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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子들은 모르는 女子의 幸福 每日 느껴요”|신동아

“女子들은 모르는 女子의 幸福 每日 느껴요”

트랜스젠더 演藝人 최한빛

  • 최호열 記者 | honeypapa@donga.com

    入力 2014-04-23 09: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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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늘 女子였고, 只今은 더 完全한 女性 됐을 뿐
    • 19禁 映畫 出演 “베드신요? 期待해도 좋을 만큼”
    • 男子舞踊手에서 잘렸다 手術 後 女主人公 꿰차
    • 아버지 “아들이든 딸이든 너는 내 子息” 性轉換 받아들여
    “여자들은 모르는 여자의 행복 매일 느껴요”
    門이 열리고, 최한빛(27)이 들어서는 瞬間, 숨이 탁 멎었다. 180cm의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가 感歎을 자아냈다. 괜히 ‘슈퍼모델’이 아닌 模樣이다. 카메라 앵글을 통해 본 얼굴도 魅力的이다. 祝福받은 外貌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安寧하세요” 하며 人事를 건네기 前까지는.

    外貌와 달리 中性的인 목소리가 그가 트랜스젠더(性轉換者)임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生物學的으로 男性이었는데 醫學的 힘을 빌려 女性으로 다시 태어났다. ‘第2의 하리수’인 셈이다. 그동안 取材次 만난 트랜스젠더 大部分은 化粧을 짙게 하고 섹시한 衣裳을 입어도 ‘딱 봐도’ 男子였다. 그런데 그에게선 男性의 痕跡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따지고 보면 이 程度 中性的인 목소리는 女性 中에도 많다.

    寫眞 撮影을 하는 동안 그의 一擧手一投足을 살펴보았다. 틈틈이 손으로 짧은 치마를 끌어내리고,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서 앉고, 上體를 숙일 때면 자연스럽게 한쪽 손을 가슴골 쪽으로 가져가는 게 ‘女性’의 모습 그대로다. 서울 청담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최한빛은 그렇게 始作부터 記者를 혼란스럽게 했다.

    “中國에서 사흘 前 돌아왔어요. 한 달 동안 中國 大都市 클럽을 돌며 公演을 했거든요. 디제잉(DJing)도 하고, 춤과 노래를 곁들인 퍼포먼스도 하고…. 색다른 經驗이었어요.”

    ▼ 映畫도 찍었죠?



    “19禁 섹시코미디예요. 트랜스젠더가 아닌 그냥 女子로 나와 제겐 意味가 큰 映畫죠. 저도 벗느냐고요? 조금요. 露出은, 期待해도 좋을 만큼.(웃음) 率直히 전 베드신을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宏壯히 語塞하고 어렵더라고요.”

    ▼ 새로운 作品이 決定된 게 있나요.

    “이야기 中인 드라마가 있어요. 放送이나 公演이 없어도 늘 바빠요. 大學院 다니면서 工夫도 하고, 틈틈이 패션쇼 舞臺도 서고, 大學 後輩들과 舞踊 公演도 하고, 學生들 레슨도 하고요.”

    ▼ 아무 日程이 없을 때는 뭐하며 지내나요.

    “2, 3日 쉬는 날이 생기면 엄마랑 있고 싶어서 父母님 집에 가요. 그렇지 않을 때는 親舊 만나요.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걸 싫어해 늘 누군가 옆에 있어야 해요. 그래서 親舊가 많아요. 中高等學校 親舊부터 無用하는 親舊, 모델 親舊, 放送하면서 만난 親舊까지.”

    핫팬츠에 핑크色 가방

    그는 “어려서부터 江陵에서 알아주는 예쁜 아이였다”고 自身을 紹介했다.

    “노란色, 핑크色 같은 예쁜 物件을 좋아하고, 로봇이나 自動車보다는 바비人形 가지고 노는 걸 좋아했어요. 아양도 잘 떨고요.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면 氣分이 좋은데, 잘생겼다고 하면 稱讚이란 느낌이 안 들었어요. 距離感이 들었던 것 같아요.”

    ▼ 언니들 影響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언니들과는 터울이 많이 져서 人形놀이를 하면서 놀아주지는 않았어요.”

    ▼ 初等學校 들어갈 나이쯤 되면 ‘男子’와 ‘女子’가 다르다는 걸 알게 마련인데.

    “그때부터 내가 뭔가 잘못됐구나 하는 걸 느꼈죠. 그래서 밤마다 祈禱했어요. ‘하나님, 오늘 이렇게 착한 일 많이 했으니 제 몸으로 바꿔주세요’ 하고. 나는 只今 꿈을 꾸는 거고, 來日 아침이면 다시 女子로 돌아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 自身의 性格을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사람이 性格은 바뀔 수 있어도 性向이 바뀌지는 않잖아요. 父母님이 제 性格을 고쳐보려고 跆拳道場을 보냈어요. 겨루기試合에 나갔는데, 내가 때린 애가 우는 거예요. 그 瞬間 너무 混亂이 왔어요. 나 때문에 우니까 내가 잘못한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맞기만 했어요. 그러다 울곤 했죠. 엄마가 ‘왜 너는 안 때리고 맞기만 하냐’고 해서 ‘내가 때리면 쟤가 울잖아’ 그랬대요. 누굴 때리거나 하는 性格이 못 돼요. 싸움이 나면 눈물부터 나요.”

    “여자들은 모르는 여자의 행복 매일 느껴요”
    ▼ 中學校 땐 어땠나요.

    “只今도 第一 돌아가고 싶은 時節이에요. 男子中學校를 다녔는데, 全校에서 有名했어요. 入學式 날, 핫팬츠에 핑크色 가방을 메고 갔으니까. 게다가 斷髮머리에 실핀까지 꽂았으니 ‘쟨 뭐야’ 했겠죠. 그래도 다들 節 예뻐했어요.”

    ▼ ‘계집애 같다’고 괴롭히는 아이들도 있었을 텐데.

    “있었죠. 저를 正말 괴롭히는 애도 있었고, 저를 위해 그 애랑 싸워준 親舊도 있었어요. 大部分 제 趣向을 認定해주고, 잘 對해줬어요.”

    ‘내가 더 예쁘게 잘 출 수 있는데’

    “여자들은 모르는 여자의 행복 매일 느껴요”

    최한빛은 “난 한番도 男子였던 적이 없다. 恒常 女子였고, 只今은 더 完全한 女性이 됐을 뿐”이라고 말한다.

    ▼ 德源豫告 舞踊科를 나왔는데, 江陵에서 서울로 온 理由가 있나요.

    “어릴 때부터 꿈이 舞臺에 서는 것이었어요. 그렇다고 演藝人이 되고 싶다는 건 아니었어요. 춤을 추든, 노래를 하든 舞臺에 서는 게 目標였어요. 只今도 카메라 앞에 서는 것보다는 舞臺 위에서 뭘 할 때가 더 幸福해요.”

    ▼ 舞踊을 하겠다고 했을 때 父母님 反應은 어땠나요.

    “아빠는 안 그래도 계집애 같은데 舞踊까지 하면 더 여성스러워질 것 같다며 反對했죠. 하지만 엄마는 恒常 저의 全幅的인 支援軍이었어요. 只今까지 엄마아빠 말을 잘 들었고 실망시킨 적이 없으니 금세 承諾을 받았죠.”

    춤이 좋아서 들어간 豫告였지만, 그는 무척 힘든 時節을 보냈다고 했다.

    “高等學校에 들어오기 前까지는 周圍에 제가 女子처럼 行動하는 걸 異常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게 제 福인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었죠. 그런데 高等學校는 그렇지 않았어요. 난 男子가 아닌데 男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어요. 女子애들이 예쁜 치마 입고 춤추는 걸 보며 ‘내가 쟤들보다 훨씬 더 예쁘게 잘 출 수 있는데 나는 왜 할 수 없는 거지’ 하는 슬픔뿐이었어요. 애들이 다 돌아간 後 舞踊室에 혼자 남아 울곤 했어요. 그러다 치마를 꺼내 입고 혼자 거울 보며 춤을 췄어요. 그때가 가장 幸福했어요. 그러면서 漸漸 춤에 依支하게 됐죠.”

    ▼ 先生님에게 ‘나도 女子애들과 같은 춤을 추고 싶다’고 말하면 되지 않았나요.

    “커밍아웃을 할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없었죠. 참고 버텨야 한다는 생각만 했어요. 그렇다고 男子 役割을 하며 살 수는 없을 것 같고…. 너무 힘들었죠.”

    ▼ 그때는 性轉換을 생각하지 않았던 模樣이네요.

    “내가 女子로 살아야 하나, 男子로 살아야 하나 하는 苦悶보다는 오직 韓國藝術綜合學校 舞踊科에 入學하는 게 目標였어요. 그 學校 公演을 보고 完全 반했거든요. 거기만 들어가면 幸福할 줄 알았죠. 춤만 추면 女子든 男子든 相關없이 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 2006年, 그토록 願하던 韓國藝術綜合學校에 入學했는데.

    “入學하자마자 男子들은 다 웃옷을 벗으라고 하는데, 망치로 머리를 맞은 氣分이었어요. 公演할 때 男子舞踊手들은 웃옷을 벗고 할 때가 있거든요. 이게 아닌데 싶었죠. 더 큰 스트레스는 男子舞踊手 役割이었어요. 제가 키가 큰 便이지만 女子들도 普通 170cm가 넘어요. 몸무게는 別 差異도 없고요. 그런 女子애를 들고 돌리고 앉히는 걸 시키는 거예요. 거기서 完全히 멘崩(멘탈 崩壞)李 온 거죠. 힘이 달려 제대로 못 하니까 公演에서 빼더군요.”

    ‘나 이런데 軍隊 가도 돼요?

    더 以上 춤을 출 수 없게 되었다는 挫折感에 彷徨하던 그는 문득 ‘나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는 이렇게 힘든데 그들은 어떻게 克服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여름, 난生처음 트랜스젠더들을 만나러 이태원을 찾았다.

    “트랜스젠더들이 일하는 遊興酒店에 갔어요. 다들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筋肉이 울퉁불퉁한 사람도, 鬚髥 난 사람도 있는 거예요. 그들을 보며 ‘저런 사람도 自己 삶을 살겠다고 여기 나와 있는데 난 只今까지 한 番도 나를 찾으려고 努力해보지도 않고 怨望만 했구나, 現實과 부딪치려 하기보다는 자꾸 다른 것에 기대려고만 했구나’ 하는 걸 깨달았어요.”

    ▼ 그 무렵 性轉換을 苦悶했나봐요.

    “나도 하리수 언니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父母님을 실망시키는 게 너무 두려웠어요. 그런데 거기서 同甲내기와 이야기하게 됐어요. 性을 轉換하는 게 苦悶이 안 되냐고 물었더니 自己는 한 番도 苦悶해본 적이 없다고 너무나 確固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父母님이 反對하더라도 하나뿐인 내 人生, 眞짜 나로 살아야지 않겠느냐고요. 그때 머릿속이 完全 환해지는 氣分이었어요. 바로 그날 決心하고 엄마에게 電話했죠.”

    ▼ 性 正體性이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單純히 女裝男子처럼 女性的 趣向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女裝男子는 어쨌든 性 正體性이 男子잖아요. 그랬다면 20年 동안 그렇게 힘들게 살지는 않았겠죠. 性的 趣向과는 全혀 別個의 問題예요.”

    ▼ 이태원 갔다 온 以後 치마도 입고 完全 女子처럼 하고 다닌 건가요.

    “前에는 그냥 유니섹스 스타일로 다녔죠. 女子처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 自體를 안 했어요. 내가 女子니까요. 이태원을 다녀온 後 처음 치마를 입어봤는데, 너무 不便하더라고요. 아시죠? 왜 그런지.(웃음) 그다음부터는 手術할 때까지 안 입었어요. 아, 한番 있다. 兵務廳 갈 때.”

    ▼ 兵務廳은 왜.

    “公演에서 잘린 뒤 挫折感에 入隊 申請을 했어요. 제가 眞짜 가야 할 길을 찾고는 無作定 兵務廳을 찾아갔죠. 긴 머리에 치마까지 입은 사람이 入營 令狀을 보여주며 ‘나 이런 사람인데 軍隊 가도 돼요?’ 하니까 職員들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只今 생각해도 그땐 正말 唐突했어요. 그 자리에서 免除處分을 해주더군요.”

    “사랑한다, 내 셋째 딸”

    ▼ 父母에게 처음 ‘커밍아웃’했을 때 反應이 어땠나요.

    “엄마는 제 性向을 알면서도 繼續 아닐 거라고 스스로에게 呪文을 걸며 살았대요. 그러다 憂慮가 現實이 되니 ‘올게 왔구나’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相當히 힘들어하셨죠. 아빠는 처음엔 ‘絶對 안 된다, 精神 차려라’고 反對하셨어요. 제가 ‘只今까지 이렇게 혼자 가슴앓이를 하면서 참고 살았다. 참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더는 안 되겠다, 眞正한 나로 살고 싶다. 幸福을 찾고 싶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그냥 살기도 힘든 이 險한 世上을 트랜스젠더로 살 수 있겠느냐’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저를 걱정하시는 게 더 未安했어요.”

    ▼ 적어도 미친놈 取扱은 안 받은 거네요.

    “아빠는 저를 너무 사랑하세요. 그때 아빠에게 約束했어요. 누구보다 幸福하게 살겠다고. 아빠도 ‘陰地에 숨어 살지 말고 堂堂하게 하고 싶은 일하며 幸福하게 살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許諾을 하시고도 繼續 힘들어하셨죠. 밤마다 아빠는 술 드시고, 엄마는 울고, 그걸 보는 내 가슴도 아프고…. 憂鬱症이 甚하게 왔어요. 하루 終日 房 안에 처박혀 울기만 했어요. 아빠가 들어오시더니 제 손을 잡으면서 ‘네가 아들이든 딸이든 둘도 없는 내 子息이다’라고 하시고는 꼭 안아주면서 ‘사랑한다. 내 셋째 딸’ 하시더라고요. 제가 世上에 더 堂堂할 수 있는 건 이런 父母님 德分일 거예요. 父母님에게 사랑스러운 딸이니까요.”

    그해 12月 手術臺에 올랐다. 7時間 넘게 걸린 큰 手術이었다고 한다. 手術 後 4, 5日 동안은 苦痛이 너무 甚해 繼續 痲醉劑를 맞아야 했고, 한 달 동안 누워만 있었다고 하니 그 苦痛이 조금은 想像이 된다.

    ▼ 性器를 바꾸는 手術을 할 때 가슴 手術도 같이 하나요.

    “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요. 가슴 없는 女子도 많잖아요. 다른 트랜스젠더들은 手術 前後로 호르몬治療를 한다는데, 전 別로 안 했어요. 털도 잘 안 나고, 筋肉도 別로 없고…. 元來 男性호르몬이 적고 女性호르몬이 많았어요.”

    ▼ 手術室에 들어갈 때 두렵지는 않았나요.

    “죽을 수도 있는 危險한 手術이고, 實際 죽은 境遇도 있어요. 하지만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한다고 해도 父母님께 딸로 인정받았으니 餘恨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 手術 後 나왔을 때의 氣分은 어땠나요.

    “울면서 들어갔다 웃으면서 나왔어요. 너무 幸福해서. 그 마음은 누구도 理解할 수 없을 거예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氣分이었죠. 그런데 率直히 너무 아팠어요. 眞짜 죽을 만큼 아파요. 그 苦痛을 아는 只今, 手術을 다시 하라고 하면 엄청 끔찍할 거예요. 그래도 할 거예요. 어쨌든 제대로 된 내 삶을 살아야 하니까요.”

    女子라서 모든 게 幸福

    ▼ 法的으로도 性別이 바뀌었나요.

    “하리수 언니가 길을 잘 터놔서 比較的 쉽게 變更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까다로워요. 手術資料, 精神科 醫師 3名의 診斷書, 父母님 同意書를 받아야 하고, 知人 10名으로부터 ‘이 사람은 女性임을 證明한다’는 所見書를 그 사람들 住民登錄謄本과 함께 提出해야 해요. 初·中·高 生活記錄簿도 봐요. 信用不良者나 前科記錄이 있으면 안 되고요. 마지막으로 判事가 外貌를 봐요. 여기서 退字를 맞은 사람도 있어요.”

    ▼ 判事가 外貌를 보고 主觀的으로 判斷한다니 論難이 있을 수 있겠네요.

    “曖昧模糊한 部分이 있어요. 例를 들어 누가 봐도 外貌가 男子인데 性轉換 手術을 했으니 女性으로 認定해달라고 하면 率直히 전 判斷이 안 서요. 實際로 얼마 前에 女湯에 男子가 들어갔다가 붙잡혔다는 記事가 실렸어요. 그 사람은 性轉換手術까지 한 트랜스젠더였어요. 그런데 外貌가 누가 봐도 男子예요. 法院에서 性別 變更이 棄却돼 法的으로 男子여서 處罰을 받았어요. 本人은 抑鬱하겠죠. 外貌에 對한 偏見이고, 幸福追求權을 막는 것이라고 非難할 수도 있지만, 反對로 다른 사람에게 混亂을 줄 수 있고, 特히 다른 女性에게 威脅을 줄 수 있다는 點도 考慮해야 할 것 같아요.”

    ▼ 手術 後 달라진 點이 있다면.

    “自信感이 百倍로 붙었죠. 手術 前엔 公演에서 잘렸는데 手術 後에는 오디션을 통해 제가 女子主人公이 됐어요. 氣가 막힌 反轉 아닌가요? 그때 ‘내가 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 周圍 反應은 어땠나요.

    “똑같았어요. 性格도, 스타일도 달라진 게 없으니까요. 춤 練習을 할 때 男子 줄에서 女子 줄로 옮겨간 것 外에는.”

    ▼ 手術 後 戀愛도 해봤나요.

    “當然히 했죠. 戀愛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고.”

    “부담스러워 옷 입힐 수 없다”

    “여자들은 모르는 여자의 행복 매일 느껴요”

    최한빛은 지난 겨울 메디컬 뮤지컬 ‘루나틱’에 出演했다.

    ▼ ‘女子가 돼서 이런 게 第一 좋다’ 하는 게 있다면.

    “男子의 保護를 받을 때?(웃음) 다른 女子들은 태어날 때부터 女子라서 只今 제가 느끼는 幸福을 못 느낄 거예요. 저와는 幸福의 基準點이 다른 거죠. 前 아주 些少한 것에서도 幸福을 느껴요. 只今 女子라서 모든 게 幸福해요.”

    그는 2009年 슈퍼모델 選拔大會에 出戰하며 世上에 얼굴을 알린다.

    “元來는 미스코리아大會에 나가려 했어요. 어릴 때부터 엄마가 ‘네가 女子라면 미스코리아감인데’ 하는 말을 많이 했거든요. 이제 完全한 女子가 됐으니까 出戰만 하면 入賞할 自身이 있었어요. 그런데 費用이 너무 많이 들더라고요. 그때 마침 슈퍼모델 公告가 났어요. 테스트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順坦하게 女子의 삶을 산 親舊들과 제가 어떻게 다른지를. 試驗 삼아 申請했는데, 덜컥 本選까지 붙은 거예요. 率直히 韓藝綜 舞踊科라는 ‘學校빨’도 있었다고 봐야죠.”

    ▼ 本選 大會를 앞두고 合宿 期間 中에 굳이 커밍아웃한 理由가 있나요.

    “제가 밝힌 게 아니에요.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實時間 檢索 1位인 거예요. ‘트랜스젠더 슈퍼모델 出戰 論難’이란 記事가 떴더라고요. 인터넷이 3日 내내 亂離가 났죠.”

    ▼ 어떻게 알려진 건가요.

    “제가 性轉換을 한 걸 韓藝綜 舞踊科 學生들은 다 알아요. 떨어진 志願者 中에 우리 科 學生의 親舊가 있었던 模樣이에요. 제 이야기를 듣고는 言論社에 提報했다고 하더라고요. 人爲的으로 性을 바꾼 사람이 女子들만 나가는 美人大會에 나갈 資格이 있느냐고.”

    그게 事實이라면 言論에 依해 一方的으로 社會的 커밍아웃을 當한 셈이다.

    “記者들이 宿所로 들이닥치고, 甚至於 江陵 父母님 집에까지 찾아가 하루 終日 門을 두드렸어요. 무서웠지만 한便으론 便한 마음도 있었어요. 罪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냥 이런 사람인데 어떡해요. 난 堂堂하고 누구보다 熱心히 잘 해낼 수 있다는 自身이 있었어요.”

    비록 受賞엔 失敗했지만 本選 進出만으로도 프로모델 資格이 생겼다. 그런데 좀처럼 舞臺에 설 機會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舞臺에 서기 위해 오디션이란 오디션은 다 쫓아다녔는데, 正말 많이 떨어졌어요. 대놓고 말하는 先生님도 있었어요. 부담스러워 옷을 입힐 수 없다고.”

    ▼ 그래서 2012年 ‘挑戰슈퍼모델코리아(度數코) 시즌3’에 다시 나간 건가요.

    “인정받을 때까지 挑戰하고 또 挑戰하려고요. 旣存 모델도 많이 나가는 프로그램이었어요. 經驗을 쌓고 싶었고, 뭔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 그 뒤로는 모델 일이 늘었나요.

    “꼭 度數코 때문은 아니었지만, 10番 오디션을 보면 2, 3番은 설 程度가 됐어요. 적어도 只今은 트랜스젠더여서 안 된다는 말은 안 들어요. 多方面으로 活動하다보니까 일부러 저를 부르는 境遇도 생겼어요.”

    ‘公州의 男子’ 무영 役

    그는 2011年 KBS드라마 ‘公州의 男子’에서 朝鮮時代 트랜스젠더라 할 수 있는 旅裝男子 妓生 無影으로 出演해 話題를 모았다. 다른 綜編 드라마에서도 트랜스젠더로 出演했다.

    “‘公州의 男子’는 作家가 먼저 連絡을 했어요. 처음부터 저를 念頭에 두고 만든 캐릭터라고 하더군요. 새로운 걸 接할 수 있는 좋은 機會였어요. 제가 福이 많은 사람이에요.”

    ▼ 드라마 두 篇 모두 트랜스젠더 役割이었는데.

    “아쉽긴 하지만 트랜스젠더 役割이라고 해서 안 할 理由는 없잖아요. 無條件 트랜스젠더 役割만 들어오는 것은 아니에요. 뮤지컬 ‘루나틱’이나 映畫 ‘只今은 工事中(假題)’에선 그냥 女子로 出演했어요.”

    ▼ 舞踊은 그만둔 건가요.

    “춤에 對한 熱情을 버린 적 없어요. 祥明大大學院 文化藝術經營學에서 뮤지컬 演出 等을 工夫하면서 舞踊科 後輩들과 춤 公演도 해요. 言論에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틈틈이 小劇場에서 公演해요.”

    ▼ ‘최한빛은 이것저것 다 하는데 都大體 眞짜 하고 싶은 게 뭐냐’는 反應도 있던데요.

    “제 꿈이 舞臺에 서는 것이라 장르를 따로 생각해본 적 없어요. 처음에 빠져든 게 춤이었고, 機會가 주어진 게 모델이었고, 運 좋게 演技를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舞臺에 설 機會가 있으면 잡고 싶었고, 그런 機會를 앉아서 기다린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트랜스젠더란 存在가 本格的으로 알려진 것은 2001年 하리수가 登場하면서다. 그동안 認識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社會的 偏見은 如前하다.

    ▼ 다른 트랜스젠더들과는 자주 만나나요.

    “만날 機會가 없었어요. 제가 갑자기 찾아가 ‘너 나랑 親舊瑕疵’고 해서 親舊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偏見도 自己가 만드는 것

    ▼ 트랜스젠더의 象徵처럼 됐는데, 그들의 權益을 위해 뭘 하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어떻게 說明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전 그냥 女子예요. 只今까지 周圍 사람들도 다 그렇게 認識했고, 저도 一般人 속에 섞여 살면서 아무런 問題가 없었어요. 트랜스젠더라고 의식한 적도 없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苦悶한 적도 없어요. 저를 트랜스젠더로 가두는 건 言論이고 사람들이지, 저는 거기에 갇혀 살지 않아요. 왜 그렇게 分類하는지 모르겠어요. 只今까지 트랜스젠더에 對한 偏見을 經驗한 적이 없어서 苦悶한 적이 없어요. 그런 제가 敢히 뭐라고 代辯할 수 있겠어요.”

    ▼ 트랜스젠더로서 世上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偏見을 갖지 말아달라고 입으로 百番 말하는 것보다 熱心히 堂堂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意味 있지 않을까요. 제가 더 좋은 일을 하면서 잘 산다면 그 自體가 트랜스젠더 이미지를 더 좋게 하지 않을까요. 이런 말은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난 이런 아픔이 있지만 이렇게 熱心히 하고 싶은 걸 하며 산다, 當身도 熱心히 살 수 있다’고.”

    그는 “男子에서 女子가 됐다고 하는데 난 한 番도 男子였던 적이 없다. 恒常 女子였고, 只今은 더 完全한 女性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서 그늘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거리낌 없이 堂堂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말에선 堂堂함마저 느껴졌다. 父母님이 사랑으로 키웠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의 이야기에서 世上의 偏見과 내면적 苦惱를 이겨내는 强한 意志와 勇氣를 읽을 수 있었다.

    “幸福은 自己가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世上 偏見도 自己가 만드는 거예요. 남 탓, 社會 탓을 한다고 무슨 所用이 있어요. 그런 待接을 받으면 그냥 ‘이 사람은 나를 잘 모르는구나’ 하고 넘겨야 해요. 저도 偏見 때문에 모델選拔大會에서 떨어졌지만, 그런 偏見을 認定하면 다시 거기에 挑戰할 理由가 없죠. 내가 不足해서 생긴 것이라 생각하고 자꾸 挑戰하다보면 언젠가 認定받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가 正말 아름다운 理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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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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