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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第)12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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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施行) 불가(不可)**
* 1960년(年) 6월(月) 15일(日) 제(第)3차(次) 개헌(改憲)으로 부통령직(副統領職) 폐지(廢止)
** 2014년(年) 7월(月) 24일(日) 헌법재판소(憲法裁判所) 가 국민투표법(國民投票法) 제(第)14조(條) 제(第)1항(項) 내용(內容) 중(中) 일부(一部)에 대(對)해 헌법(憲法) 불합치(不合致) 결정(決定) 을 내렸으나 이후(以後) 법률(法律) 개정(改正)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年) 1월(月) 1일자(日子)로 효력(效力)을 상실(喪失)하여 시행(施行) 불가능(不可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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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國會議長) · 국회부의장(國會副議長)
대한민국(大韓民國) 제(第)12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당시(當時) 투표(投票) 영상(映像)
투표율(投票率)
선거(選擧) 결과(結果)
12대 총선 결과
정당(正當)
지역구(地域區)
전국구(全國區)
총합(總合)
비율(比率)
87석(席)
61석(席)
148석(席)
53.62%
50석(席)
17석(席)
67석(席)
24.27%
26석(席)
9석(席)
35석(席)
12.68%
15석(席)
5석(席)
20석(席)
7.24%
1석(席)
0석(席)
1석(席)
0.36%
1석(席)
0석(席)
1석(席)
0.36%
4석(席)
-
4석(席)
1.44%

1 . 개요(槪要) 2 . 배경(背景) 3 . 과정(過程) 4 . 결과(結果) 5 . 지역별(地域別) 결과(結果)
5.1 . 지역구(地域區) 선거(選擧) 결과(結果)
6 . 여담(餘談)

1. 개요(槪要) [편집(編輯)]

1985년(年) 2월(月) 12일(日) 치러진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로 투표율(投票率)은 84.6%를 기록(記錄)했다. 이 수치(數値)는 역대(歷代) 총선(總選) 가운데 1958년(年) 제(第)4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이후(以後) 최고치(最高値)를 기록(記錄)한 것으로, 현재(現在)도 깨지 못하고 있으며 이후(以後)에 치러진 선거(選擧) 가운데서 유일(唯一)하게 1987년(年) 치러진 13대(代) 대선(大選) 만이 넘어섰다.

한편(한便)으로는 한국(韓國) 선거(選擧) 역사상(歷史上) 최대(最大)의 반전(反戰) 드라마 이기도 한데, 훗날(後날) 치러진 선거(選擧) 중(中)에도 2016년(年) 제(第)20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등(等) 예상(豫想)을 뒤엎는 결과(結果)가 나온 사례(事例)가 종종(種種) 있었지만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독재(獨裁) 정권(政權)을 선거(選擧)로 당혹스럽게 만들었다는 점(點) 에서 12대(代) 총선(總選)의 비중(比重)이나 여파(餘波)는 더 극적(劇的)이었다.

2. 배경(背景) [편집(編輯)]

의원(議員) 정수(定數)는 276명(名)으로 11대(代) 총선(總選)과 같았다. 선거제도도(選擧制度度) 중선거구제(中選擧區制) 였다. 184명(名)의 지역구(地域區), 92명(名)이 전국구(全國區)였다. 다수당(多數黨)에 유리한 선거법(選擧法)은 변화(變化) 없이 유지(維持)되어 지역구(地域區) 의석(議席)에서 1위(位)를 한 정당(政黨)이 전국구(全國區) 의석(議席)의 2/3를 독식(獨食)했다.

3. 과정(過程) [편집(編輯)]

당초(當初) 상당수(相當數) 정치인(政治人)들이 대법원(大法院) 판결(判決)에 의(依)해 규제(規制)가 풀리자 상도동계(系) 동교동계(系) 등(等) 구(舊) 신민당(新民黨) 출신(出身) 인사(人士) [1] 들은 신한(宸翰)민주당 을 창당(創黨)했다. 그러나 전두환(全斗煥) 정권(政權) 은 어떻게든 신한민주당을 무력화(無力化)시키기 위한 꼼수를 부렸는데 [2] 애초(애初)에 신민당(新民黨)이라는 이름으로 창당(創黨)되려던 것을 거부(拒否)한 것도 모자라, 약칭(略稱)조차 신민당(新民黨)을 쓰지 못하게 딴지를 걸었고 [3] [4] 무엇보다도 관행상(慣行上) 3~4월(月)에 치러지던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를 2월(月) 12일(日) 로 앞당겼다. [5]

이로 인(因)해 신한민주당은 사실상(事實上) 창당(創黨)한 지 불과(不過) 보름도 채 안되어 선거(選擧)를 맞이하는 어려움에 직면(直面)했으며, 관제(管制) 야당(野黨)인 민주(民主)한국당 신상우 사무총장(事務總長)을 비롯한 몇몇 주요(主要) 인사(人士)들은 정권(政權)의 협박(脅迫)으로 인(因)해 신한(宸翰)민주당 합류(合流)를 못하는 등(等)의 정치(政治) 공작(工作)도 있었다. 신상우의 경우(境遇) 안기부(安企部) 서울분실장(分室長) 방준필이 불러서 나갔더니만, "신한민주당에 입당(入黨)하면 구속(拘束)시켜 버리겠다. 우리가 동원(動員)할 수 있는 공권력(公權力)은 아주 많고, 당신(當身)의 사돈(査頓)에 팔촌(八寸)까지 죄(罪)는 만들면 된다." 는 말로 탈당(脫黨)을 못하게 했다고. 게다가 당시(當時)의 선거(選擧) 제도(制度)는 지역구당(地域區當) 2명(名)을 뽑는 중선거구제(中選擧區制)인데다, 지역구(地域區) 1당(黨)이 전국구(全國區) 의석(議席)의 2/3을 독식(獨食)하는 것 이라서 여당(與黨)인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의 과반(過半) 획득(獲得)은 기정사실(旣定事實)이었다. 특히(特히) 당시(當時)는 아직 5.18 민주화운동(民主化運動) 의 진상(眞相)이 밝혀지기 전(前)이었기 때문에 광주(光州)를 제외(除外)한 호남(湖南) 지역(地域)에서도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이 의석(議席)을 확보(確保)하는데 별(別) 문제(問題)가 없었다. [6]

하지만 전두환(全斗煥) 정권(政權)의 폭압적(暴壓的)인 태도(態度)에 염증(厭症)을 느낀 대도시(大都市) 유권자(有權者)들을 중심(中心)으로 신한(宸翰)민주당의 지지세(支持勢)는 올라가기 시작(始作)했으며, 이들이 결정적(決定的)으로 정권(政權)에 마음을 돌린 건(件)은 다름 아닌 언론(言論)의 편파(偏頗) 보도(報道)였다. 총선(總選)을 앞두고 양대(兩大) 방송사(放送社) 에서 아예 대놓고 땡전(땡錢)뉴스 를 비롯하여 정권(政權)에 유리한 편파보도도(偏頗報道度) 모자라 전(前)비어천가 드라마 를 편성(編成)했다. 자세(仔細)한 내용(內容)은 전(前) KBS 감사(監査) 강동순의 저서(著書) <KBS와 권력(權力)(2006)> 참조(參照). 결국(結局) KBS 사장(社長) 이원홍 MBC 사장(社長) 이웅희 는 신한(宸翰)민주당 김재광 선거대책본부장(選擧對策本部長)에 의(依)해 선거법(選擧法) 위반(違反)으로 피소(被訴)되었다 .

이런 식(式)의 편파(偏頗) 보도(報道)는 도리어 역효과(逆效果)를 불러 일으켰고 판세(판勢)가 차츰 신민당(新民黨)에게 유리해지는데, 특히(特히) 대학생(大學生)들의 신민당(新民黨) 유세참여(遊說參與) 및 대도시(大都市) 지역(地域) 합동연설회(合同演說會)가 큰 역할(役割)을 해냈다고 평가(評價)된다. 1980년(年) 5월(月) 17일(日) 이후(以後)로 5년(年) 간(間) 언로(言路)가 꽉 막혀있다보니 [7] 대도시(大都市)에서는 선명(鮮明) 야당(野黨)을 내건 신민당의 합동연설회(合同演說會)에 국민(國民)들이 큰 관심(關心)을 가졌으며, 특히(特히) 일부(一部) 대학생(大學生)들은 여당(與黨)인 민정당과 당시(當時) 제(第)1야당(野黨)인 민한당 연설회장(演說會場)에 야유(揶揄)를 보내서 분위기(雰圍氣)를 싸하게 만드는 용자짓을 감행(敢行)하기도 했다. 심지어(甚至於) 1985년(年) 2월(月) 5일(日)에는 대학생(大學生) 2명(名)이 동작지구(地區) 유세장(遊說場)에서 연설(演說) 중(中)이던 민정당(民政黨) 허청일 후보(候補)에게 암모니아를 투척(投擲)하는 사건(事件)도 있었으며, 이 현장(現場)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신민당(新民黨) 연설회(演說會)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民主化運動) 의 진상(眞相)이나 [8] 장영자(張玲子)·이철희 금융사기(金融詐欺) 사건(事件) 등(等) 전두환 정권(政權) 하(下)에서 벌어진 각종(各種) 사건(事件)들이 연설회(演說會)를 통해 간접적(間接的)이나마 폭로(暴露)되면서 이목(耳目)을 집중시켜 놓았다. [9] 그리고 연설회(演說會) 현장(現場)에 있었던 유권자(有權者)들의 구전(口傳)을 통해 대도시(大都市) 지역(地域) 주민(住民)들에게도 이런 내용(內容)들이 전파(傳播)되며 신민당에 대(對)한 지지세(支持勢)가 알게 모르게 확산(擴散)된 것.

거기에 김영삼(金永三) 과 함께 재야(在野)의 거목(巨木)인 김대중(金大中) 이 선거(選擧) 4일(日) 전(前)인 2월(月) 8일(日) 오전(午前)에 전격적(電擊的)으로 미국(美國) 에서 귀국(歸國)하면서 [10] 야당(野黨)을 향(向)하는 표심(票心)이 결집(結集)하기 시작(始作)한다.

4. 결과(結果) [편집(編輯)]

선거(選擧) 결과(結果)는 그야말로 파란(波瀾)이었다. 신민당은 전국(全國) 합산(合算) 29.3%의 지지율(支持率)로 지역구(地域區) 50석(席) + 전국구(全國區) 17석(席)을 얻어 총(總) 67석(席)으로 제(第)1야당(野黨)으로 등극(登極)하는 건 물론(勿論) 서울 및 부산(釜山), 대구(大邱), 인천(仁川) 등(等) 대도시(大都市) 지역(地域)에서 민정당과 호각(號角)을 다투는 성과(成果)를 올렸다. 특히(特히) 서울에서 민정당은 겨우 27.3%를 득표(得票)한 것에 그친 반면(反面) 신민당은 43.9%의 득표율(得票率)을 올렸는데, 중선거구제(中選擧區制) 라서 호각(互角)이었지 만약(萬若) 소선거구제(小選擧區制) 로 치러졌으면 대도시(大都市) 지역(地域)의 의석수(議席數)를 대거(大擧) 신민당이 싹쓸이했을 수도 있었다. [11]

뿐만 아니라 전국구(全國區) 또한 신민당과 민한당의 득표율(得票率) 총합(總合)인 49%에 맞춰 고르게 배분(配分)했다면 신민(臣民)+민한 120석(席) VS 민정(民政) 119석(席) 으로 사상(史上) 초유(初有)의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나올 수도 있었고, 심지어(甚至於) 다음 선거(選擧)인 13대(代) 총선(總選) 전국구(全國區) 배분(配分) 방식(方式)으로 배분(配分)해도 [12] 민정(民政) 133 vs 야당(野黨)+무소속(無所屬) 143 으로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나온다. 이러니 당시(當時) 선거(選擧) 결과(結果)에 대(對)한 전두환(全斗煥)의 반응(反應)은 영 좋지 않았던게 당연지사(當然之事). 제(第)5공화국(共和國) 드라마 에서 묘사(描寫)한 바로는 전두환(全斗煥)이 의자(椅子)를 손바닥으로 세게 짚으면서 분노(憤怒)한 반응(反應)을 보이다가, 국회(國會) 과반수(過半數) 의석(議席)을 확보(確保)했다는 노신영(盧信永) 안기부장(安企部長)의 보고(報告)에 "전국구(全國區)가 있으니까, 그 정도(程度)나마 얻은거 아냐! 안기부(安企部)는 선거(選擧) 분석(分析)이 왜 그 모양(模樣)이야?!" 라면서 역정(逆情)을 낸다.

아무도 예상(豫想)치 못한 신민당 돌풍(突風)에는 앞서 언급(言及)했듯이 국민(國民)들의 정권(政權) 심판론(審判論)에다가 김대중(金大中) 이 선거(選擧) 나흘 전(前) 미국(美國) 망명생활(亡命生活)을 끝내고 과감(果敢)한 귀국(歸國)을 한 것 또한 한몫했다. [13] 왜냐하면 약(約) 2년(年) 전(前)인 1983년(年) 필리핀 의 야당(野黨) 인사(人士) 베니그노 아키노 가 미국(美國) 망명생활(亡命生活)을 청산(淸算)하고 귀국(歸國)하다가 마닐라 공항(空港) 에서 암살(暗殺)되는 사건(事件)이 벌어졌는데, 김대중 또한 같은 상황(狀況)을 맞이할 것을 우려(憂慮)한 미국(美國)의 정치인(政治人), 언론인(言論人) 등(等)이 비행기(飛行機)에서부터 그를 에워싸 김포국제공항(金浦國際空港) 입국장(入國場)까지 동행(同行)했으며 이 모습은 국민(國民)들에게 아직 민주투사(民主鬪士)들의 활동(活動)은 죽지 않았으며 미국(美國)이 지지(支持)한다는 것을 내보여 큰 반향(反響)을 일으켰다. 심지어(甚至於) 이 때 김영삼(金永三) 이 직접(直接) 김포공항(金浦空港)까지 김대중을 마중나가려고 했었으나 , 전두환(全斗煥) 정권(政權) 이 사전(辭典)에 상도동 자택(自宅)을 에워싸 결국(結局) 실패(失敗)했다. 참고(參考)로 이 때 입국장(入國場)에는 김대중을 동교동 자택(自宅)으로 데려가기 위해 안기부(安企部) 요원(要員) 및 경찰(警察)들이 대기(待機)하고 있었는데, 미국(美國) 인사(人士)들에게 무력(武力)을 휘두르면서까지 김대중을 끌고 갔다. 이에 대(對)한 미국(美國)의 반응(反應)은 더 이상(以上)의 자세(仔細)한 설명(說明)은 생략(省略)한다. 당시(當時) 동행(同行)했던 전직(前職) 외교관(外交官)인 로버트 화(火)이츠 왈(曰), "한국(韓國) 경찰(警察)들이 우리한테 폭력(暴力)을 휘두르는데, 3년(年) 뒤 에 미국인(美國人)들이 안심(安心)하고 서울에 올 수 있을지 의문(疑問)이 든다."

한편(한便),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은 예상(豫想)보다 적은 의석(議席)을 얻었으나 여당(與黨)에게 지극히(至極히) 유리하게 짜여진 선거제도(選擧制度) 탓에 과반(過半)은 유지(維持)했다. 하지만 관제야당인(官製野黨人) 민주(民主)한국당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은 제도상(制度上)으로도 불리(不利)한 마당에 신한민주당에 밀리면서 제대로 유탄(流彈)을 맞아 의석수(議席數)가 크게 줄어들어 참패(慘敗)를 면하지 못했고 이는 결국(結局)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에게 불리(不利)하게 작용(作用)되었다. 심지어(甚至於) 민주(民主)한국당은 관제야당(官製野黨)이었지만 은근슬쩍(慇懃슬쩍) 신한민주당과 공조(共助)하는 모양새(模樣새)까지 보였으니..

앞서 말했듯 선거(選擧) 결과(結果)에 격분(激忿)한 전두환(全斗煥) 은 총선(總選) 판세(판勢) 분석(分析)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責任)을 물어 당시(當時) 국가안전기획부장(國家安全企劃部長) 이었던 노신영(盧信永) 을 해임(解任)했고 [14] 대통령경호실장인(大統領警護室長人) 장세동 을 국가안전기획부장(國家安全企劃部長)으로 발탁(拔擢)했다. [15] 민주(民主)한국당 의원(議員) 상당수(相當數)는 이후(以後) 신한민주당에 입당(入黨)하면서 신민당은 103석(席)의 거대야당(巨大野黨)으로 변모(變貌)하게 되었다. 이는 KBS 시청료(視聽料) 거부운동(拒否運動)과 인천(仁川) 5.3 운동(運動) 을 비롯한 민주화운동(民主化運動)의 큰 원동력(原動力)이 되었다. 사실(事實) 여기엔 노신영(盧信永) 본인(本人)의 '한계(限界)'도 작용(作用)했다. 본래(本來) 노신영(盧信永)은 정통(正統) 외교관(外交官) 출신(出身)이었다. 국가안전기획부(國家安全企劃部) 부장(部長)으로 활동(活動)할 때도 해외(海外) 첩보(諜報) 및 대외(對外) 공작(公爵) 분야(分野)에서는 전공(專攻)을 살려서 제법 좋은 성과(成果)를 냈지만 이런 국내(國內) 정치(政治) 공작(工作) 분야(分野)에서는 상대적(相對的)으로 미흡(未洽)했던 것.

실제(實際) 신민당은 이후(以後) 내각제(內閣制) 개헌(改憲)( 이민우(李珉雨) 구상(構想) ) 파문(波紋)으로 양김계(兩金系)에 속(屬)한 대다수(大多數) 의원(議員)들이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으로 옮겨졌으나, 그럼에도 어찌됐든 1987년(年) 6월(月) 항쟁(抗爭) 에 많은 영향(影響)을 끼치게 된다.

한편(한便), 선거(選擧) 결과(結果) 분풀이(憤풀이) 격(格)으로, 전두환(全斗煥)에게 여러모로 밉보였던 재벌(財閥) 국제(國際)그룹 이 해체(解體) 된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當時) 국제그룹이 부산(釜山)을 기반(基盤)으로 하는 대기업(大企業)이니만큼 양정모 회장(會長)이 부산(釜山)에서 여당(與黨)의 승리(勝利)를 위해 영향력(影響力)을 행사(行使)해달라는게 전두환 전(前) 대통령(大統領)의 의중(意中)이었는데, 부산(釜山)의 6개(個) 선거구(選擧區) 총(總) 12석(席) 중(中)에 여당(與黨) 의석수(議席數)는 고작 3석(席)밖에 안 나오는 바람에... [16] 나머지는 신민(臣民) 6, 민한 2, 국민(國民) 1. 무려(武旅) 3개(個) 선거구(選擧區)에서 민정당(民政黨)이 3위(位) 로 낙선(落選)했다.

국제그룹뿐만 아니라 똑같이 전두환의 미움을 받아온 김준엽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총장(總長)도 경질(更迭)을 피(避)할 수 없었다. 총선(總選) 다음날 손제석 청와대(靑瓦臺) 교문수석(首席)과 권이혁 문교부장관(長官)은 고려대에 감사(監査)를 실시(實施)해 전년도(前年度) 민정당사(黨舍) 점거농성(占據籠城) 학생(學生)들의 처벌(處罰)에 소극적(消極的)인 김(金) 총장(總長)을 사퇴(辭退)하도록 압력(壓力)을 가(加)했다. 이에 김(金) 총장(總長)이 압력(壓力)을 거부(拒否)하자, 개각(改閣) 후(後) 새로 부임(赴任)한 신극범 청와대(靑瓦臺) 교문수석(首席)과 손제석 문교부장관(長官)은 다시 고려대 감사(監査)를 실시(實施)해 교직원(敎職員) 자녀(子女) 특례입학(特例入學)을 문제(問題)삼아 3월(月) 8일부(日附)로 김준엽 총장(總長)을 쫓아냈다. 이에 대(對)해 학생(學生)들이 시위(示威)를 벌이자 정부(政府)는 김(金) 총장(總長)에 학교(學校) 출입금지(出入禁止) 및 외유(外遊)를 강요(强要)했다.

서울에서 민정당은 고작 27% 득표(得票)에 그쳤지만, 민한당 후보(候補)들이 신민당 돌풍(突風)의 유탄(流彈)을 맞아 3위(位)로 밀리는 바람에 어부지리격(漁夫之利格)으로 13석(席)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반(反)해 부산(釜山)에서는 신민(臣民) - 민한 양당(兩黨)이 아빠는 신한(宸翰)민주당, 엄마는 민주(民主)한국당 이라는 구호(口號)를 내세워 은근슬쩍(慇懃슬쩍) 공조(共助)를 했고, 그 결과(結果) 3개(個) 선거구(選擧區)에서 민정당을 3위(位)로 끌어내린 것. 물론(勿論) 민한당으로 표(票)가 분산(分散)되면서 부산(釜山) 지역(地域) 신민당(新民黨) 득표율(得票率)이 서울에서보다 다소(多少) 낮은 36%대(臺)에 머물렀지만 그만큼 민정당의 의석수(議席數)를 빼앗는 효과(效果)가 있었으며 만약(萬若)에 타(他) 지역(地域)에서도 이와 비슷한 선거전략(選擧戰略)을 썼으면 민정당(民政黨)이 과반(過半)은 고사하고 원내(院內) 1당(黨)조차 못 오를 수도 있었다. [17] [18]



이 영상(映像)은 당시(當時) 총선(總選) 당일(當日) MBC 뉴스데스크 이다. 당시(當時) 선거(選擧) 개표방송(開票放送) 특집(特輯) 뉴스에서도 첫 뉴스가 전두환(全斗煥) 내외(內外)가 투표소(投票所)에서 한 표(票)를 행사(行使)했다는 소식(消息)인 것을 보면 선거(選擧) 개표방송(開票放送)에서도 땡전(땡錢)뉴스 를 엿볼 수 있다.

5. 지역별(地域別) 결과(結果) [19] [편집(編輯)]

12대 총선 결과 지도
제(第)12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지역(地域)
합계(合計)
서울
13
1
0
14
0
0
0
28
인천(仁川)
2
0
0
2
0
0
0
4
경기(京畿)
10
3
3
4
0
0
0
20
강원(江原)
6
1
4
0
0
0
1
12
충남(忠南)
8
4
0
4
0
0
0
16
충북(忠北)
4
1
1
2
0
0
0
8
전남(全南)
11
5
0
5
1
0
0
22
전북(全北)
7
1
3
2
0
1
0
14
부산(釜山)
3
2
1
6
0
0
0
12
경남(慶南)
10
4
1
5
0
0
0
20
대구(大邱)
2
1
1
2
0
0
0
6
경북(慶北)
10
3
1
4
0
0
2
20
제주(濟州)
1
0
0
0
0
0
1
2
지역구(地域區)
87
26
15
50
1
1
4
184
전국구(全國區)
61
9
5
17
0
0
0
92
합계(合計)
148
35
20
67
1
1
4
276
전국구(全國區)
정당(正當)
득표수(得票數)
득표율(得票率)
당선인(當選人)
민주정의당 글자
7,040,477
35.2%
61
민주한국당 흰색 로고타입
3,931,300
19.7%
9
한국국민당(1981년) 글자
1,828,744
9.2%
5
신한민주당 흰색 로고타입
5,843,827
29.3%
17
신정사회당 선거벽보 글씨
288,863
1.4%
0
신민주당 로고(흰색+배경)
112,654
0.6%
0
민권당글자
75,634
0.4%
0
자유민족당
17,257
0.09%
0
근로농민당 선거벽보 글씨
185,859
0.9%
0
650,028
3.2%
0
총합(總合)
19,974,477
100%
92

5.1. 지역구(地域區) 선거(選擧) 결과(結果) [편집(編輯)]

6. 여담(餘談) [편집(編輯)]

  • 양대(兩大) 방송사(放送社)들은 선거(選擧) 당시(當時) 편파(偏頗)/친정부(親政府) 논란(論難)에도 불구(不拘)하고 방송기술(放送技術) 면(面)에서 발전(發展)한 모습을 보였는데, 전(前) 대선(大選) 때보다 더 본격적(本格的)으로 수작업(手作業) 대신(代身) 컴퓨터를 활용(活用)하기 시작(始作)한 것이다. 특히(特히) MBC는 컴퓨터에 문자발생기(文字發生機), 비디오파일을 연결(連結)한 'EDDS(Election Data Display System)'를 개발(開發)해냈는데 , 당시(當時)에는 컴퓨터그래픽 이미지보다 컴퓨터의 기능(機能)에 초점(焦點)을 맞춘 시스템이었다. [20] [21]
[1] 당시(當時) 양김(兩金) 은 아직 정치(政治) 규제(規制) 대상자(對象者)였기 때문에 공동의장(共同議長)을 맡고 있던 민추협(民推協) 내 인사(人士)들을 신당(新黨)에 대거(大擧) 합류시켰다. [2] 당시(當時) 선거(選擧) 제도상(制度上)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이 과반(過半) 의석(議席)을 얻는 건 기정(旣定) 사실(事實)이었다지만, 선명성(鮮明性)을 강조(强調)하는 신한민주당이 제(第)1 야당(野黨)에 오를 경우(境遇)에는 사사건건(事事件件) 정부(政府)와 여당(與黨)을 걸고 넘어질게 뻔했기 때문에 청와대(靑瓦臺) 입장(立場)에서 신한민주당은 껄끄러운 상대(相對)였다. [3] 실제로(實際로) 선거(選擧) 당일(當日) MBC 개표방송(開票放送) 에서는 신한(宸翰)민주당의 약칭(略稱)을 신민(臣民) 이 아닌 신한(新韓) 을 사용(使用)했고, 호칭(呼稱)도 신민당(新民黨) 대신(代身) 신한당 내지(乃至)는 신한(宸翰)민주당 풀 네임을 많이 사용(使用)했다. 하지만 민한당 은 물론(勿論)이거니와 여당(與黨)부터가 민정당(民政黨) 이라는 약칭(略稱)을 쓰고 있었던지라 결국(結局)에는 흐지부지되었다. [4] 참고(參考)로 신민당은 1967년(年) 통합(統合)된 신(新) 한당(汗黨) 중당(中唐) 의 앞글자(글字)에서 따왔다. [5] 참고(參考)로 그 이전(以前)까지 음력(陰曆) 설날 (구정(舊正))이(李) 휴일(休日)이 아니었지만 선거(選擧)에서 승리(勝利)하기 위해 ' 민속(民俗)의 날 '이라는 이름으로 음력설(陰曆설)(1985년(年) 2월(月) 20일(日) )을 하루짜리 공휴일(公休日)로 지정(指定)한다. [6] 실제로(實際로) 이 선거(選擧)의 전남(全南) 지역(地域) 개표결과(開票結果)를 보면 광주(光州)를 제외(除外)하곤 전부(全部)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이 1위(位)를 차지했다. [7] 1981년(年) 제(第)11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選擧) 는 정권(政權) 초기(初期)인데다가 여당(與黨) 관제(管制) 야당(野黨) 이 서로 나눠먹는 식(式)이었기에 국민(國民)의 뜻이 반영(反映)되지 않은 선거(選擧)이므로 제외(除外). 하지만 이런 시각(視角)으로 보면 사실(事實) 민주화(民主化) 이전(以前) 선거(選擧)는 대부분(大部分) 관권선거(官權選擧)의 영향(影響)이 강(剛)했기에 국민(國民)의 뜻이 상당히(相當히) 왜곡(歪曲)된 선거(選擧)긴 하다. 그런데도 득표율(得票率) 면(面)에서 여당(與黨)이 밀린 건 당시(當時) 민심(民心)을 알 수 있는 지표(指標)이기도 하다. [8] 물론(勿論) 5.18 당시(當時) 광주(光州)를 취재(取材)한 외신(外信) 기사(記事)를 인용(引用)해서 들려주는 방식(方式)이었다. 대놓고 주장(主張)했다가는 정부(政府)가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 ... 사실(事實) 1990년대(年代) 초반(初盤)까지만 해도 광주(光州) 민주화운동(民主化運動)을 언급(言及)하는 것 자체(自體)가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9] 물론(勿論) 중앙언론(中央言論)에서는 이러한 내용(內容)이 일절(一切) 공개(公開)되지 않았다. 알다시피 당시(當時)엔 정부(政府)가 대놓고 언론통제(言論統制)를 걸었기 때문. [10] 물론(勿論) 당시(當時) 내란죄(內亂罪) 혐의(嫌疑)로 20년형(年刑)을 선고(宣告)받았다가 형집행정지(刑執行停止) 상태(狀態)였기에 귀국(歸國) 직후(直後) 김포국제공항(金浦國際空港) 에서 동교동 자택(自宅)으로 직행(直行)해야 했다. [11] 아무리 중선거구제(中選擧區制)라도 저정도(低程度) 득표율(得票率)이면 의석차(議席車)가 더 벌어질 법(法)도 한데, 민한당 후보(候補)들이 신민당 돌풍(突風)의 유탄(流彈)을 맞아 3위(位)로 밀리는 바람에 여당(與黨)이 거의 어부지리격(漁夫之利格)으로 13석(席)을 차지할 수 있었다. [12] 13대(代) 총선(總選) 에서는 지역구(地域區) 1위(位) 정당(政黨)이 전국구(全國區) 의석(議席)의 절반(折半)을 얻는 방식(方式)으로 조정(調整)되었다. [13] 다만 김대중 본인(本人)은 신생(新生) 야당(野黨)인 신한민주당보다는 비록 관제(管制) 야당(野黨)이지만 조직(組織) 자체(自體)는 어느 정도(程度) 굳건한 민주(民主)한국당이 제(第)1야당(野黨)으로 유력(有力)하다 생각하여 민주(民主)한국당 에 좀 더 관심(關心)을 가졌다. 대표적(代表的)으로 김대중과 막역(莫逆)했던 정일형 - 이태영 부부(夫婦)의 아들인 정대철(鄭大哲) 종로구(鍾路區) - 중구(中區) 에 민한당 후보(候補)로 출마(出馬)했는데 3위(位)로 낙선(落選)하는데 그쳤다. 그만큼 국민(國民)들의 표심(票心)이 정치판(政治판)에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김대중의 예상(豫想)조차 빗나가게 한 셈이었다. [14] 다만 노신영(盧信永)의 외교적(外交的) 안목(眼目)이 워낙 탁월(卓越)했던 터라 해임(解任)으로 끝내는걸 전두환(全斗煥) 본인(本人)이 매우 아깝게 생각했고, 예전 직책(職責)인 외무부(外務部) 장관(長官)에 재기용(再起用)하는 것을 검토(檢討)했다. 그러나 부총리급인(副總理級人) 안기부장(安企部長)에서 외무부(外務部) 장관(長官)으로 보내는건 모양새(模樣새)가 안 좋았기에, 결국(結局) 국무총리(國務總理) 로 발탁(拔擢)하면서 사실상(事實上) 경질(更迭)의 탈을 쓴 영전(榮轉)이 되어 버렸다. [15] 장세동은 전임자(前任者) 노신영(盧信永)과 달리 강경(强勁)하게 안기부(安企部)를 운영(運營)하며 국민(國民)들의 원성(怨聲)을 샀다. [16] 사실(事實) 양정모 회장(會長)은 일해재단 건(件)부터 시작(始作)해서, 기업사정(企業事情)도 좋지 않은데 정치자금(政治資金)으로 사실상(事實上) 삥을 뜯는 군부정권(軍部政權)에 염증(厭症)을 내고 있었다고 한다. [17] 만약(萬若) 전국적(全國的)으로 신민(臣民)-민한 양당(兩黨)이 암묵적(暗默的)인 공조(共助)를 해서 민정당을 3위(位)로 밀어낸 곳이 더 많은 동시(同時)에 신민당이 그 자리를 차지했더라면 현실화(現實化)되었을 것이다. 실제(實際) 지역구(地域區) 의석수(議席數)가 민정(民情) 87, 신민(臣民) 50석(席)으로 37석(席) 차이(差異)인데, 민정당(民政黨)이 3위(位)로 떨어지고 신민당이 차지한 지역(地域)이 딱 19곳만 더 있었어도 민정(民政) 68, 신민(臣民) 69 로 뒤집혀서 신민당이 전국구(全國區) 총(總) 의석수(議席數)의 2/3인(人) 61석(席)을 독식(獨食)하여 민정(民政) 85±α, 신민(臣民) 130 이 되어버린다. 이러면 민한당 하나만 신민당과 공조(共助)해도 야권(野圈)이 160±α로 거대(巨大)해졌을 테고 그야말로 전두환(全斗煥) 정권(政權)에 강력히(强力히) 맞설 수 있는 원동력(原動力)을 확보(確保)했을 것이다. 물론(勿論) 이랬다면 당시(當時) 막가파 군부정권(軍部政權)이 의회해산(議會解散) 등(等) 막장 행보(行步)를 보였을 수도 있지만, 이럴 경우(境遇) 6월(月) 항쟁(抗爭) 은 2년(年) 먼저 재현(再現)되었을지도 모른다. [18] 의회(議會) 해산(解散) 관련(關聯)해서, 5공화국(共和國) 에서는 대통령제(大統領制)임에도 불구(不拘)하고 대통령(大統領)에게 의회(議會) 해산권(解散權)이 있었다. 삼권분립(三權分立) 저리 가라 물론(勿論) 대통령(大統領)에게 의회(議會) 해산권(解散權)이 없음 에도 의회(議會)를 해산(解散) 하는 친위(親衛) 쿠데타 를 일으킨 박정희(朴正熙) 도 있긴 하지만. 당시(當時) 군부정권(軍部政權)이 어디서 배웠겠는가? [19] 중앙선거관리위원회(中央選擧管理委員會) 의 역대(歷代) 선거(選擧) 결과(結果)에는 충북(忠北)과 경남(慶南)의 신한(宸翰)민주당 당선인(當選人) 2명(名)을 신민주당으로 잘못 적어서 신한(宸翰)민주당 48석(席), 신민주당 3석(席)으로 적고 있다. [20] 출처(出處): 한국(韓國) 방송(放送)에서 초기(初期) 컴퓨터 활용(活用)에 관(關)한 연구(硏究): 선거(選擧) 개표방송(開票放送) 변천사(變遷史)를 중심(中心)으로(1985년-1992년) - 나소미 저. <디지털융복합연구(複合硏究)> 제(第)20권(卷) 제(第)1호(號) 수록. 2022. [21] 이 EDDS는 92년(年) 14대(代) 총선(總選)까지 사용(使用)되었고, 이후(以後)에는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와 증강현실(增强現實) 스튜디오를 본격적(本格的)으로 사용(使用)하기 시작(始作)한 MAGIC으로 대체(代替)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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