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德分)에 이기붕(李起鵬)은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
수립(樹立) 후(後) 초대(初代)
경무대비서실장(景武臺祕書室長)
을 거쳐 1949년(年) 6월(月) 6일(日)부터 1951년(年) 5월(月) 8일(日)까지
제(第)3·4대(代)
서울특별시장(서울特別市葬)
을 지냈는데 사실(事實) 서울특별시장(서울特別市葬)으로 재직(在職)하던 때의 이기붕(李起鵬)은 청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강(漢江)
다리를 끊고 후퇴(後退)를 할 때는
"서울특별시장(서울特別市長)이 된 책임(責任)으로 남겠다."
라고 주장(主張)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만약(萬若)에 여기서 책임(責任)을 지고 서울에 남았다가
조선인민군(朝鮮人民軍)
에 항전(抗戰)하다 죽었다면 친일(親日)도 심(甚)하진 않았기에 오늘날 역사(歷史) 교과서(敎科書)에서는 당연히(當然히) 좌우익(左右翼)을 막론(莫論)하고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간신배(奸臣輩)
가 아니라 역사(歷史)에 길이 남을
노블리스 오블리주
를 실천(實踐)한 위인(爲人)으로 실렸을 것이다. 역사(歷史)의 아이러니다.
그나마 지나가는 말로
시민(市民)들에게 사과(沙果)
한 사실(事實)도 있으니 어떻게 보면 이승만(李承晩)보다 나은 점(點)도 있을지도 모른다. 이후(以後)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事件)
으로 사임(辭任)한
신성모
의 후임(後任)으로
제(第)3대(代)
국방부장관(國防部長官)
에 취임(就任)하여 2인자(人者)로 등극(登極)했고, 1951년(年) 5월(月) 7일(日)부터 1952년(年) 3월(月) 29일(日)까지 역임(歷任)했다. 국방장관(國防長官) 시절(時節)까지만 해도 상당히(相當히) 유능(有能)하고 주변(周邊)의 평(評)도 좋았다.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事件)의 주동자(主動者)들을 공개(公開) 처형(處刑)하는 강수(强手)까지 두면서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었고 하지만 이때 이승만(李承晩)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걸 걱정하게 된건지 이후(以後)론 지나치게 눈치를 보며 정치(政治) 깡패(깡牌)
이정재
를 영입(迎入)하고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改憲)
에 앞장서는 등(等)
무리수(無理手)
가 많아지기 시작(始作)한다.
자기(自己) 아들
이강석
을 후사(後嗣)가 없었던 이승만(李承晩)의 양자(養子)로 입적(入籍)시켜서 자신(自身)의 지위(地位)를 공고히(鞏固히) 다졌다. 당시(當時) 법(法)에는 장자(莊子)는 다른 집 양자(養子)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이걸 어기고 양자(養子)로 입적(入籍)시켰다고 한다. 더군다나
양녕대군(讓寧大君)
파인 이승만(李承晩)과
효령대군
파인 이기붕간(間)의 관계(關係)는 문중(門中)에서도 곤란한 데가 있었으며,
[15]
세간(世間)에서는 아들을 팔아 출세(出世)한다고 까였다. 물론(勿論) 이기붕 자신(自身)으로서도 장남(長男)인 이강석이 이승만(李承晩)의 양자(養子)가 되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었기에 둘째는 안 되겠냐고 했다가 이승만(李承晩)이 이강석 아니면 싫다고 했다고 한다. 일반적(一般的)으로는 장남(長男)을 보내지 않고 차남(次男)을 양자(養子)로 보내는게 당연(當然)한 것인데
[16]
자신(自身)의 대(代)를 이을 장남(長男)을 보냈으니 당연히(當然히) 권력(權力)에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승만(李承晩)은 대통령(大統領) 당선(當選) 후(後) 진짜(眞짜) 왕족(王族)인
이청
을 양자(養子)로 삼으려다가 어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방계(傍系)가 왕족(王族)을 양자(養子)로 들인단 말인가?" 라는 논리(論理)로 차(次)인 후(後) 겉으로는 이청의 입적(入籍)이 '
왕정복고(王政復古)
'를 연상시켜 이승만(李承晩) 스스로 거부(拒否)한다는 형식(形式)으로 뒤만 겨우 수습(收拾)해 둔 터였다.
하지만 잘 나가던 이기붕에게도 시련(試鍊)이 있었으니 바로
1956년(年) 정(情), 부통령(副統領) 선거(選擧)
. 이기붕(李起鵬)은 이승만(李承晩)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副統領) 선거(選擧)에 출마(出馬)했으나
장면(場面)
에게 밀려 미끄러지고 말았다. 낙선(落選)한 이유(理由)는 당시(當時) 국민(國民)들이
자유당(自由黨)
정부(政府)에 염증(炎症)을 느껴서 그런 것도 있으나 이기붕(李起鵬)의 스펙이 장면(場面)보다 떨어진 것도 컸다. 당시(當時) 정계(政界)에서 리더로 인정(認定) 받으려면 유학(留學)가서 박사(博士) 학위(學位)를 받아야 하고 영어(英語)에도 능통(能通)해야 한다는 분위기(雰圍氣)였는데
민주당(民主黨)
신파(新派) 리더인 장면(場面)은 법학박사(法學博士)를 취득(取得)한 데 반(反)해, 이기붕(李起鵬)은 마누라가 구축(構築)한 인맥(人脈)으로 출세(出世)했을 뿐 유학(留學)까지 다녀왔음에도 박사(博士) 하나도 못 딸 정도(程度)로 스펙이 형편(形便) 없었다. 결국(結局) 낙선(落選)해서 50일(日)이나 결석(缺席)할 정도(程度)로 울화통(鬱火통)이 터져 아예 누워버렸고, 김두한 등(等) 야당의원(野黨議員)들에 의(依)해 중환자(重患者), 산송장, 병든 닭이라는 소리까지 듣고말았다.
당시(當時) 대통령(大統領)이었던 이승만(李承晩)조차 승리(勝利)를 장담(壯談) 못할 상황(狀況)이었으나 민주당 후보(候補)였던
신익희
가 유세(遊說) 도중(途中) 급사(急死)하는 바람에 무난히(無難히) 당선(當選)된 것이었다. 신익희(申翼熙)에 비해 훨씬 인지도(認知度)가 낮았던 대통령(大統領) 후보(候補)
조봉암
조차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에서 30%가 넘는 지지율(支持率)을 받았을 정도(程度)였다. 그 후(後) 이기붕(李起鵬)은 장면(場面)을 제거(除去)해야겠다면서
장면(場面) 암살(暗殺)을 시도(試圖)했다가 실패(失敗)하기도 했다
. 1958년(年) 자유당(自由黨)의 돌격대(突擊隊)로서 온갖 궂은 일은 도맡아 하던 정치(政治) 깡패(깡牌) 이정재가 고향(故鄕)인
이천군(伊川郡)
에서
민의원(民議員)
에 출마(出馬)하려고 하자 이정재의 출마(出馬)를 포기(抛棄)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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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自身)이 이천(利川)에서 출마(出馬)했는데, 이 과정(過程)에서 야당(野黨) 후보(候補)도 사퇴(辭退)함으로서 무투표(無投票) 당선(當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