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出帆) 배경(背景)에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大統領)의 탄핵(彈劾)이 가장 큰 몫을 했는데,
민주당계(系) 정당(正當)
인(人)
열린우리당
이 단독(單獨)으로 과반(過半)(152석(席)) 의석(議席)을 차지하여 1960년(年) 이후(以後)
44년(年)
만에, 그리고 1987년(年) 헌정(憲政) 이후(以後) 최초(最初)로 원내(院內) 1당(黨)(그것도 과반(過半))인 상태(狀態)에서 개막(開幕)하여 국민(國民)들의 큰 기대(期待)를 모았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내(內)의 계파(系派) 갈등(葛藤)
[3]
과, 리더십 부족(不足)
[4]
등(等)으로 국민(國民)들의 열망(熱望)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한나라당(한나라黨)
이 이를 노려 온갖 반대(反對)로 일관(一貫)했다.
[5]
결국(結局) 열린우리당은 보궐선거(補闕選擧)와 지방선거(地方選擧)에서 계속(繼續) 패배(敗北)하면서 2005년(年) 10월(月) 26일부(日附)로 과반(過半)을 상실(喪失)했고, 그 이후(以後)부터는 사실상(事實上) 한나라당이 여당(與黨)이었다고 봐도 무관(無關)한 신세(身世)가 되었다. 열린우리당은 끝내 계파(系派) 갈등(葛藤)을 이기지 못한 탈당(脫黨) 러시로 한때 2당(黨)으로까지 떨어졌다가 이런저런 합당(合黨)을 통해
대통합민주신당(大統合民主新黨)
→
통합(統合)민주당
으로 다시 1당(黨)을 차지하(下)...기(基)는 했으나, 결국(結局)
18대(代) 총선(總選)
에서 한나라당에게 완패(完敗)했다.
지금(只今)까지는 3개(個) 이상(以上)의 정당(政黨)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명백(明白)한 다당제(多黨制)였지만, 이번(이番)에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실질적(實質的)인 양당제(兩黨制)를 구축(構築)하면서 이를 계기(契機)로 한국(韓國) 정치(政治)가 양당제(兩黨制)에 더욱 더 가까워졌다. 이는 2015년(年)까지 약(約) 11년간(年間) 존속(存續)했으나, 결국(結局) 중도(中道) 및 보수진영(保守陣營)의 분열(分裂)로 다시 다당제(多黨制)로 돌아간 상태(狀態)였다가 2020년(年) 21대(代) 총선(總選)으로 양당제(兩黨制)로 회귀(回歸)한다.
한편(한便)으로는
민주노동당
이 선거(選擧)에서 10석(席)을 차지하면서, 약(藥) 14여년(餘年)만에 진보진영(進步陣營)이 입성(入城)한 국회(國會)이기도 하다. 비록 온갖 파행(跛行)과 누가 진짜(眞짜) 여당(與黨)일지도 모르는 혼란(混亂)의 국회(國會)라는 오명(汚名)을 샀지만, 그래도 한편(한便)으로는 새로운 시대(時代)와 정치개혁(政治改革)을 예고(豫告)하기도 했다는 점(點)에서 큰 의미(意味)가 있다.
또한
16대(代) 국회(國會)
때까지만 해도 한나라당(한나라黨),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 자민련 제법 남아있던 민정계(系), 공화계(系), 민주계(系)의 원로(元老) 정치인(政治人)들이 대거(大擧) 은퇴(隱退), 낙선(落選), 공천(公薦) 탈락(脫落)을 함으로써 정치변화(政治變化)의 시대(時代)가 왔다.
이때 당시(當時) 남아있던 민정계(系)와 공화계(系)는
박성범(朴成範)
,
김형오(金炯旿)
,
김병호(金秉浩)
,
정형근
,
허태열
,
강재섭
,
안택수
,
박종근
,
이해봉
,
이경재(李敬載)
,
정몽준(鄭夢準)
,
고흥길
,
전재희
,
이재창(李在昌)
,
최연희
,
이상득
,
이상배
,
김태환(金泰煥)
,
김광원(金光元)
,
김용갑(金容甲)
,
김기춘(金淇春)
,
박희태
,
이강두
,
김학원
,
황진하(黃震夏)
,
권경석
,
김정부
등(等) 26명(名)에 불과(不過)했다. 총(總) 299석(席) 중(中)에 26명(名)만 과거(過去) 민정계(系)와 공화계(系)에 속(屬)했던 정치인(政治人)들이고 나머지는 신진정치인(新進政治人)으로 많이 채워졌다는 것이
16대(代) 국회(國會)
와의 큰 차이점(差異點)이다.
민주계(系) 역시(亦是) 대부분(大部分)의 노령(老齡) 정치인(政治人)들이 은퇴(隱退)했는데
이인제(李仁濟)
,
김무성(金武星)
,
이방호
등(等)을 빼면 거의 많이 없어졌다.
한편(한便) 제(第)17대(代) 국회(國會) 때 위 짤방(짤防)이 나오기도 했다.
이계진
당시(當時) 의원(議員)이 그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