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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쩍새 소리 그늘에서 悠悠自適 쉬어가는 나그네|新東亞

소쩍새 소리 그늘에서 悠悠自適 쉬어가는 나그네

忠南 公州

  • 최학│우송대學校 韓國語學科 敎授 jegang5@yahoo.com

    入力 2012-08-21 13: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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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印象이라고 하는 것도 結局 그를 接하는 이의 酒酊(主情)에 左右되듯 山의 引上 또한 그 품을 찾아들고 마루턱에 올라서는 사람의 情緖에 달렸다. 골짝을 거쳐 山꼭대기에 올랐는지 아니면 稜線 길을 걸었는지, 봄날에 찾았는지, 비 오는 여름날에 만났는지, 덧붙여 同行한 者가 누구였는지에 따라 山의 모습, 山의 느낌이 달라진다.

    鷄龍山은 性깔 있으면서도 멋스러운 구석이 많은 壯年의 사내 같다. 스무 番도 넘게 이 山에 오르면서, 그리고 내 나이 쉰도 훨씬 넘은 때에 規定해본 山의 印象이 그렇다는 말이다. 갓 스물의 어린 나이에 맨 처음 이 山을 만났을 때만 해도 山太極(山太極) 數太極(水太極)의 風水地理며 巫俗과 類似宗敎에 對한 先入觀으로 기이(奇異)와 靈廟(靈妙)의 感情移入이 없지 않았지만 그 사이 내 意識이 變하듯 山 또한 많은 變化를 거쳤다.

    壯年의 사내 같은 鷄龍

    鷄龍은 크고 넉넉한 山이 아니다. 姿態가 特別히 빼어난 것도 아니다. 키 높이만 따지자면 隣近의 서대산보다 높지 않고 絢爛함으로 치면 咫尺의 大芚山에 미치지 못한다. 넉넉하고 부드럽기로는 100里 안팎의 俗離山을 堪當할 수 없다. 周圍에 이런 벗들을 둔 德일까. 鷄龍은 突兀하면서 넉넉하고 絢爛하면서 무디다. 傲氣와 謙遜, 洗練과 質樸을 아울러 지녔기에 이는 鷄龍의 멋이 된다.

    數年 前부터 鷄龍山의 煩雜함은 道峯山, 冠岳山과 다를 바 없이 됐다. 벚꽃鐵 丹楓철에는 더 말할 나위 없다. 남달리 閑寂한 山行을 즐기고자 하는 이들은 新元史 쪽의 山길을 오르는 것이 例事지만 이쪽은 接近하기가 東鶴寺나 甲紗만큼 쉽지 않다는 難點이 있다.



    共用駐車場에서 가까운 山길 하나를 紹介한다. 東鶴寺 入口, 그러니까 오른便의 商家가 끝나고 조그만 다리가 나타나는 데서 걸음을 멈춘다. 登山路 案內板이 선 그곳에서 뭇 사람을 떠나보내고 오른쪽 샛길로 올라서는 것이다. 旅館 建物을 지나면 天障 賣票所가 나온다. 無黨골을 지나 큰배재로 오르는 이 山길은 四季節 어느 때든 閑寂하고 아름답다. 다른 登山路에는 돌階段이 많지만 이곳에서는 심심찮게 흙길을 걷는 재미도 있다. 게다가 맑은 개울이 쉼 없이 숲길을 따른다. 普通 걸음이면 한 時間 만에 큰배재 능마루에 올라설 수 있다.

    이곳에서 10餘 分 平地 길을 걸으면 男妹塔이 나온다. 바람 부는 가을날에는 바닥에 밤톨이 깔리는 山길이다. 男妹塔에 닿았으면 반드시 삼불봉을 올라야 한다. 鷄龍山 戰警은 勿論 公州 流星까지 한눈에 잡히는 壯快한 眺望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時間과 기운이 넉넉하지 못할 境遇는 이곳에서 男妹塔으로 되내려와 東鶴寺로 下山하면 그만이다.

    그렇지 않을 境遇 삼불봉~觀音峯을 잇는 1.8km 自然性陵을 縱走한 뒤 觀音峯에서 東鶴寺로 下山하면 더 좋다. 좁은 山길을 쉼 없이 오르내리며 깎아지른 斷崖를 通過하고 바위 벼랑에 걸린 아득한 철 사다리를 오르는 재미는 이 한 時間의 宗主 코스에서 모두 맛볼 수 있다.

    東鶴寺에서 公主 가는 길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마티材를 넘고 錦江 청壁을 거친 뒤 江 물줄기를 따라 山기슭 길을 달려야 했다. 그 中間 中間에는 鷄龍山을 파고들어 直接 甲紗로 가는 風致 좋은 山길도 있고 新元史는 勿論 尹拯(尹拯) 古宅(古宅)을 만날 수 있는 論山 가는 갈림길度 있었다. 그런데 그사이 청壁에서 곧장 江을 타넘는 큰 다리가 생기면서 이 길은 車들의 行跡마저 뜸한 옛길이 됐다. 터널이 뚫려 힘겹게 고갯마루를 타넘을 일도 없게 됐다. 高速道와 다를 바 없는 새 길 德에 大戰-公州 來往이 옆집 나들이처럼 쉬워졌지만 景致 보며 길 가는 재미는 훨씬 덜해졌다.

    東鶴寺에서 公主까지

    그러나 東鶴寺에서 公主로 가는 길목에는 如前히 들를 만한 데가 여럿 있다. 于先 公州와 儒城, 東鶴寺로 나눠지는 박정자 三거리에서 2km쯤 公州 쪽으로 가다 보면 왼便에 相臣, 하신 마을로 들어가는 샛길이 있다. 上申까지만 갔다 와도 좋다. 선주형(船舟型)의 特異한 風水地理를 지닌 이 山속 마을은 그 自體로 아름답다. 그리고 마을 건너便에는 陶瓷器 藝術을 하는 作家들이 集團으로 모여 사는 陶藝村이 있어서 한가롭게 그들의 作業過程을 구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直接 손에 흙을 묻히는 體驗도 할 수 있다.

    이 샛길 있는 데서 조금 더 進行하면, 오른便 野山 바위壁에 뻥 뚫려 있는 洞窟 하나를 볼 수 있다. 공癌(孔巖)이라 부르는 이 바위窟은 朝鮮 宣祖 때의 學者 書記(徐起)의 出生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書記는 土亭 이지함과 함께 花潭 徐敬德 門下에서 工夫했다. 道路 왼便의 공癌마을이 서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데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이곳 富者집의 종이었다. 處女 時節, 그女가 논에 새를 쫓으러 갔다가 소나기를 만났다. 비를 避하려고 이 洞窟에 들어갔는데 때마침 길 가던 소금장수 사내 하나도 이곳으로 뛰어들어왔다. 다음은 뻔하잖은가.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書記였으니 서기는 平生 自身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賤出(賤出)이지만 그는 學德이 높아 많은 著書와 弟子들을 남겼다. 隣近에는 그를 配享하는 祠堂도 있다.

    터널을 通過하면 곧 청壁에 닿는다. 이쯤에서 4車線의 새 道路를 벗어나면 예전 道路를 만날 수 있다. 療飢라도 하고 싶다면 이 길로 나가 청壁 어귀의 食堂街를 찾으면 좋다. 참게湯이며 새우湯, 長魚구이 等 민물고기로 만든 맛깔스러운 飮食들을 맛볼 수 있다.

    大橋를 타넘어 北쪽 江岸 道路를 달리면 머지않아 ‘石壯里博物館’ 進入路가 나타나는데 無條件 車를 빼서 들러볼 만하다. 몇 年 前까지만 해도 ‘舊石器 遺物 展示館’이란 看板을 붙이고 있었던 點에서도 보듯이 이곳은 漢江 以南에서 最初로 舊石器 遺物이 出土된 뜻 깊은 곳이다. 잠깐의 工夫도 工夫지만 참하게 지어놓은 展示館 잔디밭에서 마주할 수 있는 江과 山의 멋진 景致를 놓칠 수 없다. 그 아득한 過去의 사람들이 왜 이쯤에다 住居地를 차렸는지도 절로 알 만하다. 名唱 박동진 先生이 生前부터 마련한 ‘박동진 판소리 專修館’도 여기서 가깝다.

    公山城(公山城) 소쩍새 소리

    江 건너便 나지막한 山에 城壁이 걸려 있고 亭子가 있는 風光이 눈에 잡히면 公州에 다 온 셈이다. 번드레한 建物이 줄지어 있는 江 이便 新市街地는 봐서 뭣하겠는가. 公主大橋만 넘으면 以內 韻致 있는 公山城을 만나고 武寧王陵이 있는 둔덕에 오를 수 있는데 말이다.

    술의 그늘

    돈의 그늘

    女子의 그늘에서도 끝내

    쉬지 못하는 사내들의 넋들아

    깊은 잠 이루지 못하는 菽麥들아

    여기 와 暫時 쉬었다 갈지어다

    희뿌연 밤안개의 雜木林 속

    여리기에 더욱 또렷한

    소쩍새 소리의 그늘에 와 暫時

    지친 눈 지친 다리 쉬었다 갈지어다.

    - 나태주 時 ‘公主 금학동’ 部分

    土박이 公州 詩人은 벌써 ‘쉬지 못하는 사내들’이며 ‘잠 못 이루는 菽麥’들을 招待하고 있다. 都市라고 해도 公主 일락산 기슭에서는 밤마다 소쩍새가 운다면서 하는 誘惑이다. 금학동은 勿論 詩人이 사는 洞里이기도 하지만 傳統 깊은 公主敎育隊와 公州女高 等이 있는, 아직도 公主다운 맛을 그대로 지닌 마을이다. 나도 어느 땐가 只今은 作故한 新定式 詩人을 좇아가 公主의 또 다른 詩人 조재훈 先生과 함께 이 洞里의 所聞난 동동酒를 마신 일이 있는데 글쎄, 그때도 公主敎育隊 뒷山에서는 소쩍새가 울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便뿐인가. 無數한 頌德碑가 늘어선 상수리나무 숲길로 해서 公山城에 오르면 江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보다 더 淸凉한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 酸性 亭子에 앉아 城壁을 내려다보고 城壁 아래의 江물에 눈을 빠뜨리고 있노라면 문득 그동안 내가 끌고 다녔던 지친 걸음과 定處 없던 넋마저 안쓰럽게 떠올릴 수 있다. 하여 雄鎭에 와서 이 고요 속에 한때나마 쉴 수 있음이 無限 고맙고 복스러운 것이다.

    公山城은 百濟의 熊津 千도 때부터 首都의 本據地였다. 高句麗 長壽王의 攻擊으로 漢城이 陷落되고 蓋鹵王이 戰死하자 王座를 물려받은 文周王은 눈물을 머금고 遷都를 決心하지 않을 수 없었다(475년). 100年도 못 되지만 熊進 백제의 歷史는 그렇게 多急한 狀況에서 始作됐다. 當時 백제의 王宮도 이 城안에 있었던 것으로 推定된다. 백제 滅亡 때에는 義慈王이 太子와 함께 이곳에 避身했다가 降伏했다.

    무덤 속의 時間

    公山城을 나와 큰길을 건너면 곧 宋山里 古墳群이 있는 언덕바지를 오를 수 있다. 武寧王陵이 發見되면서 世上의 耳目을 모았던 이곳 古墳群에 서면 東쪽으로 公山城이 보이고 西쪽으로는 錦江이 아늑히 감싸 돈다. 東南쪽으로는 鷄龍山이 前面에 펼쳐 있어 風光 또한 뛰어나다. 便宜上 古墳은 제1호, 第2號, 第3號 式으로 呼稱하는데 그中 日本人 學者에 依해 發掘된 第6號墳은 武寧王陵이 出現하기 以前까지 이곳을 代表하는 백제 王陵이었다. 唯一한 甓돌무덤 인데다 四神圖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6號墳은 盜掘되고 發掘되는 過程에서 天障이 많이 毁損되어 비만 오면 물이 샜다. 이를 막기 위해 排水路 工事를 하던 中이었다. 한 人夫의 삽 끝에 뜻밖의 甓돌 모서리가 부딪혔다. 工事 責任者가 壁을 따라 들어가보니 아치형 墓室 入口가 나타났다. 그는 卽時 工事를 中止하고 이를 文化財管理局에 報告했다. 1971年 7月 8日, 純潔한 武寧王陵은 그렇게 世上에 모습을 드러냈다.

    當時 新聞의 컬러 寫眞으로 對했던 墓室 內部의 모습은 只今도 내 腦裏에 남아 있다. 華麗한 金冠이며 珠玉 等은 내게 別 關心거리가 못되었다. 歷史學界의 劃期的 發見이라고 하는 誌石조차 그런 것이거니 여겼다. 놀라운 것, 그것은 時間의 痕跡이었다. 臺石(臺石)에 놓였던 王의 棺이 무덤 속에 흐르는 時間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데 이어 王妃의 棺짝이 무너진다…. 떨어져 있던 두 官의 灌木(棺木)이 그렇게 뒤엉켜 있었던 것. 무덤 속에 흐른 1400年의 時間이 그 한 張의 寫眞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캄캄한 무덤 속에서 어느 날, 저 홀로 무너지는 棺짝이 내는 소리를 想像해보라.

    巫鈴대왕릉 模型棺까지 둘러본 뒤, 다시 큰길을 따라 國立공주박물관을 찾아가는 때는 車들의 來往이 번잡스러운데 햇살마저 따갑다. 서울의 東大門거리를 걷는 느낌마저 없지 않다. 어느새 公主도 이렇게 都市가 다 돼버렸다.

    조붓한 골목길이 있었는데, 여기

    코납짝집들이 있었는데

    깨끗한 追憶이 살았었는데, 여기

    사람의 숨결이 들렸었는데.

    - 나태주 時 ‘公主’ 專門

    이제 그렇지 못하다는 詩人의 恨歎도 그래서 實感이 난다.

    우금치의 東學軍 慰靈塔

    公州에서 扶餘로 넘어가는 첫 고개가 우금치(牛金峙)다. 고개 頂上에 높다란 東學革命軍의 慰靈塔이 서 있어 行人들의 발목을 잡는다.

    1894年 全琫準이 이끄는 第2次 農民 蜂起軍이 公主 入城을 위해 이 고개에서 日本軍이며 官軍과 熾烈한 戰鬪를 벌이다 悽絶한 敗北를 當했는데 그때 犧牲당한 農民軍의 魂을 달래는 塔이다. 그해 10月 農民軍은 論山을 出發해 이인, 哮咆, 能治 等地에서 日本軍과 戰鬪를 벌였지만 웅치 占領에 失敗하고 敬天으로 一旦 물러난다. 11月 9日 農民軍은 우금치에 對한 總攻勢를 펼쳤다. 그러나 莫强한 火力을 지닌 日本軍을 突破할 수는 없었다. 時間이 지남에 따라 戰勢는 日本軍에게 유리하게 기울었다. 戰況이 不利해지자 組織이 제대로 안 된 農民軍은 霎時에 무너졌다. 全琫準도 少數의 麾下만 이끌고 官軍의 追擊을 避해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淳昌 땅에서 옛 部下의 密告로 逮捕되었다. 東學軍의 公州 戰鬪는 곧 最後의 抗戰人 同時에 綠豆將軍 全琫準의 最後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최학

    1950年 慶北 慶山 出生

    고려대 國文科 卒, 同 大學 敎育大學院 碩士

    1970年 경향신문 新春文藝 小說 當選

    現 고려대文人會 會長

    創作集 ‘暫時 머무는 땅’ ‘食口들의 歲月’ 等

    長篇小說 ‘西北風’‘안개울음’ ‘彌勒을 기다리며’‘화담명월’등


    이 작은 痛哭 어디에다 뿌리랴

    어디에다 뿌리랴

    골짜기마다 불어난 물이

    저 두고 온 三南을 적신다면

    부드럽게 적신다면

    아! 그런 신새벽이 온다면,

    -조재훈 時 ‘鷄龍山을 넘으며’ 部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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