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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第)13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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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施行) 불가(不可)**
* 1960년(年) 6월(月) 15일(日) 제(第)3차(次) 개헌(改憲)으로 부통령직(副統領職) 폐지(廢止)
** 2014년(年) 7월(月) 24일(日) 헌법재판소(憲法裁判所) 가 국민투표법(國民投票法) 제(第)14조(條) 제(第)1항(項) 내용(內容) 중(中) 일부(一部)에 대(對)해 헌법(憲法) 불합치(不合致) 결정(決定) 을 내렸으나 이후(以後) 법률(法律) 개정(改正)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年) 1월(月) 1일자(日子)로 효력(效力)을 상실(喪失)하여 시행(施行) 불가능(不可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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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國會議長) · 국회부의장(國會副議長)
대한민국(大韓民國) 제(第)13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당시(當時) 대한(大韓)뉴스 보도(報道)
투표율(投票率)
선거(選擧) 결과(結果)
13대 총선 결과
정당(正當)
지역구(地域區)
전국구(全國區)
총합(總合)
비율(比率)
87석(席)
38석(席)
125석(席)
41.80%
54석(席)
16석(席)
70석(席)
23.41%
46석(席)
13석(席)
59석(席)
19.73%
27석(席)
8석(席)
35석(席)
11.70%
1석(席)
0석(席)
1석(席)
0.33%
9석(席)
-
9석(席)
3.01%

1 . 개요(槪要) 2 . 배경(背景) 3 . 과정(過程) 4 . 결과(結果) 5 . 평가(評價) 6 . 여담(餘談)
6.1 . 초접전(超接戰) 지역구(地域區) 6.2 . 선거(選擧)를 뒤엎은 리허설 해프닝

1. 개요(槪要) [편집(編輯)]

1988년(年) 4월(月) 26일(日) 에 실시(實施)한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투표율(投票率)은 75.8%를 기록(記錄)했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제(第)6공화국(共和國) 수립(樹立) 이후(以後) 치른, 즉(卽) 1987년(年) 대통령(大統領) 직선제(直選制) 이후(以後) [1] 최초(最初)로 치러진 총선(總選)이다. 국회의원(國會議員)의 임기(任期)가 4년(年)인 만큼 원래(元來)대로라면 1989년(年) 에 치러졌어야 할 선거(選擧)였지만 1987년(年) 개정(改正)된 헌법(憲法) 에 따라 조기(早期) 실시(實施)했다. 이후(以後) 9차(次) 개헌(改憲) 의 영향(影響)으로 이후(以後) 치러진 국회의원(國會議員) 총선(總選)은 매번(每番) 하계(夏季) 올림픽 이 치러지는 해에 치르게 됐다. [2] [3]

이 총선(總選)부터 기호(記號)를 추첨제(抽籤制)로 정(定)하지 않고 원내(院內) 다수당(多數黨) 순서(順序)대로 상위(上位) 순번(順番)의 기호(記號)를 부여(附與)받도록 했다.

2. 배경(背景) [편집(編輯)]

의원(議員) 정수(定數)는 299명(名)으로 12대(代) 총선(總選) 때보다 23명(名)이 늘어났다. 지역구(地域區) 의원수(議員數)는 40명(名)이 늘어났고 반대(反對)로 전국구(全國區) 의원수(議員數)는 17명(名)이 줄어들었다. 선거제도도(選擧制度度) 중선거구제(中選擧區制) 에서 소선거구제(小選擧區制) 로 전환(轉換)되었다. 이 선거(選擧)에서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 평화(平和)민주당 ,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 신민주(新民主)공화당 , 한겨레민주당 , 민주(民主)한국당 , 신한(宸翰)민주당 ,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 민중(民衆)의당 , 우리정의당(正義黨) , 제(第)3세대당(世帶當) 등(等)이 참여(參與)하였다.

다수당(多數黨)에 의도적(意圖的)으로 유리하게 만든 기존(旣存)의 선거법(選擧法)은 다소(多少) 완화(緩和)되어 지역구(地域區) 의석수(議席數) 1위(位) 정당(政黨)이 전국구(全國區)의 1/2를 가져갔다. 이전(以前)까지 2/3에서 1/2로 감소(減少)된 것이다. 참고(參考)로 다음 총선(總選) 부터 이러한 규정(規定)은 삭제(削除)된다.

3. 과정(過程) [편집(編輯)]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은 제(第)13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에서 양김(兩金) 의 분열(分裂)과 대한항공 858편(篇) 폭파(爆破) 사건(事件) 으로 정권(政權) 재창출(再創出)에 성공(成功)했지만 득표율(得票率)은 36.64%에 그쳤다. 게다가 대선(大選)을 통해 선호(選好)하는 당(黨)에 대(對)한 지지(支持)가 뚜렷한 지역구도(地域構圖)가 전면적(全面的)으로 드러나게 되고, 조금만 뒤틀리면 다시 독재정치(獨裁政治)를 펼칠 수 있다는 불안감(不安感) 때문에 노태우 정권(政權)은 지지기반(支持基盤)이 상당히(相當히) 불안정(不安定)했다. 비록 분열(分裂)로 인해 대선(大選)에서는 졌다지만, 통일(統一)민주당과 평화(平和)민주당, 한겨레민주당(民主黨)이 단일화(單一化)를 한다면 민주당계(系)가 총선(總選)에서는 압승(壓勝)을 거둘 수도 있겠다는 전망(展望)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야권(野圈)이 대선(大選)에 이어 총선(總選) 단일화(單一化)에도 실패(失敗)하며 [4] 결국(結局) 대부분(大部分)의 선거구(選擧區)에서 후보(候補)를 따로 내면서 분열(分裂)하자 이에 대(對)한 실망감(失望感)이 더더욱 커지고 노태우 대통령(大統領)도 5.18 민주화운동(民主化運動) 강제진압(强制鎭壓) 사과(沙果) 등(等) 상당히(相當히) 유화적(宥和的)인 정책(政策)을 펼침과 동시(同時)에 공천(公薦)에서 제(第)5공화국(共和國) 인사(人士) 상당수(相當數)를 배제(排除)하면서 [5] [6] 일부(一部) 민주세력(民主勢力)의 호감(好感)을 받아 이를 기반(基盤)으로 지지기반(支持基盤)을 넓혀갈 것으로 예상(豫想)되었다. 또한 선거제도(選擧制度)가 소선거구제(小選擧區制)로 바뀌던 것도 (당시(當時)로써는) 호재(好材)로 여겨졌다. [7]

하지만 총선(總選) 선거운동(選擧運動) 기간(期間) 도중(途中) 예전과 같은 관권(官權), 혼탁(混濁) 선거(選擧)가 [8] 펼쳐지면서 "이번(이番)에 민정당에게 몰아주면 다시 의원(議員) 내각제(內閣制) 개헌(改憲)을 통해 이전(移轉) 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불안감(不安感)이 커지게 되었고, 설상가상(雪上加霜) 전두환(全斗煥)의 동생 전경환 새마을운동(運動) 중앙본부(中央本部) 총재(總裁)로 재직(在職)하면서 저지른 비리(非理)가 잇달아 드러나면서 민정당에게 악재(惡材)로 작용(作用)하였고 민주당과 평민당, 공화당(共和黨) 지지층(支持層)이 결집(結集)하며 선거(選擧) 양상(樣相)이 복잡(複雜)해지기 시작(始作)한다. 선거(選擧) 전(前) 각(各) 당(黨)의 목표(目標) 의석수(議席數)는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과반수(過半數) 의석(議席)(150석(席) 이상(以上)) 확보(確保),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평화(平和)민주당은 제(第)1야당(野黨) 확보(確保), 신민주(新民主)공화당 및 기타(其他) 정당(政黨)은 원내교섭단체(院內交涉團體)(20석(席) 이상(以上)) 확보(確保)였다.

이 당시(當時) 노태우와 민정당은 직전(直前) 대선(大選)에서 대역전극(大逆轉劇)을 만든 것에 너무 도취(陶醉)해 현실감각(現實感覺)이 완전히(完全히) 마비(痲痹)되어 있었다. 안기부(安企部) 에서 자체(自體) 여론조사(輿論調査)를 돌려본 결과(結果) 민정당은 지역구(地域區) 85~92석(席)을 얻는 것에 불과(不過)하다 는 보고서(報告書)를 올리자 되려 민정당 지도부(指導部)가 사기(士氣)를 꺾는 말을 한다고 크게 질책(叱責)했다고 한다. 노태우는 뒤늦게야 민심(民心)이 심상(尋常)찮은 것을 알고 총선(總選) 3일(日) 전(前) 박철언 과 월계수회에 대책(對策)을 마련하란 지시(指示)를 내리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간 후(後)였다.

4. 결과(結果) [편집(編輯)]

13대 총선 결과 지도
제(第)13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지역(地域)
합계(合計)
서울
10
17
10
3
0
2
42
인천(仁川)
6
0
1
0
0
0
7
경기(京畿)
16
1
4
6
0
1
28
강원(江原)
8
0
3
1
0
2
14
충남(忠南)
2
0
2
13
0
1
18
충북(忠北)
7
0
0
2
0
0
9
광주(光州)
0
5
0
0
0
0
5
전남(全南)
0
17
0
0
1
0
18
전북(全北)
0
14
0
0
0
0
14
부산(釜山)
1
0
14
0
0
0
15
경남(慶南)
12
0
9
0
0
1
22
대구(大邱)
8
0
0
0
0
0
8
경북(慶北)
17
0
2
2
0
0
21
제주(濟州)
0
0
1
0
0
2
3
지역구(地域區)
87
54
46
27
1
9
224
전국구(全國區)
16
13
8
0
0
75
합계(合計)
125
70
59
35
1
9
299
전국구(全國區)
정당(正當)
득표수(得票數)
득표율(得票率)
당선인(當選人)
민주정의당 글자
6,670,494
34%
38
통일민주당 흰색 로고타입
4,680,175
23.8%
13
평화민주당 글자
3,783,279
19.3%
16
신민주공화당 글자
3,062,506
15.8%
8
한겨레민주당 글자
251,236
1.3%
0
신한민주당 흰색 로고타입
46,877
0.2%
0
민주한국당 흰색 로고타입
32,799
0.2%
0
한국국민당(1981년) 글자
65,032
0.3%
0
민중의당
65,650
0.3%
0
사회민주당 1985년 로고
3,267
0.02%
0
우리정의당 흰색 로고타입
25,433
0.1%
0
제3세대당
16,148
0.08%
0
한통당글자
3,736
0.02%
0
기독성민당글자
2,247
0.01%
0
933,161
4.8%
-
총합(總合)
19,642,040
100%
75

4.1. 지역구별(地域區別) 개표(開票) 결과(結果) [편집(編輯)]

4.2. 당선인(當選人) [편집(編輯)]

민주정의당 심볼 민주정의당 글자 제(第)13대(代) 총선(總選) 당선인(當選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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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민주글자 제(第)13대(代) 총선(總選) 당선인(當選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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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評價) [편집(編輯)]

무소속(無所屬) 당선자(當選者)들의 복당(復黨)이 가능(可能)한 이루어졌다고 가정(假定)했을 때의 의회(議會) 구도(構圖) [11]
민주당계(系) 133석(席)
1석(席)
70석(席)
62석(席)
35석(席)
131석(席)

선거(選擧) 결과(結果), 여소야대(與小野大) 로 민정당은 지역구(地域區) 87석(席)(득표(得票) 34%)을 확보(確保)하는데 그쳐 과반(過半) 확보(確保)에 실패(失敗)했다 . 민주당과 평민당의 단일화(單一化) 실패(失敗)로 선전(善戰)할 것이라 여겨졌던 [12] 수도권(首都圈)에서도 민정당은 총(總) 77석(席) 가운데 32석(席)에 그쳤는데, 여당(與黨) 지지세(支持勢)가 상당(相當)한 편(便)인 인천(仁川) 석권(席卷)에도 불구(不拘)하고 서울에서는 10석(席)으로 공동(共同) 2당(當)이라는 처참(悽慘)한 성적(成跡)을 보였으며 공화당으로 득표율(得票率)이 분산(分散)되는 케이스도 있어 득표율(得票率)이 12대(代) 총선(總選)보다도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TK의 절대적(絶對的) 지지(支持)와 호남(湖南)을 제외(除外)한 각지(各地)에서의 고른 의석(議席) 획득(獲得)으로 지역구(地域區) 1당(黨)을 차지했고, 득표율(得票率) 비례(比例)가 아닌 지역구(地域區) 1당(黨)이 전국구(全國區)(비례대표(比例代表)) 의석(議席) 절반(折半)을 배정(配定) 받는다는 희한(稀罕)한 당시(當時) 선거규정(選擧規定)으로 전국구(全國區) 75석(席) 중(中) 38석(席)을 챙기면서 총(總) 125석(席)을 획득(獲得)한다. [13]

한편(한便), 통일(統一)민주당은 부산(釜山) 지역(地域)을 석권(席卷)하고 [14] , 그 외(外) 호남(湖南)을 제외(除外)한 전국(全國)에서 고른 득표(得票)를 얻어 득표율(得票率)에서 2위(位)(23.8%)를 기록(記錄)했지만 소선거구제(小選擧區制)로 인(因)해 2위(位)로 아쉽게 낙선(落選)되는 지역구(地域區)가 많아서 원내(院內) 3당(黨)에 그쳤다. 특히(特히) 경남(慶南)의 일부(一部) 서부(西部) 농촌지역(農村地域)과 당시(當時) 경남(慶南) 소속(所屬)이던 울산시(蔚山市) 에서 1당(黨)이 되지 못한게 뼈아팠다. [15] 다만 서울 강남(江南) 지역(地域)에서의 선전(宣傳)은 눈에 띄었는데, 총(總) 의석(議席) 8석(席) 중(中) 무려(無慮) 4석(席)을 차지했다. 특히(特히) 서초구(瑞草區) 의 경우(境遇) 야권(野圈) 성향(性向) 무소속(無所屬) 박찬종(朴燦鍾) 의원(議員)과 함께 여당(與黨) 후보(候補)를 모두 몰아냈다.

반대(反對)로 평화(平和)민주당은 득표율(得票率) 3위(位)(19.3%)에 충청도(忠淸道)(충남(忠南), 충북(忠北))와 인천(仁川), 제주(濟州), 동부(東部) 지역(地域)(대구(大邱), 경북(慶北), 부산(釜山), 경남(慶南), 강원(講院))에서는 듣보잡(듣보雜) 신세(身世)를 면치 못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호남(湖南) 석권(席卷)과 [16] 호남(湖南) 원적(的) 유권자(有權者)가 많은 서울 에서의 선전(宣傳)(1당(黨), 17석(席))만으로 원내(院內) 2당(黨)을 차지하며 이번(이番) 선거(選擧)의 최대(最大) 승리자(勝利者)가 되었다. 서울, 호남(湖南)을 제외(除外)하고는 경기(競技) 성남시(城南市) 을(현재의 성남시 중원구 )에서만 승리(勝利)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단숨에(單숨에) 원내(院內) 2당(黨)이 된 점(點)은 당시(當時) 견고(堅固)했던 지역주의(地域主義)의 한계(限界)를 보여주기도 한다.

신민주공화당은 충청권(忠淸圈)(충남(忠南) 13석(席), 충북(忠北) 2석(席))과 경기도(京畿道) 지역(地域)(2당(黨), 6석(席)) [17] 에서 선전(宣傳)해 총(總) 35석(席)을 확보(確保)했지만, 충북(忠北) 의석(議席)을 민정당에게 대거(大擧) 내주며 충남(忠南) 맹주(盟主)로만 자리잡게 된다. [18] 사실(事實) 충남(忠南) 맹주(盟主)라기도 뭐한 게 총(總) 18석(席)(대전(大田) 포함(包含)) 중(中) 5석(席)을 자당(自黨)이 아닌 후보(候補)에게 뺏기며 확실히(確實히) 다른 지역주의(地域主義) 정당(政黨)에 비해선 충성도(忠誠度)가 낮다는걸 보여줬다.

제(第)3야당(野黨)을 표방(標榜)한 한겨레민주당 은 군소정당(群小政黨)의 한계(限界)를 넘지 못하고 1석(席) 확보(確保)에 그쳤다. 그나마 당선(當選)된 한 명(名)은 전남(全南) 신안(新安) 지역구(地域區)의 박형오 후보(候補)인데, 같은 지역구(地域區)에 후보등록(候補登錄)한 평화(平和)민주당 한화갑 의 후보등록(候補登錄)이 무효(無效) 처리(處理)되면서 [19] 후보(候補)가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김복수 후보(候補)와 박형오 둘만 남게 되자 평화(平和)민주당이 박형오를 전면적(全面的)으로 밀어준 탓이라 자력당선(自力當選)이라 하기 힘들다. 그렇게 당선(當選)된 박형오마저 선거(選擧) 직후(直後) 탈당(脫黨)하여 평화(平和)민주당에 입당(入黨)하면서 한겨레민주당은 소멸(消滅)했다.

민주(民主)한국당 (평택시·송탄시의 유치송 ), 신한(宸翰)민주당 ( 전주시(全州市) 을(乙) 이철승 ),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 달서구(達西區) 이만섭 ) 등(等)은 아예 당선자(當選者)조차 내지 못하고 해체(解體) 수순(手順)을 밟게 된다.

하지만 결과적(結果的)으로 여당(與黨)인 민정당은 과반(過半) 의석(議席) 확보(確保)에 실패(失敗)했고,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형성(形成) 되어 이에 따라 노태우 전(前) 대통령(大統領)은 국정(國政) 운영(運營)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또 이런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政局)은 민주화(民主化) 열풍(烈風)과 맞물려 광주특위(光州特委) 구성(構成) 등(等)으로 5공(共) 비리(非理)가 대대적(大大的)으로 까발려지고 사회(社會) 각지(各地)에서의 각종(各種) 부조리(不條理)한 문제점(問題點) 제기(提起)가 활발히(活潑히) 이루어지게 되는 계기(契機)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政局)은 1989년(年) 공안(公安) 정국(政局)과 제(第)2당(黨)인 평화(平和)민주당의 여당(與黨) 협조(協助)모드로 상당히(相當히) 기세(氣勢)가 수그러들게 되었고, 특히(特히) 1990년(年) 3당(黨) 합당(合黨) 으로 인해 압도적(壓倒的) 여대야소(與大野小)로 아예 판세(판勢)가 뒤집어져 버린다.

지역주의(地域主義) 는 더욱 극대화되었다. 특히(特히) 충청권(忠淸圈) 유권자(有權者)들의 신민주(新民主)공화당 지지(支持)(15.8% 득표(得票))가 대선(大選)에 비해 두드러진 반면(反面), 민주화(民主化)의 열망(熱望)으로 양김(兩金)에게 갔던 표(票)는 많이 떨어졌다.
노태우3김
1988년(年) 5월(月) 28일(日) 원내(院內) 4대(代) 정당(政黨) 총재(總裁) 회담(會談)

김재순 당시(當時) 국회의장(國會議長) 은 이 선거(選擧) 결과(結果)인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 평화(平和)민주당 -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 신민주(新民主)공화당 4당(黨) 체제(體制) 를 '황금(黃金) 분할(分割)'이라 평(評)했다. [20]

6. 여담(餘談) [편집(編輯)]

아이러니하게도 이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에서 각각(各各) 1~4위(位)의 득표결과(得票結果)를 낸 노태우(盧泰愚)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 김대중(金大中) 평화(平和)민주당 , 김영삼(金永三)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 김종필(金鍾泌) 신민주(新民主)공화당 은 법인상(法印象) 모두 한나라당(한나라黨) 으로 이어진다. [21] 물론(勿論) 실질적(實質的)으로는 새정치국민회의 평화(平和)민주당 의 맥(脈)을 잇는다. [22]

노무현(盧武鉉) 후보(候補)가 부산직할시(釜山直轄市) 동구(東區) 에서 국회의원(國會議員)으로 당선(當選)되었고, 이후(以後) 청문회(聽聞會) 스타가 되어 대통령(大統領) 자리에까지 오르는 발판(발板)을 마련하게 된다. 또 1990년(年) 3당(黨) 합당(合黨)에 반대(反對)하며 김영삼 전(前) 대통령(大統領)과 결별(訣別)한 이후(以後) 정치인생(政治人生)에서 상기(想起)한 지역주의(地域主義) 구도(構圖)를 타파(打破)하려 부단히(不斷히) 노력(努力)하였고, 지역분권(地域分權) 및 지방정부(地方政府) 자립문제(自立問題)에 대(對)해서도 관심(關心)을 갖게 되는 계기(契機)가 된다.

집권(執權)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의 참패(慘敗) 충격(衝擊) 때문인지 총선(總選) 치른 다음 날 증시(證市)가 대폭락(大暴落)했다. 당시(當時) 코스피 지수(指數) 는 25.97포인트 폭락(暴落)한 618.73포인트로 기록(記錄)했는데, 이는 당시(當時) 증시(證市) 사상(史上) 최대(最大) 당일(當日) 하락폭(下落幅)이었다. 그 당시(當時) 하한가(下限價) 종목(種目)은 322개(個)로 역시(亦是) 당시(當時) 사상(史上) 최다(最多) 하한가(下限價)였고, 전(全) 업종(業種)이 하락세(下落勢)로 마감했다.

6.1. 초접전(超接戰) 지역구(地域區) [편집(編輯)]

13대(代) 총선(總選)에서 1위(位)와 2위간(位間)의 표차(票差)가 1000표차(票差) 이내(以內)였던 지역구(地域區)는 총(總) 13곳이다. 지역별(地域別)로 각(各) 정당(政黨)의 우세(優勢)가 뚜렷했던 만큼, 접전지역도(接戰地域度) 서울과 수도권(首都圈) 도심지역(都心地域)에 집중(集中)되었다. 특히(特히) 서울은 1,2위(位)가 2%p 이내(以內)로 갈린 지역구(地域區)가 전체(全體) 지역구(地域區)의 1/3인(人) 14곳이나 되었다.

6.2. 선거(選擧)를 뒤엎은 리허설 해프닝 [편집(編輯)]

"먼저 제주시 지역(地域)에서는 이 시간(時間) 현재(現在) 개표(開票)가 완료(完了)돼 민정당의 현경대 후보(候補)가 3만(萬) 8천(千) 245표(票)를 얻어 득표율(得票率) 39.9%로 당선(當選)이 확정(確定)됐습니다. 무소속(無所屬)의 고세진 후보(候補)는 2만(萬) 8천(千) 739표(票)로 30%, 민주당(民主黨)의 김성범 후보(候補) 1만(萬) 4천(千) 367표(票)로 15%, 평민당의 강종호 후보(候補) 9천(千) 573표(票)로 10%, 공화당(共和黨)의 신두완 후보(候補) 4천(千) 764표(票)로 5%의 득표율(得票率)을 보이고 있습니다."

당시(當時) 방송사고(放送事故) 경위(經緯)를 보도(報道)한 MBC 뉴스데스크의 보도(報道) 내용(內容)

선거(選擧)를 하루 앞두고 제주(濟州)MBC 에서 리허설했는데 그 장면(場面)이 송출(送出)되는 방송사고(放送事故) 가 나서 제주도(濟州島) 일대(一帶)가 완전(完全) 난리(亂離)가 난 적이 있다. 그나마 새벽정파(政派) 시간(時間)이라면 여파(餘波)가 덜 했겠지만 오후(午後) 방송(放送) 시작(始作) 직전(直前)에 일어난 사고(事故)라 후폭풍(後暴風)이 더 거셌다. 이에 MBC에서 사과방송(謝過放送)을 하고 문책조치(問責措置)를 내렸고, 수사결과(搜査結果)도 단순실수(單純失手)로 결론(結論)이 났다. 그러나 방송사고(放送事故)로 인해 제(第)13대(代)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부터 이어진 컴퓨터 여론조작(輿論造作) 설(說)이 설득력(說得力)을 얻어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은 제주도(濟州島)에서 전멸(全滅)했고, 선거운동(選擧運動) 중반(中盤)부터 민정당의 예상의석수(豫想議席數)가 점차(漸次) 줄어들던 상황(狀況)이었는데 [28] 이를 완전히(完全히) 굳혀지게 만들었다.

결국(結局) MBC 본사(本社)에서는 당일(當日) 뉴스데스크 를 통해 사과(謝過)했고 전국(全國) 50분(分) + 지역(地域) 10분(分) 단위체계(單位體系)로 진행(進行)할 예정(豫定)이었던 개표방송(開票放送)을 제주(濟州) 지역(地域)에서만은 본사(本社) 개표방송(開票放送)을 그대로 방송(放送)했다. 또 당시(當時) 제주(濟州)MBC 사장(社長)과 상무(常務)가 이에 책임지고 사표(辭表)를 냈으며, 보도국장(報道局長) 등(等) 일부(一部) 인사(人士)는 대기발령(待機發令) 조치(措置)가 내려졌다. #

실제(實際) 제주시(濟州市) 결과(結果)는 현경대 31,720표(票)(33.5%), 고세진 후보(候補) 39,329표(票)(41.45%)로 현경대 의원(議員)의 3선(線)이 좌절(挫折)되었다. [29] 제주도(濟州島) 전체(全體) 결과(結果)는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1석(席), 무소속(無所屬) 2석(席). 참고(參考)로 그 해 무소속(無所屬) 으로 당선(當選)된 고세진, 이기빈(李起彬) 의원(議員)은 이후(以後)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에 입당(入黨)하였다.
[1] 완전(完全)한 문민정부(文民政府)는 김영삼(金永三) 정부(政府) 출범(出帆) 이후(以後)부터로 본다. [2] 사실(事實) 이때 총선(總選)은 전두환(全斗煥)의 임기(任期)가 끝나기 전(前)인 2월(月) 25일(日)에 할 수도 있었지만, 노태우 대통령(大統領) 당선자(當選者)가 자신(自身)의 공천(公薦) 몫을 줄 수 없다고 고집(固執)을 부려 4월(月)에 치러졌다. [3] 다만, 코로나19 때문에 2020년(年) 21대(代) 총선(總選) 만(萬) 예외(例外)로 도쿄 올림픽 이 2021년(年)에 개최(開催)가 되었다. [4] 다만 단일화(單一化)가 반드시 성공(成功)을 보장(保障)한 것은 아니었다. "정치(政治) 1번지(番地)"로 상징적(象徵的) 선거구(選擧區)인 종로구(鍾路區) 에선 평화(平和)민주당의 박영숙 총재권한대행(總裁權限代行)이 사퇴(辭退)하면서(불출마 후(後) 전국구(全國區) 당선(當選))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김명윤 총재권한대행(總裁權限代行)으로 사실상(事實上) 야권(野圈) 단일화(單一化)가 이루어졌으나 김명윤 후보(候補)가 패배(敗北)했다. [5] 물론(勿論) 민정당 내(內) 신주류(新主流)들의 5공(共) 세력(勢力) 견제(牽制) 또는 노태우 전(前) 대통령(大統領)의 박철언 정책보좌관(政策補佐官) 등(等) 자기(自己) 사람 심기 의도(意圖)도 있었다. 실제로(實際로) 권익현 전(前)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대표(代表), 권정달 전(前)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사무총장(事務總長) 등(等)을 위시(爲始)해 윤길중 , 봉두완 , 정석모 등(等) 중진(重鎭)들이 대거(大擧) 쫓겨났고, 89명(名)의 현역의원(現役議員) 중(中) 27명(名)이 공천(公薦)에서 학살(虐殺)되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는 박철언 , 나창주 , 강재섭 등(等) 노태우의 가신(家臣)들이 대거(大擧) 공천(公薦)되었다. [6] 단(單), 정석모 의원(議員)은 나중에 전국구(全國區)로 구제(救濟)받았다. [7] 사실(事實) 민정당은 민주화(民主化) 이후(以後) 선거제(選擧制) 개정(改正) 논의(論議) 당시(當時)에도 야권(野圈)이 단일화(單一化)하면 민정당(民政黨)이 과반(過半)은커녕 개헌저지선(改憲沮止線) 이하(以下)로 밀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중선거구제(中選擧區制)를 주장(主張)했다. 하지만 중선거제(重選擧制)를 그대로 유지(維持)할 경우(境遇)에도 전국구(全國區) 1당(黨) 독식(獨食) 규정(規定) 완화(緩和) 때문에 국회(國會)에서 과반(過半)에 미달(未達)할 가능성(可能性)이 컸던데다가, 민주당과 평민당이 갈등(葛藤)하며 분열상(分裂相)이 지속(持續)되었고 이런 상황(狀況)에서 소선거구제(小選擧區制)로 전환(轉換)할 경우(境遇)에는 어부지리격(漁夫之利格)으로 수도권(首都圈) 의석(議席)을 대거(大擧) 싹쓸이 하여 의회(議會) 과반(過半)을 여유(餘裕)있게 차지할 것으로 판단(判斷)하면서 소선거구제(小選擧區制) 전환(轉換)을 당론(黨論)으로 변경(變更)했고 결국(結局) 3월(月) 8일(日)에 소선거구제(小選擧區制)로 변경(變更)시키는 안이 통과(通過)되었다. 선거운동기간(選擧運動期間) 초반(初盤)까지만 해도 야권(野圈)이 분열(分裂)로 지리멸렬(支離滅裂)할 것으로 예측(豫測)되었기 때문에 그 예상(豫想)이 맞아들어가는듯 싶었지만 결과적(結果的)으로 보았을 때는 꽤나 큰 판단착오(判斷錯誤)가 되었던 것이다. [8] 대놓고 민정당 후보(候補) 선거유세장(選擧遊說場)에 가면 국밥 같은 식사(食事)와 몇만(萬)원씩 든 돈봉투(封套)를 나눠줬고, 현역군인(現役軍人)들의 부재자투표(不在者投票)는 선거공보물(選擧公報物)만 받은 채 정작 표(票)는 간부(幹部)들이 모두 민정당 후보(候補)를 찍어서 보내버리는 만행(蠻行)을 저지르기도 했다(...). [9] 민주(民主)한국당, 신한(宸翰)민주당,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등(等). 군소(群小) 정당(政黨)의 당선자(當選者)는 전무(全無)하다. [10] 전술(前述)했듯 당시(當時) 총선(總選) 규정상(規定上) 지역구(地域區) 제(第)1당(黨)에게 전국구(全國區) 의석(議席) 수(數)의 절반(折半) 을 부여(附與)하고 나머지 당(黨)들이 지역구(地域區) 의석(議席) 수(數)에 따라 전국구(全國區) 의석(議席)이 배분(配分)되는 방식(方式)이었다. [11] 무소속(無所屬)의 경우(境遇) 민주계(系) 3석(席), 보수계(保守系) 6석(席). [12] 실제로(實際로) 이 때 민주당과 평민당 간(間)의 단일화(單一化)가 성공(成功)했다면 단순(單純) 계산(計算)만으로는(민주 득표(得票)+평민(平民) 득표(得票)) 민정당(民政黨)이 수도권(首都圈)에서 고작 15석(席)을 얻는다는 계산(計算)이 나온다. 다만 민주당과 평민당의 핵심(核心) 지지층(支持層)이 서로 분열(分裂) 중(中)이었다는 점(點)을 감안(勘案)하면 단일화(單一化)했더라도 단순(單純) 계산(計算)만큼의 득표(得票)는 나오지 않았을 수 있다. 물론(勿論) 반대(反對)로 단일화(單一化) 실패(失敗)에 실망(失望)해 투표(投票)를 하지 않거나 기권(棄權)한 표(票)도 있겠지만. [13] 이러한 규정(規定)이 없이 전국구(全國區) 방식(方式)으로 선거(選擧)가 만약(萬若) 치러졌다면, 민정당 의석(議席)은 전국구(全國區)에서 12석(席)이 줄어 총(總) 113석(席) (총(銃) 의원수(議員數)의 37.8%에 불과(不過)한 값이다.)이 되고, 평화(平和)민주당과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과 신민주공화당은 각각(各各) 5, 4, 3석(席)이 전국구(全國區)에서 늘어 각각(各各) 75석(席) , 63석(席) , 38석(席) 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제(第)1당(黨) 1/2 전국구(全國區) 부여(扶餘) 규정(規定)이 사라진 14대(代) 총선(總選)의 방식(方式)과 같다. 만일(萬一) 15대(代) 총선(總選)의 방식(方式)과 같이 지역구(地域區) 의석(議席) 수(數)가 아닌 득표율(得票率)에 따라 전국구(全國區) 의석(議席)을 나눠가진다면 민정당은 전국구(全國區)에서 11석(席)이 줄어 114석(席),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과 신민주(新民主)공화당의 의석(議席)이 각각(各各) 6석(席), 5석(席)이 늘어서 65석(席), 40석(席)이 되었을 것이다. [14] 다만, 금정구(金井區) 1석(席)을 민정당 후보(候補)에게 1% 차이(差異)로 아깝게 내줬다. 그 이유(理由)는 민정당 후보(候補)로 나선 김진재 가 지역(地域) 유지(有志)였던 점(點)이 컸는데, 그는 이 지역(地域) 최대(最大) 향토기업인(鄕土企業人) 동일(同一)고무벨트 의 사장(社長)이었다. 여담(餘談)으로 2016년(年) 20대(代) 총선(總選) 에서도 이 지역구(地域區)는 그의 아들인 김세연(金世淵) 이 명맥(命脈)을 이었다. 다만 21대(代)는 불출마(不出馬). [15] 당시(當時) 지금(只今)의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 지역(地域)에는 총(總) 4석(席)이 있었는데, 심완구 라는 지역거물(地域巨物)이 있었던 남구(南區) 를 제외(除外)하고는 모두 패(敗)하고 말았다. (2석(席) 민정당(民政黨), 1석(席) 무소속(無所屬) ) 특히(特히) 민정당의 김태호(金泰浩) 가 있던 중구(中區) 는 아예 후보(候補)도 내지 못했으니... [16] 총(總) 37석(席) 가운데 36석(席)을 차지. 신안군(新安郡) 에서 한겨레민주당(民主黨)이 의석(議席)을 얻었으나 이는 한화갑 이 출마(出馬)하지 못한 결과(結果)였다. [17] 수원시(水原市) 을, 성남시(城南市) 갑(甲), 의정부시(議政府市) , 광명시(光明市) , 파주군(坡州郡) , 고양군(高陽郡) 등(等) 경기(景氣) 대도시(大都市)와 북서부(北西部)에서 승리(勝利)를 거뒀다. [18] 충북(忠北)은 지리적(地理的) 특성상(特性上) 그 이후(以後)에도 신민주(新民主)공화당의 후신격인(後身格人)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 이 큰 힘을 쓰지 못했다. [19] 당시(當時) 한화갑은 전두환(全斗煥)의 김대중 내란음모(內亂陰謀) 조작(造作) 사건(事件) 으로 인해 피선거권(被選擧權)을 박탈당했는데 아직까지도 사면(赦免) 복권(復權)되지 않은 상태(狀態)였다. [20] # [21] 우선(于先)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 신민주(新民主)공화당 이 1990년(年)의 3당(黨) 합당(合黨) 으로 인해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 신한국당 이 된 후(後), 그 신한국당이 1997년(年) 15대(代) 대선(大選) 을 앞두고 평화(平和)민주당 의 후신(後身)인(물론 이 시점(時點)에서 김대중(金大中) 을 비롯한 동교동계(系) 대다수(大多數)는 신당(新黨)인 새정치국민회의 를 창당(創黨)해 나갔다) 통합(統合)민주당 과 합당(合當)하며 한나라당(한나라黨) 이 탄생(誕生)하였기 때문이다. [22] 김대중(金大中) 이라는 핵심(核心) 인사(人士)의 소속(所屬) 여부(與否). [23] 참고(參考)로 3위(位)를 기록(記錄)한 평화(平和)민주당 이원형 후보(候補)도 1위(位)와 불과(不過) 542표차(票差)를 기록(記錄)했다. [24] 참고(參考)로 3위(位)를 기록(記錄)한 평화(平和)민주당 이용희(李龍熙) 후보(候補)도 1위(位)와 불과(不過) 551표차(票差)를 기록(記錄)했다. [25] 우리에게 잘 알려진 탤런트 이순재가 맞다. 4년(年) 후(後) 14대(代) 총선(總選)에서는 이순재 후보(候補)가 설욕(雪辱)에 성공(成功)한다. [26] 4년(年) 후(後) 14대(代) 총선(總選)에서 벌어진 리턴매치에서는 13대(代)보다 더 적은 36표차(票差) 로 김용채 후보(候補)가 당선(當選)되었다가, 재검표(再檢票) 결과(結果) 당락(當落)이 뒤바뀌어 임채정 후보(候補)가 최종(最終) 당선(當選)되었다. [27] 서울시장(市長), 충북도지사(忠北道知事), 박근혜정부(朴槿惠政府) 대통령비서실장(大統領祕書室長)을 지낸 이원종 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28] 선거운동(選擧運動) 초반(初盤) 당시(當時)에는 수도권(首都圈)에서 민정당(民政黨)이 야권분열(野圈分裂)로 여유(餘裕)있게 승리(勝利)할 것으로 예측(豫測)되었지만, 선거운동(選擧運動) 중반(中盤)부터 민주당과 평민당의 지지율(支持率)이 오르고 지지층(支持層) 일부(一部)가 공화당으로 쏠리면서 경합지역(競合地域)이 크게 늘어나던 상황(狀況)이었다. [29] 현경대 후보(候補)는 이후(以後)로 제(第)16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까지 모두 당선(當選)되어 5선(線) 고지(高地)에 오르니 리허설 승리(勝利) 오보(誤報)로 되려 물을 먹은 뼈아픈 패배(敗北)라고 할 만하다. 여담(餘談)으로 제(第)17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부터 19대(代)까지는 줄곳 3연(年) 낙선(落選) 중(中). 이후(以後) 2013년(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民主平和統一諮問會議) 수석부의장(首席副議長)으로 임명(任命)되었다. 여담(餘談)으로 통일(統一)민주당의 김성범 후보(候補)는 13,621표(票)로 14.38%, 평화(平和)민주당의 강종호 후보(候補)는 7,913표(票)로 8.35%, 신민주(新民主)공화당의 신두완 후보(候補)는 2,172표(票) (2.29%)를 얻는 등(等) 실제(實際) 선거(選擧) 결과(結果)에서는 리허설보다 적은 득표(得票)를 얻었다. 애초(애初)에 40:30:15:10:5로 5단위(單位)로 떨어지게 리허설을 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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