이를 數없이 오갔다.

송이 氏의 苦悶은 어릴 때부터 뿌리를 키웠다. 學校 班 親舊들에게 當付할 때도 있었다. “우리 엄마 外國人인 거 祕密로 해줘.”

송이 씨의 세 살 무렵 모습(왼쪽 寫眞)과 高等學生 時節. 윤송이 氏 提供

송이 氏는 자라며 자꾸 그렇게 祕密이 생겼다. 아픈 經驗이 알알이 마음에 박혔다. 先生님은 授業 時間에 多文化 家庭 이야기가 나올 때 물었다. “송이 學生이 多文化 家庭이죠?” 班 親舊들의 視線이 송이 氏에게 쏠렸다. 송이 氏는 그 先生님이 너무 미웠다. ‘그냥 넘어가면 좋겠는데 굳이 내 이름을 言及해야 하나.’ ‘多文化라고 刻印시켜야 하나.’

學校에서 비슷한 移住背景 親舊들은 種種 이름을 잃었다. 先生님들은 이름 代身 이렇게 부르곤 했다. “야, 인도네시아!” “야, 中國!”

傷處가 쌓이며 입은 닫혔다. “傷處가 없었다면 저도 堂堂하게 말을 했겠죠. 움츠러드니까 바로 말하지 못하고, 돌려서 말하려 하고. 제가 그런 性格이에요.”

엄마 에코 氏는 송이 氏에게 고맙다. 아픔을 딛고 잘 자라줘서. 高等學生 때 用돈을 스스로 벌던 딸이다. 알아서 進路도, 大學도 定했다.

딸에게 祕密인 엄마, 皮膚色도 言語도 다른 學父母. 쉽지 않은 길이었다. 冷帶의 視線이 많았다. 韓國人 男便과 사랑에 빠져 合法的으로 韓國에 왔을 뿐인데 말이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只今까지 송이의 初, 中, 高等學校 擔任先生님을 모두 記憶할 程度로 學校를 자주 찾아갔어요. 親舊들을 隨時로 집으로 불러 맛있는 걸 해줬어요. 正말 最善을 다했어요.” 學校에 찾아가 先生님 말이 理解가 안 되면 男便에게 바로 電話해 先生님에게 바꿔줬다. 初等學校 3學年 때 한 先生님은 ‘인도네시아 飮食을 싸 와 달라’고 했다. 에코 氏는 부지런히 볶음麵을 만들어 송이 氏를 통해 보냈다. 송이 氏에겐 愉快하지 않은 記憶이다.

아빠 刑官 氏(58)는 아내를 더 아끼고 尊重하려 했다. 그게 最高의 敎育이라고 여겼다. 아이들이 한글을 배우기 始作할 땐 엄마 이름을 아빠 이름보다 먼저 외우게 했다.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집 사람이 애들을 情感 있게 잘 키워줘서 恒常 고마워요.”

安山市 外國人住民相談支援센터에서 勤務 中인 에코 氏.

다름은 나의 힘

‘다름’을 받아들이는 經驗은 移住民 2歲가 成長하는 힘이 된다. 다른 사람, 다른 社會를 잘 理解한다. 共感한다. 그리고 돕는다.

‘2016年 新安山臺 電子情報通信學科 卒業, 2016年 安養 YMCA 入社. 現 市民事業部 팀長.’ 스리랑카界 韓國人 서현식 氏(29)의 스펙이다. 安養市民에게 氣候, 環境, 生態 關聯 講演과 小모임을 마련해준다. 줌(ZOOM) 活用法, 寫眞 動映像 編輯 講義는 直接 한다. 新種 코로나바이러스 感染症(코로나19)으로 인한 距離두기 時代, 사람 사이 距離를 좁히는 技術을 가르친다. 그의 志向은 ‘마을 共同體 回復’. 市民들이 共同體 價値에 注目하고 그 價値를 지키는 삶을 꿈꾼다. 只今 當場의 目標는 ‘內的 成長’이다.

“于先 30代 中盤까지는 經驗으로 內的 成長을 하고 싶어요. 於此彼 80, 90代까지 살 텐데 內的으로 成長한다면 30代 中盤 以後부턴 알아서 必要한 돈을 벌지 않을까요. 只今 當場은 ‘집 사야 한다’ ‘돈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요.”

現識 氏는 安養 YMCA의 核心 人材다. 管理者級 中에선 가장 젊다. 安養 YMCA의 이현주 아기스포츠團 院長은 現識 氏의 疏通 能力을 稱讚했다. “幼兒부터 어머니들까지 多樣한 年齡帶와 일하면서 모든 世代와 疏通하는 悠然함을 키웠더라고요.”

現識 氏가 가르치던 한 學生의 學父母는 現識 氏를 ‘까만콩 先生님’으로 記憶한다. “먼저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自己紹介度, 프로그램 說明도 先生님들 中 가장 똑 부러지게 해서 놀랐던 記憶이 있어요.”

현식

安養 YMCA에서 寫眞 動映像 編輯 講義를 하고 있는 現識 氏.

韓國人 아버지와 스리랑카人 어머니는 現識 氏를 1993年 스리랑카 中南部 地域 웰리마다(WELIMADA) 市의 한 山間 마을에서 낳았다. 2002年 아버지가 다니던 스리랑카의 韓國 企業이 撤收하며 家族은 韓國行 飛行機를 탔다. 現識 氏 나이 9歲 때였다. 現地 國際學校를 다니던 現識 氏는 瞬息間에 ‘안산시 와동초등학교 3學年’이 됐다. 當時 現識 氏가 다니던 學校엔 移住背景 學生이 거의 없었다. 只今의 安山과는 너무도 달랐다.

“우리가 外界行星에서 온 사람처럼, 아주 神奇하게 쳐다봤어요. 쉬는 時間에 敎室 窓門과 門에 저를 보려고 宏壯히 많은 親舊가 몰려들었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어요. 저도 그런 狀況이 神奇했죠.”

2002年 월드컵 以後 분 ‘蹴球 붐’ 德分에 現識 氏는 몸으로 부딪히며 親舊를 사귀었다. 中學校부터 始作한 춤은 그를 ‘인사이더’로 만들었다. 現識 氏는 專門 크루로 活動하며 地域, 學校 祝祭에 나가기도 했다.

現識 氏는 自身의 背景을 오히려 積極的으로 살렸다. 高等學校 때는 競技差世代委員會 委員長을 맡았다. 靑少年 政策, 多文化 政策을 提案했다. “移住背景 學生도 韓國 社會의 一員일 뿐이고, 남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人種이나 社會的 地位에 따라 사람을 對하는 態度가 바뀌면 안 되잖아요.”

가족사진 현식어린시절 현식

現識 氏 家族 寫眞(윗줄 왼쪽 寫眞)과 어린시절 跆拳道場에서의 모습(윗줄 오른쪽 寫眞). 댄스 크루에서 活動한 現識 氏는 地域 行事에 자주 參與했다. 서현식 氏 提供.

現識 氏는 2012年 新安山臺에 入學해 電子情報通信學을 專攻했다. 情報技術(IT)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IT 企業에 就職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大學 때 參與한 海外 奉仕活動이 進路를 바꾼 契機가 됐다. 필리핀의 貧困 地域에서 6個月間 奉仕하며 어려운 사람들과 어울렸다. 對話하며 그들의 傷處에 다가갔다. 아픔을 共感하게 됐다. “돈을 많이 벌기 보단 다양한 사람을 偏見 없이 만나 疏通하는 일을 하고 싶어졌어요.”

現識 氏가 韓國 社會를 돕는 奉仕者로 成長한 건 어머니 徐阿이라 氏(50) 影響도 있었다. 徐 氏는 安山 外國人住民相談支援센터에서 스리랑카 移住民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徐 氏는 移住民들을 돕고 있지만, 移住民들이나 아이들에게 늘 얘기한다. 남들이 우릴 도와주길 바라지 말라고. 스스로 熱心히 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늘 ‘해봐’ ‘안 해보고 抛棄하지마’라고 말해요. 현식이가 힘들었을텐데 努力을 많이 했죠.”

서아이라

安山市 外國人住民相談支援센터에서 勤務 中인 徐阿이라 氏.

現識 氏의 동생 샤니 氏(25)도 어릴 적 愉快하지 않은 經驗이 있다. 샤니 氏가 韓國에 첫 발을 디딘 건 일곱 살 때. 그 때를 어렴풋하게 記憶한다. 韓國人 아버지와 할머니는 샤니 氏 손을 잡고 幼稚園을 찾았다. “外國人 아이는 안 돼요.” “韓國人이에요. 내가 아빠고, 이 분이 할머니에요.”

“外國人 아이는 無條件 안 된다고 했대요. 길게 얘기도 못했대요. ‘안 되니까 돌아가시라’고 했대요.”(샤니 氏)

結局 洞네 한 어린이집만 샤니 氏를 안쓰럽게 여겨 받아줬다. “일곱 살이었는데 4~6歲만 다니던 어린이집에 다녀야 했어요. 갈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죠. 아직도 移住 兒童을 拒否하는 어린이집들이 많다니 神奇하네요.”

韓國에서의 出發부터 障礙物이 있었지만 샤니 氏는 傷處만 받고 있지 않았다. 堂堂하게 맞섰다.

샤니어린시절 샤니어린시절

샤니 氏의 첫 돌 寫眞(왼쪽 寫眞)과 7살 때 모습. 鉏샤니 氏 提供.

高等學校 2學年 때 歷史 時間이었다. 先生님은 샤니 氏를 갑자기 일으켜 세웠다. “韓國史를 몰라도 되는 샤니가 98點을 받았어요. 본받아야 해요.” 샤니 氏는 唐慌했다. 授業 내내 氣分이 나빴다.

授業 終了 鐘이 울리자마자 敎室을 나가는 先生님을 붙잡았다. “저희 아버지는 韓國人이고 저 어렸을 때부터 韓國 살았어요. 제가 왜 韓國史 몰라도 돼요?”

샤니 氏는 高校 卒業 後 바로 就業했다. 製藥會社, 物流會社를 거쳐 非營利 團體에서 일했다. 低所得層 韓國人, 難民, 多文化 家庭 等에 企業이 後援한 物品을 傳達하는 役割을 맡았다. 移住背景 靑少年의 ‘꿈 찾기’를 돕는 講演을 열기도 했다.

最近엔 京畿 안양시의 한 病院에 就職했다. ‘싱글 라이프’를 즐기기 위한 安定的인 職場이 必要해서다. 獨立 準備도 始作했다. 20代이지만 이미 個人年金에 加入했다. 月給의 折半은 貯蓄하려 아낀다. 收益이 安定的인 種目 中心으로 株式 投資도 한다. “居室 하나, 房 하나 있는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며 살고 싶어요. 只今은 父母님이랑 살지만 아파트 請約을 넣어서 獨立할 생각이에요.”

서샤니

안양시의 한 病院에서 勤務 中인 샤니 氏.

그래도 앞으로 남을 돕는 일은 繼續 하고 싶다. 스리랑카 移住民 對象 通譯과 相談을 하는 어머니처럼 싱할라어(스리랑카 第 1言語)를 더 배워 같은 일을 해볼 생각도 있다.

“非營利 團體에서 일하며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或是 도와줄 수 있냐’고 하는 移住民들을 많이 봤어요. 저절로 마음이 움직이더라고요. 스리랑카 말은 내 正體性을 찾기 爲해서라기보단… 엄마 보니까 通譯 要請이 너무 많아 拒絶할 때가 있을 程度더라고요. 배워두면 展望이 좋을 거 같아요.”

샤니 氏의 이름은 ‘아름답다’는 싱할라어 ‘프샤니’에서 따왔다. 外家에서 지어준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德分에 ‘샤니빵’이란 別名도 있지만 그래도 전 제 이름이 좋아요.”

安山을 土壤으로 쑥쑥 자란 移住民 2世들은 韓國 곳곳으로 뻗어나간다. 이들은 成人으로서 몰랐던 社會를 알아간다. 現實을 더 날 것으로 接한다. 아픔은 있지만 그래도 믿고 싶다. 韓國 社會는 努力한 만큼 成功할 수 있는 社會라고.

“移住背景 靑年들이 사람들과 關係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얘길 들으면 안타까워요. 安山 밖에서도 우리를 支援하는 센터나 機關이 늘고, 프로그램 質도 높아지면 좋겠습니다.” (現識 氏)

“自立해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努力해야 해요. 支援만 바라고 있으면 안 돼요. 이런 努力을 制度가 뒷받침 해주면 더 좋구요.”(샤니 氏)

이들은 말한다. 共存은 尊重에서 始作된다고. 多樣性을 尊重하는 文化가 社會 곳곳에 자리 잡아야 한다고.

大聲, 송이, 現識, 샤니 氏. 各樣各色 經驗 속에 成長해 未來 모습도 다채롭다.

  • 양주원
  • 이명자
  • 조나단
  • 김세경
  • 김율리아
  • 이리나
  • 어티겅도야
  • 서현식
  • 윤대성
  • 윤송이
  • 서샤니
  • 윤대성

20年 뒤, 70萬 名의 多衆正體性 世代는 우리를 어떻게 바꿀까.

  • 記事 取材 이새샘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記者
  • 寫眞·動映像 取材 송은석 남건우 記者
  • 動映像 編輯 남건우 記者 박세진 PD 안채원 CD
  • 그래픽 김충민 記者
  • 프로젝트 企劃 位은지 記者
  • 사이트 製作 임상아 고민경 뉴스룸 디벨로퍼
共有하기 닫기
닫기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