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종철 兄 宗婦 氏가 말하는
‘서울대生 拷問致死’ 事件
#2.
종철이가 죽은 다음 날(1987年 1月 15日)은 類달리 추웠다.
屍身이 安置된 서울 城東區 警察病院 靈安室에서 나왔을 때
굳게 잠긴 病院 鐵門 뒤쪽에서 사람 기척이 들렸다.
#3.
“동아일보 記者입니다. 서울大生 遺族 안에 계세요?”
‘동아일보 記者’라니 믿기로 했다.
“여기 있소. 내가 兄이오.”
當時 나는 스물아홉 살로 종철이와 일곱 살 터울이었다.
“박종철 맞습니까?”
“서울대 3學年生이오.”
刑事들이 달려들었다. 兩팔이 붙들린 나는 靈安室로 끌려 들어갔다.
#4.
葬禮式을 치르고 警察 調査를 받았다. 精神없이 며칠이 흘러갔다.
동아일보 記者와 몇 마디 주고받았던 게 떠올랐다. 1月 19日이었다.
新聞을 찾아봤다.
‘물拷問 途中 窒息死’
#5.
1面에 大門짝하게 실려 있었다. 記事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그前까지 어느 言論도 종철이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報道하지 못했었다. 이 記事로 종철이의 犧牲은 歷史가 됐다.
#6.
化粧한 縱綴의 遺骨을 江물에 뿌리던 날 한겨울 物價는 얼어있었다.
뼛가루가 자꾸만 얼음 周圍에 고였다.
아버지는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 縱綴이 遺骸가 담겨있던 종이封套를 江물 위에 띄웠다.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다이”
#7.
그 前까지 나는 종철이의 抑鬱한 죽음이 밝혀질 것이라는 希望을 품지 못했다.
當時엔 縱綴이 말고도 서울大生 疑問詞가 많았다. 暗黑이었다.
果然 누가 眞實을 世上에 드러낼 수 있을까.
동아일보의 ‘물拷問 途中 窒息死’ 報道는 한 줄기 빛이었다.
#8.
映畫 ‘1987’을 보면 當時 동아일보 社會部長이 漆板에 적힌 軍事政權의 報道指針을 북북 지우며 記者들에게 “마음것 取材해서 갖고 와. 내가 責任진다.”라고 말한다.
1987年 當時 實感했던 동아일보의 氣魄을 映畫를 통해 다시 한 番 느꼈다.
#9.
박종부 氏는 當時를 回想하며 “民主化는 종철이의 죽음이 없었더라도 거스를 수 없는 時代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종철이의 犧牲이 民主化를 앞당긴 것은 分明하다.”고 傳했습니다.
또 映畫 ‘1987’을 통해 “많은 분들에게 當時 眞實을 傳할 수 있어 多幸” 이라고 말했습니다.
元本ㅣ 박종부 氏
寫眞 出處ㅣ東亞日報 DB·cj 엔터테인먼트
企劃·製作ㅣ김아연 記者·김채은 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