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選擧) 결과(結果),
여소야대(與小野大)
로 민정당은 지역구(地域區) 87석(席)(득표(得票) 34%)을 확보(確保)하는데 그쳐
과반(過半) 확보(確保)에 실패(失敗)했다
. 민주당과 평민당의 단일화(單一化) 실패(失敗)로 선전(善戰)할 것이라 여겨졌던
[12]
수도권(首都圈)에서도 민정당은 총(總) 77석(席) 가운데 32석(席)에 그쳤는데, 여당(與黨) 지지세(支持勢)가 상당(相當)한 편(便)인 인천(仁川) 석권(席卷)에도 불구(不拘)하고 서울에서는 10석(席)으로 공동(共同) 2당(當)이라는 처참(悽慘)한 성적(成跡)을 보였으며 공화당으로 득표율(得票率)이 분산(分散)되는 케이스도 있어 득표율(得票率)이 12대(代) 총선(總選)보다도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TK의 절대적(絶對的) 지지(支持)와 호남(湖南)을 제외(除外)한 각지(各地)에서의 고른 의석(議席) 획득(獲得)으로 지역구(地域區) 1당(黨)을 차지했고, 득표율(得票率) 비례(比例)가 아닌
지역구(地域區) 1당(黨)이 전국구(全國區)(비례대표(比例代表)) 의석(議席) 절반(折半)을 배정(配定)
받는다는
희한(稀罕)한
당시(當時) 선거규정(選擧規定)으로 전국구(全國區) 75석(席) 중(中) 38석(席)을 챙기면서 총(總) 125석(席)을 획득(獲得)한다.
[13]
한편(한便), 통일(統一)민주당은
부산(釜山)
지역(地域)을 석권(席卷)하고
[14]
, 그 외(外) 호남(湖南)을 제외(除外)한 전국(全國)에서 고른 득표(得票)를 얻어 득표율(得票率)에서 2위(位)(23.8%)를 기록(記錄)했지만 소선거구제(小選擧區制)로 인(因)해 2위(位)로 아쉽게 낙선(落選)되는 지역구(地域區)가 많아서 원내(院內) 3당(黨)에 그쳤다. 특히(特히) 경남(慶南)의 일부(一部) 서부(西部) 농촌지역(農村地域)과 당시(當時) 경남(慶南) 소속(所屬)이던
울산시(蔚山市)
에서 1당(黨)이 되지 못한게 뼈아팠다.
[15]
다만 서울 강남(江南) 지역(地域)에서의 선전(宣傳)은 눈에 띄었는데, 총(總) 의석(議席) 8석(席) 중(中) 무려(無慮) 4석(席)을 차지했다. 특히(特히)
서초구(瑞草區)
의 경우(境遇) 야권(野圈) 성향(性向) 무소속(無所屬)
박찬종(朴燦鍾)
의원(議員)과 함께 여당(與黨) 후보(候補)를 모두 몰아냈다.
반대(反對)로 평화(平和)민주당은 득표율(得票率) 3위(位)(19.3%)에 충청도(忠淸道)(충남(忠南), 충북(忠北))와 인천(仁川), 제주(濟州), 동부(東部) 지역(地域)(대구(大邱), 경북(慶北), 부산(釜山), 경남(慶南), 강원(講院))에서는 듣보잡(듣보雜) 신세(身世)를 면치 못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호남(湖南) 석권(席卷)과
[16]
호남(湖南) 원적(的) 유권자(有權者)가 많은
서울
에서의 선전(宣傳)(1당(黨), 17석(席))만으로 원내(院內) 2당(黨)을 차지하며 이번(이番) 선거(選擧)의 최대(最大) 승리자(勝利者)가 되었다. 서울, 호남(湖南)을 제외(除外)하고는 경기(競技)
성남시(城南市)
을(현재의
성남시 중원구
)에서만 승리(勝利)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단숨에(單숨에) 원내(院內) 2당(黨)이 된 점(點)은 당시(當時) 견고(堅固)했던 지역주의(地域主義)의 한계(限界)를 보여주기도 한다.
신민주공화당은 충청권(忠淸圈)(충남(忠南) 13석(席), 충북(忠北) 2석(席))과 경기도(京畿道) 지역(地域)(2당(黨), 6석(席))
[17]
에서 선전(宣傳)해 총(總) 35석(席)을 확보(確保)했지만, 충북(忠北) 의석(議席)을 민정당에게 대거(大擧) 내주며 충남(忠南) 맹주(盟主)로만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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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 충남(忠南) 맹주(盟主)라기도 뭐한 게 총(總) 18석(席)(대전(大田) 포함(包含)) 중(中) 5석(席)을 자당(自黨)이 아닌 후보(候補)에게 뺏기며 확실히(確實히) 다른 지역주의(地域主義) 정당(政黨)에 비해선 충성도(忠誠度)가 낮다는걸 보여줬다.
제(第)3야당(野黨)을 표방(標榜)한
한겨레민주당
은 군소정당(群小政黨)의 한계(限界)를 넘지 못하고 1석(席) 확보(確保)에 그쳤다. 그나마 당선(當選)된 한 명(名)은 전남(全南) 신안(新安) 지역구(地域區)의
박형오
후보(候補)인데, 같은 지역구(地域區)에 후보등록(候補登錄)한 평화(平和)민주당
한화갑
의 후보등록(候補登錄)이 무효(無效) 처리(處理)되면서
[19]
후보(候補)가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김복수
후보(候補)와 박형오 둘만 남게 되자 평화(平和)민주당이 박형오를 전면적(全面的)으로 밀어준 탓이라 자력당선(自力當選)이라 하기 힘들다. 그렇게 당선(當選)된 박형오마저 선거(選擧) 직후(直後) 탈당(脫黨)하여 평화(平和)민주당에 입당(入黨)하면서 한겨레민주당은 소멸(消滅)했다.
민주(民主)한국당
(평택시·송탄시의
유치송
),
신한(宸翰)민주당
(
전주시(全州市) 을(乙)
의
이철승
),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
달서구(達西區)
의
이만섭
) 등(等)은 아예 당선자(當選者)조차 내지 못하고 해체(解體) 수순(手順)을 밟게 된다.
하지만 결과적(結果的)으로 여당(與黨)인 민정당은 과반(過半) 의석(議席) 확보(確保)에 실패(失敗)했고,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형성(形成)
되어 이에 따라 노태우 전(前) 대통령(大統領)은 국정(國政) 운영(運營)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또 이런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政局)은 민주화(民主化) 열풍(烈風)과 맞물려 광주특위(光州特委) 구성(構成) 등(等)으로 5공(共) 비리(非理)가 대대적(大大的)으로 까발려지고 사회(社會) 각지(各地)에서의 각종(各種) 부조리(不條理)한 문제점(問題點) 제기(提起)가 활발히(活潑히) 이루어지게 되는 계기(契機)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政局)은 1989년(年) 공안(公安) 정국(政局)과 제(第)2당(黨)인 평화(平和)민주당의 여당(與黨) 협조(協助)모드로 상당히(相當히) 기세(氣勢)가 수그러들게 되었고, 특히(特히) 1990년(年)
3당(黨) 합당(合黨)
으로 인해 압도적(壓倒的) 여대야소(與大野小)로 아예 판세(판勢)가 뒤집어져 버린다.
지역주의(地域主義)
는 더욱 극대화되었다. 특히(特히) 충청권(忠淸圈) 유권자(有權者)들의 신민주(新民主)공화당 지지(支持)(15.8% 득표(得票))가 대선(大選)에 비해 두드러진 반면(反面), 민주화(民主化)의 열망(熱望)으로 양김(兩金)에게 갔던 표(票)는 많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