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島山 安昌浩 美國서 追放되기까지…모함한 投書者의 實體는 | 聯合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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島山 安昌浩 美國서 追放되기까지…모함한 投書者의 實體는

送稿時間 2017-08-10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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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涯 3番째 訪美行跡 注目…移民國 監視속 獨立運動 위해 끈질긴 努力

美 政府記錄保存所서 '안창호 파일' 찾아내…엔젤섬 移民國 書類도 多數

(로스앤젤레스=聯合뉴스) 옥철 特派員 = 島山 安昌浩(1878∼1938) 先生을 볼셰비스트(共産主義者)로 謀陷해 美國에서 追放시키려고 한 投書가 美國 移民國에 接受된 事實이 確認됨에 따라 倒産 先生의 세 番째 訪美 行跡이 다시 注目받고 있다.

9日(以下 現地時間) 장태한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大學校(US리버사이드) 敎授('김영옥在美同胞硏究所' 所長 兼任)가 最初로 公開한 美 캘리포니아 샌브루노 情報記錄保存所의 '安昌浩 파일'에는 倒産 先生이 實體가 밝혀지지 않은 敵對勢力의 謀陷과 美 移民當局의 監視 속에서도 在美 韓人社會의 獨立運動을 成功的으로 組織하려고 끈질기게 努力한 痕跡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評價된다.

倒産 先生은 總 세 次例 美國을 往來하며 13年間 美國에 居住했다.

첫 番째는 1902∼1907年으로 리버사이드에서 最初의 韓人共同體人 '파차派 캠프'를 建設하던 時期다.

이어 두 番째 1911∼1919年 대한인국민회와 興士團 組織 活動을 旺盛하게 벌인 期間이었고, 마지막 1924∼1926年에는 비록 짧은 期間이었지만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西部와 시카고 等 中部, 워싱턴DC 等 東部 一圓까지 美 全域을 누비며 同胞들을 感化시켰고 民族 精神을 일깨웠다.

倒産 先生은 1924年 12月 16日 샌프란시스코로 入國해 1926年 2月 23日 샌프란시스코에서 S.S.小노마號를 타고 出發한 것으로 돼 있다.

安昌浩 先生이 到着하기 하루 前인 1924年 12月 15日 '콩 王'과 '찰스 洪 이'라는 이름으로 美 移民國에 投書가 接受됐다.

'安昌浩는 볼셰비스트이니 美國 入國을 不許해야 한다'는 內容이었다.

移民國 擔當者에게 投書가 傳達되기 以前에 入國한 安昌浩 先生은 이듬해인 1925年 6月 3日 시카고 移民國에서 美國 入國 經緯에 對해 直接 審問을 받았다. 이런 一連의 過程에서 안창호 파일이 作成된 것으로 보인다.

'도산은 볼셰비스트' 모함한 투서
'倒産은 볼셰비스트' 謀陷한 投書

(로스앤젤레스=聯合뉴스) 옥철 特派員 = 島山 安昌浩 先生을 '볼셰비스트'로 謀陷하는 內容으로 作成된 投書 元本. 1924年 12月15日 '콩 王'과 '찰스 洪 이'라는 이름의 署名이 붙은 이 投書는 美 勞動部 傘下 샌프란시스코 移民國에 接受됐다. UC리버사이드 장태한 敎授가 파차派 캠프 移住 韓人의 入國 經路를 追跡하던 中 북캘리포니아 샌브루노 政府記錄保存所에서 發掘했다.
[장태한 UC리버사이드臺 敎授(김영옥在美同胞硏究所長) 提供]

◇ '볼셰비스트 안창호' 投書에는 어떤 內容이…그들은 무엇을 노렸나

張 敎授는 "李 投書는 總 4張의 長文인데 英語 文法이 正確하지 않아 뜻을 飜譯하기가 若干 힘들었다"고 말했다.

投書에는 "安昌浩가 상하이를 出發해 하와이를 거쳐 곧 美國에 到着할 豫定인데 그는 볼셰비스트, 卽 社會主義者이니 그를 有心히 잘 지켜봐야 할 것이다"라는 內容이 들어있다.

또 "볼셰비스트 政策에 關한 冊을 많이 읽었으며…(중략)…볼셰비스트 政策을 널리 傳播하려고 하는 安昌浩는 速히 中國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라고 促求하는 內容도 있다.

張 敎授는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 所在 알링턴호텔 專用便紙紙의 맨 뒷張에 나오는 延命 署名 '콩 王(Kong Wong)'과 '찰스 洪 이(Charles Hong Lee)'에 關한 資料를 數 個月 동안 追跡했다고 한다.

張 敎授는 "대한인국민회와 對立關係에 있었던 臺韓人同志會, 卽 李承晩 追從勢力이 投書를 보냈을 可能性은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와 關聯해 島山 安昌浩 先生이 하와이에 到着했을 때 移民國 關係者가 '興士團은 나쁜 일을 하는 團體'라고 말했다고 傳한 記錄도 남아있다.

또 1924年 徐載弼 先生이 "워싱턴에 있는 韓人 指導者가 倒産을 共産主義者로 謀陷했다"고 證言했다는 記錄도 傳해진다.

'安昌浩 追放'의 端初가 되는 美 移民國 投書 內容은 當時 대한인국민회, 興士團과 敵對的 關係에 있던 勢力을 聯想시키는 側面이 剛하다는 것이 發見者인 張 敎授의 解釋이다.

◇ 移民國 審問에 堂堂했던 倒産 先生 "나에게 적은 없다"

안창호 파일의 核心 內容 中 하나는 1925年 6月 3日 J.B 브來키 移民國 檢査官이 시카고 移民國에서 安昌浩 先生을 相對로 벌인 直接 審問이다.

張 敎授가 公開한 審問書 前文에는 當時 移民國 調査에서 堂堂했던 倒産 先生의 面貌를 엿볼 수 있다.

안창호 선생 조사 기록 붙은 이민국 문서
安昌浩 先生 調査 記錄 붙은 移民國 文書

(로스앤젤레스=聯合뉴스) 옥철 特派員 = 島山 安昌浩 先生을 調査했다는 記錄이 붙어있는 美 勞動部 傘下 샌프란시스코 移民國 檢査官 署名 文書. 존 A.로빈슨 移民國 檢査官이 '안창호(AHN CHANG HO)'란 中國 이름의 S.S.小노마 乘船을 체크했다는 記錄이 摘示돼 있다.
[장태한 UC리버사이드臺 敎授(김영옥在美同胞硏究所長) 提供]

倒産 先生은 '어떤 資格으로 美國 入國이 許諾됐나'라는 質問에 "上海에서 發行한 섹션 6의 旅行者 證書를 所持하고 있다"고 答했다.

上海에서 職業은 大韓民國 上海 臨時政府 會員이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 到着한 以後 美國에서의 行跡을 昭詳히 털어놨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스탁튼, 새크라멘토, 多뉴바, 리들리, 샌프란시스코, 리버사이드, 그리고 베이커스피드. 캘리포니아에서 시카고로 向하던 中 덴버에 暫時 滯留後 시카고에 到着했다. 시카고에서 필라델피아, 뉴욕, 코네티컷주 뉴헤븐, 보스턴, 폴 리버스. 뉴저지의 패터슨, 다시 뉴욕에 갔다가 시카고에 到着했다."

倒産 先生은 美 全域을 누비며 在美 韓人 獨立運動의 기틀을 닦았다.

브來키 檢査官은 그 前 해에 接受된 投書의 內容에 根據한 듯한 審問을 이어갔다.

倒産 先生을 相對로 '當身은 蘇聯 政府 또는 러시아에 關心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當時는 볼셰비키 革命(1917年) 直後였고 投書에는 倒産을 볼셰비스트로 謀陷했기 때문이다.

島山은 "나는 直間接的으로 全혀 關心이 없다"고 答했다.

또 '美國 政府가 過激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主張하나'라고 물었지만 "絶對 아니오. 그럴 理由가 없다"고 淡淡하게 答한다.

倒産 先生은 "내가 아는 한 (美國에) 나에게 적은 없고 나의 行動을 싫어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라고 答하기도 했다.

張 敎授는 倒産 先生이 元來 8個月 滯留 비자로 入國했다가 6個月 延長 申請을 했으며 1926年 2月까지 滯留 延長이 이뤄졌다고 說明했다.

이 審問은 移民國에 接受된 投書로 調査가 始作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張 敎授는 解釋했다.

도산 선생 심문한 미 이민국 조서
倒産 先生 심문한 美 移民國 調書

(로스앤젤레스=聯合뉴스) 옥철 特派員 = 美國 시카고 移民國의 1925年 6月 9日 字 安昌浩 先生 審問記錄. J.B 브來키 移民國 檢査官이 시카고 移民國에서 倒産 先生을 相對로 直接 調査를 벌인 記錄이다. 安昌浩 先生의 自筆 署名이 남아있다.
[장태한 UC리버사이드臺 敎授(김영옥在美同胞硏究所長) 提供]

◇ 배에 타는 瞬間까지 確認한 移民國…그리고 家族과의 生離別

샌프란시스코 엔젤섬 移民國의 1925年 6月 26日 文書는 安昌浩 先生의 滯留 延長 申請에 對해 言及했다.

移民國은 "安昌浩는 美國 全域을 旅行했는데 콩 王과 찰스 洪 이가 提出한 投書(1925年 12月 15日 接受) 內容을 否認했다. 現在로서는 그 投書 內容의 眞僞를 判斷할 수 없다"고 摘示했다.

安昌浩 先生은 6個月 더 滯留할 수 있었지만 投書로 社會主義者인지 與否에 對한 調査를 받고는 追放 對象者로 分類가 된 것으로 보인다.

1926年 3月 初의 强制 出國은 그 延長線이다.

移民國은 1926年 2月 6日 文書에서 "安昌浩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는 배에 타는 것을 確認하라"고 적었다.

이어 1926年 2月 23日 文書에는 "安昌浩가 S.S. 小노마를 타고 떠난 것을 確認했는데 寫眞과 對照해서 確認했다"고 적혀있다.

倒産 先生은 그러나 배가 故障나서 돌아왔다가 그해 3月 2日 다시 小노마號를 타고 샌프란시스코港에서 出港했다.

當時 新韓民報에는 安昌浩 先生과 夫人 이혜련 女史의 마지막 送別 모습도 描寫됐다.

李 女史의 "平安히 가십시오"가 마지막 對話였고 倒産 先生 夫婦는 永永 다시는 보지 못할 生離別을 했다.

當時 記錄에는 安昌浩 先生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하와이에 6時間만 머무르고 바로 濠洲로 追放된 것으로 돼 있다.

關聯 資料에는 安昌浩 先生이 濠洲로 갈 意思는 全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安昌浩 先生의 濠洲 追放은 그 傳해 移民國 檢査官의 調査, 그리고 세 番째 美國 訪問 첫 해 移民國에 接受된 投書가 그間의 行跡을 立證할 端緖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도산 강제추방 짐작할 미 이민국 문서
島山 强制追放 斟酌할 美 移民國 文書

(로스앤젤레스=聯合뉴스) 옥철 特派員 = 1926年 2月 6日 作成된 美 移民國 文書. 安昌浩 先生의 오스트레일리아 追放을 斟酌할 수 있는 重要한 資料이다. S.S小노마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出發해 오스트레일리아로 向한다는 內容이 담겨있다.
[장태한 UC리버사이드臺 敎授(김영옥在美同胞硏究所長) 提供]

安昌浩 先生은 以後 1925年 3月 25日 濠洲에 到着했고 5月 20日에는 상하이로 向했다. 以後 安昌浩 先生은 1932年 家族이 있는 美國을 訪問하려 했으나 그해 4月 29日 尹奉吉 醫師의 훙커우 擧事로 日本 警察에 逮捕돼 韓國으로 送還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35年 2月 假出獄하지만 1937年 6月 修養同友會 事件으로 다시 逮捕됐고 그해 12月 病保釋으로 나왔으나 京城大學 病院에 入院해 있다가 1938年 3月 10日 祖國의 獨立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1920년대 도산 선생
1920年代 倒産 先生

[聯合뉴스 資料寫眞]

oakchu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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