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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氣와 底力의 後任者 현병철 委員長|新東亞

끈氣와 底力의 後任者 현병철 委員長

‘이카루스의 날개로 날다’ ⑨

  • 안경환│서울대 法學專門大學院 敎授 ahnkw@snu.ac.kr

    入力 2012-08-21 15: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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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人權의 政治的 中立性-人權委 獨立性 흔들
    • 끝내 霧散된 하버드法大 特講
    • 退任 後 프랑스 파리로 걸려온 疑問의 電話
    • 자랑스러운 大韓民國 勳章을 辭讓 한 까닭
    前任者가 누리는 가장 큰 祝福은 後任者의 成功이다. 自身이 몸담았던 機關의 威容이 살아야만 떠나간 사람도 빛나는 法이다. 記念辭의 常套的인 文句, “오늘날의 우리 委員會가 있기까지 寄與하신 분들…” 속에 自身도 包含된다는 慇懃한 自負心도 누릴 수 있다. ‘舊官이 名官’이라는 말, 쉽게 쓰지만 딱히 實體는 없기 十常이다. 大衆의 情緖만큼 믿지 못할 게 따로 없다. 實際로 떠난 옛사람이 그리워서가 아니다. 지난 일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不滿의 焦點이 現在의 삶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國家人權委員會의 歷代 首長 中에 初代 委員長 김창국 辯護士만 3年 任期를 채웠다. 그만큼 人權委員長은 힘든 자리다. 이렇다 할 權力도 없이 前後左右 四方에 敵이 布陣해 있다. 人權委엔 確實한 友軍이 없다. 오로지 國民(과 人間)이라는, 正體不明의 後援軍에 依支해야 한다. 그 힘든 人權위의 首長 자리를 3年 버텨냈고 게다가 類例없이 連任까지 하는 사람이 있다. 나의 後任者, 현병철 委員長의 남다른 끈氣와 底力이 부럽다. 就任 첫날부터 이날에 이르기까지 國內外 人權擁護者들의 끊임없는 抗議와 批判, 辭退 要請을 버텨낸 그의 確信이 놀랍다. 그의 確信은 任命權者인 李明博 大統領의 所信이기도 하다.

    在任 期間 玄 委員長이 남긴 功績이 왜 없겠는가? 밖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아 모르지만 無數할 것이다. 또한 首長의 能力과는 無關하게 人權委가 日常 業務를 통해 많은 國民을 달래고 품었을 것이다. 本是 公職을 떠난 사람은 몸담았던 機關의 業務를 두고 曰可曰否하는 게 아니다. 그게 前官으로서의 禮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通念과 常禮에도 不拘하고 前任者인 내가 그의 連任을 公開的으로 反對하는 理由가 있다. 그는 오랜 歲月에 걸쳐 힘들여 쌓아올린 人權위의 威容에 決定的인 傷處를 남겼다. 그것은 바로 獨立機關 人權위의 自負心이다.

    人權에는 政治의 色彩를 띠지 않을 수 없는 主題와 領域이 있다. 때때로 ‘政治의 人權火’ 現象도 不可避하다. 나라 안의 問題에 人類와 人間性의 이름으로 他國과 國際社會가 干涉한다. 介入者가 標榜하는 人權이라는 崇高한 理念의 裏面에 감춰진 검은 動機가 있다. 軍事, 經濟 强大國이 흔히 쓰는 手法이다. 이렇듯 人權을 利用하는 것은 政治의 몫이다. 그러나 어떤 境遇에도 人權이 먼저 政治의 先鋒將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人權委는 政治的 中立과 獨立的 地位를 確保함으로써 人權의 政治化를 막아야 한다.

    그런데 이 大統領은 人權위를 ‘左派政府’의 遺産으로 보는 政治哲學의 所有者로 비친다. 그는 人權위를 無力化하는 것이 곧바로 社會的인 善이라고 믿는 듯하다. 玄 委員長은 이러한 大統領의 政治哲學을 充實하게 代辯해왔다. 그 過程에서 政治的 中立과 人權위의 獨立性을 決定的으로 毁損했다. 더 큰 잘못이 있다. 그는 自身이 首長인 機關 構成員의 和合을 앞장서서 해쳤다. 人權委는 여느 政府機關과 다르다. 다양한 價値觀이 共存하는 合議制 機關이다. 個個人의 性向과 믿음이 尊重되고 調和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는 常任委를 無力化하고, 많은 委員과 助力者들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多樣한 背景과 哲學의 構成員을 包容하는 代身 批判的 性向의 職員을 迫害했다. 눈에 거슬리는 職員을 쫓아내고 남은 批判者를 懲戒로 다스렸다. 그들의 主張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職員들 사이에 不信과 反目의 골을 깊이 파놓았다. 이 모든 處事가 靑瓦臺와의 校監 아래 이루어졌다는 疑心이 든다.



    가슴으로 쓴 離任辭

    나는 아직도 現 委員長이 내 後任者가 된 詳細한 經緯를 알지 못한다. 分明히 政務職 人事에 必要한 內部 檢證 節次를 거쳤을 것이다. 다만 바깥 社會에서 期待하는 人權委 首長으로서의 資格에 對해서는 全혀 檢證이 없었다. 後日 私席에서 만난 靑瓦臺의 한 人士는 내게 “後任者가 좀 그래서…”라며 민망스러운 表情을 지었다. 難堪해하는 그에게 더 以上 캐묻지 않았다. 어쨌든 낯설고 힘든 그 자리를 맡게 된 現 委員長의 處地를 內心 同情하기도 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이 大統領은 그가 人權위와 人權에 낯선 人物이기에 더욱 適格者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國際社會는 勿論 國內 人權社會에 이름조차 生疏한 玄 委員長을 임명한 以上 國家人權機構 國際調停委員會(ICC) 議長은 처음부터 無理였다. 그로서는 抛棄할 수밖에 없었고, 大統領은 國際人權은 眼中에 없었다. 그의 連任을 두고 열린 國會의 人事聽聞會에서 “人力과 豫算이 準備되지 않아” 抛棄할 수밖에 없었다고 答하는 것을 들었다.

    2009年 6月 30日, 豫告한 대로 提出한 人權委員長 辭表가 7月 8日子로 受理됐다. 當日 離任式을 치렀다. 言論이 注目했다. 많은 職員이 親筆로 쓴 記念 앨범을 만들어주었다. 近來에 들추어보니 새삼 애잔한 마음이 든다. 特히 職場을 잃고 나서 生計手段조차 마땅치 않을 것 같은 職員들의 近況이 걱정이다. 大部分 지난 3年 동안 한 番씩은 만났다. 쓴 술盞과 메마른 한숨밖에는 건네줄 것이 없어 가슴이 아렸다.

    나의 離任辭는 특별한 注目을 받았다. 곰곰이 생각하고 나름대로 精誠을 쏟아 쓴 글이다. 私的인 所懷를 굳이 감추지 않되 大統領, 政府, 言論, 市民社會, 人權團體, 憲法裁判所, 人權委, 各各에 對한 批判과 建設的인 提案의 메시지를 담으려 했다. 內心 작은 歷史的 文書가 되기를 바랐다. 只今도 인터넷에 全文이 돌고 있다. 地方의 한 高等學校에서는 授業時間에 내 글을 나누어주고 行間에 담긴 韓國 社會의 現實을 討論한 敎師가 校長에게 잔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學父母가 問題를 삼았다는 後聞이다.

    “法이 保障한 任期 滿了日을 기다리지 못하고 앞서 물러나기로 決心한 事由는…새 政府의 出帆 以來 發生한 一連의 不幸한 事態에 對한 剛한 責任을 痛感함과 同時에, 政府의 支援 아래 새로 就任할 後任者로 하여금 그동안 深刻하게 損傷된 國際社會에서의 韓國 人權의 位相을 回復하고 人權 先進國으로서의 面貌를 一新할 轉機를 마련해드리고 싶은 强烈한 所望과 衷情 때문입니다…저는 人權이란 이념적 左도 右도 아니고, 政治的 進步도 報酬도 아닌,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日用할 糧食인 人類 普遍의 價値라는 믿음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嚴正한 政治的 中立을 强調했으며, 委員會와 ‘緊張 어린 同伴者’의 關係인 市民社會와도 일정한 距離를 둘 것을 注文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모든 言論에 對해서 同一한 基準과 誠意로 資料提供과 弘報活動을 할 것을 督勵하고, 제 스스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人權의 高貴한 價値는 政權의 交替나 延長에 따라 달라질 수 없을 것입니다. 政權의 交替는 國民의 選擇입니다. 그러나 決코 國民은 人權의 彈壓이나 後退를 選擇할 理 없습니다. … ‘先進 社會’를 旗幟로 내걸고 壓倒的인 國民의 支持로 出帆한 李明博 政府는 1年 半이 지난 이날까지 그 長點이 滿開夏至 않고 있다는 評을 듣고 있습니다. 人權위의 首長으로서 느낀 所感은 적어도 人權에 關한 限, 이 政府는 議題와 意志가 不足하고, 疏通의 姿勢나 努力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아무리 내 나라, 내 政府에 對해서 不滿이 깊더라도 國際社會에서는 내 나라, 내 政府의 立場을 最大限 擁護하는 것이 公職者의 道理임을 믿는 저이지만 그間 빚어진 實로 羞恥스럽基 짝이 없는 일들을 國際 社會에서 辯論할 自身과 面目이 없습니다.…권한쟁의심판의 請求를 憲法裁判所에 提起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立場이 다를수록 要求되는 政府機關 間의 對話와 疏通의 不在가 빚어낸 悲劇이기도 합니다. 지난 20年間 韓國의 民主化를 制度的으로 이끌어왔다는 稱頌을 받고 있는 憲法裁判所는 國際社會가 注目하고 있는 이 事案을 深思熟考하여 決定을 내려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憲裁는 1年 6個月 동안 判斷을 미루었다. 마침내 2010年 10月 26日 本案審査를 하지 않고 却下決定을 내렸다. 人權委가 憲法에 明示된 機關이 아니기 때문에 當事者適格이 없다는 理由였다. 나는 憲裁의 決定이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憲裁 스스로 自身의 領域을 縮小해버렸다. 人權위의 主張이 法理에 合當하지 않으면 本案決定으로 棄却해도 無妨했을 터다. 人權위 問題를 公論化하는 것 自體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推測도 있다.

    國民의 尊重과 사랑

    무엇보다도 나는 言論에 不滿이 많았다. 내가 人權委에 就任할 當時 한 新聞은 나를 ‘補修, 進步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日刊紙에 칼럼을 쓰는 글쟁이’라고 썼다. 그러나 人權委 以後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게 關心을 가진 言論社는 至極히 ‘偏向的인’ 少數에 限定되어 있다.

    “言論에도 苦言을 드립니다. ‘無官의 帝王’이라는 傳來의 別稱이 象徵하듯 民主社會에서 言論의 權能은 實로 莫强합니다. 그러기에 言論이 짊어져야 할 責任 또한 무겁습니다. 多數의 讀者에게 影響을 미치는 巨大 言論의 境遇는 더욱 그러합니다. 人權위의 生命이 業務의 獨立性에 있듯이, 言論의 生命은 正確한 事實의 報道에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否認하지 못할 것입니다. 特定 言論社의 政治的 立場이나 利害關係가 걸린 事案에서도 報道는 正確한 事實이 前提되어야 한다는 것은 言論의 基本良識이자 讀者에 對한 最小限의 禮儀일 것입니다. 이른바 ‘北韓人權’이나 ‘촛불集會’ 事件의 例에서 보듯이 人權위의 法的 權能에 對한 無知, 誤解, 事實歪曲과 같은 부끄러운 言論 行態는 拂拭되어야 할 것입니다.”

    離任辭를 쓰면서 나는 언젠가는 人權위의 經驗을 記錄으로 남겨야겠다고 作定했다. 이 나라 人權社의 史草를 提供해야 한다는 使命感이 들었다.

    “政治的 背景과 哲學이 다른 두 분의 大統領의 在職 中에 國際的 關心이 集中된 獨立機關의 張의 職을 遂行한 幸運은 여느 大韓民國 國民이 누리지 못한 特權과 祝福이었습니다. 다만, 單 한 次例도 李明博 大統領께 業務報告를 드리지 못하고 자리를 떠난 無能한 人權委員長으로 歷史에 남게 된 것은 제 個人의 不運과 恥辱으로 삭이겠습니다.…저의 後任者는 政府와 國民의 尊重과 사랑을 받아, 지난 8年間 委員會가 犯한 若干의 施行錯誤를 克服하는 한便, 그동안 이룩한 燦爛한 業績을 發展的으로 承繼하기 바랍니다.”

    나의 後任者는 大統領의 사랑을 받는 것 같다. 사랑뿐만 아니라 尊重도 받는가? 그렇다면 國民의 尊重과 사랑은? 내가 懇切히 念願했던 人權위의 ‘發展的 承繼’는? 이 대목에서 가슴이 턱 막힌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온갖 受侮를 當하는 植物 委員長으로라도 넉 달을 더 버티었을 것이다. 그러나 正말이지 그 때는 몰랐다. 마지막까지 나는 이 大統領의 常識과 善意를 믿고 期待했다.

    마지막 句節은 맨 먼저 써두었다. 쓰면서도 이 대목이 가장 가슴에 쓰렸다. 只今도 그렇다.

    “흔들리지 않는 信賴와 사랑으로 저를 지켜주었던 同僚들께 感謝드리고, 委員會의 獨立性을 蹂躪하면서 强行한 政府의 暴擧로 因해 倉卒間에 職場을 잃게 된 同僚 職員들에게 깊은 慰勞와 謝罪의 말씀을 드립니다.…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人權의 길에는 終着驛이 없다는 事實을. 또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政權은 짧고 人權은 永遠하다’는 萬古不變의 眞理를. 우리 가슴 깊은 곳에 높은 以上의 불씨를 간직하면서 毅然하게 걸어갑시다. 외롭지만 떳떳한 人權의 길을. 오늘 우리를 괴롭히는 이 憤怒와 아픔은 보다 밝은 來日을 위한 작은 試鍊에 不過하다는 믿음을 다집시다. 제各其 가슴에 품은 작은 칼을 벼리고 벼리면서, 蒼天을 向해 맘껏 劍舞를 펼칠 大明天地 그날을 기다립시다.”

    美 出張 놓고 靑과 昇降이

    大多數 言論은 나의 退任 事實만 짧게 報道했고, 少數의 言論은 離任辭의 몇 句節을 擴大해 報道했다. ‘날선 批判’ ‘政權은 짧고 人權은 永遠하다.’ 그 누구도 내가 스스로 물러나는 眞正한 뜻을 바로 알아주지 않았다. ‘政權은 짧고 人權은 永遠하다’는 句節이 나의 ‘語錄’으로 남아 있다. 實인즉 내가 그때 처음 쓴 말은 아니었다.

    2009年 2月 나는 美國 하버드法大 人權센터에서 보낸 講演 招請狀을 들고 있었다. 이에 앞서 스탠퍼드대에서 열리는 美國 西部地域 公益人權法學會 年例總會 開幕式에서 基調演說을 하기로 돼 있었다. 大韓民國의 現職 人權委員長으로서 意味 있는 일로 생각돼 受諾했다. 하버드大 講演 題目은 招請者 側의 意圖를 尊重해 ‘經濟 第一 時代의 韓國 人權’으로 定했다. 出國 豫定日을 넉넉히 앞두고 靑瓦臺에 出張 申告書를 提出했다. 다른 政務職과 달리 人權委員長은 大統領의 ‘再嫁’ 없이 海外旅行을 할 수 있다. 내가 就任하기 前 이미 確立된 慣行이지만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김대중 政府 末期의 일이다. 김창국 當時 委員長이 國際會議에 參席하면서 靑瓦臺의 許可를 받지 않았던 게 問題가 됐다. 始末書를 쓰라는 靑瓦臺에 대고 人權委가 直擊彈을 날렸다. ‘人權위는 獨立機關이다. 委員長의 海外旅行은 大統領의 許可 事項이 아니다. 人權위의 獨自的인 判斷에 따라 決定할 뿐이다.’ 靑瓦臺 參謀들이 ‘傲慢不遜’ ‘眼下無人’인 人權위를 非難하고 나섰고 몇몇 國會議員도 同調했다. 任期 末 大統領의 權力에 漏水現象이 생길 것을 憂慮했던 까닭이다. 이 問題는 ‘人權 大統領’의 諒解로 結末이 났다. 許可 代身 申告事項으로 整理된 것이다. 이 事件에서 나는 靑瓦臺와의 戰爭을 宣布한 金 委員長을 支援하는 新聞 칼럼을 썼다.

    人權委員長의 疏略한 出張 書類를 接한 靑瓦臺가 새삼 是非를 걸어왔다. 詳細한 日程과 內容을 添附하라는 것이다. 擔當 行政官이 실로 異例的인 質問을 건네 왔다. 왜 委員長과 女職員, 단둘이서만 海外旅行에 나서느냐고. 그러고는 未婚인 該當 職員에게 直接 電話를 걸어 常例에 어긋나는 質問을 했다. 人權委는 業務上 男女의 區分이 없다. 그 職員은 當初부터 委員長의 國際 業務를 補助하기 위해 採用한 사람이다. 事務總長이 行政官의 性差別的인 發言을 公式的으로 引用해도 좋으냐고 따지자 물러섰다. 靑瓦臺가 干涉한다는 消息을 接한 委員會의 內部 雰圍氣가 洶洶했다. 組織縮小를 둘러싼 戰爭을 치르는 中이라 모두 緊張했다. 常任委員들이 操心스럽게 出張 再考를 勸告했다. 무엇보다 委員長 不在 中에 急迫한 事情이 생기면 어찌 하느냐는 것이다. 苦心 끝에 하버드大 講演은 取消하기로 했다. 代身 스탠퍼드大 日程은 豫定대로 消化했다. 하버드대에는 事實대로 傳할 수 없어 ‘家族의 身柄’을 理由로 들었다. 美國人이 쉽게 諒解하는 事由다. 너무 急迫한 決定이라 取消된 줄 모르고 當日 講演場에 나왔던 사람도 數十 名이나 됐다는 後聞이다. 하버드대에 진 빚은 꼭 1年 後에 갚았다. 連 이틀에 걸쳐 세 次例나 講演을 했다. 學生, 人權專門家, 一般 知識人 等 聽衆이 다양했다. 學究的인 內容이 많고 期待만큼 政府에 對한 批判의 强度가 높지 않았는지 多少 失望한 表情을 짓는 聽衆도 더러 있었다.

    委員長의 海外 나들이에 隨行員이 단출한 것은 무엇보다 旅費를 節約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通譯員은 必要 없다. 짐도 단출한 便이다. 業務를 챙길 最小限의 人力으로 足하다. 人權委員長은 長官級이기에 航空機의 一等席이 基準이다. 그러나 나는 在職 中 한 番도 一等席을 利用한 적이 없다. 비즈니스席으로도 充分했다. 굳이 機關의 體面이나 의전을 따지더라도 儉約은 人權委員長의 威容에 決코 欠이 되지 않는다. 첫 나들이부터 내가 固執한 若干 ‘튀는’ 決定을 職員들은 歡迎했으리라 믿는다. 언제나 不足하기 마련인 것이 豫算이다. 더구나 나는 國際 活動을 强調했다. 내가 남긴 航空料 差額으로 職員 몇 사람의 旅費가 充當될 수 있다.

    疑問의 與圈 職權抹消

    끈기와 저력의 후임자 현병철 위원장

    2012年 7月 열린 현병철 人權委員長에 對한 人事聽聞會 光景. 2009年 就任한 現 委員長은 8月 13日 任期 3年의 人權委員長에 再任命됐다.

    나는 내 世代 中 比較的 일찍부터 海外 나들이를 한 篇이다. 많은 나라, 無數한 旅程에서 豫期치 않은 일을 當하기도 했다. 近來 들어 내 나라가 얼마나 豫測可能한지 安堵하곤 했다. 그런데 年前에 實로 豫期치 않은 일을 當했다. 2010年 6月 28日의 일이다. 파리行 航空機를 타기 위해 仁川空港에 나갔다. 平素 習慣대로 充分히 이른 時間에 到着했다. 搭乘手續을 하던 航空社 職員이 내 旅券에 問題가 생겼다고 했다. 영문 모를 일이다. 한참 만에 法務部의 擔當者를 連結해주었다. 내 旅券이 失效됐다고 했다. 理由는 모르겠다고 했다. 내 身元을 밝히고 長官에게 卽時 報告하고 納得할 만한 說明을 해주지 않으면 正式으로 問題 삼겠노라고 斷乎하게 말했다. 다시 法務部 擔當者가 連絡해왔다. 40分假量 걸렸다. 正確한 事由는 모르지만 내가 所持한 官用旅券이 5月 10日子로 外交通商部에 依해 職權으로 抹消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空港에서 臨時旅券을 發給받도록 措置했으니 번거롭지만 節次를 밟으라고 鄭重하게 傳했다. 個人의 問題만은 아닌 듯해 學長에게 電話로 알렸다. 그리고 外交部에 狀況을 傳하라고 要求했다. 公務員 身分을 떠난 사람이 官用旅券을 所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올해 初, 法人으로 轉換하기 以前의) 서울大 敎授는 儼然히 公務員이다. 나는 서울대 在職 時에 所持하던 官用旅券을 人權委員長이 돼서도 使用했다. 在職 中에 期間이 滿了돼 새 旅券을 發給받았다. 그리고 서울대에 復歸한 뒤 1年 가까이 같은 與圈을 使用해 몇 次例나 海外 나들이를 했다. 아무런 制止도 없었다. 그 누구도 別途의 措置가 必要하다고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뒤늦게, 느닷없이, 本人도 모르게 職權으로 抹消하다니!

    後에 들은 이야기는 公務員 身分을 維持하더라도 所屬機關이 바뀌면 새로운 所屬機關의 名義로 旅券을 發給받도록 하는 外交通商部의 ‘內規’가 있다고 했다. 萬若 그런 規定이 있다면 누군가가 알려줬어야 할 것이 아닌가? 적어도 與圈을 抹消하기 前에 本人에게 通知는 해줬어야 할 것이 아닌가? 外交部는 前 所屬機關에서 要求하는 境遇에만 措置를 取할 뿐이라는 말도 있다. 설마하니 人權委가 前任 委員長인 나의 旅券을 實效시키라고 注文했을 理 없다. 人權委 實務者들은 그런 일이 決코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기막힌 일이다.

    空港에서 臨時旅券을 만들었다. 혼자서 促迫한 時間 內에 解決해야 했다. 證明寫眞을 찍으려고 보니 無人寫眞機가 고장이다. 부스 안에 적힌 안내 番號로 電話를 걸어도 쉽게 連結되지 않았다. 點心時間이 걸쳐 있어 더욱 서비스가 制限됐다. 外交部 擔當 職員은 冷冷했다. 在職證明書, 出張許可書 寫本을 卽時 팩스로 보내라. 게다가 나의 身元을 證明할 身分證까지 要求했다. 旅券 말고 무슨 身分證이 더 必要한가, 나의 反問에 그는 抹消된 旅券은 有效한 身分證이 될 수 없다고 했다. 運轉免許證 아니면 住民登錄證? 海外旅行을 떠나면서 누가 持參하는가.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려 애썼지만 나도 모르게 不平이 터져나왔다. 또한 그는 發給 申請書의 事由欄에 나의 ‘不察’을 具體的으로 적으라고 했다. 不察이라니? 世上에 이렇게 氣가 막히는 일이 있는가? 어쨌든 나는 飛行機를 타야 한다. ‘抽象的’으로 記載했다. 그 過程에서 느낀 官僚的 態度, 冷淡한 表情에서 ‘當身이 누군지 몰라도 내가 當身을 不便하게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읽었다. 그나마 航空社 職員이 始終一貫 매우 親切하게, 참을性 있게 便宜를 봐주었다. 내가 法務部와 通話하는 內容을 듣고 前後事情을 感知한 듯했다. 그의 고마움을 特別히 記憶하는 것도 그에게 도움보다는 負擔이 될 것 같아 애써 잊기로 했다. 그래서 그런지 不過 2年 남짓인데 그의 이름은 勿論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내게 臨時旅券을 내준 그 公務員도 마찬가지로.

    씁쓸한 마무리

    아직도 나는 이 荒唐한 事件의 顚末을 알지 못한다. 歸國해 正式으로 經緯를 따지려다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그해 2月 하버드대에서 한 講演이 影響을 미쳤을 것이라고 推測하는 사람도 있었다. 決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쨌든 나는 臨時旅券을 들고 出國했다. 그런데 異常한 일이 旅行 中에도 일어났다. 며칠 後 파리에서 知人과 저녁食事를 하고 信用카드로 밥값을 支拂했다. 미처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前에 내 携帶電話가 울렸다. 서울의 去來 銀行인데 프랑스에서 카드를 決濟한 事實이 맞느냐고 물었다. 요즘 旅行者를 相對로 하는 詐欺가 많아서 챙긴다고 했다. 서울 時間으로 새벽 4時쯤일 것이다. 나는 고맙다고 答하고선 不過 30萬원 남짓한 金額인데, 韓國의 顧客 서비스가 놀랍지 않으냐며 그에게 자랑했다. 그는 瞬間的으로 뭔가 좀 異常하다고 말했다. 電話를 건 時間도, 男子 목소리인 것도 좀 異常하지 않으냐고 했다. 파리에 오래 산 그는 1979年 10月 일어난 김형욱 前 中央情報部長 失踪事件에 關해서도 區區한 뒷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매우 敏感하게 反應하는 것처럼 보였다. 要旨인즉 “當身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그러니 알아서 處身하라”고 누군가 내게 보내는 警告 메시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흘 前의 旅券問題와 聯關 지어 推理小說을 쓸 法도 하다. ‘설마 그럴 理야, 내가 무슨 重要한 人物이라고’ 하고 넘겨버렸다. 設令 眞相을 알아낸다고 한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으랴. 나는 아직까지 이 問題도 正式으로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내게 具體的인 被害가 생긴 것도 아니다. 그저 이따금씩 생각하면 若干 不快할 뿐이다. 한동안 소란스럽던 總理室의 ‘民間人 不法査察’ 對象者 中에 나는 包含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끈기와 저력의 후임자 현병철 위원장
    안경환

    1948年 慶南 密陽 出生

    1984年 美國 샌타클래라臺 法學 博士

    第4代 國家人權委 委員長 (2006.10~2009.06)

    現 서울대 法學專門大學院 敎授

    著書: ‘法과 社會와 人權’ ‘法, 映畫를 캐스팅하다’ ‘조영래 評傳’ 等


    2011年 봄의 일이다. 人權위의 某 局長이 電話를 걸어왔다. 退任 以後 처음 있는 일이다. ‘冠禮와 傳統에 따라 前職 委員長과 常任委員에게 政府가 勳章을 授與하려고 한다. 主務部署인 行政安全部에서 當事者의 意思를 確認하고 上申하라고 한다’며 내 뜻을 물어왔다. 그러면서 前職 常任委員들도 모두 받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한동안 ‘나라를 말아먹은’ 前 政府의 官僚들에게는 勳章을 주지 않기로 했다는 等 洶洶한 말까지 나돌았었다. 모든 前職者에게 一括的으로 勳章을 授與하는 것도 問題이긴 하다. 甚至於는 不美스러운 일로 解任된 閣僚들까지 勳章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一括的으로 保留하는 것은 더욱 異常한 일이다. 나는 이 政府의 出帆 當時부터 노무현 政府의 閣僚들에게 卽時 勳章을 授與하라고 建議하곤 했다. 이제야 비로소 政府가 安定된 셈이다. 多幸한 일이다. 訓長은 憲法에 따라 國家元首가 授與하는 것이다. 내게 李明博 大統領은 問題가 아니었다. 그는 儼然한 國家元首다. 大韓民國 政府의 勳章을 받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本人의 意思를 물어보고 준다는 것도 多少 부자연스럽기는 하지만 아주 納得이 가지 않은 바도 아니다. 나의 前任者인 조영황 辯護士의 境遇도 現職인 내가 直接 실마리를 풀었다. 스스로 떠난 後 人權委 쪽을 쳐다보기도 싫다던 그분을 내가 나서서 說得했고 正式으로 勳章을 傳達하는 意識도 치렀다. 問題는 나 自身이다. 나는 며칠 생각할 말미를 달라고 했다. 家族과도 相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나름대로 熱心히 일했지만 決코 成功한 委員長이 아니다. 設令 내게 功績이 있다 치더라도 部下職員 40餘 名의 일자리를 잃게 한 張本人 아닌가. 그런 失敗한 組織의 腸이 무슨 낯으로 訓長을 받겠다고 제 입으로 말할 수 있을까! 며칠 後 뜻을 傳했다. 決코 ‘拒否하는’ 것이 아니라 ‘辭讓하는’ 것이라고. 仕樣의 事由도 밝혔다. 그런데 내 眞意가 제대로 傳達되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安 敎授가 大統領에 對해 角을 세운다’며 섭섭해 하거나 안타까워하는 政府 高位層의 反應이 있었다는 뒷말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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