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選擧) 결과(結果)는 그야말로 파란(波瀾)이었다. 신민당은 전국(全國) 합산(合算) 29.3%의 지지율(支持率)로 지역구(地域區) 50석(席) + 전국구(全國區) 17석(席)을 얻어 총(總) 67석(席)으로 제(第)1야당(野黨)으로 등극(登極)하는 건 물론(勿論) 서울 및 부산(釜山), 대구(大邱), 인천(仁川) 등(等) 대도시(大都市) 지역(地域)에서 민정당과 호각(號角)을 다투는 성과(成果)를 올렸다. 특히(特히) 서울에서 민정당은 겨우 27.3%를 득표(得票)한 것에 그친 반면(反面) 신민당은 43.9%의 득표율(得票率)을 올렸는데,
중선거구제(中選擧區制)
라서 호각(互角)이었지 만약(萬若)
소선거구제(小選擧區制)
로 치러졌으면 대도시(大都市) 지역(地域)의 의석수(議席數)를 대거(大擧) 신민당이 싹쓸이했을 수도 있었다.
[11]
뿐만 아니라 전국구(全國區) 또한 신민당과 민한당의 득표율(得票率) 총합(總合)인 49%에 맞춰 고르게 배분(配分)했다면
신민(臣民)+민한 120석(席) VS 민정(民政) 119석(席)
으로 사상(史上) 초유(初有)의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나올 수도 있었고, 심지어(甚至於) 다음 선거(選擧)인
13대(代) 총선(總選)
의
전국구(全國區)
배분(配分) 방식(方式)으로 배분(配分)해도
[12]
민정(民政) 133 vs 야당(野黨)+무소속(無所屬) 143
으로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나온다. 이러니 당시(當時) 선거(選擧) 결과(結果)에 대(對)한 전두환(全斗煥)의 반응(反應)은
영 좋지 않았던게
당연지사(當然之事).
제(第)5공화국(共和國) 드라마
에서 묘사(描寫)한 바로는 전두환(全斗煥)이 의자(椅子)를 손바닥으로 세게 짚으면서 분노(憤怒)한 반응(反應)을 보이다가, 국회(國會) 과반수(過半數) 의석(議席)을 확보(確保)했다는
노신영(盧信永)
안기부장(安企部長)의 보고(報告)에
"전국구(全國區)가 있으니까, 그 정도(程度)나마 얻은거 아냐! 안기부(安企部)는 선거(選擧) 분석(分析)이 왜 그 모양(模樣)이야?!"
라면서 역정(逆情)을 낸다.
아무도 예상(豫想)치 못한 신민당 돌풍(突風)에는 앞서 언급(言及)했듯이 국민(國民)들의 정권(政權) 심판론(審判論)에다가
김대중(金大中)
이 선거(選擧) 나흘 전(前)
미국(美國)
망명생활(亡命生活)을 끝내고 과감(果敢)한 귀국(歸國)을 한 것 또한 한몫했다.
[13]
왜냐하면 약(約) 2년(年) 전(前)인
1983년(年)
에
필리핀
의 야당(野黨) 인사(人士)
베니그노 아키노
가 미국(美國) 망명생활(亡命生活)을 청산(淸算)하고 귀국(歸國)하다가
마닐라 공항(空港)
에서 암살(暗殺)되는 사건(事件)이 벌어졌는데, 김대중 또한 같은 상황(狀況)을 맞이할 것을 우려(憂慮)한 미국(美國)의 정치인(政治人), 언론인(言論人) 등(等)이 비행기(飛行機)에서부터 그를 에워싸
김포국제공항(金浦國際空港)
입국장(入國場)까지 동행(同行)했으며 이 모습은 국민(國民)들에게 아직 민주투사(民主鬪士)들의 활동(活動)은 죽지 않았으며 미국(美國)이 지지(支持)한다는 것을 내보여 큰 반향(反響)을 일으켰다. 심지어(甚至於) 이 때
김영삼(金永三)
이 직접(直接) 김포공항(金浦空港)까지 김대중을 마중나가려고 했었으나
,
전두환(全斗煥) 정권(政權)
이 사전(辭典)에 상도동 자택(自宅)을 에워싸 결국(結局) 실패(失敗)했다. 참고(參考)로 이 때 입국장(入國場)에는 김대중을 동교동 자택(自宅)으로 데려가기 위해 안기부(安企部) 요원(要員) 및 경찰(警察)들이 대기(待機)하고 있었는데,
미국(美國) 인사(人士)들에게 무력(武力)을 휘두르면서까지 김대중을 끌고 갔다.
이에 대(對)한 미국(美國)의 반응(反應)은
더 이상(以上)의 자세(仔細)한 설명(說明)은 생략(省略)한다.
당시(當時) 동행(同行)했던 전직(前職) 외교관(外交官)인 로버트 화(火)이츠 왈(曰),
"한국(韓國) 경찰(警察)들이 우리한테 폭력(暴力)을 휘두르는데,
3년(年) 뒤
에 미국인(美國人)들이 안심(安心)하고 서울에 올 수 있을지 의문(疑問)이 든다."
한편(한便),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은 예상(豫想)보다 적은 의석(議席)을 얻었으나 여당(與黨)에게 지극히(至極히) 유리하게 짜여진 선거제도(選擧制度) 탓에 과반(過半)은 유지(維持)했다. 하지만 관제야당인(官製野黨人)
민주(民主)한국당
과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은 제도상(制度上)으로도 불리(不利)한 마당에 신한민주당에 밀리면서 제대로 유탄(流彈)을 맞아 의석수(議席數)가 크게 줄어들어 참패(慘敗)를 면하지 못했고 이는 결국(結局)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에게 불리(不利)하게 작용(作用)되었다. 심지어(甚至於) 민주(民主)한국당은 관제야당(官製野黨)이었지만 은근슬쩍(慇懃슬쩍) 신한민주당과 공조(共助)하는 모양새(模樣새)까지 보였으니..
앞서 말했듯 선거(選擧) 결과(結果)에 격분(激忿)한
전두환(全斗煥)
은 총선(總選) 판세(판勢) 분석(分析)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責任)을 물어 당시(當時)
국가안전기획부장(國家安全企劃部長)
이었던
노신영(盧信永)
을 해임(解任)했고
[14]
대통령경호실장인(大統領警護室長人)
장세동
을 국가안전기획부장(國家安全企劃部長)으로 발탁(拔擢)했다.
[15]
민주(民主)한국당 의원(議員) 상당수(相當數)는 이후(以後) 신한민주당에 입당(入黨)하면서 신민당은 103석(席)의 거대야당(巨大野黨)으로 변모(變貌)하게 되었다. 이는 KBS 시청료(視聽料) 거부운동(拒否運動)과
인천(仁川) 5.3 운동(運動)
을 비롯한 민주화운동(民主化運動)의 큰 원동력(原動力)이 되었다. 사실(事實) 여기엔 노신영(盧信永) 본인(本人)의 '한계(限界)'도 작용(作用)했다. 본래(本來) 노신영(盧信永)은 정통(正統)
외교관(外交官)
출신(出身)이었다. 국가안전기획부(國家安全企劃部) 부장(部長)으로 활동(活動)할 때도 해외(海外) 첩보(諜報) 및 대외(對外) 공작(公爵) 분야(分野)에서는 전공(專攻)을 살려서 제법 좋은 성과(成果)를 냈지만 이런 국내(國內) 정치(政治) 공작(工作) 분야(分野)에서는 상대적(相對的)으로 미흡(未洽)했던 것.
실제(實際) 신민당은 이후(以後) 내각제(內閣制) 개헌(改憲)(
이민우(李珉雨) 구상(構想)
) 파문(波紋)으로 양김계(兩金系)에 속(屬)한 대다수(大多數) 의원(議員)들이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으로 옮겨졌으나, 그럼에도 어찌됐든 1987년(年)
6월(月) 항쟁(抗爭)
에 많은 영향(影響)을 끼치게 된다.
한편(한便), 선거(選擧) 결과(結果) 분풀이(憤풀이) 격(格)으로, 전두환(全斗煥)에게 여러모로 밉보였던 재벌(財閥)
국제(國際)그룹
이 해체(解體)
된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當時) 국제그룹이 부산(釜山)을 기반(基盤)으로 하는 대기업(大企業)이니만큼
양정모
회장(會長)이 부산(釜山)에서 여당(與黨)의 승리(勝利)를 위해 영향력(影響力)을 행사(行使)해달라는게 전두환 전(前) 대통령(大統領)의 의중(意中)이었는데, 부산(釜山)의 6개(個) 선거구(選擧區) 총(總) 12석(席) 중(中)에
여당(與黨) 의석수(議席數)는 고작 3석(席)밖에 안 나오는 바람에...
[16]
나머지는 신민(臣民) 6, 민한 2, 국민(國民) 1. 무려(武旅) 3개(個) 선거구(選擧區)에서 민정당(民政黨)이
3위(位)
로 낙선(落選)했다.
국제그룹뿐만 아니라 똑같이 전두환의 미움을 받아온
김준엽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총장(總長)도 경질(更迭)을 피(避)할 수 없었다. 총선(總選) 다음날
손제석
청와대(靑瓦臺) 교문수석(首席)과
권이혁
문교부장관(長官)은 고려대에 감사(監査)를 실시(實施)해 전년도(前年度)
민정당사(黨舍) 점거농성(占據籠城)
학생(學生)들의 처벌(處罰)에 소극적(消極的)인 김(金) 총장(總長)을 사퇴(辭退)하도록 압력(壓力)을 가(加)했다. 이에 김(金) 총장(總長)이 압력(壓力)을 거부(拒否)하자, 개각(改閣) 후(後) 새로 부임(赴任)한 신극범 청와대(靑瓦臺) 교문수석(首席)과 손제석 문교부장관(長官)은 다시 고려대 감사(監査)를 실시(實施)해 교직원(敎職員) 자녀(子女) 특례입학(特例入學)을 문제(問題)삼아 3월(月) 8일부(日附)로 김준엽 총장(總長)을 쫓아냈다. 이에 대(對)해 학생(學生)들이 시위(示威)를 벌이자 정부(政府)는 김(金) 총장(總長)에 학교(學校) 출입금지(出入禁止) 및 외유(外遊)를 강요(强要)했다.
서울에서 민정당은 고작 27% 득표(得票)에 그쳤지만, 민한당 후보(候補)들이 신민당 돌풍(突風)의 유탄(流彈)을 맞아 3위(位)로 밀리는 바람에 어부지리격(漁夫之利格)으로 13석(席)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반(反)해 부산(釜山)에서는 신민(臣民) - 민한 양당(兩黨)이
아빠는 신한(宸翰)민주당, 엄마는 민주(民主)한국당
이라는 구호(口號)를 내세워 은근슬쩍(慇懃슬쩍) 공조(共助)를 했고, 그 결과(結果) 3개(個) 선거구(選擧區)에서 민정당을 3위(位)로 끌어내린 것. 물론(勿論) 민한당으로 표(票)가 분산(分散)되면서 부산(釜山) 지역(地域) 신민당(新民黨) 득표율(得票率)이 서울에서보다 다소(多少) 낮은 36%대(臺)에 머물렀지만 그만큼 민정당의 의석수(議席數)를 빼앗는 효과(效果)가 있었으며 만약(萬若)에 타(他) 지역(地域)에서도 이와 비슷한 선거전략(選擧戰略)을 썼으면 민정당(民政黨)이 과반(過半)은 고사하고 원내(院內) 1당(黨)조차 못 오를 수도 있었다.
[17]
[18]
이 영상(映像)은 당시(當時) 총선(總選) 당일(當日)
MBC 뉴스데스크
이다. 당시(當時) 선거(選擧) 개표방송(開票放送) 특집(特輯) 뉴스에서도 첫 뉴스가
전두환(全斗煥)
내외(內外)가 투표소(投票所)에서 한 표(票)를 행사(行使)했다는 소식(消息)인 것을 보면 선거(選擧) 개표방송(開票放送)에서도
땡전(땡錢)뉴스
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