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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權 行使 못한 心弱한 君主|新東亞

王權 行使 못한 心弱한 君主

免疫力 弱했던 ‘마마보이’ 明宗

  • 이상곤│甲山韓醫院 院長·韓醫學 博士

    入力 2014-04-21 17: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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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定王后 尹氏는 朝鮮 第12代 王 人種(仁宗·1515~1545, 在位 1544 ~1545)과 第13代 王 明宗(明宗·1534~1567, 在位 1545∼1567)의 어머니로, 中宗의 繼妃다. 燕山君을 내쫓은 反正 功臣들은 中宗과 그의 첫 夫人인 단경王后 申氏를 强制로 헤어지게 만든다. 申氏의 아버지 신수근이 燕山君과 妻男, 妹夫 之間으로 反正에 反對했기 때문에 겪은 不幸이다. 仁王山의 치마바위는 쫓겨난 申氏가 九重宮闕에서 中宗이 或是 自身을 바라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期待感에 바위에 치마를 걸치고 宮闕을 바라봤다는 애달픈 恨이 서린 場所다.

    中宗의 둘째 夫人은 장경왕후인데, 出産 後遺症으로 世上을 떠났다. 그때 出産한 아이가 人種이다. 장경왕후의 出産을 도운 이는 TV드라마로 有名한 장금이다.

    셋째 王妃가 바로 朝鮮 歷史上 가장 强力한 女帝였던 文定王后다. 두 딸을 낳은 그는 結婚 17年 만인 中宗 29年에 後날 明宗이 되는 王子를 生産했다. 文定王后는 人種과 明宗 두 王의 健康과 죽음에 重大한 影響을 끼친다.

    强力한 女帝 文定王后

    ‘明宗實錄’ 20年 4月 6日, 史觀이 쓴 尹氏의 卒氣는 이렇게 始作한다. “尹氏는 天性이 强한(剛?)하고 文字를 알았다. 人種이 東宮으로 있을 적에 尹氏가 그를 꺼리자, 그 아우 윤원로(尹元老)·尹元衡(尹元衡)의 무리가 장경왕후의 아우 尹任(尹任)과 틈이 벌어져, 尹氏와 世子 兩쪽 사이를 얽어 謀陷하여 드디어 大尹·소윤의 說이 있게 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人種의 高位(孤危)를 근심하였는데, 中宗이 昇遐하자 人種은 孝道를 極盡히 하여 尹氏를 섬겼다. 그러나 三曹할 즈음에 頻繁히 怨望하는 말을 하고, 甚至於 ‘願컨대 官街(왕)는 우리 家門을 살려달라’고까지 말하였다. 人種이 이 말을 듣고 답답해하고 또 喪中에 過度히 슬퍼한 나머지 이어서 偶像(憂傷)李 되어 昇遐하게 되었다.”



    왕권 행사 못한 심약한 군주

    中宗의 繼妃인 文定王后 尹氏 墓가 있는 태릉.

    親아들인 明宗도 文定王后의 壓迫에 健康을 해쳤다. “스스로 明宗을 부립(扶立)한 功이 있다 하여 때로 主上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所有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如意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民家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對하듯 함이 있었다. 上(上·賃金)의 天性이 至極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後援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 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床이 心熱症(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죽는 瞬間까지 明宗을 괴롭힌 心熱症의 뿌리는 바로 自身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4月 20日 明宗이 指示해 만든 公式 文書는 사뭇 다르다. “人種이 原子爐 있을 때 부지런히 애써 武揚(撫養·어루만지듯이 잘 돌보아 기름)함이 自己 所生보다 더 나았다. 恒常 人種의 學問이 날로, 달로 進就함을 기뻐하여 乳母·保姆, 是認(侍人)의 무리에게 자주 賞을 주었다. 人種과 孝惠空週가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것을 애통히 여겼고, 公主의 子弟에 이르러서도 모든 일을 一切 公主의 例에 依하였다.”

    왜 이렇게 差異가 날까. 文定王后는 두 番이나 公主를 낳은 끝에 結婚 17年 만에 明宗을 낳는다. 그동안 自身의 感情을 徹底히 누르고 쓴맛 단맛을 보며 權力의 屬性으로 앞날을 把握한 女丈夫다운 處身이 아니었을까.

    文定王后는 權力을 잡자 自身과 對立했던 대윤파를 一掃했다. 이때 尹任과 그 一派가 除去되면서 人種 때 登用된 士林들도 大擧 被害를 보았는데, 이를 乙巳士禍라고 한다. 乙巳士禍는 大尹과 少尹의 政爭이지만, 그 裏面엔 旣得權을 維持하려는 勳舊勢力과 性理學의 原理主義者인 士林勢力 間 葛藤이 背景으로 있었다.

    勳舊와 士林의 葛藤

    士林은 宣祖 以後 朝鮮의 政治權力을 完全히 掌握한다. 이 때문에 士林과 葛藤을 겪으면서 佛敎를 擁護한 文定王后를 實錄이 어떻게 評價했는지는 쉽게 斟酌할 수 있다. 當時 文定王后의 權勢를 가늠할 수 있는 事件은 양재역(良才驛) 壁書(壁書) 事件이다. 只今으로 말하자면, 양재역 壁에 大字報 性格의 글이 揭示된 것이다.

    原文은 이렇다. “其書以朱書曰: “女主執政于上, 奸臣李·#54702;等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 豈不寒心哉?”(그 글은 붉은 글씨로 썼는데, ‘驪州(女主)가 위에서 政權을 잡고 奸臣 이기(李·#54702;) 等이 아래에서 權勢를 弄奸하고 있으니 나라가 將次 亡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寒心하지 않은가.’

    驪州는 女王의 權力을 가진 분이라는 뜻이다. 이 事件으로 中宗과 희빈 洪氏 사이에 난 人種과 明宗의 異腹兄弟 봉성군 弛緩이 四史(賜死)當한다.

    佛敎는 世宗마저 平生의 慰安處로 삼았으면서도 대놓고 절 하나 마음대로 지을 수 없었던 朝鮮의 異端 宗敎다. 이 때문에 社會를 거스르며 佛敎를 育成하고 度牒制를 만들어 僧侶 普雨를 優待한 文定王后의 배짱은 朝鮮의 미스터리다. 反面 儒學的 素養을 지닌 明宗이 얼마나 어머니의 壓迫에 시달렸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仁宗은 朝鮮의 國敎인 性理學의 메시아나 다름없었다. 明宗 卽位年 7月 27日 人種의 行長은 이렇게 記錄됐다. “王의 性品이 嚴重하여 平素 한가롭게 消日할 적에도 조용히 沈默하면서 戱弄하는 말이 없었고, 찡그리거나 웃는 모습을 外形에 나타내지 않았고, 左右의 近視(近侍)들에게도 일찍이 懶怠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恒常 自身의 美德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으며, 혹 稱讚하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좋아하지 않는 빛이 있었다.…성색(聲色·음악과 女色(女色)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儒學이 孔子를 操縱(祖宗)으로 하여 國家와 社會의 秩序 維持를 目的으로 했다면, 性理學은 走者를 操縱으로 해 태어난바 마음의 理致를 硏究하는 學問이다. 儒學이 콤플렉스로 가지고 있던 佛敎的 功(空)의 世界와 道敎의 道(道)의 世界로 擴張해 마음의 太極을 닦아가는 工夫다.

    人種의 極端的 道德性

    朝鮮時代 王의 理想型은 內聖外王(內聖外王)이다. 안으로 聖賢 같은 人格을 完成하고 밖으로 王다운 王 노릇을 하는 것이다. 聖賢은 當然히 孔子와 朱子가 롤 모델이다. 孔子는 ‘論語’ 鄕黨便에서 自身의 食生活 習慣을 밝히면서 ‘生薑을 끊지 않고 먹었다’고 했다. 生薑이 精神을 疏通하고 內部의 濁한 樂器를 없앤다고 註釋을 달았다.

    仁宗은 世子 時節 世子侍講院(世子侍講院·朝鮮 電氣에 王世子의 敎育을 맡아보던 官衙)의 宮僚들에게 生薑을 하사했다.

    “내가 ‘論語’에 孔子의 飮食에 對한 竊盜를 記錄한 것을 보니 ‘生薑을 끊지 않고 먹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입과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精神을 疏通시키고 입냄새를 除去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여러분은 孔子를 思慕하는 사람들로서 비록 末端인 飮食 같은 것에서도 반드시 法을 取하고 있을 것이기에 只今 이 菜蔬를 글 先生인 侍講院 宮僚에 보내는 것이니, 한番 맛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매운 生薑을 膳物하며 極端의 孔子 따라잡기를 한 것이다.

    人種과 燕山君은 매우 對照的이지만 비슷한 面도 많다. 일찍 世子로 冊封됐고, 어머니가 얼굴도 모르던 時節에 世上을 떠났으며, 繼母의 손에 자라 다음 王位가 繼母의 아들로 이어졌다. 어머니가 모두 坡平 尹氏였고, 31歲에 死亡한 點도 닮았다. 하지만 人種은 士林의 熱烈한 支持를 받았고 極端的으로 孝心을 發揮했으며 道學者로서의 禁慾精神을 實踐한 反面, 燕山君은 處容舞라는 탈춤을 추고 백某를 劫姦하면서 소의 태(胎)를 먹는 極端的인 快樂을 追求했다. 極端的인 道德性도, 極端的인 快樂도 健康을 해친다는 平凡한 眞理를 歷史가 確認해준 셈이다.

    實錄은 人種의 孝心이 죽음에 이르는 病의 原因이 됐음을 淡淡히 적고 있다. 仁宗은 世子 時節부터 王位에 오르기까지 별다른 疾病이 없었다. 自身의 누님인 효혜공주의 죽음을 슬퍼해 憔悴해졌다는 記錄이 唯一하다. “왕이 成服(成服·初喪이 나서 처음으로 喪服을 입음)에서 卒哭(卒哭·三虞祭를 지낸 뒤에 曲을 끝낸다는 뜻으로 지내는 祭祀)까지 粥만 먹고 염장(鹽醬)은 먹지 않았으며 밤에 便히 자지 않고 哭聲이 끊이지 않았다. 葬禮를 마치고 나서도 上車를 떠나지 않았다. 王이 時疾(侍疾) 初頭부터 憔悴함이 너무 甚하였는데, 大鼓를 當함에 이르러서는 너무 슬퍼한 나머지 徹骨이 되어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날 地境이었으므로 代身이 先王의 儒敎를 들어 아뢰면서 權道를 따라 肉饍을 進御하라고 請하면, ‘나의 成效가 미덥지 못하여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다’ 하면서 더욱 애통해하였다.” 病이더욱 惡化된 것도 使臣을 迎接하기 위해 無理했기 때문이었다.

    心熱症(心熱症)과 毒殺說

    人種의 在位期間은 8個月이다. 人種 1年 尹(閏)1月 1日부터 藥房提調와 議員들은 繼續해 診察을 받고 藥을 쓸 것을 建議하지만 거절당한다. 1月 9日 “心肺와 비위의 脈이 微弱하고 입술이 마르고 낯빛이 瘦瘠하며 때때로 가는 기침을 했다. 政府 및 六曹·漢城府가 아뢰기를, “相議 玉體가 매우 疲困하고 脾胃가 微弱하십니다”라면서 世宗의 境遇처럼 고기飯饌을 먹을 것을 慫慂한다. 하지만 人種은 1月 29日 “나도 아들인데 이러한 일을 하지 못한다면 어디에다 나의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느냐”고 되레 反問한다. 實錄은 人種이 正말로 하늘이 내린 孝子라고 記錄했다.

    人種 1年 6月 25日 痢疾(設使) 症勢가 始作되면서 症勢가 急激하게 나빠진다. “相議 增稅는 大槪 더위에 傷한 데다 精神을 써서 心熱(心熱)하는 症勢로 매우 지치셨는데, 藥을 물리치는 것이 너무 甚하여 狂症을 日으키실 듯합니다.”

    7月 1日 人種은 世上을 떠난다. 하루 前엔 죽음의 苦痛 속에서도 性理學의 메시아답게 죽은 趙光祖를 잊지 않는다. 自身의 마지막 悲願을 尹任에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趙光祖를 복직시키고 賢良科를 芙蓉(復用)하는 일은 내가 늘 마음속으로 잊지 않았으나 미처 勇氣 있게 決斷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平生의 큰 유한이 없지 않다.”

    왕권 행사 못한 심약한 군주

    性理學을 崇尙했던 人種은 世子 時節 世子侍講院 宮僚들에게 生薑을 하사했다.

    野史는 文定王后가 人種에게 떡을 주어 毒殺했다고 傳한다. 6月 18日의 記錄은 이렇다. “床이 警査展에 나아가 晝茶禮를 지내고 自轉(慈殿)에게 問安하였다. 自傳이 수가(隨駕)한 始終·祭場에게 술을 먹이고, 또 始終에게 胡椒를 넣은 흰 주머니를 내렸다.”

    같은 날 實錄은 野史의 推測에 힘을 보태는 記錄을 남겼다. “人種이 이날 以後 元氣가 끊어지고 病勢가 심해져 다시는 祭祀를 지내지 못했다.”

    明宗 20年 4月 6日 文定王后는 自身의 殞命할 날이 다가오자 明宗의 體力을 斟酌할 수 있는 重要한 遺言을 남긴다. “主上은 元氣가 本來 充實하지 못하여 오래도록 蘇선(素膳·고기나 生鮮이 들어 있지 않은 飯饌)을 들 수 없으니, 모든 喪禮(喪禮)는 모름지기 保養하는 것을 先務로 삼아 卒哭까지 기다리지 말고 모든 方法을 써서 조보하는 것이 곧 나의 所望이오.”

    스태미나 弱했던 明宗

    明宗은 卽位 直前 疫疾(疫疾)을 앓았다. ‘免疫’이란 單語의 ‘譯’李 疫疾人 點을 勘案하면 現代的으로 볼 때 免疫力이 弱했던 것이다. 免疫力이 弱해지면서 잘 걸리는 感氣는 明宗의 疾病 中 단골 메뉴였다. 明宗 8年 換節期에 바람을 쐬어 머리가 아프고 기운이 나른하다고 말한 것을 始作으로, 12年 10月 27日 날씨가 따뜻하지 못해 感氣를 오래 앓고 있다면서 宮殿 처마 밑에 털로 帳幕을 쳐서 임금을 추위로부터 保護했다고 할 程度였다.

    13年 11月과 14年 1月에도 各各 기침과 어지러움, 感氣 症勢로 診療를 받는다. 感氣에 잘 걸리고 추위를 잘 탄다면 이는 몸속의 보일러人 身長의 陽氣가 弱하다는 信號다. 陽氣가 弱하다는 건 스태미나가 弱하다는 意味다. 伸張은 차가운 쪽과 뜨거운 쪽 兩面이 있다. 차가운 쪽이 물을 象徵하는 身手(腎水)라면 身長의 뜨거운 部分인 名文(命門)은 보일러이며, 흔히 斷電(丹田)이라는 붉은 밭과 脈絡을 같이한다. 現代 醫學의 副腎(副腎)처럼 보일러와 같은 意味를 內包한다. 名門은 生命의 聞으로 生命을 維持하는 데 必要한 人體의 보일러 구실을 한다. 身長의 陽氣를 象徵하며, 男子의 스태미나를 內包한다. 明宗은 스태미나가 弱했던 만큼 子息 農事도 힘들어 순회세자 하나만 낳았는데 일찍 죽고 만다.

    卽位年 8月 15日엔 文定王后의 至極한 保護 아래 競演과 哭臨(哭臨·賃金이 죽은 臣下를 몸소 弔問하는 것)을 中止한다. ‘마마보이’ 明宗은 엄마의 극성스러운 保護를 받는다. “主上께서 큰 疫疾을 겪으신 지 오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氣가 허약하여 飮食을 제대로 드시지 못한다. 學問과 陽氣가 모두 重要하나 내 생각으로는 기운을 기르는 것이 더욱 重要하다.” 實錄의 史觀은 文定王后의 이런 指摘을 대놓고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기운을 保養하는 것이 學問보다 重要한지 모르겠다’라고 딴죽을 걸었다.

    성리학자 李彦迪은 意外로 文定王后의 指摘에 힘을 보탠다. “어제 傳敎를 들으니 ‘主上께서는 춘추가 어리신 데다 今年에 또 疫疾을 앓으셔서 氣體가 充實하지 못하니, 學問이 眞實로 힘써야 하는 것이지만 神奇(身氣)를 保養하는 일 또한 큰일이다. 哭臨과 競演은 위에서 헤아려서 措處하겠다’ 하셨는데 상교가 至當하십니다.” 李彦迪은 血氣가 安定되지 않을 때 色(女子)을 警戒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明宗의 健康과 스태미나를 最優先 國政課題로 꼽는다.

    世子의 죽음으로 健康에 打擊

    韓醫學에선 목소리와 스태미나가 깊은 關聯을 맺고 있다고 判斷한다. 李彦迪의 指摘에 根據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明宗 3年 11月 7日 侍講官 정유길은 王의 목소리를 擧論한다. “玉音을 들으니 여느 때만 못합니다.”

    臣下들의 不安한 豫測은 後日 맞아떨어진다. 明宗은 結局 순회세자 하나를 낳았는데 13歲에 죽으면서 自身의 健康에 決定的 打擊을 입는다.

    明宗의 외아들 巡廻世子는 本來부터 弱한 體質로 태어났다. 6年 5月 30日 原子(元子)가 誕生한 지 一週日도 되기 前에 피우(避寓)한다. 社勢가 不得已하다는 王의 指摘을 勘案하면 태어나면서부터 健康에 큰 問題가 있었던 것은 分明하다.

    9年 8月 14日 “原子의 補養은 操心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原子가 前日 걸음이 自由로울 적에는 뛰어다녀 별다른 症勢가 없었는데, 올해 봄, 여름부터는 다리 힘이 衰弱해져 健康하게 걷지 못하고 때로는 일어서는 것도 어렵게 여깁니다. 間或 差度가 좀 있기는 해도 亦是 前日처럼 健康하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된 까닭을 알 수 없었는데, 議員 김윤은(金允誾)이 가서 脈을 짚어보고 ‘濕症(濕症)이다’라고 하기에, 神이 ‘普通 사람들은 居處가 잘못되어서 그런 症勢가 있게 되지만 原子가 무엇 때문에 그런 症勢가 있겠느냐?’ 하니, ‘乳母에게 濕症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12年 8月 19日의 記錄은 世子의 健康에 問題가 크다는 것을 나타낸다. “司饔院 主婦 김윤은은 前日에 世子가 어리고 弱한 데다 氣가 虛하여 거의 죽게 되었을 때 藥을 잘 調劑하여 效驗을 보게 하였으니 참으로 嘉尙한 일이다. 百官을 加資할 때 亦是 親受하게 하라.”

    18年 9月 20日 王世子 二部는 世上을 떠나고 말았다. 以後 明宗의 健康은 急激히 나빠진다. 19年 尹2月 24日 明宗은 世子를 잃은 自身의 心境을 이렇게 披瀝한다. “나의 心氣가 매우 便安하지 않으며 脾胃가 化하지 않고 가슴이 답답하며 갑갑하다. 寒氣와 熱이 쉽게 일어나며 元氣(元氣)가 허약하여 間間이 어지럼症과 곤히 條는 症勢가 있고, 밤의 잠자리가 便安하기도 하고 便安치 못하기도 하다.…나이가 30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國家에 慶事가 없다. 지난해에 世子를 잃은 뒤 國家의 形便이 고단하고 弱해진 듯하니 心氣가 어찌 和平하겠는가.”

    後繼者를 둘러싼 論爭에서 明宗은 마지막까지 自身의 핏줄을 念頭에 뒀다. 그만큼 순회세자의 죽음은 明宗의 健康에 큰 影響을 끼쳤다.

    親衛 權力 사라져 죽음 門턱

    왕권 행사 못한 심약한 군주

    王의 外三寸 尹元衡이 專橫을 일삼았던 明宗 때엔 義賊까지 出現했다. 林꺽정의 山菜가 있었다고 傳해오는 漢灘江 高석바위(오른쪽).

    明宗 20年 4月 6日 어머니 文定王后가 죽었다. 外三寸이자 權力의 核心인 尹元衡은 바로 領議政 자리에서 쫓겨났다. 尹元衡의 妾이면서 안房 權力을 흔들었던 정난정은 本妻를 毒殺한 嫌疑로 告訴당했다. 王后의 작은아버지였던 심통원마저 쫓겨나면서 親衛 權力이 모두 사라졌다.

    이에 本來부터 心熱症을 앓던 明宗은 큰 衝擊을 받아 거의 죽음 直前까지 갔다. 20年 9月 15日엔 熱이 甚해 입시한 臣下를 알아보지 못할 程度였다. 大臣들은 後繼者 問題에 對해 切迫하게 물었다. 當時의 雰圍氣를 實錄은 이렇게 傳한다. 明宗은 “內戰(內殿)에서 생각하여 處理할 것이다.”(당시에 床이 下答하기가 어려워서 이같이 下校했으나 實은 後嗣를 定하겠다는 뜻이 없었다) 大臣들은 다시 王妃를 壓迫했고, 王妃는 마지못해 한글로 하성군 이균(宣祖)을 指目했다. 이것이 바로 ‘乙丑年의 河西’다.

    心熱症은 明宗이 가장 자주 呼訴한 괴로움이다. 그는 어머니와 外三寸의 威勢에 눌려 한 番도 王權을 行使해보지 못한 마마보이의 典型이다. 尹元衡의 專橫이 이어져 不淨腐敗가 심해지면서 林꺽정이란 義賊까지 出現한다. 明宗 14年 3月 27日 임꺽정 討伐 方案을 議論하는 자리에서 當時 狀況에 對한 宰相들의 認識은 事態의 本質을 분명하게 喚起시켜준다. “盜賊이 出現하는 것은 守令의 苛斂誅求 탓이며 守令의 苛斂誅求는 宰相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時代가 時代이니만큼 特異한 狀況도 많다. 明宗 21年 2月 29日 傳하는 다음 이야기는 端的인 例다. “사서(士庶)들이 酒色을 즐기다 吟唱(陰瘡·性病)에 걸린 이가 많았다. 사람의 쓸개로 治療하면 그 病이 卽時 낫는다는 所聞이 퍼지자, 苦痛을 받던 이들이 많은 財物로 사람을 사서 죽이고 그 쓸개를 醉했다. 종루, 보제원, 洪濟院 等에는 乞人이 많이 모였는데 4~5年 새 이들이 다 사라졌다. 나중에 이들은 平民에게까지 손을 뻗쳐 아이를 잃은 者가 많았다.”

    吟唱은 사타구니에 생기는 부스럼으로 一種의 性病 後遺症이다. 이것을 사람의 쓸개로 治療하고자 했던 것이다.

    心弱한 王의 特徵을 잘 보여주는 것은 마지막 졸기다. “幻視(宦侍)를 對할 때에는 매우 叱咤했지만 外信(外臣)을 對하면서는 조금도 잘못됨이 없게 하였으니, 公論을 두려워하고 調整을 높이는 것이 至極했던 것이다. 使臣은 論한다.…상이 君子를 쓰려고 하면 小人이 自己를 해칠까 두려워 죽여버리고, 床이 小人을 除去하려고 하면 小人이 自己에게 붙좇는 것을 利롭게 여겨 서로 이끌어 나왔다.”

    外部에 剛한 사람은 內部에 弱하고 外部에 弱한 사람은 內部에 强하다. 心弱한 明宗은 內侍들에겐 限없이 剛했지만, 外部로는 自身의 見解를 밝히거나 王權을 行使하지 못했다.

    上熱下寒症에 시달려

    實錄 17年 7月 12日 “賞은 性品이 剛明(剛明)하여 宦侍들의 잘못을 조금도 容恕하지 아니하고, 恒常 宮中에서 조금이라도 거슬리거나 疏忽히 하는 者가 있으면 卽時 꾸짖고 매를 치기까지 하였다. 다만 스스로 心熱을 걱정하였다. 喜怒가 일정하지 않아 아침에 罰을 주었다가 저녁에는 賞을 주고 또는 저녁에 罷免시켰다가 아침에 다시 敍用下니, 幻視들이 上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甚히 두려워하지 않았다.”

    22年 中國 使臣을 接待하는 問題로 王은 지레 怯을 먹고 苦悶했다. 實錄은 當時의 狀況을 “床이 平素 心熱이 있는 데다 더욱 使臣에 對한 생각에 熱症을 돕는 徵候가 없지 않았다”고 記錄했다.

    心熱症이 심해지면서 明宗의 體質的 特性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實錄 20年, 明宗은 自身은 本來 弱한 體質로 位는 熱이 나고 아래는 冷한 症勢가 있었는데 더욱 심해져서 가슴과 명치가 막힌 듯해 飮食이 내려가지 않는다고 言及한다. 21年 9月 13日에도 明宗은 自身이 弱質로 본디 心熱이 있어 病을 자주 앓는데 계해년에 世子를 잃고 매우 傷心하고 다시 어머니의 喪을 만나 마음이 限없이 괴롭다고 呼訴한다. 22年 6月 9日에도 位는 뜨겁고 아래는 冷한 增稅로 診療를 받는다. 그때마다 吐露하는 괴로움은 韓醫學에서 자주 言及하는 上熱下寒症이었다.

    陰陽五行論에서 心臟은 우리 몸의 엔진이어서 불꽃(火) 같은 힘을 象徵한다. 伸張은 겨울을 象徵하므로 차가운 물(水)을 나타낸다. 불은 위를 向하고 물은 아래로 흐른다. 上熱下寒을 治療하는 殊勝화강(水升火降)은 마음을 다스려 心臟의 熱氣를 下部로 내리고 伸張에 貯藏된 차가운 물을 데워 上昇하게 하는 것이 가장 重要한 要素다.

    明宗은 스트레스로 心熱이 甚해져 불이 위로 向하고 스태미나를 象徵하는 身手는 枯渴돼 上昇할 수 없었다. 平素 衣食住 習慣도 問題가 있었다. 너무 더운 곳에 居處하고 너무 두꺼운 옷을 입었으며 찬 飮食을 즐겼기 때문에 消化 機能이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一般人도 여름에 찬 飮食을 먹고 배頉이 나는 境遇가 많은데, 오랜 持病을 앓은 明宗의 消化 機能은 弱해질 대로 弱해졌다.

    왕이 健康할 權利

    22年 6月 27日 實錄은 마지막 症狀을 이렇게 記錄했다. “賞께서 熱氣가 위로 치받쳐 올라 人事를 살피지 못한다.”

    ‘東醫寶鑑’은 이런 症狀을 肝熱과 脾虛로 把握했다. “몹시 성내어 肝을 傷하면 熱氣가 가슴에 밀려오고 숨이 거칠고 짧아지면서 끊어질 듯하며 숨을 잘 쉬지 못한다”“지나치게 생각하여 비를 傷하면 機가 멎어서 돌아가지 못하므로 中浣에 積聚가 생겨서 飮食을 먹지 못하고 배가 불러 오르고 그득하며 팔다리가 나른해진다.”

    性理學은 本性과 千里를 把握하고 修養함으로써 氣質과 欲望을 抑制하고 敬虔하게 살 것을 唯一한 解答으로 提示했다. 그러나 現實的으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解答을 지닌 治癒 體系도 共存할 必要가 있다. 性理學은 王이 健康하게 살아갈 權利를 빼앗았다. 性理學 原理主義者였던 人種과 心弱한 마마보이 明宗은 그렇게 朝鮮의 이념적 桎梏 속에서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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