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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半島 持續 支配’ 日本의 妄想 滿洲 利權 노린 蘇聯의 欺瞞|新東亞

‘韓半島 持續 支配’ 日本의 妄想 滿洲 利權 노린 蘇聯의 欺瞞

다시 들여다보는 分斷 責任

  • 崔榮鎬 | 하와이大 名譽敎授∙歷史學

    入力 2014-04-18 17: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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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崔榮鎬 하와이大 名譽敎授가 韓半島 分斷 原因과 關聯해 第3의 視角을 提起하는 논고(論告)를 보내왔다. 旣存의 蘇聯 或은 美國 責任論과 달리 日本에 주된 責任이 있다는 게 要旨.
    • 崔 敎授에 따르면 日本은 太平洋戰爭 末期 戰爭에 敗하더라도 天皇을 保護하고 韓半島를 繼續 支配하겠다는 妄想을 품었다.
    • 그래서 無條件 降伏을 要求하는 美國 代身 中立 關係인 蘇聯을 活用하려 했다.
    • 그 바람에 日本의 降伏이 늦어졌고 蘇聯軍의 欺瞞的인 參戰(參戰)으로 分斷이 일어났다는 主張이다. <편집자>
    ‘한반도 지속 지배’ 일본의 망상 만주 이권 노린 소련의 기만
    來年이면 韓半島가 分斷된 지 70年이다. 하지만 아직 누구도 分斷의 根本 原因을 밝히지 못했다. 우리가 一般的으로 아는 것은 이렇다. 1945年 8月 15日 日本이 降伏했을 때 蘇聯軍은 北韓에 이미 進駐했지만 美軍은 멀리 오키나와에 겨우 到達했을 뿐이었다. 이에 多急해진 美國이 提議하고 蘇聯이 받아들여 38度線을 境界로 北쪽은 蘇聯軍이, 南쪽은 美軍이 日本軍을 武裝解除했으며, 그 結果로 韓半島가 分斷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明白한 事實이지만, 分斷 根源 糾明에서 氷山의 一角일 뿐이다.

    分斷의 決定的 原因은 蘇聯이 1945年 8月 9日 日本에 宣戰布告를 해 對日戰爭 參戰權을 確保한 데 있었다. 日本의 眞珠灣 攻擊 以後 美國은 莫大한 人命과 自願을 犧牲해 거의 單獨으로 太平洋戰爭 勝利를 成就했다. 日本과 蘇聯은 事實 中立條約의 同伴者였다. 最後의 瞬間에서 不過 1週日 前 蘇聯은 北韓 地域에 軍事를 進入시켰다. 萬若 蘇聯이 參戰하기 前에 戰爭이 끝났으면 蘇聯軍이 韓半島에 進入할 아무런 理由가 없었다. 그랬더라면 韓半島의 分斷 또한 있을 수 없었다.

    1945年 봄 戰勢는 日本에 極히 不利했다. 5月 初 獨逸이 降伏했으며, 6月 오키나와가 陷落됐다. 日本은 戰爭을 더는 繼續할 수 없다는 事實을 自認했다. 1945年 6月 日本은 敗北를 認定하고 戰爭 終結의 길을 摸索한다. 이때 日本이 美國과 接觸해 强化의 길을 찾았으면 蘇聯의 參戰 없이 戰爭은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不幸히도 日本은 美國을 忌避하고 蘇聯에 接近해 蘇聯을 仲裁者로 삼아 强化의 길로 나아가려 했다. 日本의 이러한 選擇은 스탈린에게는 黃金의 機會였다.

    日蘇中立條約의 運命

    太平洋戰爭 中 日本과 蘇聯은 相互 中立條約을 맺고 있었다. 이 條約은 1941年 4月 批准됐는데, 重要한 內容은 세 가지다. △平和와 友好關係를 維持해 相對方 領土의 保全(保全)과 不可侵(不可侵)을 尊重한다 △第3國과 軍事行動이 일어날 때 紛爭期間 中 中立을 지킨다 △條約의 期限은 5年이고, 滿期 1年 前 廢棄 通告를 하지 않는 限 自動으로 5年間 延長한다.



    蘇聯과 日本이 맺은 이 條約이 알려지자 世界 列强은 驚愕했다. 條約 締結 以前까지 蘇聯, 日本은 서로 敵性國이었다. 러일戰爭(1904~1905), 시베리아 出兵(1918~1922), 장고봉 戰鬪(1938), 老몽港 戰鬪(1939) 等 軍事的 衝突과 葛藤으로 點綴돼 있었다.

    日本은 獨逸, 이탈리아와 1937年 防共協定(防共協定), 1940年 三國軍事同盟(三國軍事同盟)을 締結했다. 獨逸, 이탈리아는 蘇聯을 敵性國으로 봤다. 1937年 中日戰爭이 일어나자 蘇聯은 中國에 武器를 提供하는 等 中國의 對日 抗爭을 直接 支援한 唯一의 强大國이었다. 이렇듯 利害關係가 衝突하던 日本과 蘇聯이 中立條約을 맺었으니 世界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같은 中立條約을 맺는 것이 어떻게 可能했을까. 日本은 장고봉, 老몽港 戰鬪에서 敗北한 後 蘇聯의 軍事力을 再評價했다. 또한 1939年 9月 獨逸이 폴란드를 攻擊하면서 유럽戰爭이 始作돼 世界의 勢力 均衡(Balance of Power)에 大變動이 일어났다. 獨逸이 프랑스, 네덜란드를 占領하고 英國 本土를 威脅했다. 그 結果 東南아시아의 植民地인 인도차이나와 인도네시아 地域이 主人을 잃고 힘의 空白地價 됐다.

    日本은 重要한 選擇에 直面했다. 이른바 ‘北進(北進)’ 或은 ‘南進(南進)’ 中 擇日하는 게 그것이다. 北進論은 蘇聯과 對決해 滿洲, 蒙古, 시베리아의 極東地域을 차지하자는 것이었으며, 南進論은 東南아시아와 서태평양 地域에 進出하자는 主張이었다. 日本은 中日戰爭이 膠着狀態에 들어간 狀況에서 앞으로 새로운 戰爭이 일어나면 東南아시아의 資源, 特히 石油가 必要하다고 봤다. 게다가 東南아시아는 主人 없는 空白地價 돼가고 있었다. 더구나 유럽戰爭 初期 大勝利에 氣高萬丈한 히틀러는 英國 勢力을 弱化하는 計略으로 蘇聯에는 이란과 印度 方面, 日本에는 東南亞와 버마(現 미얀마) 地域으로 進出하라고 勸奬했다. 이른바 립벤트롭(Ribbentrop) 腹案이 그것이다.[‘대동아전쟁전사(大東亞戰爭全史)’ 56p]

    日本은 結局 南進論을 擇했다. 1940年 7月 27日 大本營은 御殿會議에서 ‘時局處理요강(時局處理要綱)’을 採擇하면서 “獨逸, 이탈리아와의 政治的 結束을 强化하고 臺蘇國交(對蘇國交)의 飛躍的 調整(飛躍的調整)을 祈禱한다”고 決定했다. 蘇聯과의 外交關係를 友好的으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同時에 인도차이나와 인도네시아의 資源을 確保하기 위해 必要한 工作과 措置를 取할 것을 決定했으며, 홍콩과 버마에서 英國 勢力을 排除하기로 했다. 덧붙여 “남방 問題 解決을 위해 武力을 行使할 수도 있다”고 決定했다.[대본영기밀일지(大本營機密日誌) 38~40p]

    이렇듯 ‘南進’ 政策을 決定한 日本은 窮極에 眞珠灣 攻擊에 나서면서 美國을 相對로 한 太平洋戰爭을 挑發한다. 日本이 美國과의 戰爭에 突入하면서 가장 留意한 것이 蘇聯의 態度였다. 日本은 蘇聯의 行動이 戰爭 遂行에 致命的 影響을 줄 것으로 봤으며, 蘇聯과의 戰爭은 絶對 回避하기로 決定한 것이다. 蘇聯과의 中立條約은 이 政策의 始發點이었다.

    한便 蘇聯은 히틀러의 獨逸로부터 恒常 威脅을 느꼈다. 1939年 獨逸과 不可侵條約을 締結했지만 獨逸이 언제 攻擊해올지 몰라 戰戰兢兢했다. 스탈린은 極東에서 日本의 威脅을 除去해 兩面 攻擊을 避하는 게 必要하다고 봤다. 日本이 이러한 時點에서 中立條約을 提議했으니 스탈린은 그것을 大歡迎했다.[보리스 스라빈스키, ‘一掃中立條約(The Japanese-Soviet Neutrality Pact)’]

    1943年 11月 카이로에서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蔣介石)가 會談해 戰爭 後 東아시아의 새 秩序를 論議했다. 세 頂上은 日本이 無條件 降伏할 때까지 싸울 것을 約束했다. 또한 戰後 日本 領土는 元來의 日本 列島에 限定하기로 合意했다. 韓國은 日本의 隸屬에서 벗어나게 해 독립시키기로 約束했다. 카이로 宣言은 韓國의 將來에 對한 最初이자 唯一한 聯合國의 公式 合意였다. 여기서 注目할 것은 스탈린이 루스벨트에게 對日戰爭에 參戰하겠다고 約束한 것이다. 이 面談에 參席한 해리먼은 回顧錄(‘Special Envoy to Churchill and Stalin’)에서 스탈린은 유럽戰爭에 全力을 기울이느라 太平洋戰爭에 參戰하지 못해 遺憾이라고 밝히면서 獨逸을 敗北하게 한 後 시베리아의 軍事力을 세 倍로 增强해 日本을 攻擊할 것이라고 約束했다고 傳한다. 1943年 11月 스탈린은 이렇듯 日本과의 中立條約을 無視하고 日本과 戰爭을 하기로 美國에 約束했다.

    蘇聯의 參戰 約束

    1945年 2月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은 얄타에서 第2次 巨頭會談을 가졌다. 獨逸의 敗北가 눈앞에 보이던 터라 前後 유럽 問題가 主된 論議 對象이었다. 前後 東아시아 問題에 對해서도 매우 重要한 合意를 내놓았는데, 우리는 이 合意에서 韓半島 分斷의 씨앗을 찾아볼 수 있다. 2月 11日 會談에서 세 頂上은 ‘蘇聯의 對日戰爭 參與에 關한 協定’에 合意했다. 獨逸과의 戰爭을 終結한 後 2個月 或은 3個月 以內에 蘇聯이 對日戰爭에 參與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留意할 것은, 첫째, 스탈린이 對日戰爭에 參戰하겠다는 테헤란에서의 約束을 거듭 確認했으며 公式 條約에 署名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스탈린의 野望이다. 스탈린은 日本이 1904年 러시아를 相對로 ‘背信的 攻擊(treacherous attack)’에 나서 빼앗아간 러시아의 權利를 回復한다는 事實을 協定文에 明記하도록 했다. 스탈린은 러일戰爭의 敗北를 歷史的 恥辱으로 봤으며 이를 雪辱하는 것을 歷史的 使命으로 삼았던 것이다.

    우리가 注目해야 할 點은 스탈린이 滿洲의 利益과 權利를 爭取하려면 蘇聯이 日本을 반드시 攻擊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萬若 蘇聯이 對日戰爭에 參加하기 前에 日本이 降伏한다면 얄타의 約束은 無效가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韓半島 分斷의 씨앗이 있었다.

    루스벨트는 왜 이처럼 讓步했을까. 첫째 理由는, 美軍의 犧牲을 最少化하는 데 있었다. 가미카제 特攻隊(神風特攻隊) 等 日本의 特殊한 抵抗을 살펴볼 때 美國은 莫大한 人命 被害를 覺悟해야 했다. 둘째는, 戰後 世界 新(新)秩序의 構想이다. 루스벨트는 國際聯合(UN)을 組織해 5大 强國 主導로 世界平和를 維持하려는 計劃을 갖고 있었다. 그러려면 蘇聯의 協助가 必須라고 믿었다.

    얄타에서는 韓國을 信託統治한다는 合意도 이뤄졌다. 2月 8日 루스벨트가 韓國은 20~30年間의 信託統治가 必要하다고 밝히자, 스탈린은 可能하면 짧은 期限이 좋다고 答하면서 信託統治와 關聯해 合意가 이뤄졌다. 이 대목에서 또 하나 重要한 것은 얄타會談을 準備하며 美國 國務部가 作成한 ‘戰後 韓國 問題(Post-War Status of Korea)’라는 題目이 붙은 文件이다. 이 文件에는 戰爭 直後 韓國에 對한 軍事的 占領과 過渡政府 樹立 準備에 關한 腹案이 들어 있다. 國務部는 軍事的 占領에 參加할 수 있는 나라로 韓國에 實際的 利益(real interest) 關係인 美國, 英國, 中國, 蘇聯 等 네 個의 强大國을 꼽았다. 다만 蘇聯에 對해서는 “萬若 太平洋戰爭에 參戰했을 境遇(if it has entered the war in the Pacific)”라는 條件을 달았다. 다시 말해 美國은 蘇聯이 對日戰爭에 參戰할 것을 豫期하고 있었지만, 參戰하지 않을 境遇 蘇聯은 韓半島 占領에 參加하지 못한다는 構想을 갖고 있었다.

    蘇聯의 中立條約 廢棄

    1944年 7月 사이判이 陷落되자 日本의 敗戰이 明確해졌다. 賭租(東條) 內閣이 무너지고 朝鮮 總督이던 고이소(小磯國昭)가 總理가 됐다. 內閣을 組織할 때 고이소는 敗戰을 覺悟하고 있었다. 內閣書記館長 다나카(田中武雄)는 이렇게 證言했다. “彫刻 當時 고이소는 戰爭에 勝利한다는 것은 至極히 힘들다(至難)고 結論내리고 中國을 相對로 速히 和平工作을 進行하면서 蘇聯 또는 其他 第3國을 통해 前全國和平(全戰局和平)의 길을 講究하는 것이 絶對 必要하다고 確信했다.”(일본 外務省 便, ‘終戰史錄 1’ 236~237p)

    1945年 初 필리핀 陷落을 눈앞에 두고 多急해진 天皇(日王의 日本式 表現, 筆者 要請으로 이 글에서는 天皇으로 表記했다.)은 重臣(重臣, 主로 前 總理)들을 個人的으로 불러 當面한 事態에 關해 意見을 물었다. 고노에 前 總理는 2月 14日 直接 準備한 上奏文을 天皇 앞에서 읽고 傳達했다. 그는 上奏文 書頭에 “敗戰은 유감스럽게도 必然的(必至)”이라면서 “하루速히 戰爭 終結의 方道를 講究해야만 한다는 것이 나의 確信”이라고 말했다.

    日本 最高委層에서는 이처럼 戰爭의 敗北를 認定하면서 强化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主張이 提起되고 있었다. 그러나 軍部는 이를 積極 反對했고, 天皇은 軍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狀況이었다.

    1945年 4月 필리핀이 陷落되고 오키나와에서 美軍의 上陸作戰이 始作됐다. 獨逸도 敗亡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4月 5日 蘇聯 外務相 몰로토프는 日本大使 사토(佐藤尙武)를 召喚해 中立條約을 廢棄한다고 公式 通告했다. 廢棄 時效가 언제부터인지의 問題가 생겼다. 1941年 4月 25日 批准돼 5年間 有效한 中立條約에는 廢棄 時 1年 前 通告해야 한다는 條項이 있다. 사토는 이를 引用해 蘇聯이 1945年 4月 廢棄 通告를 했으니 條約은 1946年 4月까지 有效하지 않은가라고 指摘했고, 몰로토프는 瞬間 躊躇하다가 사토의 指摘에 同意해 中立條約은 이듬해까지 有效하다고 確認했다.(보리스 스라빈스키, ‘一掃中立條約(The Japanese-Soviet Neutrality Pact)’ 150~162p)

    中立條約 廢棄는 日本에 致命的이었다. 日本은 蘇聯과의 中立條約에 依存해 美國과 戰爭을 始作했다. 實質的으로는 이때 中立條約이 蘇聯에 依해 廢棄됐음에도 日本은 이를 認定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속이고 있었다. 中立條約이 1946年까지 有效하다는 몰로토프의 確認은 詐欺劇이었다.

    前 蘇聯 陸軍參謀總長 슈테멘코(S. M. Shtemenko)는 中立條約 廢棄와 關聯해 回顧錄(‘The Soviet General Staff at War, 1941-1945’ 408~409P)에서 이렇게 說明했다. “蘇聯이 中立條約을 繼續 지킨다는 것은 어리석은(ridiculous) 짓이어서 廢棄를 日本에 通報했으나 日本은 이를 無視했다. 廢棄 通告는 日本에 深刻한 警告를 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日本은 戰爭에 狂奔(war hysteria)해 이를 無視했다. 同時에 스탈린은 臺(對)獨逸 戰爭의 經驗을 備蓄한 有能한 指揮官과 參謀들을 極東 地域에 再配置하고 日本 攻擊 準備를 命令했다.”

    日本은 이렇듯 蘇聯의 欺瞞에 말려들었다. 日本으로서는 다른 選擇肢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日本은 關東軍(關東軍)의 軍力 相當 部分을 太平洋 地域으로 돌려놓은 터라 蘇聯과의 國境地帶 軍事力은 激減돼 있었다. 蘇聯의 眞짜 意圖를 알아차리지 못한 日本의 이 對(大)失策이 窮極的으로 終戰을 遲延하고, 原子爆彈 攻擊과 韓半島 分斷을 招來한 것이다.

    “蘇聯에 仲介의 勞苦를 맡기자”

    1945年 4月 7日 고이소 內閣이 무너지고 스즈키(鈴木貫太郞)가 새 總理에 就任했다. 많은 사람이 스즈키가 終戰을 摸索할 것으로 期待했다. 스즈키 自身도 前後의 口述에서 總理에 就任할 當時 “나는 이대로 戰爭을 繼續하면 日本의 滅亡이 眞實로 確實해진다”고 믿었다고 했다. 또한 “天皇도 하루速히 戰爭을 終結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고 回顧했다.(‘종전사록 2’ 154~155p) 日本이 當場 直面한 危機는 蘇聯의 參戰이었다. 蘇聯이 參戰하면 日本의 運命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時點에서 日本이 選擇한 것은 蘇聯과 協商해 攻擊을 防止하는 方案이었다.

    最高戰爭指導會의(最高戰爭指導會議)는 5月 11~14日 ‘日소교섭要領(日蘇交涉要領)’을 採擇했다. 蘇聯의 參戰은 日本 “帝國의 죽음과 生命을 결정짓는” 重大한 事項이라고 規定하고, 그 對策으로 세 가지를 決定했다. 첫째, 蘇聯의 參戰을 防止하기 爲해 모든 方法을 講究한다. 둘째, 蘇聯을 ‘好意的 中立’으로 만든다. 셋째, 戰爭을 終結하기 위해 蘇聯을 움직여 日本에 有利한 仲介者가 되도록 誘導한다. 日本은 蘇聯과 交涉하기 위해 큰 讓步를 覺悟했다. 그中에는 포츠머스 條約을 廢棄하고 滿洲의 鐵道 利權과 뤼순(旅順)半島의 權利를 蘇聯에 讓渡하겠다는 것도 包含돼 있었다. 重要한 것은 韓國은 繼續 支配하겠다고 明記한 點이다.[패전의 記錄(敗戰の記錄) 278~279p]

    6月 6日 最高戰爭指導會議는 當面한 時局의 모든 面을 討議한 後 ‘戰爭指導基本大江(戰爭指導基本大綱)’을 採擇했다. 이 大綱은 8日 御殿會議에서 天皇의 最終 裁可를 받았다. 비록 情勢가 絶望的이었지만 “國體(國?)를 호지하고, 黃土(皇土)를 보위하여, 停電(征戰) 目的의 達成을 期한다”는 決定이었다. 이른바 本土決戰(本土決戰)이다. 日本 本土에서 最後의 한 사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다. 陸軍 强勁派의 主張에 스즈키 內閣이 同調한 셈이다.[패전의 記錄(敗戰の記錄) 256~276p]

    事情이 이렇다보니 穩健派가 焦燥해졌다. 天皇의 最側近 人士인 기토(木戶幸一) 宮內大臣(宮內大臣)李 움직였다. 기토는 ‘基本大江’을 본 그날 ‘時局收拾對策시안(時局收拾對策試案)’을 作成해 天皇에게 提示했다. 戰爭을 繼續하는 것은 到底히 不可能하니 和平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軍部가 和平을 提唱하는 것이 程度(正道)이나, 이는 軍의 反對로 不可能하니 天皇이 直接 ‘어용단(御勇斷)’을 내어 全國을 收拾해달라고 建議했다. 여기서 構想한 終戰은 降伏이 아니었다. 王室을 保存하고 國際를 堅持하는 이른바 ‘名譽의 强化’였다. 기토는 “交涉上의 餘裕를 가지기 위해(…) 中立國인 蘇聯에 仲介의 勞苦를 맡기자”고 提議했다. 陸軍은 신중해야 한다고 抗議했지만, 天皇은 이를 뿌리치고 ‘名譽의 强化’를 推進하라고 命令했다. 天皇의 最終決定은 6月 8日 내려졌다.[기토일기 2(木戶幸一日記 2) 1208~1213p]

    우리는 이 대목에서 두 가지 內容을 記憶해야 한다. 첫째, 日本 最高 指導層이 試圖한 强化는 降伏이 아니라 國際를 保持하는 名譽의 江華였다. 둘째, 日本은 强化를 위해 美國과의 直接 交涉을 拒否하고 蘇聯과 協商해 蘇聯을 仲裁者 삼아 戰爭을 終結하려고 했다. 이러한 決定이 窮極으로 韓半島를 分斷하게 하는 運命을 가져온다. 萬若 日本이 完全 敗北를 認定한 이 時點에서 美國과 直接 交涉에 나섰더라면 蘇聯軍의 韓半島 晋州는 없었을 것이고, 이로 인한 分斷도 決코 있을 수 없었다. 아직 參戰하지 않은 蘇聯軍이 韓半島에 進出할 名分이 全혀 없던 것이다.

    한便 蘇聯은 日本이 降伏하기 前 戰爭을 始作해야만 했다. 蘇聯은 日本과 戰爭을 해야만 얄타에서 約束받은 萬株의 利權을 確保할 수 있었다. 이러한 蘇聯의 事情을 모르고 日本은 蘇聯에 强化의 仲裁者가 되어달라고 要請한 것이다. 當時의 모든 客觀的인 與件을 考慮할 때 決코 蘇聯이 日本을 위해 仲裁者가 될 수 없었다. 日本은 이때 理性的(理性的) 判斷力을 喪失하고 幻想의 世界에 살고 있었다. 日本이 追求한 이 外交를 呼訴野(細谷千博)는 ‘幻想의 外交’라고 불렀다.[양대전간 日本外交(兩大戰間の日本外交) 303~336p]

    對蘇 協商과 特使 派遣

    當時 日本 外交의 總責任者는 도고(東鄕茂德) 外務相이었다. 壬辰倭亂 때 잡혀간 陶工의 後裔로 그의 家門은 아버지 때까지 姓이 朴(朴)이었다. 都賈는 當時 內閣에서 가장 强力한 平和主唱者였다. 蘇聯과의 첫 接觸은 前 總理 히로타(廣田弘毅)와 日本駐在 蘇聯大使 말릭(Jakob Malik)의 會談이었다. 日本은 蘇聯에 좀 더 積極的인 友邦이 돼달라고 哀乞하면서 滿洲를 中立化하고 蘇聯이 石油를 供給하는 條件으로 日本이 漁業權(漁業權)을 抛棄할 것이며 蘇聯이 願하는 다른 事項은 앞으로 論議할 수 있다고 提議했다. 蘇聯은 이 提案을 無視했다. 모스크바의 指示에 따라 말릭은 애初부터 會談을 回避하려 했지만, 求乞하는 히로타를 6月 4次例 만난 後 病을 핑계로 會談을 謝絶했다. 이 接觸은 67歲의 老(老)政治人이 39歲의 젊은 外交官에게 아양을 부리는 阿諂의 會談이었다.

    6月 13日 오키나와가 陷落되고 7月에 들어서자 聯合國의 움직임이 尋常치 않았다. 中國의 行政院長(行政院長) 쑹쯔원(宋子文)李 모스크바에 가 蘇聯 首腦部와 7月 3日부터 會談을 하고 있었다. 7月 下旬에는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포츠담에서 거두 會談을 開催한다는 情報가 들려왔다. 히로타-말릭 會談에 아무런 進陟이 없자, 困境에 몰린 天皇이 直接 나섰다. 7月 7日 特使를 모스크바에 보내 蘇聯과 直接 交涉해 蘇聯의 仲裁로 和平을 講究하라고 指示한 것이다. 7月 10日 最高戰爭指導會議가 移安을 正式으로 採擇하고 總理 職을 세 次例 맡았던 고노에 후미마로를 特使로 임명했다. 底意는 스탈린이 포츠담에서 트루먼, 처칠을 만나기 前 고노에를 통해 强化를 求하려는 것이었다. ‘名譽의 强化’는 天皇을 保存하는 게 核心이었다. 다시 말해 스탈린의 援助로 ‘天皇’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蘇聯은 特使를 受諾한다는 것도, 拒絶한다는 것도 아닌 回答을 보냈다. 蘇聯의 地上 目的은 日本이 降伏하기 前 戰爭에 參與하는 것이었다. 7月 26日 포츠담宣言이 公布됐다. 降伏하라는 聯合國의 最後通牒이었다.

    美國은 日本이 蘇聯을 통해 强化를 試圖한다는 事實을 잘 알고 있었다. 太平洋 戰爭 初부터 日本의 모든 無電通信門을 盜聽해 暗號를 解讀했다. 美國은 이 情報網을 통해 日本의 終戰 祈禱와 日本 內部의 葛藤을 詳細하게 把握했다. 陸軍의 强勁派는 日本의 ‘國體’를 호지하기 위해 끝까지 싸워 이른바 玉碎(玉碎)까지 해야 한다고 固執하고 있었다. 反面 主로 外務省과 海軍을 中心으로 한 和平派는 日本의 敗北는 돌이킬 수 없는 形便이니 이 狀況에서 ‘명예로운 和平’을 摸索하자고 主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명예로운 和平’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國體’의 問題였다. ‘國體’는 日本人이 믿고 있는 日本의 獨特하고 優越한 歷史 文化 精神 宗敎 制度 等의 모든 傳統이 集約된 槪念이다. 이것을 象徵하고 代表하는 機關이 ‘天皇’이라고 믿었다. 戰爭 막다른 골목에서도 끝까지 護持하겠다는 國際는 結局 天皇을 지키겠다는 것으로 歸結된다.

    日本 內部의 意見 差異를 잘 아는 美國 內部에서도 日本을 降伏시키는 方案을 두고 意見이 對立했다. 하나는 從來의 無條件 降伏 要求이고 다른 하나는 日本이 받아들일 수 있는 條件을 提示해 쉽게 降伏하게끔 하자는 것이었다. 後者를 擁護한 이는 國務次官 그루(Joseph C. Grew)였다. 그는 5月 初 天皇의 在位를 許諾하는 條件으로 降伏을 要求하자고 提議했다. 日本 國民의 天皇에 對한 感情을 考慮할 때 이 條件을 내세우면 日本이 좀 더 빨리, 쉽게 降伏할 것으로 내다봤다. 陸軍長官 스팀슨(Henry Stimson)과 海軍長官 포레스脫(James Forrestal)이 이 같은 提議에 積極 同調했다. 스팀슨은 7月 포츠담에 가는 트루먼에게 別途의 覺書를 써 日本의 降伏 條件 가운데 當時의 天皇下에 立憲君主制를 容納하는 것을 明記하자고 建議했다.[그루, ‘激動의 時代(Turbulent Era)’ 1406~1473p]

    降伏 條件의 緩和를 反對하는 勢力도 强力했다. 當時 國務部 次官補이던 애치슨(Dean Acheson)의 생각이 그랬다. 새로 就任한 國務長官 번스(James Byrnes) 또한 天皇에 더욱 强力하게 反對했다. 무엇보다도 美國의 輿論이 天皇을 容恕하지 않고 있었다. 트루먼, 번스 같은 輿論에 銳敏한 政治人은 輿論을 無視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트루먼, 스탈린의 競爭

    트루먼, 처칠(나중에 애틀리가 大體), 스탈린이 7月 17日부터 8月 2日까지 베를린 近郊 포츠담에서 3거두 會談을 했다. 會談의 가장 重要한 案件은 폴란드를 包含한 戰後 유럽의 새로운 國際 秩序였다. 여기에서 美國과 蘇聯은 서로 葛藤을 露出해 戰爭의 同伴者에서 戰後의 競爭者로 탈바꿈한다. 유럽 다음으로 重要한 것은 日本의 降伏이었다. 트루먼과 스탈린은 蘇聯의 參戰 問題를 두고 서로 暗默의 競爭을 한다. 스탈린은 얄타에서 言及된 利權을 確保하고자 日本을 攻擊할 口實을 찾고 있었다. 蘇聯은 美國에 蘇聯의 參戰을 公式으로 要請해달라고 提議했다. 트루먼은 이것을 拒否했다.

    트루먼은 表面으로는 蘇聯의 參戰을 願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實際로는 이에 對해 疑心을 갖고 있었다. 獨逸 敗戰 以後 폴란드 等 遊獵에서 取한 蘇聯의 行動을 目擊한 美國은 日本이 敗北한 後 蘇聯이 東아시아에서 取할 수 있는 行動에 對해 疑懼心을 갖게 된다. 美國은 얄타會談에서 蘇聯에 滿洲의 利權을 讓步한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蘇聯이 參戰하기 前 戰爭을 終結하면 얄타의 讓步는 無效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트루먼은 蘇聯이 參戰하기 前 戰爭을 끝내려고 했다. 이를 위해 빼든 祕藏의 칼이 原子爆彈이었다.[스요시 히세가와, ‘敵과의 競爭(Racing the Enemy)’ 75~155P]

    한便 스탈린은 蘇聯이 參戰하기 前 日本이 降伏하는 것을 防止하고자 모든 努力을 기울였다. 7月 18日 會談에서 스탈린은 트루먼에게 고노에 特使에 對해 通報하고 天皇의 親書를 보여주며 이를 어떻게 處理할 것인지 물었다. 暗號 解讀을 通해 이 같은 內容을 알고 있던 트루먼은 내色하지 않고 日本을 信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스탈린은 日本이 提出한 안에 具體性이 없다는 핑계를 내세워 ‘日本으로 하여금 이 問題를 안고 잠들게 만들겠다(lull the Japanese to sleep)’고 回答했다.[해리먼, 特使(Special Envoy) 492p]

    美國의 原子爆彈 開發計劃人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가 7月 16日 첫 實驗에 成功했다. 이 消息은 포츠담에 到着한 트루먼에게 卽時 報告됐다. 7月 21日 爆彈의 威力에 對한 더욱 仔細한 報告가 올라왔다. 이 報告를 接한 트루먼은 蘇聯에 對해 새로운 自信感을 갖게 되어 더욱 强勁한 態度를 取한다. 蘇聯 參戰 以前 日本을 降伏시키기 爲해 트루먼이 期待한 것이 原子爆彈이었다. 原子爆彈의 破壞力을 誇示하면 日本이 速히 降伏할 것으로 트루먼은 믿었다.[가르 알페로비츠, ‘原子爆彈 使用 決定(The Decision to Use the Atomic Bomb)’ 249~265p)

    7月 24日 會談에서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신무기에 對해 通告했다. 原子爆彈이라고 하지 않고 “普通이 아닌 破壞力을 가진 新武器(a new weapon of unusual destructive force)”라고 했다. 스탈린의 反應은 無表情이었다. 스탈린은 이 新武器를 잘 알고 있었다. 스파이를 動員해 맨해튼 프로젝트를 初期부터 監視했을 뿐 아니라 첫 實驗 날짜 亦是 스파이로 暗躍한 物理學者 休크(Klaus Fuchs)를 통해 探知했다. 이제 스탈린이 急해졌다. 蘇聯이 攻擊할 수 있을 때까지 日本의 降伏을 늦춰야 했다.(‘Racing the Enemy’ 130~214p)

    포츠담 宣言은 日本에 無條件 降伏을 要求한 것으로 一般的으로 알려졌다. 宣言文을 仔細히 보면 그것은 決코 無條件 降伏 要求가 아니었다. 日本軍의 降伏을 要求한 것이지 國家 全體의 降伏을 要求한 것은 아니었다. 卽 日本軍의 武裝解除를 要求하고 日本의 再武裝을 反對한 것이다. 降伏하면 日本이라는 國家를 존속시키며, 日本 國民의 自由意思로 平和的이고 責任 있는 政府를 樹立할 수 있으며, 國民의 基本權과 言論 宗敎 및 思想의 自由도 回復해주겠다고 約束했다. 또한 平和的인 産業과 通商 等 戰後 經濟 再建도 容許한다고 했다.

    8月 9日 蘇聯 總攻擊 始作

    그런데 이 宣言文에는 두 가지 異常한 點이 있다. 첫째는 天皇에 對해 아무런 言及이 없다는 點이다. 그의 處罰, 存續과 關聯해 아무런 말이 없다. 天皇의 存續을 容許해 日本을 쉽게 降伏시키자는 提議를 트루먼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둘째, 宣言文은 美國 英國 中國 3巨頭의 이름으로 恐怖됐을 뿐 스탈린의 이름은 없다. 蘇聯은 日本과 中立條約을 맺고 있었기에 트루먼은 宣言文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除外했을 뿐 아니라 宣言文 準備 때도 그와 相議조차 하지 않았다.(‘The Decision to Use the Atomic Bomb’ 375~389p)

    日本은 宣言文을 綿密히 檢討했다. 外務省은 無條件 降伏이 아니라 日本이 받아들일 수 있는 與件을 갖췄다는 結論을 내렸다. 또한 앞서 言及한 宣言文의 두 가지 異常한 點에 注目했다. 도고 外務相은 蘇聯과의 協商 餘地가 남았다고 보고 모스크바와 交涉하면 天皇 問題 等에 對해 더욱 유리한 條件을 얻을 수 있다고 가늠했다. 그는 이 같은 內容을 天皇에게 直接 說明해 그의 許諾을 받았다.(‘종전사록 4’, 3~51p)

    當時 日本 陸軍 首腦部는 蘇聯과 關聯해 서로 다른 두 가지 可能性을 指摘했다. 첫째, 戰後의 世界政策을 考慮할 때 蘇聯이 對日戰爭에 參戰해 日本을 영구의 敵(敵)으로 만들기를 願하지 않는다. 둘째, 蘇聯은 日本과 戰爭을 計劃하고 있으면서 이 祕密을 감추고자 한다. 大本營은 前者의 可能性을 選擇해 “스탈린의 賢明함을 期待한다”고 決定했다. 蘇聯이 끝까지 日本과 戰爭을 하지 않고 中立國으로 남아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대본영기밀일지(大本營機密日誌) 306p]

    7月 27日 最高戰爭會議에서 都賈는 ‘柳條件 强化’라는 表現을 使用하면서 포츠담 宣言을 受諾할 것을 主張했고 스즈키 總理도 同意했다. 그러나 陸軍이 强力히 反對했다. 內閣書記長館 사코미즈(迫水久常)에 따르면 스즈키와 都賈는 “포츠담 宣言이야말로 當面한 和平의 基礎로 活用해야만 할 唯一의 것”이라면서 이 宣言을 基盤으로 强化를 摸索하기로 했다. 그러나 聯合國의 要求를 卽刻 受諾하지는 않고 都賈의 뜻에 따라 蘇聯과의 協商 推移를 기다리기로 했다. 고노에 特使에게 未練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同時에 포츠담 宣言에 對해서는 受諾 또는 拒絶에 關해 一切 外部에 言及하지 않기로 決定했다.

    포츠담 宣言은 世界 各國의 言論 媒體를 통해 日本에도 알려져 있었다. 이에 對한 報道를 막을 수 없어 軍의 反對에도 總理가 記者들에게 論評 形式으로 簡單하게 言及하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스즈키는 포츠담 宣言과 關聯해 “政府로서는 重要하게 여기지 않는다, 默殺(默殺)할 뿐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그 有名한 ‘默殺 事件’이다. 總理가 말한 “默殺”은 포츠담 宣言을 受諾도 拒絶도 하지 않은 狀況에서 時間을 얻기 위해 當分間 無視한다는 “no comment”의 뜻이었지, 當場 拒絶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美國 等 外國에는 日本이 拒絶한다는 것으로 報道됐다. “默殺”이 “ignore”로 飜譯되고, 그것이 “reject”가 돼버린 것이다.[‘기관총하의 首相官邸(機關銃下の首相官邸)’ 225~233p]

    이러한 報道를 接한 美國은 日本이 아직 降伏할 意思가 없다고 結論을 내고 8月 6日 히로시마에 原子爆彈 攻擊을 했다. 그리고 9日 蘇聯이 日本에 宣戰布告를 하고 滿洲와 北韓 地域으로 總攻擊을 始作했다. 이것이 特使 派遣 要請에 對한 蘇聯의 最終 答辯이었다. 이로써 蘇聯은 正式으로 對日戰爭의 參戰國이 됐고, 韓半島에 軍隊를 보낼 수 있었다. 韓半島 分斷의 運命은 여기에서 決定된 것이다. 萬若 日本이 포츠담 宣言을 遲滯하지 않고, 적어도 8月 6日 前에 受諾했더라면 原子爆彈으로 인한 慘狀과 蘇聯의 參戰을 얼마든지 避할 수 있었다. 그렇게 했으면 韓半島 分斷도 없었을 것이었다. 이에 對한 모든 責任은 全的으로 天皇을 비롯한 日本 軍國主義 指導者들에게 있다.

    日本은 왜 그랬을까?

    하버드대의 日本人 歷史學者 이리에(入江昭)는 “萬若 日本이 1944年 末 모스크바를 選擇하지 않고 워싱턴에 接近했더라면 美國은 平和計劃을 가지고 日本을 歡待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리에, ‘權力과 文化(Power and Culture)’ 225p) 그러나 日本은 美國 代身 蘇聯에 接近했다. 왜 그랬을까?

    첫째는 天皇의 問題다. 日本이 最後의 瞬間까지 追求한 것은 이른바 ‘名譽의 强化’였다. 天皇 側近 人士들이 蘇聯에 매달려 天皇을 保護하는 方法을 摸索한 것이다. 둘째는 蘇聯에 對한 日本의 獨特한 認識이다. 日本은 이념적으로 蘇聯과 葛藤 構造에 있음에도 서로가 많은 共通點을 가졌다고 보았다. 蘇聯이 共産國家로서 獨逸, 英國, 美國 等 西歐 强大國에 差別받은 것처럼, 日本 亦是 强力한 軍事力을 育成했는데도 東洋에 位置했기에 平等한 待遇를 받지 못했다고 보았다. 또한 日本은 美國, 英國이 主導하는 自由, 民主主義, 個人主義, 資本主義 等의 思想은 日本이 志向하는 全體主義, 國家主義, 社會共同體 等의 思想과 配置하며 日本은 오히려 蘇聯의 理念, 體制와 더 많은 共通點을 가졌다고 봤다. 日本은 이렇듯 蘇聯과 스탈린에 對해 現實과 동떨어진 浪漫的인, 아니 幻想的인 認識을 가졌기에 美國을 忌避하고 蘇聯에 매달려 强化를 追求한 것이다.

    降伏을 늦춘 또 하나의 要因은 日本이 꿈꾸던 戰後 新(新)世界 秩序다. 太平洋戰爭 初 乘勝長驅할 때 日本은 美國, 英國의 自由民主主義 體制와 蘇聯의 共産主義 體制에 對抗한다는 이른바 ‘대동아共榮圈(大東亞共榮圈)’을 構想했다. 西歐 勢力으로부터 東洋人을 ‘解放’하고, 日本이 主導하고 日本이 支配하는 새로운 勢力圈을 ‘公營’의 이름으로 아시아에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日本의 꿈은 終戰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蘇聯의 仲裁로 强化를 試圖한 底邊에는 ‘公營圈’에 對한 愛着이 相當히 作用했다. 日本은 戰爭 後 美國과 蘇聯이 서로 對立하면서 競爭者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념적으로, 地政學的으로, 또한 實際 權力政治(Realpolitik)에서 美國과 蘇聯은 必然的으로 衝突할 것으로 豫想했다. 그러한 狀況에서 日本이 操縱할 수 있는 餘裕가 아직 있다고 본 것이다. 蘇聯이 戰後 美國, 英國의 勢力을 牽制하는 데 日本이 必要할 것으로 봤으며, 그런 狀況에서 日本은 蘇聯의 도움으로 아시아를 繼續 支配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日本이 꿈꾸던 戰後 新秩序는 美國·英國의 勢力圈과, 蘇聯의 勢力圈, 日本의 勢力圈으로 分割한 世界 支配 構想이었다. 降伏을 遲延한 背景에는 이러한 妄想이 있었다. 現在 日本에서 일어나는 이른바 ‘右傾化’의 움직임은 이러한 思想의 延長이라고 할 수 있다.

    分斷은 日帝의 最終 産物

    第2次 世界大戰 中 韓國을 分斷하겠다는 計劃은 어디에도 없었다.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가 韓國을 독립시키겠다고 한 카이로 宣言이 韓國의 將來에 關한 聯合國 唯一의 公式 合意였다. 그리고 얄타에서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韓國을 解放한 後 過渡政府 樹立을 위해 美國, 英國, 中國, 蘇聯 4大 强國의 信託統治를 할 것을 合意했다. 이 合意에서도 韓國을 分斷하겠다는 考慮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4大强國 信託統治度 어디까지나 統一된 韓國에 實施하겠다는 것이지, 分斷을 考慮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要約하면 韓國의 分斷은 蘇聯이 對日戰爭에 參戰한 結果로 일어난 現象이다. 蘇聯이 8月 9日 日本을 相對로 宣戰布告를 하고 北韓 地域에 蘇聯軍이 進入한 狀態에서 8月 15日 日本이 降伏했다. 蘇聯軍이 이미 北韓 地域에 進駐한 狀況에서 多急해진 美國이 蘇聯이 北쪽, 美國이 南쪽을 占領해 日本軍을 武裝解除하자고 提議하자, 이를 蘇聯이 받아들여 韓國이 分斷됐다. 不過 1週日의 戰爭으로 蘇聯은 北韓을 占領할 수 있었다. 數次例 强調했듯 萬若 蘇聯이 參戰하지 않았더라면 蘇聯軍이 北韓에 進入하지 않았을 것이며 韓國의 分斷도 있을 수 없었다.

    蘇聯이 對日戰爭에 參戰하려는 主目的은 1905年 러일戰爭의 敗北를 雪辱하고 포츠머스 條約에서 日本에 빼앗긴 滿洲地域의 利權을 回復하는 것이었다. 이 權利는 얄타에서 對日戰爭에 參戰하는 代價로 스탈린이 루스벨트로부터 約束받은 것이었다. 이 代價는 蘇聯이 반드시 參戰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蘇聯이 參戰하기 前 日本이 降伏하면 얄타에서의 約束은 無效가 되는 것이다. 蘇聯이 모든 手段을 動員해 對日戰爭에 參加하려 한 理由는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蘇聯의 參戰은 얼마든지 避할 수 있었다. 1945年 5月 初 獨逸이 完全히 敗北했을 때 戰爭은 이미 끝난 것이었다. 美國의 莫强한 軍事力이 이제 日本 攻擊에 總集中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中立을 지켰던 蘇聯도 日本을 攻擊할 것은 너무나도 明確했다.

    그래서 4月 初 蘇聯은 中立條約을 廢棄하겠다고 通告해 日本과 戰爭하겠다는 意思를 露骨的으로 表示한 것이다. 이러한 絶望的인 狀況을 天皇을 비롯한 日本의 指導層은 認定하고 있었으며 더는 戰爭을 繼續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時點에서 日本이 美國을 相對로 强化를 摸索했더라면 그때 쉽게 戰爭을 終結할 수 있었다. 美國은 當時 人命의 犧牲을 最少化하기 위해 可能한 限 早速한 時日에 戰爭을 마무리하는 方法을 追求하고 있었다. 이때 日本이 美國과 接觸했으면 原子爆彈도 蘇聯의 參戰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危重한 時點에 日本은 美國을 忌避하고 蘇聯을 友邦國으로 選擇했다. 蘇聯의 仲裁로 ‘名譽의 和平’을 찾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蘇聯의 도움으로 天皇을 保護하고 日本 支配의 ‘公營圈’을 持續하겠다는 꿈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意圖는 이와 正反對였다. 스탈린의 最大 目的은 하루速히 日本과 戰爭을 始作해 얄타의 權利를 確保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日本의 降伏을 百方으로 遲延시켜야 했다. 이러한 스탈린의 眞意를 알아차리지 못한 日本은 스스로가 만든 陷穽에 빠지게 된 것이다. 스탈린은 이 機會를 最大限 利用해 宣戰布告까지 끌고 갔다.

    ‘한반도 지속 지배’ 일본의 망상 만주 이권 노린 소련의 기만
    崔榮鎬

    1931年 慶北 慶山 出生

    學徒兵으로 6·25戰爭 參戰. 陸軍 少領 除隊

    美國 시카고大 歷史學 博士

    美國 하와이주립대 歷史學科 敎授

    現 하와이주립대 名譽敎授

    韓國獨立運動史, 하와이 移民史 等과 關聯한 論文 多數

    著書 : ‘From the Land of Hibiscus - Koreans in Hawaii’ 等


    日本은 戰爭으로 나라 全體가 疲弊해 있었다. 陸軍은 軍事力이 激減해 日本 本土에서 겨우 抵抗하고 있었으며, 海軍은 有名無實했다. 美國의 無制限 空襲으로 都市의 大部分은 廢墟가 됐으며 많은 國民이 飢饉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러한 慘酷한 狀況에서 日本은 卽刻的인 降伏을 拒否하고 美國을 忌避하면서 蘇聯을 통한 ‘名譽의 和平’, 卽 ‘天皇 保護의 平和’를 選擇한 것이다. 이러한 選擇의 結果가 原子爆彈 被爆이고, 韓半島 分斷이다.

    韓半島 分斷의 責任은 全的으로 天皇을 비롯한 帝國主義 日本의 指導者에게 있다. 韓國을 支配했던 日本 帝國主義의 最終 産物이 韓半島 分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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