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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 소파를 두 番 죽이지 말라”|신동아

“내 아버지 소파를 두 番 죽이지 말라”

小波 方定煥 아들 방운용 翁의 피끓는 絶叫

  • 김기영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ades@donga.com

    入力 2005-04-20 13: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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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들 코묻은 돈으로 만든 銅像이나마 있으니 이젠 됐어요. 더 以上 財團은 안 했으면 해요” 方定煥財團의 跛行으로 겪은 마음苦生이 대단했던 模樣이다. 八旬老人은 憤怒와 悔恨이 엇갈리는 表情으로 方定煥財團이 跛行으로 치달은 지난 2年을 回顧했다.
    至毒한 黃沙(黃砂)였다. 방운용 翁(方云容·83)을 처음 만난 3月7日, 서울의 大氣는 사람들의 눈과 목을 刺戟했다. 쌀쌀한 空氣 탓에 더더욱 을씨년스럽기만 한 날씨였다. 방옹이 사는 京畿道 광명시 철산동 住公아파트. 約束時間보다 조금 이른 時刻인데도 아파트 駐車場에 미리 나와 기다리는 방옹이 눈에 들어왔다.

    小波 方定煥의 唯一한 아들인 방옹은 末年에 얻은 아들마저 留學을 떠나보내고 老夫婦가 단둘이 살고 있다. 낯선 訪問客의 손을 맞잡는 그에게서 누구라도 찾아오면 반겨줄 듯한 너그러움이 津하게 느껴졌다. 한때는 제 집 드나들듯 이 아파트를 出入했다는 李氏의 行跡에 새삼 愉快하지 못한 感情이 치밀었다.

    첫 인터뷰에서 방옹은 피를 吐하듯 이종찬氏와 世上에 對한 섭섭함을 吐露했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李氏의 犯罪嫌疑를 立證할 만한 資料를 取材陣에 한가득 챙겨주기도 했다. 그리고 방옹은 배웅을 하겠다며 10分 距離에 있는 電鐵驛까지 取材陣과 同行했다. 그리고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3月13日 午前, 다시 방옹의 철산동 집을 찾았다. 一週日도 안 됐지만 그 사이 方定煥財團事件에는 重大한 變化가 있었다. 警察調査에서 嫌疑事實을 頑剛하게 否認하던 이종찬氏에게 리베이트性 賂物을 줬다는 證人이 나타나면서 搜査는 急進展됐고 李氏의 球速은 秒읽기에 들어간 狀態였다.

    이 消息에 방옹은 錯雜한 表情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操心하라고 타일렀거늘…” 방옹은 이 말을 되풀이했다.



    ―이종찬氏의 公金 流用嫌疑가 續續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제넘은 얘기인지 모르지만 世上 혼자 사는 게 아니니 어른들 恭敬하라고 그렇게 當付했는데…. 나중에 돌아다니는 얘기 들어보니 當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거예요. 名譽를 毁損당한 사람도 적지 않아요. 그분들도 다 著名한 사람들이라 李鍾贊이에게 當하고도 어디 내놓고 말도 못 하고, 그러다 보니 일이 이렇게 커지고 말았지요. 처음엔 저도 아들같은 사람이라 생각하고는 남들이 뭐라고들 하면 덮어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래선 안 되겠다 생각했어요. 나라도 나서지 않으면 第2, 第3의 이종찬이 나오지 말라는 法 있나요.”

    ―이종찬氏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色동會 會長이던 尹克榮 先生을 통해 人事를 했지요. 97年인가, 98年인가부터 우리 집에 出入하기 始作했어요. 우리 집에 올 때도 혼자 오는 境遇는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 夫婦가 그를 안 믿게 되면서는 늘 다른 사람을 앞세우곤 했는데 財團理事長인 김명윤氏도 이종찬과 함께 우리 집을 訪問한 사람 가운데 한 분입니다. 財團理事長인 김명윤氏와 李鍾贊의 關係는 훨씬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방옹의 말대로 金理事長과 李氏의 關係는 뿌리가 깊다. 96年 金理事長이 ‘장한나後援會’ 會長을 맡을 때 이 이벤트를 演出한 이가 바로 이종찬氏였다. 오랜 因緣 탓에 金理事長만은 이종찬氏의 詐欺 全力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이에 對해 방옹은 對答을 避했으나 옆자리의 夫人은 剛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語塞한 雰圍氣를 깨고 突然 방옹은 美國 留學中인 외동아들 얘기를 꺼냈다.

    “아들이 美國에서 工夫하고 있습니다. 그 애가 美國 가기 前에 그래요. 제발 李鍾贊이와 어울리지 말라구요. 그런데 이렇게 一波萬波로 일이 커지고 여러분에게 心慮를 끼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番 일에 對해서는 美國에 있는 아들에게는 얘기를 안합니다.”

    ‘方定煥財團 事件’의 가장 큰 精神的 被害者이면서 아들에게만은 근심거리를 傳하고 싶지 않다는 否定(父情)에 共感이 가긴 했지만, 어쩌면 周圍에 아무도 도움을 請할 家族이 없는 老人이라는 點을 相對가 惡用한 것은 아닌가 하는 疑心이 들기도 했다. 建立豫算만도 數百億원에 達하는 방정환記念館을 建立하겠다며 巨創한 計劃書를 들고 나타난 李鍾贊의 誘惑을 世上과 斷絶하다시피 살고 있는 老夫婦가 果然 매몰차게 拒絶할 수 있었을까.

    ―처음 李氏는 소파記念館을 建立하겠다고 나섰다면서요.

    “97年 봄인가 어느 날 밤에 알고 지내던 兒童文學家에게서 電話가 왔습니다. 色동會 사람들과 兒童文學家 等이 現職 總理를 모시고 소파記念館 建立準備委員會를 만든다, 방정환記念事業會 모임을 갖는다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遺族代表로 고맙다는 人事라도 하라고 해 朝餐모임에 나갔는데 李秀成 總理, 김명윤 議員 等이 계셨습니다. 고맙다는 人事는 했지만 記念館이라는 게 여러모로 利用해야 하는 것이어서 實際 그 自體로는 그다지 쓸모가 없어요. 그저 一年에 한 番 돌아가신 분 追慕式이나 하면 그만이에요. 그런데도 建物 維持費는 들어갑니다. 그래서 財團을 만들겠다며 이경재 前議員, 이동원 前議員 等이 人事次 찾아왔을 때도 저는 記念館 建立은 싫다고 했습니다. 어린이들의 純粹한 돈, 한푼 두푼 모은 코 묻은 돈으로 마련한 아버님 銅像으로 滿足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日本이든 美國이든 어느 나라를 가봐도 어린이를 위해 일하다 돌아가신 분을 記念해 작게라도 記念館을 運營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外國人들을 불러다 어린이 關聯 行事를 해도 데리고 갈 만한 곳이 없지 않습니까. 어린이 關聯 民間團體들도 事務室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旣往 財團을 만들고 記念館을 세우겠다고 하니 가난한 어린이 關聯 團體들이 모여 지낼 수 있는 空間이 되겠다 생각했지요. 저 自身은 財團이니 記念館이니 탐탁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건 分明히 해두고 싶어요.”

    ―이종찬氏가 私心(邪心)을 갖고 接近하고 있다는 判斷을 언제 했습니까?

    “事實 記念事業을 始作하면서 李鍾贊에 對한 雜音도 흘러나왔습니다. 當初 李鍾贊이가 前科者라는 얘기가 다른 곳에서 흘러나왔으면 달리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色동會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다 이겁니다. 어느 날 조용히 이종찬에게 ‘자네가 前科가 있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러니까 ‘두 個가 있다’고 그래요. 한番은 妻家 慶事에 갔는데 저보다 나이 어린 妻男하고 말다툼을 하다 때려서 傷害罪로 拘束된 적이 있다고 해요. 다른 하나는 免稅店에서 親舊에게 카드를 빌려줬는데 親舊가 카드빚을 갚지 않아서 拘束이 됐다 그래요. 그래서 내가 소파先生 記念事業한다는 親舊가 前科者라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된다고 나무란 뒤,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는 ‘멀쩡한 사람 잡는다’면서 所聞이 퍼지는 것을 막고 다녔습니다.”

    ―財團을 만들 當時까지도 이종찬氏를 믿었다는 말씀이군요.

    “그 後 財團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래요, 李鍾贊이가. 이런 좋은 事業을 하는데 財團을 만들어야 各界에서 誠金을 모으기가 유리하다고 그러더군요. 當時 이수성 前總理가 이 事業에서 물러난 뒤라 전택부 先生을 새 委員長으로 모시겠다고 그래요. 전택부 先生은 내가 直接 알지는 못하지만 이름을 들어서 알고 있는 사이인데 全先生을 만나러 가자고 해 같이 갔습니다. ‘참 젊은 사람이 일도 잘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全先生을 만나 財團理事長으로 모시고 싶다 하니 ‘仔細한 것은 모르지만 소파先生 記念事業이라면 걱정할 것 없다’며 鍾路YMCA建物 再建 當時 經驗을 얘기하면서 이대로 하면 된다고 해 鼓舞돼 돌아왔습니다. 얼마 뒤 李鍾贊이가 와서는 문화일보사에 가자고 그래요. 왜 가느냐 물으니 남시욱 社長이 이 事業을 文化日報 次元에서 도와주겠다고 해서 전택부 先生을 모시고 西大門 문화일보사에 같이 갔지요.”

    ―財團 構成과 關聯해 그 뒤 이종찬氏가 業務報告를 하던가요?

    “新聞社도 訪問하고 해서 그 後로는 일이 잘되는 줄 알았는데 흐지부지해요. 며칠 뒤 文化日報 事故(社告)에 聲樂家 조수미가 10萬달러를 方定煥財團에 喜捨했다, 그런 얘기가 나왔더라구요. 그런데 李鍾贊이는 나뿐 아니라 財團 理事 누구에게도 돈이 어떻게 들고나는지 얘기한 적이 없어요. 내가 답답해서 ‘돈이 좀 모아졌느냐’고 물으면 ‘얼마 안 돼요. 그저 警備 程度 될까요’ 그렇게 對答하더라구요.”

    ―그런데도 李鍾贊의 行跡이 疑心되지 않던가요?

    “97年엔가요, 내 生前 가장 큰 行事를 치렀습니다. 12月 末에 김대중(金大中) 大統領當選者를 모시고 프레스센터에서 ‘方定煥 文集’ 憲政式을 가졌습니다. 그날 보니까 大統領當選者가 나온다고 해서인지 우리나라를 代表하는 政治人과 財閥總帥, 企業人이 80名 以上 찾아왔어요. 이수성氏와 나 두 사람이 入口에 서서 人事를 했는데, 何如間 그날은 내 生涯에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어요. 이렇게 大統領當選者까지 움직일 程度니 李鍾贊이를 疑心했겠어요. 何如튼 그날도 손님들이 저마다 封套 하나씩을 내미는데 나와 이수성氏는 人事하느라 돈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確認도 못 했습니다만, 이종찬이 末路는 이수성氏에게는 報告를 했다는데 그랬겠습니까? 나한테는 돈에 對한 얘기를 一切 하지 않았습니다.”

    ―이종찬氏의 行跡을 보면 巨金이 모아지면 募金에 參與한 人士를 財團에서 밀어내곤 했다는데요.

    “늘 혼자 하는 거예요. 뒤끝이 좋지 않게 방정환記念事業會 일을 그만두고 난 뒤 이수성氏가 저더러 ‘李鍾贊이는 孟浪한 親舊’라고 그러더라고요. 이수성氏 말이 自身이 나서서 金大統領까지 參席하는 行事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이종찬에게 財團法人을 設立하라고 코치도 해줬대요. 그런데도 이수성氏를 財團設立에서 除外시켰어요.”

    ―財團 設立 뒤에도 그랬습니까?

    “마찬가지예요. 事業報告를 하나, 理事會를 하나… 이건 完全히 이종찬이 제 마음대로예요. 小波賞이라는 게 있어요. 해마다 아버지 돌아가신 날 주는 文化賞인데요, 한동안 시상이 中斷됐다가 財團이 設立되면서 復活했는데 施賞式날 行事場에 조금 일찍 나갔는데 마침 이경재 議員이 나와 있더라구요. 나를 보더니 따로 할 얘기가 있다고 밖에서 보자고 해요. 그래 따라갔죠. ‘房先生님 큰탈났습니다. 理事會에 參與한 사람들은 내가 紹介해 이 일을 始作했는데 이거 이종찬이 원맨숍니다’ 그러는 겁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李前議員 말이 日前에 馬事會에서 支援을 받을 수 있게 斡旋했고 그 뒤 이종찬이 더러 報告를 하라 했는데 報告가 없어 電話를 걸어 어떻게 됐느냐고 採根했더니 그 後 報告高 뭐고 消息을 딱 끊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더러 그 事實을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이 무렵 李前議員은 방옹이 이종찬과 한便인 줄 알았다고 한다. 방옹度 李前議員이 이종찬과 같은 光州 李氏 宗親인 까닭에 두 사람 사이가 緊密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방옹과 李前議員이 만나 自身의 飛行에 對한 情報를 交換한 事實을 안 李氏는 그 後 意圖的으로 방옹과 다른 理事들이 만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設令 이종찬氏가 다른 理事들을 만나지 못하게 했더라도 周邊 사람들에게 도움을 請할 수 있는 것 아니었나요. 狀況이 이 地境이 되도록 放置했다는 點이 理解되지 않습니다.

    “내가 李鍾贊의 非理를 알고 난 뒤 態度가 달라지더군요. 또 내가 이경재氏 쪽에 接近할까 봐 그쪽을 一方的으로 罵倒했습니다. 그 後 李前議員의 補佐官이던 이상일氏를 만나 이종찬과 關聯한 所聞이 모두 事實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馬事會에서 받은 支援金 2000萬원도 橫領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경재 議員이 터무니없이 이종찬을 헐뜯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事實을 알고 나니 낯이 뜨거웠습니다. 남들이 李鍾贊이가 前科者라 손가락질하면 그걸 말린 사람이 난데… 事實을 알고 背信感에 精神的으로 큰 苦痛을 겪었습니다.”

    그 後 방옹은 李氏를 만나 “이제 더 以上 만나지 말고 因緣도 끊자”고 斷交宣言을 했다. 그리고는 2000年 봄 美國에 있는 아들집을 다녀왔다. 그런데 그해 7月 圖書館에서 訊問을 閱覽하던 방옹은 自身의 눈을 疑心했다. 김명윤氏를 새 理事長에, 권노갑 민주당 顧問이 總裁로, 金昇淵 한화그룹會長, 조승형 辯護士, 이주영 議員, 탤런트 최불암 等 錚錚한 人物들을 理事로 迎入한 方定煥財團의 새出發 消息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遺族이 없는 方定煥財團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도 가만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나 두고 보자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그해 秋夕 이틀 前 이종찬氏가 다시 철산동 집을 찾아왔다. 김명윤 理事長과 女職員 몇 名을 데리고서였다. 李氏가 못마땅했던 방옹은 마지못해 金理事長 一行을 應對했고 그날의 冷冷한 雰圍氣에 金理事長度 語塞해했다고 한다. 그날 以後 方定煥財團의 跛行은 本格的으로 始作됐다. 마침내 김명윤 理事長마저 李氏를 排斥했고 李氏는 警察調査를 받는 處地가 되고 말았다.

    ―김명윤 理事長 等 이종찬氏를 告訴한 現 財團關係者들은 方定煥財團을 繼續 維持하고 싶어하는데요.

    “그건 안 됩니다. 遺族의 뜻과 相關없이 財團을 할 수 없습니다. 99年 8月에 더 以上 財團을 안 하겠다는 생각으로 報勳處에 認可證을 返納했습니다. 우리 遺族의 뜻은 財團의 解散입니다. 비록 어린이들 코 묻은 돈으로 만든 凍傷이지만 소파先生 銅像이 있으니 그것으로 됐습니다.”

    눈물의 誕生 100周年 記念音樂會

    “그렇지만 法人으로 存續하는 以上 遺族의 뜻과 상관없는 財團이라도 存續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質問에 방옹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옆에 있던 夫人은 눈물을 비치며 말했다.

    “그렇게는 안 돼요. 財團을 없애야 해요. 저렇게 놔두면 종찬이가 언제 다시 돌아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방옹이 財團事業을 벌이면서 가장 가슴아팠던 記憶은 99年 11月9日의 ‘小波方定煥先生 誕生 100周年 記念音樂會.’ 當初 이 行事는 포스코로부터 資金支援을 받아 서울 世宗文化會館 뒤 噴水公園에서 치러질 計劃이었다. 有名 演藝人과 어린이 觀客을 大擧 招請해 치르기로 한 이 行事는 그러나 포스코側이 막판에 資金을 支援하지 않는 바람에 行事가 霧散될 狀況에 몰렸다. 行事 前날 밤 이종찬氏는 방옹에게 電話를 걸어 “妨害勢力이 많아 豫定대로 行事를 못하게 됐다”고 通報했다. 뒤늦게 밝혀진 事實이지만 포스코의 資金支援 中斷이 行事를 中斷한 理由의 全部가 아니었다고 한다. 이 무렵 李氏는 馬事會 支援金 橫領事件과 카드詐欺 等으로 手配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行事를 못 치른다는 말에 방옹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演藝人들이야 못 올 수도 있지만 소파의 後輩들로 舞臺에 오르기로 約束한 微動初等學校 어린이들에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漠漠했다. 밤새 뒤척이던 방옹은 어린이들만으로 行事를 열기로 決心했다. 마음이 弱해지고 다리가 떨릴 때면 ‘하늘나라의 아버지도 어린이들만의 힘으로 꾸민 잔치를 더 기뻐하시지 않을까’ 이렇게 스스로 慰安했다.

    “아침 일찍 美동초등학교를 찾아갔습니다. 多幸히도 微動初等學校 校長도 제 뜻에 欣快히 同意해 주셨습니다.”

    초라한 舞臺였지만 어린이들의 손으로 꾸며진 ‘方定煥 先生 誕生100周年 記念音樂會’를 마친 뒤 방옹은 미동초등學生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슴속으로 限없이 울었다. 아버지의 誕生 100周年行事를 망쳐버린 悔恨과, 빵 한조각 사주지 못했지만 초라한 舞臺나마 끝까지 지켜준 어린이들에 對한 고마움에 목이 메었다고 한다.

    “點心을 먹고 가라” “아버지 遺品을 보여주마” 방옹은 모처럼 온 客을 보내기 아쉬웠던지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遲滯하게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取材陣이 아파트 門을 나서자 방옹이 다시 따라 나섰다. 아파트 入口에 서서 訪問客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如前히 손을 흔들었다. ‘이쯤이면 들어가셨겠지’ 하고 돌아서면 如前히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드는 방옹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철산동을 찾았을 때 눈과 목을 가렵게 하던 黃沙는 볼 수 없었고 어느새 봄기운이 宛然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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