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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武王 水中陵은 實在인가 神話인가?|신동아

發見 50周年

文武王 水中陵은 實在인가 神話인가?

  • 김태식 | 國土文化財硏究院 硏究委員·文化財 專門言論人

    入力 2017-02-28 13:2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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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年 4月 28日 午後 KBS 歷史스페셜 ‘最初 發掘, 新羅 大王巖’ 篇을 視聽하다 눈을 疑心하는 場面을 마주했다. 大王巖을 發掘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放送社가 말이다. 勿論 發掘 資格이 없는 放送社가, 그것도 新羅 文武王 水中陵이라 해서 1967年 5月 15日에 所謂 ‘發見’되고 같은 해 7月 24日 國家史跡 第158號로 이름을 올린 大王巖을 直接 發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에 放送社는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에 依賴해 發掘調査를 벌였다. 하지만 分明 發掘 施行處는 KBS였다. 프로그램 製作을 위해 放送社가 나서서 直接 發掘하는 일은 見聞이 짧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今時初聞이었다. 더구나 그것이 大王巖이라니.



    放送社가 公開한 大王巖 속살

    그렇게 해서 바닷물을 빼내고 마침내 大王巖이 속살을 드러낸 場面을 보고 또 놀랐다. 그에 對한 漠然한 憧憬 或은 神祕 같은 感情이 瞬息間에 사라졌다. 프로그램을 보니 調査團은 바닷물이 넘나드는 네 군데 大王巖 守舊(水口)를 모래주머니로 틀어막고는 揚水機로 안쪽에 고인 물을 퍼냈다. 그러자 大王巖 內部에 南北으로 길게 놓인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當時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學藝硏究士로 發掘에 參與한 이은석 現 國立海洋文化財硏究所 海洋遺物硏究課長의 말.

    “揚水機는 넉 臺를 動員했지요. 모래주머니 500個를 가져가 아침부터 熱心히 막았어요. 大王巖 內部로 들어오는 물길은 稀罕하게도 東西南北 쪽에 있더군요. 點心 무렵 作業은 거의 마무리됐지만 큰 波濤가 치니 가장 큰 東쪽 瘦軀가 한 放에 뚫렸어요. 點心도 굶어가며 제가 다시 막았어요. 거의 3時間 만에 물을 퍼내고 겨우 撮影하고, 探査도 했지요. 繼續 들어오는 물 때문에 바닥까지 물을 다 빼지는 못했지만 뚜껑돌이라고 하는 바위 바닥까지 봤어요. 바위는 바닥에 박힌 狀態였어요. 이것이 무덤의 個席(蓋石·뚜껑돌)처럼 보인 것은 물속에 있을 때 일어나는 錯視 現象 때문이었어요.”

    그에 따르면 20t 程度로 推定되는 이 바위가 바닥에 박힌 事實을 除外하더라도 陸上 어딘가에서 이곳으로 옮기는 것은 不可能에 가깝고, 또한 波濤가 일면 물을 막을 方法이 없기 때문에 大王巖 內部에 무슨 人爲的인 施設을 하는 일도 不可能하다.



    그렇지만 역사스페셜은 調査에 參與한 한 地質學者를 불러내 그 成果를 弘報했다. 다른 말들은 記憶에 남지 않으나, 大王巖 內部에서 人爲的으로 바위 面을 갈무리한 痕跡이 發見됐으며, 이를 통해 이곳이 문무왕 遺骸를 化粧하고서 그 遺骨을 安置한 곳임을 알 수 있다는 要旨로 그 地質學者가 인터뷰한 場面은 只今도 또렷하다.

    하지만 이은석 誇張과 마찬가지로 나 亦是 이를 疑心한다. 果然 大王巖 內部 바위에 손을 댄 痕跡이 있는가. 아무리 훑어봐도 그런 痕跡을 찾을 길이 없다. 어쩌면 역사스페셜이 視聽者 口味에 맞게 大王巖이 ‘遺骨 山砲處’임이 發掘調査 結果 드러났다는 成果를 極大化하려고 끼워 맞춘 臆測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文武王의 遺訓이 깃든 感恩寺 터에서 아주 가까운 慶州 감포 앞바다에 똬리를 튼 大王巖(大王巖)은 4個 덩어리가 뭉치를 이룬 花崗巖 바위섬이다. 現在 海邊으로부터 約 200m 떨어진 水中섬人 大王巖은 크기가 東西 35m, 南北 36m로 空中에서 내려다보면 方形에 가깝다. 海水面에서 높이는 大略 5.3m. 바위는 네 個 돌덩이로 갈라져 있고 복판에 웅덩이가 있다. 水深은 大略 1.5m. 그 웅덩이 안에는 東西 最長 2.47m, 南北 最長 3.75m, 두께 最大 約 1.35m 크기에 무게 大略 20t인 큰 돌덩이 하나가 있다. ?

    放送社가 主導한 이 發掘을 통해 大王巖은 마침내 神祕의 領域을 벗어났다. 돌이켜 보면 그前에도 大王巖 속살을 보고자 하는 試圖가 없지 않았다. 1982年, 文化財廳 前身인 文化財管理局이 內部를 調査하기로 하고는 水中 다이버를 入手시키기 直前에 中斷한 일이 있다. 이를 推進한 조유전 前 國立文化財硏究所長은 中斷 理由로 “神祕의 領域에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고 判斷했다”고 말한다.? ?



    新羅三山五岳學術調査團

    1964年 10月 24日, 한국일보는 光復 以後 國內 言論社 歷史上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싶은 文化財 事業 始作을 알린다. 新羅五岳學術調査 事業이 그것이다. 말 그대로 ‘三國史記’ 第四肢(祭祀志)에 보이는 新羅 五惡 一帶에 散在하는 遺跡들을 調査한다는 것이었다. 五惡(五嶽)이란 東岳인 吐含山, 남악인 智異山, 鉏惡人 鷄龍山, 北岳人 太白山 그리고 重惡人 八公山을 말한다. 이들 다섯 군데 山은 新羅가 神으로 섬겨 때마다 祭祀를 지낸 靈山(靈山)이었다. 그런 까닭에 五惡 周邊에는 新羅時代 遺産이 더욱 많이 布陣한다. ?

    3年 뒤 이 事業은 成果가 쌓이면서 調査 對象 範圍도 三山(三山)으로 擴大된다. 三山은 新羅가 國家 次元에서 지내는 祭祀 中에서도 가장 規模가 큰 大使(大祀)를 지낸 곳이다. 中祀에 屬하는 五惡이 新羅 全 國土에 고루 퍼진 데 비해 三山은 首都 慶州 周邊에 位置한다. 具體的으로는 慶州 一帶의 나曆算(奈歷山)과 永川 一帶의 骨火山(骨火山) 그리고 淸道 一帶의 穴禮山(穴禮山)을 말한다. 調査 區域이 넓어지자 調査團 이름도 ‘新羅三山五岳學術調査團’이라 부르는 일이 많아졌다.

    1962年 한국일보에 入社해 1980年까지 이 言論社에서 줄곧 慶州 駐在 記者를 지낸 言論人 우병익(84) 氏는 事業 期間 내내 一線 現場에서 取材를 擔當했다. 事業 始作 當時만 해도 新生 新聞社로서 旣存 東亞·조선일보와 競爭해야 했던 한국일보는 그의 回顧에 따르면 突破口를 文化財에서 찾았다. “言論에서 文化財를 意圖的으로 키운 것은 韓國日報이고, 韓國日報 亦是 文化財 때문에 엄청 컸다”는 것이 그의 判斷이다. 더불어 韓國日報 創業主이자 社主인 張基榮 社長 亦是 文化財 事業에 果敢한 投資를 했다고 한다. 禹 記者는 “新羅三山五岳調査 事業은 政府에 돈 한 푼 支援받지 않은 純粹 韓國日報 支援 事業”이었다고 한다. 그 成果는 눈이 부실 程度였다. 光復 以後 새로 찾아냈다는 新羅史 關聯 寶物들은 거의 이 事業이 이룩한 成果였으니 말이다.

    調査團 出帆 當時 面面을 보면 한국일보에서는 文化部長 예용해 氏가 主務였다. 그는 韓國文化財 歷史에서 ‘人間文化財’라는 말을 만들어낸 人物이며, 影響力 亦是 莫强했다. 出帆 當時 團長은 體育人이자 社會學者이면서 歷史學者인 상백(想白) 李相伯(李相佰·1904~1966) 博士였고, 委員으로 當時 美術史學界와 歷史學系 그리고 考古學界 中樞인 황수영·진홍섭·金元龍·이기백·崔淳雨·김영하 敎授가 委囑됐다. 調査團 創設 以來 解體될 때까지 幹事는 美術史學者人 정영호 前 단국대 敎授 몫이었다. 草創期 自身의 役割에 對해 鄭 敎授는 “모든 企劃과 進行, 한국일보와의 連絡 等”이었다고 記憶한다. 李相伯 博士가 2年 뒤 他界하자 團長에 當時 서울對 敎授이자 歷史學者인 동빈(東濱) 김상기(金庠基·1901~1977)가 就任했다. 더불어 홍사준 國立扶餘博物館長과 박경원 釜山市立博物館腸을 委員으로 補强했다. 事業 期間 亦是 1972年까지로 延長됐다. 大王巖 ‘發見’은 바로 이 五惡學術調査의 成果였다.



    고유섭과 ‘大王巖의 노래’??

    이 事業에 大王巖이 包含된 것은 정영호 敎授의 回顧에 따르면 植民地 時代 韓國美術史를 開拓한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1905~1944)에 뿌리를 둔다고 한다. 仁川 出身인 우현은 서울 보성고를 卒業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學部 哲學科에서 美學과 美術史를 專攻하면서 韓國美術史 硏究에 뛰어든다. 1933年 以後 他界할 때까지 朝鮮總督府博物館 傘下 개성부립박물관張으로 있었다. 이 期間에 그의 門下에서 司稤(私淑)韓 弟子들이 황수영·진홍섭·崔淳雨다. 이 中에서 우현과 황수영·진홍섭을 韓國美術史 開城 三人坊이라 부르기도 하고, 弟子 세 名을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韓國美術史는 공교롭게도 모두 個性 出身인 이들이 體系를 잡았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정영호 敎授는 이 우현 弟子들에게 배웠다. 따라서 그는 우현의 再專制者(再傳弟子)다. 이렇게 보면 新羅三山五岳調査團은 우현 弟子들이 核心을 이룬 셈이다.? ?

    한데 우현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題目으로 大王巖을 노래한 詩를 發表했다. 現在 大王巖을 내려다보는 정자인 이肩帶(利見臺)에 懸板으로 걸려 있다. 노래 1節만 본다. ?

    “大王의 憂國聖靈(우국성令)은 / 燒身後(所信後) 龍王(龍王)李 되자/ 저 바위 저 길목에 / 숨어들어 계셨다가 / 海天(海天)을 덮고 나는 / 賊鬼(赤鬼)를 調伏(朝服)하시고” ?

    ? 이 詩는 ‘考慮時報(高麗時報)’라는 開城 地方新聞 1939年 8月 1日子에 실렸다. 우현은 또 같은 媒體 1940年 7月 16日子에는 ‘慶州紀行의 一切(一節)’이라는 자못 興奮한 色彩가 짙은 散文을 寄稿하거니와, 이에서는 “무엇보다 慶州에 가거든 東海의 大王巖을 찾으라”고 注文하기도 했다. 新羅五岳調査團은 右舷이 남긴 이런 大王巖 關聯 글들에 깊은 印象을 받은 듯하다. ?



    “大王巖 發見”??

    大王巖 發見 事實은 1967年 5月 16日子 한국일보 報道를 통해 大大的으로 公開된다. 이날 新聞은 1面 사이드 ‘文武大王陵 發見, 解放 後 最大의 文化財 收穫’이라는 題下 記事를 통해 이것이 自社가 主管하는 新羅五岳調査團의 歷史的 개가(凱歌)라고 했다. 그러면서 文武王을 “新羅 通三(統三) 護國의 榮州(英主)”라고 하는가 하면, 이것이 “世界 類例없는 水中(水中) 經營式 裝置”라고 했다. 競走발로 남욱·우병익 두 記者가 作成한 記事는 “15日 下午 新羅五岳調査團(韓國日報 主管)은 只今까지 그 形態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新羅 統一의 榮州 文武大王의 陵을 慶北 月城郡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의 大王巖에서 發見함으로써 解放 後 가장 巨大한 文化史的 凱歌를 올렸다”는 첫 줄로 始作한다.

    나아가 이番 發見이 갖는 意味라든지 構造的 特徵 等은 3面에 따로 박스記事를 실어 敷衍했다. 이 記事에는 “‘화룡訪日(化龍防日·勇이 되어 日本을 막겠다)’의 遺言 따라” “海潮音(海潮音) 속 肅然한 環境” “倭寇 막으려던 透徹한 王都(王道)의 決定(結晶)” “石窟庵 大佛(大佛)도 大王巖을 定試(正視)” “感恩寺 等은 護國 寺刹로 지어”와 같은 題目 或은 副題로 뽑은 文句가 가득하다.

    이런 文句들에서 이들이 大王巖을 통해 무엇을 읽어내려 했는지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當時의 時代精神을 表象하는 護國(護國)과 克日(克日)과 統一(統一)이었다. 文武王과 그가 묻혔다는 大王巖을 통해 民族統一의 熱望과 이를 위한 方便으로 護國과 克日 精神을 鼓吹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重要한 곳이니 當場 史跡으로 指定해 保護해야 했다. 이 박스 記事에 引用된 金上琦 博士의 말에는 “保護對策이 時急하다”는 대목이 보인다. 實際 大王巖은 그해 7月에 史跡이 됐다.

    大王巖 發掘은 이를 主導한 調査團이 韓國日報 主管인 까닭에 當然히 이 新聞의 特種이었다. 다른 新聞에서는 그 이튿날이 돼서야 關聯 記事가 보이기 始作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아는 大王巖은 華麗하게 歷史의 前面에 登場한다. ?



    發見인가 再發見인가

    한국일보를 筆頭로 하는 當時 言論 報道를 보면 異常한 點이 있다. 모든 報道가 이때 大王巖을 發見했다고 하지만, 이 點이 疑訝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이때 五惡調査團이 發見했다는 大王巖은 現在 남아 있는 證據들을 볼 때도 高麗時代 以來 줄곧 文武王의 遺骨을 뿌린 大王巖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高麗 末 陶隱(陶隱) 이숭인(李崇仁·1347~1392)이 쓴 ‘招獄自轉(草屋子傳)’이라는 글을 보면 壬寅年(1362·恭愍王 11) 가을에 陶隱 自身이 招獄자라는 사람과 함께 “감應四(感應寺·感恩寺의 誤謬)에서 노닐며 溶血(龍穴)을 들여다보았으며, 異見臺에 올라가고, 배를 타고는 大王巖까지 갔으니, 이 또한 東海의 機關(奇觀·奇異한 볼거리)이었다”고 한다. 陶隱이 말하는 大王巖이 只今의 大王巖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

    只今의 大王巖을 文武王 水中陵으로 看做한 朝鮮時代 글도 不知其數에 達한다. 朝鮮 初 地理誌인 ‘新增東國輿地勝覽’ 慶尙道 慶州府(慶州府)를 보면 이견대를 紹介하면서 “(異見)大 아래 10報(步) 바다 가운데 네 뿔이 우뚝 솟은 돌이 네 文과 같은 곳이 있는데, 이것이 그(文武王)를 장사한 곳이다. 只今까지 大王巖(大王巖)이라고 일컫는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大王巖 模樣은 只今의 大王巖과 똑같다. 그럼에도 新羅五岳調査團에서는 大王巖을 새로 發見한 듯이 弘報했다.

    都大體 어찌된 일일까? 이때의 ‘發見’이란 位置나 實體를 알지 못한 大王巖을 새로 찾았다기보다 嚴密히는 그 構造를 이때 와서야 비로소 밝혀낸 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理解하는 便이 좋을 듯하다. 말하자면 再發見이었다. 實際 大王巖 內部 調査는 이때 비로소 이뤄졌다. 정영호 敎授의 回顧.

    “1967年 5月 15日 午前 10時에…필자는 金元龍·김기웅 先生님과 함께 해중 陵域(陵域)에 들어가 3t 무게의 覆蓋席(覆蓋石) 밑에 溶血(龍穴)이라 稱할 수 있는 큼직한 巖穴(巖穴)이 있음을 確認하여 길이 6m가 넘는 대나무 長대가 다 들어가도 모자람을 알게 되었다. 5月 中旬 東海水(東海水)는 亦是 冷氣로 몸이 떨렸으나, 興奮된 1時間의 作業을 끝내고 나니 오히려 薰氣가 들었다.”

    정영호 敎授를 包含한 3名이 팬티 바람으로 大王巖 內部 웅덩이에 들어가 長대를 쑤셔 그 복판 바윗돌 밑에 구멍이 뚫렸다는 事實을 確認했다는 것이다. 이런 調査 成果를 土臺로 調査團이 그린 大王巖 內部 模式圖가 5月 18日子 韓國日報 5面에 실렸다. 이를 보면 大王巖 內部 복판 바닥에는 棺 같은 施設을 安置하기 위한 홈을 파고, 그 위를 覆蓋席이라 稱한 巨大한 바위 덩어리를 덮은 模樣이다. 이것만 보면 大王巖은 恰似 무덤이다. ?

    하지만 2001年 歷史스페셜과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가 直接 內部를 發掘調査한 結果는 이와는 全然 딴판이다. 所謂 覆蓋席 아래에는 遺骨을 安置했을 만한 溶血 또는 巖穴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50年 前 大王巖 ‘再發見’을 굳이 貶毁할 理由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는 決定的인 證據가 있다고 確信은 하기 힘드나, 只今의 大王巖은 우리에게 주어진 資料에 依하는 한 高麗時代 以來 줄곧 文武王 水中陵으로 통했다. 이 歷史 亦是 無視할 수 없다. 半世紀 前 調査 方法이 只今의 눈으로 볼 때 아쉽기는 하지만 그 時代의 限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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