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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날개로 나는 法
부러진 날개로 나는 법

열일곱 살, 오디션 프로그램 정상에 올랐지만
아이돌 활동은 데뷔 3년 만에 끝났다.
그 후 13년… 서른세 살이 된 그가
뮤지컬 ‘위키드’ 주인공으로 다시 무대에 섰다

天運이 必要한 世界

이솔林 SL스튜디오 代表는 2003年부터 18年 가까이 스타를 꿈꾸는 아이돌 志望生들을 위한 아카데미를 運營해왔다. SM 傘下 아카데미 時節부터 少女時代 태연, 샤이니 온유, 엑소 카이 等을 排出해낸 베테랑이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相談을 오는 父母님들에게 그는 아이돌이 되는 건 ‘天運’이 必要한 일이라고 强調한다.

“아무리 비주얼 좋고 實力 좋아도, 本人만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 運命的인 것도 있는 것 같아요. 可能性은 稀薄하고 競爭에서 살아남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願하면 시키시라고 말해요.”

숱한 스타의 誕生을 지켜본 專門家도 認定할 수밖에 없는 이 世界의 어쩔 수 없는 眞實이다. ‘아이돌 考試’라는 말이 붙을 程度로 꿈을 이루는 아이들보단 傷處받는 아이들이 더 많다. 李 代表는 그런 現實을 率直하게 드러낸다. 내 子息이 ‘이걸로 먹고살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父母의 心情을 理解하기 때문이다. 얼마 前 옛 弟子의 連絡을 받고 唯獨 반가웠던 理由도 그래서다.

“16年 前에 배틀神話라고, 神話가 ‘第2의 神話’를 뽑는 오디션 放送에서 1等을 한 親舊가 있어요. 그런데 그 아이돌 그룹이 잘 안되고 솔로도 잘 안되고, 軍隊 다녀와서 뮤지컬 俳優 하다가 이番에 위키드 男子 主人公이 됐다고 해서 (公演) 다녀왔어요. 벌써 서른셋이 됐더라고요. 그때는 열일곱, 열여덟이었으니까 애기였는데…. 只今은 所屬된 會社도 없는데 혼자 오디션 봐서 大型 作品을 한다는 게 正말 대단해요.”

스무 살에
마주한 失敗

高等學校 2學年. 열일곱 진태화는 이미 스타였다. 2005年 4月부터 6個月間 放送된 오디션 ‘배틀神話’에서 人氣를 얻었다. 데뷔하기도 前에 팬 카페 會員이 1萬8000名이었다. 主要 포털사이트 메인에도 얼굴이 걸렸다. 生放送으로 열린 오디션 最終話에서 最終 6人으로 뽑혀 ‘第2의 神話’로 데뷔할 수 있는 機會를 얻었다.

代表로 所感을 말해달라는 司會者의 말에 진태화는 웃으며 “神話 兄들 尊敬하고요. 데뷔해서 兄들을 꼭 따라잡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해맑은 抱負에 神話의 民友는 愛情을 담은 쓴소리를 했다.

“只今 選擇이 됐다고 歌手가 된 건 아닙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고 險하니까 저희가 많이 도와드릴 거고. 決코 順調롭게 歌手 生活을 하진 못할 겁니다. 酷毒한 訓鍊 잘 견뎌서 正말 第2의 神話라는 소리 듣게, 멋진 神話가 될 수 있게 저희가 應援하겠습니다.”

그 時節, 自身이 말했던 所感을 다시 들려주자 진태화는 “‘따라가겠다’가 아니고 ‘따라잡겠다’고 그랬어요? 미쳤었네”라며 웃었다.

진태화에게 今方 손에 잡힐 것 같았던 데뷔와 成功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오디션이 끝나고도 繼續 미뤄지던 데뷔는 프로그램이 끝난 지 1年이 훌쩍 지난 2006年 12月에야 이뤄졌다. ‘배틀’이라는 팀 이름으로 6名이 데뷔했다. 오디션 當時의 熱氣는 이미 식었고 一部 팬들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民友가 豫告했던 ‘멀고 險한 길’이 實際로 펼쳐졌다. 비슷한 時期 데뷔한 슈퍼주니어(2005年), 빅뱅(2006年) 같은 男子 아이돌 그룹 사이에서 배틀의 存在感은 微微했다. 미니앨범 3輯을 끝으로 다음 앨범이 나오지 못했다. 지친 멤버들이 軍隊를 가기 始作했고 배틀은 事實上 解體됐다. 진태화의 나이 고작 스무 살 때였다.

舞臺만 있다면
어디든

“當時에는 스트레스가 컸어요. 거길 繼續 두드리느냐, 그 다음에 對해서는 아무 생각이 안 들었어요. 뭐 해야 하지? 배운 게 이건데. 할 줄 아는 게 이거뿐인데 뭐하지….”

歌手의 꿈을 抛棄할 순 없었지만, 當場 할 일이 없었다. 다른 會社를 알아보면서 參席하게 된 演藝人 축구팀에는 아이돌 活動을 하다 쉬고 있는 비슷한 處地의 親舊들이 여럿 있었다. 3年 안에 뚜렷한 成果를 내지 못한 아이돌에겐 다음 앨범을 낼 機會가 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때 진태화에게 日本에서 5人組 그룹 活動을 해보자는 提案이 들어왔다. 아예 日本 會社에서 製作하고 日本語로 노래하는 J팝 新人으로 데뷔하는 企劃이었다. 쉬운 選擇은 아니었다. 日本語를 배우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하지만 “無酌定 기다리기보다는 只今이라도 日本에서 活動을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末에 決心이 섰다.

“舞臺에 서 있는 게 重要하지. 어디에 서도. 나라든, 뭐든 重要한 게 아니라 내가 舞臺에 서는 게 重要하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진태화는 ‘寒流’를 타고 넘어온 歌手가 아니었다. 日本에서 진태화가 屬한 그룹은 그저 수많은 인디 그룹 中 하나였다. 첫 舞臺 때는 스무 名 남짓한 觀客 앞에서 노래를 했다.

韓國 아이돌 그룹은 成功하더라도 大部分 20代 初中盤에 活動을 끝낸다. 反面 日本 音樂 市場에서는 자리를 잘 잡으면 40代에도 繼續 舞臺에 설 수 있다. 成功하면 큰 돈을 만질 수 있지만 成功하기 前까지는 거의 所得이 없는 韓國과 달리 日本은 아이돌 그룹 멤버에게 꾸준히 月給을 준다. 진태화度 日本 活動을 하면서 처음으로 돈을 벌었다. 父母님에게 엔貨로 用돈도 드렸다.

진태화의 父母님은 그때 아들이 준 用돈을 차곡차곡 모았다. 8年이 지난 只今까지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

“아들이 苦生할 때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던 적이 몇 番 있었는데 한 番도 말한 적은 없어요. 第一 힘든 건 本人이니까. 그런데 제가 그 돈을 어떻게 써요. 아들 이름으로 通帳에 넣어뒀어요.”(진태화 어머니 홍은경 氏)

다시
밑바닥부터

진태화는 조금씩이나마 늘어나는 팬들을 보면서 日本에서 버텨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番에는 軍 入隊를 더 以上 미룰 수 없는 時期가 다가왔다. 結局 日本 活動 1年 만에 義警 弘報團에 入隊했다. 入隊 初盤에는 바깥世上 걱정 없이 弘報團 公演에 集中했다. 하지만 全域이 다가오면서 進路 苦悶이 다시 始作됐다. 日本으로 돌아갈 準備를 하던 때 蹴球團 活動으로 平素 親分이 있던 김준수(시아遵守)가 그에게 뮤지컬에 挑戰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김준수는 後輩인 진태화가 他地에서 다시 바닥부터 歌手 生活을 始作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제가 活動했던 時期에는 各 그룹 메인 보컬 特色이 第一 重要했거든요. 누가 들어도 ‘아 빅뱅이다’ ‘2NE1이다’ 이런 게 있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어요. ‘音色은 좋은데 보컬 色이 없다’ ‘네 色을 찾아봐’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遵守 兄이 ‘歌手로서는 眞짜 短點인데 뮤지컬에서는 오히려 네가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하더라고요. 튀지 않으니까 오히려 맡을 수 있는 配役이 많다고….”

진태화는 2015年 大劇場 뮤지컬 ‘드라큘라’ 첫 오디션을 봤다. 뮤지컬 收錄 曲을 練習하면서 錄音해 김준수에게 ‘檢査’를 받고 不足한 部分을 補完했다. 오디션 準備에 集中하던 때 運動을 하다 다리가 부러지는 事故가 있었다. 진태화는 깁스를 하고 木발을 짚고 오디션을 봤다. 製作社 代表가 그런 모습을 “熱情이 있다”고 評價해줬다. 진태화는 첫 作品에서 助演을 따냈다.

하지만 그는 첫 公演 以後 大學로 小劇場의 門을 두드렸다.

“周邊에서는 ‘와, 大劇場 作品으로 데뷔했네’라고 하는데 스스로는 속이 허전했어요. 뮤지컬은 觀客분들이 10萬 원 넘는 돈을 내면서 나를 보러 오도록 만들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小劇場 公演을 하면서 섬세한 演技를 배우고 成長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小劇場의 門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大學路에서 탄탄하게 立地를 쌓은 俳優들에게 繼續 밀렸다.

“그때 제 人生의 바닥을 본 것 같았어요. 오디션 보는 족족 떨어졌어요. 6個月 동안. 웬만한 作品 한 番씩은 다 떨어져봤어요. 그러다 ‘나와 나타샤와 흰 唐나귀’에 運이 좋게 들어가게 됐어요. 그것도 오디션 때는 안 됐거든요.”

그렇게 한 番 小劇場의 門을 열자 두 番, 세 番은 조금은 더 수월했다.

지난해 8月엔 所屬社를 나왔다. 小劇場에서 진득하게 實力을 쌓자고 생각하니 所屬社의 도움이 必要할 것 같지 않았다. 마침 글로벌 有名 뮤지컬인 ‘위키드’ 오디션 消息이 들려왔다. 진태화는 男子 主人公 ‘피에로’ 驛에 支援했다. 길어야 10分이면 끝나는 오디션을 30分이나 봤다. 큰 期待를 하지 않았는데 ‘合格했다’는 文字 메시지를 받았다. 더블 캐스팅(韓 役割에 두 俳優를 캐스팅하는 것)된 배우는 그보다 10年이나 經歷이 많은 서경수였다.

아이돌의 生命은 失敗한 아이돌에게만 짧은 것이 아니다. 成功하더라도 7年을 넘기기 어렵다. 公正去來委員會가 아이돌 專屬契約 期間을 最大 7年으로 制限해 大多數가 7年 契約을 맺고 活動을 始作하기 때문이다. 契約이 끝날 때쯤 이들은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을 달기엔 많은 나이가 된다. 男子라면 入隊를 늦추기 어려운 時點이 된다.

“데뷔 3年次부터는 恒常 그런 苦悶을 했었던 것 같아요. ‘팀이 平生 갈 수는 없을 텐데, 헤어지기는 싫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런데 그 헤어짐이라는 게 現實로 찾아오니까, 이제 다시 못 보는 것도 아닌데 너무 속상했죠.”(산다라박, 2017年 4月 2NE1 解體 後 인터뷰)

再契約 時點이 다가오면 奇劃社와 아이돌 間에도, 아이돌 內部에서도 셈法이 複雜해진다. 스타덤에 오른 境遇라면 재계약할 때 아이돌 그룹이 ‘甲’李 된다. 두 番째 契約 期間에 奇劃社가 가져갈 수 있는 收益이 줄어드니 合意가 잘 이뤄지지 못하는 境遇가 發生한다.

成功한 아이돌 그룹 內部에서도 人氣가 더 높은 멤버와 그렇지 않은 멤버는 願하는 것이 다른 境遇가 많다. 延期 等 다른 活動으로 새 길을 찾으려는 멤버는 바쁜 日程을 消化하면서 다같이 收益을 나누는 아이돌 活動을 이어가고 싶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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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이 곧 오디션

5月 2日 ‘위키드’ 서울 마지막 公演 날. 마지막 場面이 끝나자 觀客席에서 起立拍手가 쏟아졌다. 男子 主人公 ‘피에로’ 役을 맡은 진태화는 作別 舞臺人事에서 울음이 터져서 公演 所感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위키드라는 作品은 所屬社 契約을 끝내고 저 혼자 힘으로 配役을 따냈다는 意味가 컸어요. 첫 大劇場 男子 主人公이기도 했고요. 안 울려고 했는데 音樂 監督님이 저를 바라보시니까. 그 音樂 監督님은 제가 아무것도 아닐 때부터, 다른 作品 오디션 때부터 처음으로 節 봐주셨거든요. 그 監督님이 나를 보고 있는 걸 보면서 울컥하더라고요. 大劇場 公演에서는 운 적이 없는데….”

2006年 데뷔했던 배틀 멤버 中에서 只今까지 舞臺에 서는 사람은 진태화뿐이다. 다른 멤버들은 舞臺 밖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다. 演技 레슨을 하거나, 카페를 運營한다. 建設業으로 方向을 튼 멤버도 있다. 멤버들은 只今도 團體 카톡房에서 사는 얘기를 나눈다.

“宿所 生活도 했었고. 練習生 때부터 10, 20代 初中盤, 가장 빛날 수 있고 또 힘들 수 있던 時間을 같이한 애들이다 보니까…. 저희 멤버들의 目標는 ‘뭘 하든지, 어디서 뭘 하든지, 한 名이라도 잘되자’예요.”

배틀은 2019年 Mnet의 한 音樂 프로그램에서 11年 만에 함께 舞臺에 섰다. 오래된 팬들에게 追憶거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以後 잊혀진 歌手를 再照明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出演 提案이 오기도 했지만 그 放送은 나가지 않았다.

“멤버들도 競演이라는 말에 좀…. 그냥 우리가 냈던 앨범을 다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면 괜찮은데 또 그 안에서 熾烈하게 輕軟해야 한다는 것에 拒否感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진태화가 只今 발 딛고 있는 뮤지컬이란 世界도 有名 作品의 主演을 했다고 해서 安定的인 未來를 保障받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繼續 舞臺에 남아있으려면 製作社에서 먼저 찾아주는 俳優가 되거나 오디션을 통해 繼續 配役을 따내야 한다. 初等學生 時節 地域 KBS 合唱團과 톰키즈 兒童服 모델 오디션, 高等學生 時節 SM과 배틀神話 오디션에 앞으로도 繼續 이어질 뮤지컬 오디션까지….

올 4月 取材陣과 처음 만난 날, 自身의 時間을 돌아보던 진태화는 “人生이 오디션이네요”라고 말했다. 뮤지컬에 새로 挑戰하려던 그 무렵, 진태화는 어깨에 “Take these broken wings and learn to fly(부러진 날개로 나는 法을 배워라)”라는 英文 文身을 새겼다. 비틀스의 名曲 ‘블랙버드(Blackbird)’의 한 句節이다.

“꼭 나를 大入시키는 건 아니고 그냥,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이런 걸 英語로 써봤어요. 저는 恒常 次惡까지는 생각을 해요. 最善과 車線과 次惡까지는 생각을 하자. 願하는 대로 되면 좋은데, 안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自己滿足 할 수 있지만 不安함을 恒常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職業이에요. 그래도 워낙 많은 걸 겪어서…. 힘들어도 봤고. 只今은 옛날보다 더 힘들지는 않으니까요. 뮤지컬로 分野를 바꾸기는 했지만 꾸준히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것에 對해 스스로 奇特하게 생각해요.”

發刊일 2021年 7月 23日

  • 記事 取材 | 位은지 김도형 김배중 임보미 記者
  • 寫眞 取材 | 송은석 記者
  • 그래픽 | 김충민 記者
  • 프로젝트 企劃 | 이샘물 李지훈 記者
  • 사이트 製作 |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김하나, 開發 최경선 박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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