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이기붕 - 나무위키

이기붕

최근(最近) 수정(修正) 시각(時刻):
[ 펼치기 · 접기 ]

국회부의장(國會副議長) · 임시(臨時)의정원 의장(議長)
역임(歷任)한 직위(職位)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대통령실 심볼대한민국 대통령실 흰색 심볼
대통령비서실장
[ 펼치기 · 접기 ]
이승만(李承晩) 정부(政府)
허정(許政) 내각(內閣)
초대(招待)
이기붕
제(第)2대(代)
김양천
제(第)3대(代)
고재봉
제(第)4대(代)
유창준
제(第)5대(代)
장일강
장면(場面) 내각(內閣)
제(第)6대(代)
김준하
장면(場面) 내각(內閣)
박정희(朴正熙) 정부(政府)
초대(招待)
이재항
제(第)2대(代)
이동원
제(第)3대(代)
이후락
제(第)4대(代)
김정렴
제(第)5대(代)
김계원
최규하 정부(政府)
전두환 정부(政府)
제(第)6대(代)
최광수
제(第)7대(代)
김경원
제(第)8대(代)
이범석
제(第)9대(代)
함병춘
제(第)10대(代)
강경식
전두환 정부(政府)
노태우 정부(政府)
제(第)11대(代)
이규호
제(第)12대(代)
박영수
제(第)13대(代)
김윤환
제(第)14대(代)
홍성철
제(第)15대(代)
노재봉
노태우 정부(政府)
문민정부(文民政府)
제(第)16대(代)
정해창
제(第)17대(代)
박관용
제(第)18대(代)
한승수
제(第)19대(代)
김광일
제(第)20대(代)
김용태(金鎔泰)
국민(國民)의 정부(政府)
제(第)21대(代)
김중권
제(第)22대(代)
한광옥
제(第)23대(代)
이상주
제(第)24대(代)
전윤철
제(第)25대(代)
박지원(朴智元)
참여정부(參與政府)
제(第)26대(代)
문희상(文喜相)
제(第)27대(代)
김우식
제(第)28대(代)
이병완
제(第)29대(代)
문재인(文在寅)
이명박(李明博) 정부(政府)
박근혜(朴槿惠) 정부(政府)
초대(招待)
류우익
제(第)2대(代)
정정길
제(第)3대(代)
임태희
제(第)4대(代)
하금열
제(第)5대(代)
허태열
박근혜(朴槿惠) 정부(政府)
제(第)30대(代)
허태열
제(第)31대(代)
김기춘(金淇春)
제(第)32대(代)
이병기(李丙琪)
제(第)33대(代)
이원종
제(第)34대(代)
한광옥
제(第)35대(代)
임종석(任鍾晳)
제(第)36대(代)
노영민(盧英敏)
제(第)37대(代)
유영민(兪英民)
제(第)38대(代)
김대기
제(第)39대(代)
이관섭(李官燮)
제(第)40대(代)
정진석(鄭鎭奭)

대한민국 국방부 심벌
국방부장관
[ 펼치기 · 접기 ]

초대(招待)

이범석
제(第)2대(代)

신성모
제(第)3대(代)

이기붕
제(第)4대(代)

신태영
제(第)5대(代)

손원일

제(第)6대(代)

김용우
제(第)7대(代)

김정렬
제(第)8대(代)

이종찬(李鍾贊)
제(第)9대(代)

현석호
제(第)10대(代)

권중돈
제(第)11대(代)

현석호
제(第)12대(代)

장도영
제(第)13대(代)

송요찬
제(第)14대(代)

박병권
제(第)15대(代)

김성은
제(第)16대(代)

최영희
제(第)17대(代)

임충식
제(第)18대(代)

정래혁
제(第)19대(代)

유재흥
제(第)20대(代)

서종철
제(第)21대(代)

노재현
제(第)22대(代)

주영복
제(第)23대(代)

윤성민
제(第)24대(代)

이기백
제(第)25대(代)

정호용
제(第)26대(代)

오자복
제(第)27대(代)

이상훈
제(第)28대(代)

이종구(李鍾九)
제(第)29대(代)

최세창
제(第)30대(代)

권영해
제(第)31대(代)

이병태
제(第)32대(代)

이양호
제(第)33대(代)

김동진
제(第)34대(代)

천용택
제(第)35대(代)

조성태
제(第)36대(代)

김동신
제(第)37대(代)

이준(李儁)
제(第)38대(代)

조영길
제(第)39대(代)

윤광웅
제(第)40대(代)

김장수(金章洙)



[ 펼치기 · 접기 ]
초대(招待)
김형민
제(第)2대(代)
윤보선
제(第)3·4대(代)
이기붕
제(第)5·6대(代)
김태선
제(第)7대(代)
고재봉
제(第)8대(代)
허정(許政)
제(第)9대(代)
임흥순
제(第)10대(代)
장기영
제(第)11대(代)
김상돈
제(第)12대(代)
윤태일
제(第)13대(代)
윤치영
제(第)14대(代)
김현옥
제(第)15대(代)
양택식
제(第)16대(代)
구자춘
제(第)17대(代)
정상천
제(第)18대(代)
박영수
제(第)19대(代)
김성배
제(第)20대(代)
염보현
제(第)21대(代)
김용래
제(第)22대(代)
고건(櫜鞬)
제(第)23대(代)
박세직
제(第)24대(代)
이해원
제(第)25대(代)
이상배
제(第)26대(代)
김상철
제(第)27대(代)
이원종
제(第)28대(代)
우명규
제(第)29대(代)
최병렬
제(第)30대(代)
조순(趙淳)
제(第)31대(代)
고건(櫜鞬)
제(第)32대(代)
이명박(李明博)
제(第)33·34대(代)
오세훈(吳世勳)
제(第)35-37대(代)
박원순(朴元淳)
제(第)38·39대(代)
오세훈(吳世勳)
SEOUL MY SOUL 한글...

[ 펼치기 · 접기 ]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초대(招待)
장두현
제(第)2대(代)
고원훈
제(第)3대(代)
최린(崔麟)
제(第)4대(代)
박창하
제(第)5대(代)
이동식(移動式)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제(第)6대(代)
김규면
제(第)7대(代)
신흥우
제(第)8대(代)
유억겸
제(第)9대(代)
윤치호
제(第)10대(代)
유억겸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하지 군정(軍政)
하지 과도정부(過渡政府)
제(第)11대(代)
여운형
제(第)12대(代)
유억겸
제(第)13대(代)
정환범
제(第)14대(代)
신익희
제(第)15대(代)
신흥우
장면(場面) 내각(內閣)
송요찬 내각(內閣)
제(第)16대(代)
조병옥
제(第)17대(代)
이기붕
제(第)18대(代)
이철승
제(第)19대(代)
김동하
제(第)20대(代)
이주일
김현철 내각(內閣)
제(第)21대(代)
이효
제(第)22대(代)
민관식
제(第)23대(代)
김용우
제(第)24대(代)
김택수
제(第)25대(代)
박종규
최규하 정부(政府)
제(第)26대(代)
조상호
제(第)27대(代)
정주영(鄭周永)
제(第)28대(代)
노태우(盧泰愚)
제(第)29대(代)
김종하(金鍾河)
제(第)30대(代)
김종열
제(第)31대(代)
김운용
제(第)32대(代)
김운용
제(第)33대(代)
김운용
제(第)34대(代)
이연택
제(第)35대(代)
김정길(金正吉)
제(第)36대(代)
이연택
제(第)37대(代)
박용성
제(第)38대(代)
김정행
제(第)39대(代)
강영중
제(第)40대(代)
이기흥
제(第)41대(代)
이기흥

[ 펼치기 · 접기 ]
제(第)2대(代)
이기붕
( 효령대군파(派) )
제(第)3-5대(代)
이세정
( 익양군파(派) )
제(第)6대(代)
이건웅
( 덕천군파(派) )
제(第)7대(代)
이수길
( 인평대군파(派) )
제(第)8대(代)
이봉우
( 효령대군파(派) )
제(第)9-13대(代)
이재형
( 인성군파(派) )
제(第)14-15대(代)
이범준
( 광평대군파(派) )
제(第)16-20대(代)
이환의
( 효령대군파(派) )
제(第)24-25대(代)
이귀남
( 회산군파(派) )
external/www.doo...
출생(出生)
사망(死亡)
1960년(年) 4월(月) 28일(日) (향년(享年) 63세(歲))
본관(本館)
호(號)
만송(晩松)(?松)
재임기간(在任期間)
제(第)3대(代) 전반기(前半期) 국회의장(國會議長)
제(第)3대(代) 후반기(後半期) 국회의장(國會議長)
제(第)4대(代) 전반기(前半期) 국회의장(國會議長)
[ 펼치기 · 접기 ]
부모(父母)
배우자(配偶者)
자녀(子女)
딸 이강희 [4]
아들 이강석 , 이강욱 [5]
양자(兩者) 이강복 [6]
친인척(親姻戚)
6촌형(寸型) 이기룡 [7]
학력(學歷)
보성학교(寶城學校) (졸업(卒業) / 6회(回))
연희전문학교 (중퇴(中退))
데이버 대학교(大學校) (철학(哲學) / 학사(學士) )
종교(宗敎)
의원(議員) 선수(選手)
2
의원(議員) 대수(臺數)
경력(經歷)
제(第)3·4대(代) 국회의장(國會議長)
서울특별시장(서울特別市葬)
국방부장관(國防部長官)
자유당(自由黨) 중앙위원회(中央委員會) 의장(議長)
대한체육회장(大韓體育會長)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委員長)
1 . 개요(槪要) 2 . 생애(生涯)
2.1 . 초년기(初年期) 2.2 . 광복(光復) 이전(以前) 2.3 . 광복(光復) 이후(以後) 2.4 . 정치(政治) 활동(活動) 2.5 . 3.15 부정선거(不正選擧) 2.6 . 사망(死亡) 2.7 . 사후(事後)
3 . 평가(評價) 4 . 소속(所屬) 정당(政黨) 5 . 선거(選擧) 이력(履歷) 6 . 대중매체(大衆媒體)에서 7 . 여담(餘談) 8 . 둘러보기

1. 개요(槪要) [편집(編輯)]

대한민국(大韓民國) 정치인(政治人) 으로 제(第)3-4대(代) 서울특별시장(서울特別市葬) , 제(第)3대(代) 국방부장관(國防部長官) 이자(利子) 제(第)3·4대(代) 전반기(前半期) 대한민국(大韓民國) 국회의장(國會議長) . 이승만(李承晩) 정부(政府) 의 2인자(人者)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작 부통령(副統領) 직책(職責)을 역임(歷任)한 적은 없다. 이기붕(李起鵬)을 따르며 계승(繼承)한 정치(政治) 세력(勢力)을 ' 이기붕계(界) '라 한다.

2. 생애(生涯) [편집(編輯)]

2.1. 초년기(初年期) [편집(編輯)]

충청북도(忠淸北道) 청주군(淸州軍) 청천면 후평리의 몰락(沒落)한 양반가(兩班家) 집안에서 남매(男妹) 중(中) 장남(長男)이자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의 차남(次男) 효령대군 의 17대손(代孫)이었으나 왕족(王族)으로서의 대우(大宇)는 13대조(對照)에서 끝이 났고 그 뒤 자손(子孫)들의 현달(顯達)로 증(增)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追贈)된 전성군(全城君) 이대(梨大)(李?)는 그의 12대조(對照)였다. 그의 증조부(曾祖父) 이회정(李會正)은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문신(文臣)으로 흥선대원군(大院君) 의 수하(手下)에서 활약(活躍)하여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8] 와 예조판서(禮曹判書)에까지 올랐으나 임오군란(壬午軍亂) 직후(直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잠시(暫時) 정권(政權)을 잡았을 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명(命)을 어기지 않고 명성황후 의 국상(國喪)을 반포(頒布)하였다. 이 때문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중국(中國) 으로 끌려간 이후(以後) 탄핵(彈劾) 을 받고 민씨(閔氏) 정권(政權)에 의(依)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당여(黨與) [9] 라고 하여 고금도(古今島) 에 유배(流配)되었다가 사사(四史) 되었다.

이후(以後) 그의 가계(家計)는 몰락(沒落)하여 어렵게 지냈고 그의 회고(回顧)에 의(依)하면 '할아버지도 20세(歲)에 사망(死亡)하고 아버지마저 오래 산다는게 30세(歲)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死亡)했다.' [10] 아버지가 세상(世上)을 떠났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7세(歲)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과부(寡婦)인 홀어머니 [11] 밑에서 어렵게 성장(成長)했으며 가난한 환경(環境)에서 끼니를 때우지 못하였고 밥을 굶기를 예사로(例事로) 하여 몸이 병약(病弱)하였다 한다. 그가 소학교(小學校)에 다닐 때는 며칠 안있어 죽을 아이를 무엇하러 학교(學校)에 보내나 하고 손가락질하는 동리(洞里) 어른들이 있었다고 하며 소학교(小學校)에 다닐 때는 노래를 잘 불러서 여기저기 뽑혀다니기도 했다.

2.2. 광복(光復) 이전(以前) [편집(編輯)]

선교사(宣敎師)의 도움으로 미국(美國) 아이오와 주(州)의 데이버 대학교(大學校)로 유학(留學)을 가게 된다. 호텔 일, 농장(農場) 일, 접시닦이 일 등(等)을 하면서 어렵게 대학교(大學校)를 다니던 시절(時節)에 신민회(新民會) 집회(集會)에서 밀양(密陽) 박씨(朴氏) 박명삼(朴明三)의 딸 [12] 박마리아 를 만나 1931년(年) 약혼(約婚)했다가 박마리아의 귀국(歸國)으로 약혼(約婚)이 취소(取消)되었지만 1935년(年) 이기붕(李起鵬)이 귀국(歸國)하면서 다시 재회(再會)하여 결혼(結婚)했다. 귀국(歸國) 후(後) 이기붕(李起鵬)은 중추원(中樞院) 참의(參議) 최남이 경영(經營)하던 종로(鍾路) 국일관 지배인(支配人)을 지냈다. [13] 당시(當時) 아내 박(朴)마리아가 현재(現在)의 이화여자대학교 인(人) 이화여자전문학교(李花女子專門學校) 교수(敎授)였기 때문에 여학교(女學校) 교수(敎授) 남편(男便)이 요정(妖精) 을 운영(運營)한다고 말이 많았고 기사화도(記事化度) 되었다.

또한 이 무렵 2남(男) 1녀(女) (이강희, 이강석, 이강욱 ) 을 두었으며 다방 <종로(鍾路)>를 경영(經營)하기도 했고 건축청부업사무소(建築請負業事務所) 등(等) 잡다(雜多)한 일을 거쳐 일제(一齊) 말기(末期)에는 허정(許政) 과 함께 광산(鑛山) 을 경영(經營)하기도 했지만 빛을 보지 못한 채 8.15 광복(光復) 을 맞았다.
external/shindon...
이기붕 일가(一家).

제(第)1공화국(共和國) 의 이기붕 일가(一家). 왼쪽부터 장남(長男) 이강석 , 이기붕, 박마리아, 차남(次男) 이강욱. 이강석과 이강욱 위에 이강희(李康姬, 1935.12.19~1949.5.31) [14] 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지만 이화여중 2학년(學年) 때 사망(死亡)해서 사진(寫眞)에는 없다.

2.3. 광복(光復) 이후(以後) [편집(編輯)]

Birthday of Syng...
1946년(年) 3월(月) 26일(日), 이승만(李承晩) 생일(生日)을 맞아 돈암장 에서 측근(側近)들과 함께 기념(記念) 촬영(撮影)한 이승만(李承晩) 부부(夫婦). 사진(寫眞) 왼쪽 넥타이를 매고 서있는 사람이 이기붕이다.

이렇게 하는 일마다 잘 안 되던 사람이었는데 이승만(李承晩) 이 귀국(歸國)하자 그의 개인(個人) 비서(祕書)가 된 것을 시작(始作)으로 승승장구(乘勝長驅)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의 아내 박(朴)마리아가 출세(出世)와 명예(名譽)에 대(對)한 욕심(欲心)이 많아서 이승만(李承晩) 주변(周邊)에 붙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努力)했다. 특히(特히) 영부인(令夫人) 프란체스카 도너 가 당시(當時) 여성(女性) 정치인(政治人) 임영신 과 불화(不和)가 있었던 틈을 탔다. 임영신이 이승만(李承晩)에 대(對)한 충성심(忠誠心)이 강(强)해서 돈암장 을 들락날락거리자(距離者) 임영신과 이승만(李承晩)이 불륜(不倫) 관계(關係)라고 소문(所聞)났는데 해외(海外)에 있었던 프란체스카의 귀에 들어가서 급히(急히) 귀국(歸國)하고 임영신(任永信)의 돈암장 출입(出入)을 금지(禁止)시켰다.

프란체스카를 만나기 전(前) 이승만(李承晩)은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大學校) 에 유학(留學) 중(中)이던 임영신에게 한때 청혼(請婚)했었지만 거절당했다. 보통(普通) 국외(國外)에서 외국인(外國人)과 결혼(結婚)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들이 귀국시(歸國時)에 처(妻)를 버리고 오는 일이 많아서 임영신이 돈암장에 들락거린게 문제(問題)가 되었던 것. 박마리아는 유창(流暢)한 영어(英語) 실력(實力)으로 프란체스카 여사(女史)와 친분(親分)을 다져서 경제적(經濟的)으로나 사회적(社會的) 지위(地位)로나 별(別) 볼 일 없었던 남편(男便)을 정계(政界)에 들이는데 성공(成功)했다.

2.4. 정치(政治) 활동(活動) [편집(編輯)]

덕분(德分)에 이기붕(李起鵬)은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 수립(樹立) 후(後) 초대(初代) 경무대비서실장(景武臺祕書室長) 을 거쳐 1949년(年) 6월(月) 6일(日)부터 1951년(年) 5월(月) 8일(日)까지 제(第)3·4대(代) 서울특별시장(서울特別市葬) 을 지냈는데 사실(事實) 서울특별시장(서울特別市葬)으로 재직(在職)하던 때의 이기붕(李起鵬)은 청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강(漢江) 다리를 끊고 후퇴(後退)를 할 때는 "서울특별시장(서울特別市長)이 된 책임(責任)으로 남겠다." 라고 주장(主張)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만약(萬若)에 여기서 책임(責任)을 지고 서울에 남았다가 조선인민군(朝鮮人民軍) 에 항전(抗戰)하다 죽었다면 친일(親日)도 심(甚)하진 않았기에 오늘날 역사(歷史) 교과서(敎科書)에서는 당연히(當然히) 좌우익(左右翼)을 막론(莫論)하고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간신배(奸臣輩) 가 아니라 역사(歷史)에 길이 남을 노블리스 오블리주 를 실천(實踐)한 위인(爲人)으로 실렸을 것이다. 역사(歷史)의 아이러니다.

그나마 지나가는 말로 시민(市民)들에게 사과(沙果) 한 사실(事實)도 있으니 어떻게 보면 이승만(李承晩)보다 나은 점(點)도 있을지도 모른다. 이후(以後)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事件) 으로 사임(辭任)한 신성모 의 후임(後任)으로 제(第)3대(代) 국방부장관(國防部長官) 에 취임(就任)하여 2인자(人者)로 등극(登極)했고, 1951년(年) 5월(月) 7일(日)부터 1952년(年) 3월(月) 29일(日)까지 역임(歷任)했다. 국방장관(國防長官) 시절(時節)까지만 해도 상당히(相當히) 유능(有能)하고 주변(周邊)의 평(評)도 좋았다.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事件)의 주동자(主動者)들을 공개(公開) 처형(處刑)하는 강수(强手)까지 두면서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었고 하지만 이때 이승만(李承晩)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걸 걱정하게 된건지 이후(以後)론 지나치게 눈치를 보며 정치(政治) 깡패(깡牌) 이정재 를 영입(迎入)하고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改憲) 에 앞장서는 등(等) 무리수(無理手) 가 많아지기 시작(始作)한다.

자기(自己) 아들 이강석 을 후사(後嗣)가 없었던 이승만(李承晩)의 양자(養子)로 입적(入籍)시켜서 자신(自身)의 지위(地位)를 공고히(鞏固히) 다졌다. 당시(當時) 법(法)에는 장자(莊子)는 다른 집 양자(養子)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이걸 어기고 양자(養子)로 입적(入籍)시켰다고 한다. 더군다나 양녕대군(讓寧大君) 파인 이승만(李承晩)과 효령대군 파인 이기붕간(間)의 관계(關係)는 문중(門中)에서도 곤란한 데가 있었으며, [15] 세간(世間)에서는 아들을 팔아 출세(出世)한다고 까였다. 물론(勿論) 이기붕 자신(自身)으로서도 장남(長男)인 이강석이 이승만(李承晩)의 양자(養子)가 되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었기에 둘째는 안 되겠냐고 했다가 이승만(李承晩)이 이강석 아니면 싫다고 했다고 한다. 일반적(一般的)으로는 장남(長男)을 보내지 않고 차남(次男)을 양자(養子)로 보내는게 당연(當然)한 것인데 [16] 자신(自身)의 대(代)를 이을 장남(長男)을 보냈으니 당연히(當然히) 권력(權力)에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승만(李承晩)은 대통령(大統領) 당선(當選) 후(後) 진짜(眞짜) 왕족(王族)인 이청 을 양자(養子)로 삼으려다가 어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방계(傍系)가 왕족(王族)을 양자(養子)로 들인단 말인가?" 라는 논리(論理)로 차(次)인 후(後) 겉으로는 이청의 입적(入籍)이 ' 왕정복고(王政復古) '를 연상시켜 이승만(李承晩) 스스로 거부(拒否)한다는 형식(形式)으로 뒤만 겨우 수습(收拾)해 둔 터였다.

하지만 잘 나가던 이기붕에게도 시련(試鍊)이 있었으니 바로 1956년(年) 정(情), 부통령(副統領) 선거(選擧) . 이기붕(李起鵬)은 이승만(李承晩)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副統領) 선거(選擧)에 출마(出馬)했으나 장면(場面) 에게 밀려 미끄러지고 말았다. 낙선(落選)한 이유(理由)는 당시(當時) 국민(國民)들이 자유당(自由黨) 정부(政府)에 염증(炎症)을 느껴서 그런 것도 있으나 이기붕(李起鵬)의 스펙이 장면(場面)보다 떨어진 것도 컸다. 당시(當時) 정계(政界)에서 리더로 인정(認定) 받으려면 유학(留學)가서 박사(博士) 학위(學位)를 받아야 하고 영어(英語)에도 능통(能通)해야 한다는 분위기(雰圍氣)였는데 민주당(民主黨) 신파(新派) 리더인 장면(場面)은 법학박사(法學博士)를 취득(取得)한 데 반(反)해, 이기붕(李起鵬)은 마누라가 구축(構築)한 인맥(人脈)으로 출세(出世)했을 뿐 유학(留學)까지 다녀왔음에도 박사(博士) 하나도 못 딸 정도(程度)로 스펙이 형편(形便) 없었다. 결국(結局) 낙선(落選)해서 50일(日)이나 결석(缺席)할 정도(程度)로 울화통(鬱火통)이 터져 아예 누워버렸고, 김두한 등(等) 야당의원(野黨議員)들에 의(依)해 중환자(重患者), 산송장, 병든 닭이라는 소리까지 듣고말았다.

당시(當時) 대통령(大統領)이었던 이승만(李承晩)조차 승리(勝利)를 장담(壯談) 못할 상황(狀況)이었으나 민주당 후보(候補)였던 신익희 가 유세(遊說) 도중(途中) 급사(急死)하는 바람에 무난히(無難히) 당선(當選)된 것이었다. 신익희(申翼熙)에 비해 훨씬 인지도(認知度)가 낮았던 대통령(大統領) 후보(候補) 조봉암 조차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에서 30%가 넘는 지지율(支持率)을 받았을 정도(程度)였다. 그 후(後) 이기붕(李起鵬)은 장면(場面)을 제거(除去)해야겠다면서 장면(場面) 암살(暗殺)을 시도(試圖)했다가 실패(失敗)하기도 했다 . 1958년(年) 자유당(自由黨)의 돌격대(突擊隊)로서 온갖 궂은 일은 도맡아 하던 정치(政治) 깡패(깡牌) 이정재가 고향(故鄕)인 이천군(伊川郡) 에서 민의원(民議員) 에 출마(出馬)하려고 하자 이정재의 출마(出馬)를 포기(抛棄)시키고 [17] 자신(自身)이 이천(利川)에서 출마(出馬)했는데, 이 과정(過程)에서 야당(野黨) 후보(候補)도 사퇴(辭退)함으로서 무투표(無投票) 당선(當選)이 되었다.
1960년(年) 정(情)·부통령(副統領) 선거(選擧) 에서도 자유당(自由黨)의 부통령(副統領) 후보(候補)에 출마(出馬)했으나 후계(後繼) 구도(構圖)를 명확히(明確히) 하겠다고 3.15 부정선거(不正選擧) 라는 최악(最惡)의 사건(事件)을 터뜨린다. 이번(이番)에도 민주당의 대통령(大統領) 후보(候補)였던 조병옥 이 선거(選擧) 2달여(餘)를 앞두고 급사(急死)하였기 때문에 이승만(李承晩)의 재선(再選)은 확실(確實)한 상황(狀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李承晩)이 당시(當時) 나이로 무려(無慮) 86세(歲)였던지라 대통령(大統領) 임기(任期)를 끝까지 마칠 것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18] [19] 부통령(副統領)은 대통령직(大統領職) 승계(承繼)가 예약(豫約)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고 부통령(副統領) 자리에 당선(當選)되기 위해 부정선거(不正選擧)를 적극적(積極的)으로 주도(主導)한 것.

결국(結局) 4.19 혁명(革命) 이 일어나자 4월(月) 22일(日) 국무회의(國務會議) 에서는 이기붕(李起鵬)을 사퇴(辭退)시키기로 합의(合意)했으며 국방장관(國防長官) 김정렬 , 법무장관(法務長官) 홍진기 에게 소식(消息)을 전(傳)하도록 했다. 4월(月) 19일(日) 성난 군중(群衆)이 서대문(西大門) 의 저택(邸宅)으로 몰려온 것을 본 이기붕(李起鵬)은 겁(怯)을 먹고 그들의 눈을 피(避)해 [20] 경기도(京畿道) 포천시(抱川市) 대한민국(大韓民國) 육군(陸軍) 제(第)6군단(軍團) 사령부(司令部) [21] 로 가서 기거(起居)하고 있었는데 이미 스스로 걷지 못할 정도(程度)로 건강(健康)이 악화(惡化)되었고 식사(食事)도 못해서 미군(美軍) 이 준 주스로 연명(延命)했으며 대화(對話)도 박(朴)마리아가 옆에서 말을 알아듣게 설명(說明)해줘야 겨우 했다고 한다. 이미 1957년(年)부터 이기붕(李起鵬)은 각부신경통(各部神經痛)과 협심증(狹心症) 을 앓고 있어서 미국(美國) 월터리드 육군(陸軍) 병원(病院) 등(等) 여러 병원(病院)들을 돌아다녔지만 점점(漸漸) 병세(病勢)가 악화(惡化)되었다.

그 무렵의 이기붕(李起鵬)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혼자서는 화장실(化粧室)도 가지 못하는 중증(重症) 장애인(障礙人) 상태(狀態)라 휠체어를 타야 했고 집 밖으로 나갈 때는 휠체어 밑에 간(肝)이 대소변기(大小便氣)를 달고 다녔다. 4월(月) 25일(日) 오후(午後) 6시(時)에 자택(自宅) 뒷문(뒷門)으로 빠져나와 육군(陸軍) 6군단(群團)으로 피신(避身)할 때에도 대소변(大小便)을 보기 위한 변기(便器)와 신경통(神經痛)을 앓는 다리를 덮을 담요(毯요)를 챙길 정도(程度)였고 앉은 자세(姿勢)로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사실상(事實上) 이기붕(李起鵬)은 부통령(副統領) 역할(役割)을 거의 할 수가 없었고 부통령(副統領) 역할(役割)은 그의 아내인 박(朴)마리아가 대리(代理)했다는 견해(見解)가 유력(有力)하다. 박마리아는 이승만(李承晩)의 아내인 프란체스카와 절친(切親)한 사이였고 권력욕(權力慾)이 강(强)해서 사실상(事實上) 비선(秘線) 실세(實勢)나 다름없었다. 김정렬 장관(長官)의 연락(連絡)을 받고 서대문(西大門)의 집으로 돌아간 이기붕(李起鵬)은 김정렬 장관(長官)으로부터 부통령(副統領) 당선자(當選者)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통보(通報)를 받았다. 이기붕(李起鵬)은 그 말을 듣고 충격(衝擊)을 받아 쓰러졌고 잠시(暫時) 후(後)에 난 그럴 재목(材木)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잘되었다는 말을 했다. 김정렬 장관(長官)은 중앙청(中央廳)으로 가서 이기붕(李起鵬)의 사퇴(辭退) 수락(受諾) 소식(消息)을 전(傳)했고 한갑수 를 시켜 사퇴(辭退) 성명(姓名)을 쓰기 시작(始作)했다. MBC 드라마 <제(第)2공화국(共和國)>에 의(依)하면 자유당(自由黨) 선거대책위원장(選擧對策委員長) 한희석 은 이 한갑수의 사퇴(辭退) 성명(聲明) 초안(草案)을 눈물 짜는 소리가 너무 장황(張皇)하다고 얘기했다. 이는 처음에 사퇴(辭退) 성명(姓名)을 쓰게 할 때 국민(國民)들의 분노(憤怒)를 진정시키기 위해 최대한(最大限) 감명(感銘)깊게 쓰라는 주문(注文)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한편(한便) 이기붕(李起鵬)은 경무대(景武臺) 로 가서 이승만(李承晩)에게 부통령(副統領) 당선자(當選者) 자리에서 사퇴(辭退)를 하겠다는 의사(意思)를 전(傳)했지만 이승만(李承晩)은 그럴 수 없다고 고집(固執)을 부렸고 김정렬 국방장관(國防長官)이 설득(說得)하고 나서야 겨우 동의(同意)했다. 하지만 다음날의 신문(新聞) 기사(記事)에는 이기붕 사퇴(辭退)가 아니라 이기붕 '사퇴(辭退) 고려(高麗)'라는 기사(記事)가 실렸다. 국무위원(國務委員)들은 김정렬 장관(長官)에게 항의(抗議)했고 확인(確認) 결과(結果) 자유당(自由黨) 강경파(强勁派)들의 반발(反撥)로 사퇴(辭退) 성명서(聲明書)가 사퇴(辭退) 고려(高麗) 성명서(聲明書)로 후퇴(後退)한 것이 드러났는데 이는 결과적(結果的)으로 자충수(自充手)였다. 국민(國民)들은 이 '사퇴(辭退) 고려(高麗)'를 시간(時間)을 벌려는 얄팍한 수작(酬酌)으로 평가(評價)했고 계엄령(戒嚴令) 선포후(宣布後) 잠시(暫時) 수면(水面)아래로 가라앉았던 국민(國民)들의 분노(憤怒)에 다시 불을 당겨버린 꼴이었다.

여론(輿論)이 들끓자 다음날에 이기붕(李起鵬)은 직접(直接) 모든 공직(公職)에서 사퇴(辭退)할 것이라는 의사(意思)를 발표(發表)했지만 결국(結局) 4월(月) 25일(日)에 이기붕(李起鵬)의 집은 파괴(破壞)되었고 시민(市民)들은 가구(家具)들을 가져나와 불태웠으며, 이기붕(李起鵬)은 다시 6군단(軍團) 사령부(司令部)로 달아났다가 경무대(景武臺) 별관(別館) 36호실(號室)로 옮겼다. 그리고 다음 날인 4월(月) 26일(日)에 이승만(李承晩)은 하야(下野)를 선언(宣言)했고 다음 날인 4월(月) 27일(日)에 결국(結局) 하야(下野)함으로써 이기붕(李起鵬)의 마지막 방패막(防牌幕)이었던 이승만(李承晩) 정부(政府) 는 붕괴(崩壞)되고 말았다.

2.6. 사망(死亡) [편집(編輯)]

결국(結局) 4.19 혁명(革命) 이 일어난 지 9일(日)째되던 1960년(年) 4월(月) 28일(日) 새벽 5시(時) 20분(分) 경무대(景武臺) 비서동(祕書洞) 36호실(號室)에서 당시(當時) 육군(陸軍) 소위(少尉)였던 장남(長男) 이강석에 의(依)해 이기붕(李起鵬)을 포함(包含)한 가족(家族)들은 모조리 권총(拳銃) 으로 살해(殺害) 되었고 이강석도(度) 자살(自殺) 했다. [22] 향년(享年) 63세(歲). 참으로 비참(悲慘)한 최후(最後)였는데 공교롭게도 같은날 아침 미국(美國) 대사(大使) 맥카나기(氣)는 이기붕 내외(內外)의 망명(亡命) 신청(申請)이 수락(受諾)되었다는 미국(美國) 정부(政府) 의 뜻을 전달(傳達)한 상태(狀態)였다.

이강석이 어떤 심정(心情)으로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對)해서는 지금(只今)까지도 별로(別로) 알려진 바가 없으며 가족(家族)들 전부(全部)가 같이 죽기로 합의(合意)하고 죽은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일전(日前)에 사는게 힘들다고 자살(自殺) 기도(企圖)를 여러 번(番) 했다고 하며 그로 인해 치사량(致死量)의 수면제(睡眠劑)를 복용(服用)하고 이미 자살(自殺)한 상태(狀態)에서 이강석이 권총(拳銃) 두 자루를 준비(準備)하여 머리와 가슴에 각각(各各) 대고 쏘았다는 것이 현재(現在)까지 유력(有力)하다. 훗날(後날) 조사(調査)한 바에 따르면 이강석의 시신(屍身)에는 머리와 가슴에 총상(總狀) 이 발견(發見)되었다고 한다.

한 자루의 총(銃)만 사용(使用)할 경우(境遇) 실패(失敗)할 가능성(可能性)이 있기 때문인데 이는 사실(事實) 종종(種種) 있는 일이다. 이강석의 사인이 타살(他殺)이라는 루머가 퍼진 이유(理由)는 뜬금없게도 도조(度祖) 히데키 때문이다. 이유(理由)는 도조(度祖) 히데키가 가슴에 권총(拳銃)을 겨누고 쐈는데 자살(自殺)이 실패(失敗)한 것. 사실(事實) 도조(度祖) 히데키는 콜트 22 같은 소구경(小口徑) 권총(拳銃)을 사용(使用)했기 때문에 자살(自殺) 실패(失敗) 가능성(可能性)이 너무나도 높았고, 이 때문에 자살(自殺)할 의도(意圖)로 가슴을 쏜 게 아니라 쇼였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소구경(小口徑) 권총(拳銃) 때문에 자살(自殺)이 실패(失敗)한 것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고 가슴에 총(銃)을 쐈다가 죽지 못한 것이 주목(注目)을 받아 "가슴을 쏘면 자살(自殺)에 실패(失敗)한다."는 속설(俗說)이 퍼지고 이에 더해 "이강석이 가슴에 총(銃)을 맞았기 때문에 타살(他殺)"이라는 말이 퍼지면서 타살론(他殺論)이 제기(提起)된 것이다.

2.7. 사후(事後) [편집(編輯)]

이기붕과 가족(家族)들의 시신(屍身)은 이후(以後) 수습(收拾)해서 1960년(年) 4월(月) 30일(日) 수도육군병원(首都陸軍病院) 교회(敎會)에서 장례식(葬禮式)을 치렀다. 장례식(葬禮式)에는 이승만(李承晩) 내외(內外)와 허정(許政) 등(等) 내각(內閣) 인사(人事), 여야(與野) 국회의원(國會議員)들이 참석(參席)했으며 장지(葬地)는 망우리 공동묘지(共同墓地) 였다. 1970년대(年代)까지는 이기붕(李起鵬)의 비서(祕書) 등(等) 지인(知人)들이 망우리에서 추모(追慕) 활동(活動)을 벌인 것이 확인(確認)되며, 1976년(年) 경(頃)에 경기도(京畿道) 고양시(高陽市) 파주시(坡州市) 의 경계(境界)에 있는 명봉산 자락의 한 사설묘지(社說墓地)로 이장(移葬)했다.

이기붕(李起鵬)의 가문(家門)인 효령대군파(派) 종중(宗中)에서 가끔 제례(祭禮)를 지내지만 묘지(墓地) 관리비(管理費)도 내지 않아서 그대로 방치(放置)되고 있다. 2008년경(年頃)부터 미국(美國)에서 이기붕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한 여성(女性)이 거액(巨額)의 관리비(管理費)를 보내서 석축도(石築度) 새로 만들었지만 이마저도 몇년(年) 후(後) 끊겼다.

3. 평가(評價) [편집(編輯)]

한국(韓國) 근현대사(近現代史)를 통틀어 좋은 평가(評價)를 찾아볼 수가 없는 몇 안되는 인물(人物)로 , 좌우(左右)를 불문(不問)하고 좋아하거나 지지(支持)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의 정치(政治) 인생(人生) 내내 정치적(政治的) 동반자(同伴者)였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大統領)의 경우(境遇) 전쟁(戰爭) 중(中) 본인(本人)들만 무책임(無責任)하게 도망간 것과 그에 따른 책임(責任)은커녕 적지 않은 학살(虐殺) 사건(事件) 동참(同參), 후일(後日)의 독재(獨裁) 행각(行脚) 등(等)으로 맹렬(猛烈)하게 비난(非難)받기도 하지만, 시대(時代)와 위치(位置)로 인한 한계(限界)와, 인의장막(仁義帳幕)과 말기(末期) 중(中) 극심(極甚)한 노화(老化) 때문에 돌아가는 현실(現實)을 파악(把握)해지 못해서 그랬다는 최소한(最小限)의 변론(辯論)이 있으며. 논란(論難) 이 있긴 하지만 독립운동(獨立運動)에 투신(投身)해 한국(韓國) 독립(獨立)에 공헌(貢獻)했고, 문교부에 원자력(原子力)과를 신설(新設)하고 1958년(年)에 원자력법(原子力法)을 제정(制定)하면서 원자력(原子力) 발전소(發電所)를 향(向)한 연구(硏究)를 시작(始作)한 것,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 체결(締結)과 평화선(平和線) 선포(宣布)를 통(通)한 독도(獨島) 수호(守護), 농지개혁법(農地改革法) 실시(實施), 의무교육(義務敎育) 시행등(施行等) 국가(國家) 초기(初期)의 기틀을 닦은 족적(足跡)도 결코(決코) 부정(否定)할 수 없기에 공과(工科) 과(科)가 양립(兩立)하여 아직까지도 평가(評價)가 극명히(克明히) 갈리는 인물(人物)인 것과 대비(對比)된다. [23]

하지만, 이기붕(李起鵬)은 그러한 공로(功勞)도 없이 오직 자신(自身)의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汲汲)했다. 오히려 선거(選擧) 당시(當時) 이승만(李承晩)의 재선(再選)이 확실(確實)한 상황(狀況)이라 이기붕(李起鵬)이 실책(失策)을 저지르지만 않았어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大統領)이 하야(下野)까지 하지는 않아도 됐을 것이라면서 아쉬워 하는 경우(境遇)도 더러 있다. 물론(勿論), 당시(當時) 이승만(李承晩)의 나이와 건강상태(健康狀態) 등(等)을 고려(考慮)했을 때 임기(任期)를 무사히(無事히) 마치고 사망(死亡)했을 가능성(可能性)은 거의 없었지만 이렇게 되면 적어도 대한민국(大韓民國) 대통령(大統領) 임기(任期) 중(中)에 죽는 것이니 전국적(全國的)으로 시위대(示威隊)가 들고 일어나서 강제(强制)로 하야(下野)해서 비참(悲慘)하게 타국(他國)에서 최후(最後)를 맞는 것 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다만, 이 사람이 딱 한 가지 잘 한 게 있는 것이라면 바로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事件) 을 효율적(效率的)으로 처리(處理)한 것이었다.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事件) 관련자(關聯者) 김윤근 일당(日當)을 제대로 사법처리(司法處理)하지 않았다면 현대판(現代版) 임오군란(壬午軍亂) 이 터졌을 것이고 한국전쟁(韓國戰爭) 중(中)인 대한민국(大韓民國)에 크나큰 치명타(致命打)를 안겨줬을 것이다. 이기붕(李起鵬)은 김윤근 일당(一黨)이 군납비리(軍納非理) 를 저질러서 국가(國家)를 지키려고 한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들을 모두 굶겨죽이고 얼어죽게 만든 죄상(罪狀)들을 낱낱이 밝혀내고 죄(罪)에 맞는 합당(合當)한 처벌(處罰)인 사형(死刑)을 선고(宣告)했고 최초(最初)로 공개총살형(公開銃殺型)이라는 초강수(超强手)를 두어 대한민국(大韓民國)을 구(救)했다.

결국(結局) 과오(過誤)가 너무 많은 이기붕이지만, 최소한(最小限) 이것만큼은 긍정적(肯定的)으로 평가(評價)를 할 수 있겠다. 물론(勿論), 이런 공(公)으로도 덮지 못 할 만큼 이기붕(李起鵬)이 저지른 과오(過誤)가 너무 큰데다 3.15 부정선거(不正選擧)처럼 본인(本人) 의도(意圖)치 않게 이승만(李承晩)의 몰락(沒落)을 불러일으킨 당사자(當事者) 중(中) 한 명(名)이라 덮어지지 않는 경우(境遇)도 제법 있다.

4. 소속(所屬) 정당(政黨) [편집(編輯)]

소속(所屬)
기간(期間)
비고(備考)
자유당 투명
1951 - 1960
창당(創黨)
정계(政界) 입문(入門)
사망(死亡)

5. 선거(選擧) 이력(履歷) [편집(編輯)]

연도(鳶島)
선거(選擧) 종류(種類)
선거구(選擧區)
소속(所屬) 정당(政黨)
득표수(得票數) (득표율(得票率))
당선(當選) 여부(與否)
비고(備考)
1954
서울 10 [24]
자유당 투명
12,923 (58.63%)
당선(當選) (1위(位))
초선(初選) [25]
1956
3,805,502 (44.03%)
낙선(落選) (2위(位))
1958
경기(京畿) 13 [26]
무투표(無投票) 당선(當選)
재선(再選) [27] [28]
1960
8,337,059 (79.19%)
당선(當選) (1위(位))

6. 대중매체(大衆媒體)에서 [편집(編輯)]

7. 여담(餘談) [편집(編輯)]

  • 실제(實際) 왕실(王室)의 후손(後孫)으로 효령대군 의 17대손(代孫)이며 아버지는 예조판서(禮曹判書) 이회정의 손자(孫子) 이낙의다.
  • 이기붕(李起鵬)은 생전(生前)에 국어학자(國語學者) 한갑수 손도심 , 임철호 , 오범수 , 최승만, 김영찬, 김일환 등(等) 지인(知人) 150여명(餘名)을 모아다가 '만만(萬萬)클럽'을 만들기도 했는데, 멤버들은 이기붕 사후(事後) 1970년(年)에 묘비(墓碑)까지 쓸 정도(程度)로 인연(因緣)을 계속(繼續) 이어갔다.
  • 4.19 혁명(革命) 직전(直前) "민족(民族)의 해와 달"이라는 책(冊)이 출간(出刊)되어 이승만(李承晩)을 민족(民族)의 해, 이기붕(李起鵬)을 민족(民族)의 달로 찬양(讚揚)하였다. # 출판업계(出版業界)까지 권력(權力)에 순종(順從)하였다는 증거(證據)인데 책(冊)이 나온지 1년(年) 만에 혁명(革命)으로 비참(悲慘)한 최후(最後)를 맞았으니 그야말로 권력무상(權力無常)이다.
  • 박마리아 의 서적(書籍)도 충격적(衝擊的)이라는데 서적(書籍)을 신촌(新村) 헌책방(헌冊房)에서 본 마광수 의 에세이에 보면 "누가 이 글만 알고 박(朴)마리아가 나쁜 사람인지 생각할 수 있는가!"라고 한탄(恨歎)했다. 네이버 지식인(知識人) 같은 곳을 보면 여성(女性)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인 김마리아 와 혼동(混同)하는 글도 발견(發見)되는데 전혀(全혀) 다른 사람이니 주의(注意)할 것. 김마리아와 박마리아의 공통점(共通點)은 세례명(洗禮名) 과 여성(女性) 교육운동가(敎育運動家), 다른 김마리아(金瑪利亞)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배속(配屬)된 무장독립운동가(武裝獨立運動哥)라는 점(點) 뿐이다.
  • 이승만(李承晩)의 정치(政治) 분석(分析) 서적(書籍) ' 일본(日本) 내막기 '의 번역(飜譯)에도 이기붕과 박(朴)마리아가 관여(關與)했다. 책(冊)인 'Japan Insideout'은 2차대전(次大戰) 전(前)에 미국(美國)에서 영어(英語)로 출간(出刊)되었다. 책(冊)을 번역(飜譯) 의뢰(依賴)받은 분은 기껏 번역(飜譯)했더니 박(朴)마리아가 중간(中間)에 가져와서 최덕신(崔德新) 번역(飜譯)으로 먼저 책(冊)을 만들어 이승만(李承晩)에게 선물(膳物)했다. 나중에 책(冊)은 동일(同一)한 번역자(飜譯者)의 손으로 '일본(日本) 군국주의(軍國主義) 의 내막(內幕)'이라는 제목(題目)으로 1980년대(年代)에 재출간(再出刊)된다.
  • 이기붕(李起鵬)의 유산(遺産) 상당수(相當數)는 상속인(相續人)인 사후(事後) 양자(養子) 이강복이나 연고자(緣故者) 등(等)에게 양도(讓渡)됐으나 이승만(李承晩) 정권(政權) 때 부정축재(不正蓄財)한 자금(資金)은 4.19 혁명(革命) 이후(以後) 환수(還收)되어 공항(空港)대로 를 건설(建設)하는데 쓰였다. 이기붕(李起鵬)의 저택(邸宅)은 1960년(年) 4.19 혁명(革命) 당시(當時) 시위대(示威隊)에게 가재도구(家財道具) 등(等)이 파손(破損)된 후(後) 5월(月) 27일(日)부터 '4.19혁명(革命) 희생자(犧牲者) 유족회(遺族會)'가 사무실(事務室)로 썼다. 1963년(年) 자택(自宅)이 국가(國家)로 환수(還收)되자 4.19 관련(關聯) 단체(團體)에 무상(無償) 대여(貸與)하여 1964년(年) 4.19기념(記念) 사설도서관(私設圖書館)이 개설(開設)됐는데 현재(現在)의 4.19혁명기념도서관(革命記念圖書館) 이다. 1971년(年)에 새 건물(建物)이 들어서면서 과거(過去) 이기붕 때 흔적(痕跡)은 전부(全部) 사라졌다.
  • 3.15 부정선거(不正選擧) 및 이승만(李承晩)의 양자(兩者) 관련(關聯)으로 한국(韓國) 권력(權力) 2인자(人者)를 굳히면서 이승만(李承晩)의 자유당(自由黨) 정부(政府)가 무너지게 되는 계기(契機)를 마련한 자(者)이자 대한민국(大韓民國) 정치인(政治人) 사상(史上) 최악(最惡)의 인물(人物)로 손꼽히는 자(者)이지만 현재(現在) 욕(辱)은 이승만(李承晩)이 거의 다 먹는다. 하지만 부정선거(不正選擧) 이후(以後) 사회(社會) 분위기(雰圍氣)는 이기붕(李起鵬)이 부정선거(不正選擧) 책임자(責任者)로 욕먹는 분위기(雰圍氣)였다고 한다. 애초(애初)에 이승만(李承晩)은 조병옥(趙炳玉)이 사망(死亡)함에 따라 단독(單獨) 후보(候補)로서 당선(當選)이 확정(確定)이었기 때문에 굳이 부정선거(不正選擧)를 할 이유(理由)가 없었다. 시민(市民)들은 이승만(李承晩)이 독재자(獨裁者)이기는 해도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였기 때문에 시민(市民) 대표(代表)를 보내 정중(鄭重)하게 면담(面談)을 요청(要請)했고 이승만(李承晩)도 당시(當時) 나이가 많아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고 버티는게 자기(自己)에게 불리(不利)하다고 판단(判斷)했는지 하야(下野)를 선택(選擇)했는데 사실(事實) 하야 때는 나이가 85세(歲)였다.
  • 이승만(李承晩)을 숭배(崇拜)하는 자(者)들에겐 이기붕 때문에 이승만(李承晩)이 억울(抑鬱)하게 매도(罵倒)당한다고 방패막이(防牌막이)로 쓰는 경우(境遇)도 있다. 올인코리아라는 단체(團體)가 쓴 이승만(李承晩) 미화(美化) 책자(冊子)에서도 이기붕 때문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大統領)이 매도(罵倒)당한다면서 밑사람을 잘못 등용(登用)한 것뿐이라고 옹호(擁護)했는데 비슷한 경우(境遇)가 박정희(朴正熙) 비난(非難) 방패막이(防牌막이)로 쓰는 차지철 . 물론(勿論) ' 그런 주장(主張)들이 틀린 말도 아니지만 " 밑사람을 잘못 등용(登用)한 것도 지도자(指導者)로서 책임(責任)이 있는 부분(部分)이다.
  • 6.25 전쟁(戰爭) 직전(直前)까지 북한(北韓)이 점령중(占領中)이었던 강원도(江原道) 고성군(高城郡) 해변(海邊)에 김일성(金日成)이 당시(當時) 어린아이였던 김정일과 함께 머물렀던 시설(施設)(별장(別莊))이 지금(只今)도 남아있는데, 정전(停戰) 직후(直後) 이승만(李承晩)과 이기붕(李起鵬)도 인근(隣近) 화진포(花津浦) 주변(周邊)에 별장(別莊)을 지어 지금(只今)까지 남아 관리(管理)되어 오고 있다.
  • 사적(史跡)으로는 이종찬(李鍾贊) 과 친(親)한 사이였다. 이종찬이 육군참모총장(陸軍參謀總長)에 갓 임명(任命)될 당시(當時) 미혼(未婚)이었는데, 이미 마음에 둔 여인(女人)이 있었지만, 집안이 형편없다는 이유(理由)로 어머니의 반대(反對)가 심(甚)했다. 이에 이기붕(李起鵬)이 직접(直接) 이종찬(李鍾贊)의 어머니를 찾아가서 '일국(一國)의 참모총장(參謀總長)이 미혼(未婚)으로 남아 있는건 체면상(體面上) 맞지 않은 일'이라고 설득(說得)해서 이종찬이 혼인(婚姻)하게 된 계기(契機)가 됐다고 한다.
[ 펼치기 · 접기 ]
직위(職位)
명단(名單)

[ 펼치기 · 접기 ]


[1] 음력(陰曆) 1896년(年) 12월(月) 20일(日) . 80년대(年代) 인명사전(人名事典)에는 이 음력(陰曆)대로 1896년생(年生)으로 나오곤 했다. [2] 효령대군파(派) 17대손(代孫), 시조(時調) 41세손(世孫) '起'자(者) 항렬(行列). [3] 야인시대(野人時代) 115회(回)에서는 15대손(代孫)으로 말함 [4] 李康姬, 1935 ~1949. [5] 李康旭, 1940 ~1960. [6] 李康福, 이기붕(李起鵬)의 7촌(寸) 조카로 이기붕 사후(事後) 양자(養子)로 입적(入籍)되었다. [7] 李起龍,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 의 영어(英語) 교수(敎授)였다. 이기붕(李起鵬)의 사촌형(四寸兄)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實際로) 족보(族譜)를 보면 6촌형(寸型)이다. [8] 判義禁府事. 종(種)1품(品). [9] 黨與. 한편(한便)이 되는 무리. [10] 《선원속보(船員速報)(璿源續譜)》에 의(依)하면 조부(祖父) 이석우(李錫宇)는 계축년(癸丑; 1853년(年))에 태어나 신사년(紳士年)(辛巳; 1881년(年))에 사망(死亡)했다. 아버지 이낙의(李洛儀)는 병자년(丙子年)(丙子; 1876년(年))에 태어났다가 1904년(年)에 사망(死亡)했으니 28세(歲)에 사망(死亡)한 것이 된다. [11] 교리(敎理)(校理)를 지낸 은진(恩津) 송씨(宋氏) 송규원(宋圭元)의 딸로 을해년(乙亥年)(乙亥; 1875년(年))에 태어났다. [12] 출처(出處) 사진(寫眞). 이기붕 족보. [13]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종로구(鍾路區) 관수동에 있는 국일관이다. 개점(開店) 당시(當時)부터 현재(現在)까지 존속(存續)되어 온 상호(相互)로는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지금(只今)은 주인(主人)도 바뀌고 용도(用途)도 달라져 일반(一般) 상가(商家) 건물(建物)로 쓰인다. [14] 족보(族譜)에서도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15] 여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전통적(傳統的)으로 양자(兩者)는 본인(本人)보다 한 항렬(行列) 낮은 항렬(行列)에 해당(該當)하는 친척(親戚)을 들여야 하는데, 이강석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8대손(代孫)이라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손(代孫)인 이승만(李承晩)보다 두 항렬(行列)이 낮았기 때문에 주변(周邊)에서는 족보(族譜)가 꼬였다는 얘기가 나왔다. 바로 아랫항렬(行列)의 친척(親戚)을 양자(養子)로 들이는 예법(禮法)에 따르면 이강석이 아니라 차라리 이기붕(李起鵬)이 직접(直接) 이승만(李承晩)의 양자(養子)로 들어가는 것이 예법(禮法)에 맞다. 실제로(實際로) 이기붕(李起鵬)은 항렬(行列)로 보나 나이로 보나 이승만(李承晩)의 아들뻘이다. 물론(勿論) 이기붕(李起鵬)도 이강석처럼 장남(長男)이라 법(法)을 어기고 양자(養子)로 들어간다는 건 이 경우(境遇)에도 변(變)함이 없다. 다만 장남(長男)이 양자(養子)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예법상(禮法上)의 문제(問題)라기보다는 당시(當時) 법률상(法律上)의 문제(問題)인데, 전통적(傳統的)으로 장남(長男)은 다른 사람의 양자(養子)로 보내지 않는 것이 일반적(一般的)이었지만 절대적(絶對的)인 것은 아니어서 장남(長男)을 양자(養子)로 보낸 경우(境遇)도 간혹(間或) 있었기 때문이다. [16] 물론(勿論), 오늘날 기준(基準)으로도 어림도 없는 일이긴 하다. [17] 흔히 서울에서 자유당(自由黨) 지지율(支持率)이 바닥이라 당선(當選)이 어려워서 그랬다는 이야기가 돌지만, 정작 이기붕(李起鵬)의 원래(元來) 선거구(選擧區)인 서대문(西大門) 을(乙)에서는 자유당(自由黨) 후보(候補)인 최규남 이 과반(過半)으로 당선(當選) 된 점(點)을 미루어 볼 때, 자유당(自由黨) 내(內)에서 이정재 세력(勢力)을 견제(牽制)해야 한다는 의견(意見) 때문에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튼 무소속(無所屬)으로라도 출마(出馬)하려는 이정재를 구속(拘束)시키겠다는 위협(威脅)으로 출마(出馬)를 포기(抛棄)하게 한다. [18] 의학기술(醫學技術)의 발달(發達)도 고려(考慮)해야 하겠지만 당시(當時) 기준(基準)으로 이승만(李承晩)보다 오래 산 국가원수(國家元首)를 따져보면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까지 가야 한다. [19] 참고(參考)로 이승만(李承晩)은 1965년(年)에 사망(死亡)했기 때문에 4.19 혁명(革命) 으로 이승만(李承晩) 정권(政權)이 몰락(沒落)하지 않았어도 이기붕(李起鵬)이 대통령(大統領)이 될 일은 없었다(...). 물론(勿論) 대통령직(大統領職)에 수반(隨伴)되는 스트레스로 수명(壽命)이 줄었을 수는 있다. [20] 이때 이기붕(李起鵬)의 저택(邸宅) 냉장고(冷藏庫)에서 수박을 발견(發見)한 군중(群衆)들은 더욱 거세게 들고 일어났다는 소문(所聞)이 있다. 일반인(一般人)들은 제철 과일도 먹기 힘든 시대(時代)인데 수박을 4월(月)에 구(求)해서 시원하게 두고 먹는다는 건 당시(當時)로서는 상당(相當)한 사치(奢侈)이기 때문이다. [21] 이때 6군단(軍團) 사령관(司令官)이 5.16 군사정변(軍事政變) 당시(當時)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 교장(校長)으로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 생도(生徒)들의 혁명(革命) 지지(支持) 시위(示威) 동원(動員)에 반대(反對)하다 ‘반혁명(反革命) 장성(將星) 1호(號)’로 체포(逮捕)되어 강제(强制) 예편(豫編)당한 강영훈 이었다. [22] 다만 일가족(一家族) 전원(全員)이 사망(死亡)한지라 이기붕 일가(一家)의 합의(合意)를 봐서 다같이 죽기로 한 건지( 동반자살(同伴自殺) ) 이기붕 일가(一家)는 죽을 생각이 없었는데 이강석이 일가족(一家族)을 죽이고 자살(自殺)한 건지( 살해(殺害) 후(後) 자살(自殺) )는 알 수 없다. [23] 당장(當場) 3.15 부정선거(不正選擧) 이전(以前) 때만 해도 대다수(大多數)의 국민(國民)들은 이승만(李承晩)에 대(對)한 불만(不滿)이 쌓였을망정, 사망(死亡)하기 이전(以前)까지 대통령(大統領)의 직위(職位)를 유지(維持)하길 바라거나 나름대로 우호적(友好的)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결코(決코) 적지 않았고, 4.19 선거(選擧) 이후(以後) 이승만(李承晩)의 하야(下野) 때만 해도 학생(學生) 시위대가(示威代價) 만수무강(萬壽無疆) 하시라는 글을 이화장 대문(大門) 앞에 붙이거나 비교적(比較的) 안타깝다는 반응(反應)도 나왔지만, 이기붕 일가(一家)의 비참(悲慘)한 몰락(沒落)에 대(對)해서는 환호(歡呼)했으면 환호(歡呼)했지, 이승만(李承晩)처럼 동정(同情)을 하는 사람은 찾아볼수가 없었다. [24] 서대문(西大門) 을(乙) [25] 전(前)·후반기(後半期) 국회의장(國會議長) [26] 이천군(伊川郡) [27] 전반기(前半期) 국회의장(國會議長) [28] 1960.4.28 사망(死亡) [29] 당선인(當選人)의 사망(死亡)으로 인한 재선거(再選擧) 결정(決定) [30] 병약(病弱)했던 모습이 부각(浮刻)되었으며 항상(恒常) 느긋한 모습을 유지(維持)하지만 박마리아 가 지나치게 나대면 "계집년이 너무 나선다"면서 다그치는 권위주의적(權威主義的)인 모습도 보인다. 조병옥 과는 사석(私席)에서 친구(親舊)처럼 말놓고 지내며 서로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 막후(幕後) 협상(協商)을 벌이는 모습도 연출(演出)되었다. 걷기조차 계속(繼續) 힘들어하는 모습에 이강석 이 "아버지, 정치(政治) 그만둬, 정치(政治)를 뭐하려고 해, 죽을려고 해?"라고 따지는 모습에 "알았어, 안할께. 응?"하면서 너털웃음을 짓는 인간적(人間的)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3.15 의거(依據) 가 발생(發生)했을 때에는 상황(狀況) 파악(把握) 못하고 기자(記者) 들 앞에서 "총(銃)은 쏘라고 준 거지, 가지고 놀라고 준게(皴揭) 아니다."라는 실제로(實際로) 했던 발언(發言)을 그대로 표현(表現)했다. 결국(結局) 4.19 혁명(革命) 이 발발(勃發)하자 앓아 누운 상태(狀態)에서 업혀서 제(第)6군단(軍團) 으로 피신(避身)하고 그 와중(渦中)에서도 권력(權力) 에 대(對)한 미련(未練)을 못 버려 깔끔하게 사퇴(辭退)를 하지 않고 사퇴(辭退) 고려(高麗)라는 애매모호(曖昧模糊)한 말을 해서 민중(民衆)의 분노(憤怒)를 극대화(極大化)시켰다. 이승만(李承晩) 이 하야 결심(決心)을 하자 6군단(群團)에서도 머무르지 못하고 경무대(景武臺)로 왔고 결국(結局) 이강석에 의(依)해 가족(家族)이 집단(集團) 자살(自殺)한다. [31] 이기붕 일가(一家)의 죽음이 곽영주 에 의(依)한 것이라는 가설(假說) 자체(自體)는 전혀(全혀) 언급(言及)하지 않지만 이기붕(李起鵬)을 귀찮은 존재(存在)로 여기는 곽영주가 이기붕 일가(一家)가 경무대(景武臺)로 왔다는 말을 듣고 "이것들 차라리 집단(集團) 자살(自殺)해줬으면 좋겠네..."라는 식(式)으로 한마디 내뱉는 것으로 표현(表現)하였다. [31] < 제(第)1공화국(共和國) >에서는 가족(家族)들을 만난 이강석이 직접(直接) 총(銃)으로 쏘고 자살(自殺)하는 것으로 나오는 반면(反面) < 제(第)2공화국(共和國) >에서는 직접적(直接的)으로 보여주지 않고 이강석이 이기붕 일가(一家)가 머무르는 건물(建物)로 들어가고 잠시(暫時) 후(後) 총성(銃聲)이 5발(發) 울리는 것으로 간접(間接) 표현(表現)하였다. [32] 2002년(年) SBS 드라마 < 야인시대(野人時代) >에서는 이승만(李承晩) 역(驛). 최불암 이후(以後) 이승만(李承晩) 배역(配役) 전문(專門) 배우(俳優)로 유명(有名)한데 최불암이 MBC 외(外)의 다른 방송사(放送社) 출연(出演)을 꺼렸고 정작 MBC에서는 이승만(李承晩)이 나오는 작품(作品)을 자주 만들지 않게 된 탓에 권성덕의 캐스팅이 대폭(大幅) 늘어난 것이다. [33] 1998년(年) SBS 정치(政治) 대하드라마(大河드라마) < 삼김시대(三金時代) >에서도 동일(同一) 배역(配役)을 맡았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저작물(著作物)은 CC BY-NC-SA 2.0 KR 에 따라 이용(利用)할 수 있습니다. (단(但), 라이선스가 명시(明示)된 일부(一部) 문서(文書) 및 삽화(揷畵) 제외(除外))
기여(寄與)하신 문서(文書)의 저작권(著作權)은 각(各) 기여자(寄與者)에게 있으며, 각(各) 기여자(寄與者)는 기여(寄與)하신 부분(部分)의 저작권(著作權)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百科事典)이 아니며 검증(檢證)되지 않았거나, 편향적(偏向的)이거나, 잘못된 서술(敍述)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直接) 문서(文書)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意見)을 원(願)할 경우(境遇) 직접(直接) 토론(討論)을 발제(發題)할 수 있습니다.

  • Operado por umanle S.R.L.
  • Hecho con ?? en Asuncion, Republica del Paraguay
  • Su zona horaria es GMT
  • Impulsado por the seed engine

This site is protected by reCAPTCHA and the Google Privacy Policy and Terms of Service apply. This site is protected by hCaptcha and its Privacy Policy and Terms of Service ap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