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民主)공화당
이 약(藥) 50%의 득표율(得票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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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개헌선(改憲線)을 넘는 129석(席)을 얻었고, 신민당은 당초(當初) 예상(豫想)보다 저조(低調)한 약(約) 33%의 득표율(得票率)로 45석(席)에 그쳤다. 그래도 대도시(大都市)에선 승리(勝利)를 챙겼고(서울 13석(席) / 부산(釜山) 5석(席)) 민주(民主)공화당 득표율(得票率)이 저번(這番)보다 많이 올라가 6대(代) 총선(總選)과 달리 전국구(全國區) 의석(議席)만큼은 그나마 공평(公平)하게 분배(分配)된게 신민당(新民黨) 입장(立場)에선 위안(慰安)이라면 위안점(點). 사실(事實) 기타(其他) 군소(群小) 정당(政黨)들이 표(票)를 갉아먹은 여파(餘波)도 꽤 컸다.
해당(該當) 선거(選擧)는 이후(以後) 전개(展開)로도 주목(注目)받았는데, 왜냐하면
6.8 부정선거(不正選擧)
라는 닉네임이 붙을만큼 선거(選擧)가 끝난 뒤
부정선거(不正選擧)
논란(論難)이 거세게 일었고 실제(實際) 시위(示威)와 당선(當選) 맥락(脈絡)의 변화(變化)도 일어났기 때문. 농촌(農村) 지역(地域)에서 속칭(俗稱)
막걸리
와
고무신
선거(選擧)라고 불리는 금품(金品), 물품(物品) 살포행위(撒布行爲) 같은 선거법(選擧法) 위반(違反) 행위(行爲)가 대형(大型) 스케일로 저질러져서 여당(與黨)이 농촌(農村) 지역구(地域區)를 싹쓸이했는데, 이에 신민당이 전면(全面) 무효(無效)를 외치며 재선거(再選擧)를 요구(要求)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권당(執權黨)인 민주(民主)공화당의 행위(行爲)에 미치지 못했을 뿐 신민당도 이러한 막걸리, 고무신 살포(撒布)를 행(行)하는 흑역사(黑歷史)를 찍기도 했다고 한다.(...)
쟤도 하는데 별(別) 수 없잖아?
하여튼(何如튼) 정황증거(情況證據)가 너무 명확(明確)하다보니, 분노(憤怒)한 대학가(大學街)에서 휴학(休學) 열풍(烈風)까지 일 정도(程度)가 되자 정부측(政府側)도 여론(輿論)의 압력(壓力)에 부딪혀 부랴부랴 1명(名)의 당선자(當選者)를 정정(訂正)하고 공화당(共和黨)은 꼬리자르기식(式)으로 일단(一旦) 7명(名)을 제명(除名) 조치(措置)했다. 이에 야당(野黨) 낙선자(落選者)들은 소송(訴訟)을 냈으나 재보선(再補選)이 대대적(大大的)으로 벌어져서 정부(政府)의 권위(權威)가 추락(墜落)하고 공화당(共和黨) 의석(議席)이 개헌선(改憲線) 아래로 떨어지는 건 싫어했던
[2]
당시(當時) 행정부(行政府)가 사법부(司法府)에 압력(壓力)을 넣은 탓에 대부분(大部分) 패소(敗訴)하고 만다.
[3]
한편(한便), 공화당(共和黨) 탈당자(脫黨者)들 중(中) 일부(一部)는 의원직(議員職)도 내려놓은 후(後) 정계(政界) 은퇴(隱退)를 하기도 했지만
[4]
나머지는 '10·5구락부(俱樂部)(클럽)'이란
어용(御用)
단체(團體)를 구성(構成)했다가,
3선(選) 개헌(改憲)
시즌에 은근슬쩍(慇懃슬쩍) 친정(親庭)인 민주(民主)공화당으로 복당(復黨)한다.
경향신문(京鄕新聞)
은
6월(月) 12일(日) 기사(記事)
에서 공화당(共和黨)이 압승(壓勝)하고 신민당이 참패(慘敗)한 것, 불과(不過) 얼마 전(前) 대선(大選)에서 나타난 지역별(地域別) 특정(特定) 정당(政黨) 선호(選好)가 그대로 재연(再演)되는 대신(代身) 전국(全國)에서 공화당이 이긴 것, 지난 대선(大選) 당시(當時)
윤보선
이 이긴 호남(湖南) 지역(地域)에서
호남(湖南) 푸대접론(푸待接論)
에도 불구(不拘)하고 민주(民主)공화당이 이긴 것이나 반대(反對)로 박정희(朴正熙)가 이겼던 부산(釜山)에서 신민당이 압승(壓勝)한 것 등(等)은 완전히(完全히) 일반(一般)의 예상(豫想)을 뒤엎은 것이며,
이승만(李承晩) 정권(政權)
시절(時節)의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現象)이 재현(再現)된 것, 군소(群小) 정당(政黨)들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전진한
후보(候補)나
자유당(自由黨)
장택상
후보(候補) 등(等) 원로급(元老級) 정치인(政治人)들마저 낙선(落選)하는 등(等) 전혀(全혀) 힘을 쓰지 못한 것, 공개(公開) 투표(投票), 대리(代理) 투표(投票),
매표(賣票)
, 투표장(投票場) 폭력(暴力) 사건(事件), 개표(開票) 조작(造作) 등(等)으로 수많은 부정(不正) 선거(選擧) 논란(論難)이 일어난 것 등(等)이 흥미로운(?) 점(點)이라고 평(評)했다.
[5]
전국적(全國的)으로 서울을 제외(除外)하면 공화당(共和黨)이 지역구(地域區) 대부분(大部分)을 싹쓸이한 가운데, 부산(釜山) 3선거구(選擧區)(
서구(西區)
)의
김영삼(金永三)
과 전남(全南) 3선거구(選擧區)(
목포시(木浦市)
)의
김대중(金大中)
의 당선(當選)이 두드러진다. 박정희(朴正熙)는 불과(不過) 재선(再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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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김대중 의원(議員)의 당선(當選)을 저지(沮止)하려 진력(盡力)했는데, 심지어(甚至於)
국무회의(國務會議)
를 사상(史上) 초유(初有)로 목포(木浦)에서 열 정도(程度)로 공화당 후보(候補)를 밀어주었다. 그러나 그 결과(結果)는
엄창록
이란 걸출(傑出)한 책사(冊肆)를 낀 김대중의 생환(生還)... 영화(映畫)
킹메이커
에서도 충실(充實)하게 이 대목을 다루고 있다.
사족(蛇足)으로 이때 경상남도(慶尙南道)는 신민당이 1석(席)만 차지했는데, 그곳이 어딘가 하면 바로
성낙현
이 당선(當選) 된
창녕군(昌寧郡)
이었다. 오늘날 창녕(昌寧)이
합천군(陜川郡)
,
산청군(山淸郡)
등(等)과 같이 보수정당(保守政黨)의 텃밭 지역(地域)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꽤나 격세지감(隔世之感)인데, 아니나 다를까, 성낙현은 3선(選) 개헌(改憲)을 앞두고 개헌(改憲)에 찬동(贊同)하는 변절(變節)을 해버린다.(...) 실제(實際) 성낙현은 신민당의 셀프 해산(解散)으로 의원직(議員職)을 잃은 후(後) 민주(民主)공화당에 입당(入黨)했으며, 창녕군도(昌寧郡度) 이후(以後) 보수(保守) 텃밭으로 오늘에 이르게 된다.
1967년(年)은 선거(選擧)로 인한 정국혼란(政局混亂)을 틈탄 북한(北韓) 무장간첩(武裝間諜)이 선거(選擧) 전후할 것 없이 전국적(全國的)으로 출몰(出沒)하여 국지적(局地的)인 총격전(銃擊戰)이 많이 벌어져서 군인(軍人), 경찰(警察), 민간인(民間人) 사상자(死傷者)들이 많이 발생(發生)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