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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記者의 Who's now] 데뷔 30年 歌手 심수봉
[박선영 記者의 Who's now] 데뷔 30年 歌手 심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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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記者의 Who's now] 데뷔 30年 歌手 심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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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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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家 金訓은 “심수봉의 女性性 속에서, 女子로 태어난 運命은 견딜 수 없는 缺乏”이라고 쓴 적이 있다. “意識化된 것도, 人文化된 것도 아니지만, 심수봉의 노래는 그 缺乏을 莫無可奈로 드러내 보이며, 男子의 안쪽을 向해 直接 쳐들어온다”는 것이다.

심수봉의 熱誠팬인 金訓은 “심수봉의 목소리를 들을 때 나는 그 女子의 缺乏의 哀切함에 依해 男子인 나 自身의 缺乏을 깨닫고, 그 缺乏이 슬픔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讚歎했다.

이 긴 引用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心琴(心琴)을 울린다는, 너무 낡아 어지간해선 感興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이 慣用句가 심수봉의 노래에선 物理的으로 具現된다는 事實을 안다. 노래房에 가면 질세라 定한(情恨)과 설움이 구비구비 맺힌 그의 노래를 불러대는 까닭이다.

‘그때 그 사람’으로 大學歌謠祭에 出戰했던 게 1978年 겨울이니 올해로 데뷔 30年. 10ㆍ26事件과 放送禁止, 同居와 離婚과 再婚, 佛敎에서 基督敎 信仰으로의 改宗 等 事緣 많은 生涯를 살아온 심수봉(53)을 만났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 아름다워 듣는 이를 쉽게 홀렸다.

- 노래하신 지 벌써 30年이 됐어요. 氣分이 어떠세요?

“大學歌謠祭 나갔던 때를 起點으로 하면 올해가 30周年이네요. 하지만 첫 音盤 <그때 그="" 사람=""> 이 나온 게 79年이라 데뷔 30周年 記念音盤과 公演은 來年에 선보이려고 準備 中이에요.

다음 音盤은 월드뮤직 쪽으로 가보려고요. 來年 初쯤 나올 텐데 30周年인 만큼 멋지게 저의 모두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요즘은 몸이 좀 늙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을 程度로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요.”

- 本來 歌手가 꿈이었나요? 歌手 되는 데 나훈아氏 影響이 컸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大學 때 한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로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했었어요. 그때 나훈아氏가 偶然히 손님으로 왔어요. ‘有名한 歌手가 왔으니까 서비스 次元에서 나훈아氏 노래를 해봐라’ 그래서 노래를 했는데, 나훈아氏가 그걸 듣고 나중에 레코드 會社 社長을 데리고 다시 온 거예요.

正말 積極的으로 歌手를 卷했죠. 當時 無名인 저한테 피아노 한 臺 값 程度로 契約도 하게 해줬어요. 처음에 헤드폰 끼고 錄音室에 들어서면 너무 唐慌하고 힘들거든요. 그때 나훈아氏가 왔다 갔다 하면서 ‘잘했다’고 힘을 줬어요. 나훈아氏 고마운 건 못 잊죠. 歌手 되게 만들어준 張本人이니까.

그런데 그 뒤에 나훈아氏가 個人的인 스캔들로 潛跡하면서 일이 흐지부지 됐어요. 레코드社 社長은 ‘新人이라 키우려면 집이 한 채 있어야 한다’는 둥 해가며 進行을 못하겠다 하고. 바람은 잔뜩 집어넣어 놓고선요. 그게 大學歌謠祭 나가기 直前이에요.”

- 그래서 大學歌謠祭에 나간 건가요? 트로트를 들고 나갔다 떨어진 걸로 有名한데요.

“거기 나가면 入賞만 해도 音盤이 나오니까 歌手는 못하더라도 音盤이나 한番 내보자 해서 나갔어요. 제 딴에는 音樂 分析도 많이 했고 解釋도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第一 꼬랑지로 本選에 올라갔고, 本選에서도 떨어졌어요. 이까짓 것 아마추어 大會에서도 떨어지는데 무슨 歌手야, 그만 두자 했지만, 事實 크게 落心했죠.

그런데 그 다음날 地球레코드에서 連絡이 왔어요. 巨金을 받고 音盤 契約을 했죠. 여러가지로 깜짝 놀랄 일이 많았어요. <그때 그="" 사람=""> 이란 題目으로 音盤이 나온 게 79年 1月, 精神없이 人氣歌手가 된 게 6月이니까 히트하기까지 時間이 좀 걸린 便이에요.”

- 本名이 심민경인데 심수봉으로 바꾸셨어요. 普通 촌스러운 本名을 예쁜 이름으로 바꾸는 게 藝名인데, 正反對로 하셨어요.

“當時 조영남氏나 서유석氏 等 참 많은 先輩들이 저한테 關心을 보이셨어요. 저한테 歌手를 하지 말라고 말린 PD들도 있었고…,

- 왜요?

“뭔가 어둠의 그림자를 느꼈나봐.(웃음) 아끼는 사람인데 망가지게 하고 싶지 않다고. 그때 서유석氏가 날 불러서 ‘이름 바꿔라’ 그러더라구요. ‘藝名을 안 써서 피본 사람이 나다’ 그러면서 歌手를 하려면 이름을 꼭 바꾸라는 거예요.

只今은 篤實한 基督敎人이지만 예전에는 엄청난 佛敎信者였어요. 佛敎에서 眞理를 찾아보려고 努力했던 때인데, 아는 스님께서 미리 지어준 이름이 있었어요. 그게 수봉(守峰)이에요. 佛家에서 道를 이룬다는 뜻인데, 宏壯히 센 이름이죠.

이건 都大體가 家庭을 가질 수 없는 이름이에요. 그런데 자꾸 들어보니까 特異하고 괜찮아요. 그래서 심수봉으로 했는데, 事實 只今은 다른 이름으로 바꾸고 싶어요. 過去를 없앨 수는 없지만 크리스천이니까 創造主 하나님의 恩惠를 드러낼 수 있는 이름으로요.”

심수봉의 트로트에는 格(格)이 있다. 흔히 ‘뽕짝’이라는 말로 부르는 音樂들과 한 카테고리로 묶이지 않는 獨特한 個性이다. 심수봉은 그것을 클래식과 다양한 장르의 陸像슭퓽?工夫했던 德分으로 分析한다. 그러면서도 自身을 트로트 歌手로 떳떳이 規定했다.

- 왜 트로트 音樂을 하셨어요? 當時만 해도 筒기타에 포크音樂이 大勢 아니었나요?

“前 韓國人으로서 트로트 장르를 訓鍊했다는 데 自負心을 느껴요. 우리나라 가요니까. <그때 그="" 사람=""> 도 大學歌謠祭에 맞지 않는 장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저는 다만 제가 좋아하는 音樂을 끌고 나갔을 뿐이에요. 제겐 音樂을 할 수밖에 없었던 確實한 才能이 있었고, 그것을 30年 가까이 쭉 끌고 나간 거죠.”

- 심수봉의 트로트는 그 누구의 것과도 닮지를 않았어요. 무리를 지을 수 없는 獨特한 音樂이라, 혼자서 참 외롭게 트로트를 해왔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데요.

“외롭게 트로트를 해왔다…, 그 말 참 가슴에 와 닿네요. 제가 10ㆍ26事件으로 80年代에 繼續 放送을 못했잖아요. 그러다 보니 放送禁止가 풀렸는데도 그 後遺症이 相當히 오래 갔어요. 거기다 私生活이 꼬이고 生活이 平坦하지 않으니까 音樂을 할 수 있는 與件도 되지 않았고요.

요즘 저는 모든 面에서 제가 조금 일찍 태어난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音樂人들을 그런 대로 待接해주는 요즘 時代에 音樂을 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그게 꼭 나쁘다고 볼 순 없지만, 참 劣惡할 때였어요. 저, 혼자 辱 많이 먹었어요. 까다롭다는 거죠. 只今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놓고 제가 혼자 鬪爭한 거예요.

例를 들어 ‘男子는 배, 女子는 港口’가 C 샵 마이너거든요. 音마다 샵이 다 붙어요. 그럼 연주할 때 便하지가 않죠. 하지만 放送局 程度에서 연주하는 사람들은 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도 班 키를 내리든지 班 키를 올려서 해요.

제가 까다로운 音으로 노래를 하는 理由는 그 反音 差異가 特別한 音色을 驅使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部分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 半音이 우스운 것 같아도 쓸데없이 올린 게 아니란 말이죠. 한番은 제가 어느 放送 프로그램에 나가 PD한테 ‘이番에 또 C 마이너를 하거나 D 마이너를 하면 노래를 안 부르겠다’고 했어요.

벌써 세 番째였거든요. 그런데 徹底히 約束을 하고 나갔는데도 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제가 노래를 안 부르고 내려왔죠. 그랬더니 뒤에서 세션팀들이 平生 들어보지도 못한 辱들을 퍼붓는데….

툭 하면 放送禁止를 當하면서 너무 힘들게 10餘年을 보냈어요. 그런 일을 當하면서 제가 어떻게 活動이라고 하겠어요. 저를 북돋워주는 사람이 있길 하나, 매니저가 있어서 모든 問題를 커버해주길 하나, 正말 저 혼자 외롭게 鬪爭해온 時間이었어요.

한番도 저는 競爭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제 일을 熱心히 했던 거지 누굴 밟고 일어선 적이 없어요. 正말 외롭게 才能 하나로 버텨왔구나, 어떤 서포트度 받지 못하고 참 잘도 견뎌왔구나 싶어요.”

- 요즘 트로트 音樂에 對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活動을 못하고 있는 동안 歌謠界에 메들리 烈風이 불었어요. 예전에는 조용필氏나 李美子 先輩님이, 羅勳兒 先輩님이 불렀던 것들이, 조금 유머스럽게 뽕짝이라고 불리긴 했지만, 全部 歌謠라는 한 장르로 묶였는데, 어느 瞬間 제가 放送을 하면서 보니까 異常하게 트로트라는 장르가 따로 分離가 되면서 格下되기 始作하는 거예요.

트로트 歌手는 마치 淺薄한 노래를 부르는 歌手처럼 疏外되고요. 조용필 先輩가 93年에 ‘나는 트로트가 싫다’고 하더라구요. 난 트로트 歌手가 아니라고 宣言하는 男子 歌手들도 많았어요. 깜짝 놀랐어요. 所謂 音樂을 한다는 아티스트들도 트로트는 認定받지 못하는, 最下位級 音樂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저는 너무 안타까웠죠.

只今 트로트, 트로트 하는데 요즘 트로트는 트로트가 아니에요. 부끄러워요. 落後된 歌詞와 멜로디, 누구를 특정하고 싶진 않지만 全般的인 흐름이 그래요. 正말 트로트는 아름답고 成人들에게 慰勞를 줄 수 있는 音樂인데….”

- 목소리가 늙지도 않고 참 아름다우세요. ‘神이 내린 비음’이라고도 하잖아요.

“제 音聲을 두고 비음, 비음 하는데, 저는 콧소리는 아닌 것 같아요. 배에서 내는 소리, 머리에서 내는 소리가 있는데, 저도 頭聲이에요. 제가 腦 檢査를 해본 적이 있는데요, 그때 異常한 걸 하나 發見했어요.

醫師가 MRI 寫眞을 보여주는데, 코 옆에 있는 뼈가 普通 사람들은 다 채워져 있는데 저는 거기가 텅 비어있어요. 그래서 우리끼리 웃으면서 안에서 텅 비어있는 소리라서 鼻音처럼 들리나 보다, 그랬죠. 두性을 내는 건데 그 空間에서 울리는 것 같아요. 醫師 말이 그렇게 생긴 構造는 없데요.”

10ㆍ26 事件은 긴긴 歲月 심수봉에게 朱紅글씨였다. 大統領 弑害事件이 있었던 陰險한 밤, 그는 大統領 왼쪽에 기타를 들고 앉아 노래를 불렀다. 朴正熙 前 大統領의 最後를 目擊했다는 것은 單純한 目擊者의 地位만을 그에게 附與하지 않았다.

얼굴이 못 생겨 屛風 뒤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侮辱的인 헛所聞부터 合搜部 調査와 精神病院 監禁, 放送禁止와 出國禁止라는 至毒한 苦痛까지 10ㆍ26은 그의 生에 새겨진 가장 큰 傷處였다. 이 모든 얘기를 그는 <사랑밖에 난="" 몰라=""> 라는 題目의 自敍傳에 썼지만, 누구를 만나든 質問은 繼續된다.

- 10ㆍ26이 없었더라면 내 人生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 안 해보세요?

“요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예전에는 내가 왜 이렇게 犧牲者가 돼서 어려움을 겪나 괴로워했는데, 只今은 이런 境遇가 나한테니까 있지 않았나 싶어요. 견딜 수 있는 사람에게 보여준 게 아닌가 생각해요.”

- 심수봉이라는 센 이름 때문일까요?

“나니까 견딜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날 같이 있었던 신재순氏라고 있잖아요. 미스 神이 美國 LA에 살아요. 公演 갈 때마다 扮裝室에 나타나는데, 늘 눈이 빨개져서 와요. 再巡氏만 보면 너무 가슴이 아파요. 언니 언니, 해가며 옛날 얘기를 하죠. 지난해 10月에 LA 公演을 갔을 때도 둘이 호텔에서 時間을 갖고 그 얘기를 했어요.

참, 너무 어려서, 어린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怯도 없이 쭐레쭐레 따라간 거예요. 그런 자리인지도 모르고. 運命이라는 게 瞬間的인 잘못으로 인해 너무나 큰 苦痛 속에 살게 되는 거죠.”

- 20代에 너무 큰 精神的 衝擊을 받았는데, 只今은 그 트라우마에서 解放됐다고 생각하세요?

“그럼요. 다 지나간 일이에요. 제가 10ㆍ26으로 音盤 팔아먹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건 正말 無識한 사람이죠. 전 오히려 10ㆍ26으로 損害를 봤지 제 音樂性이 그걸로 惠澤 받은 건 없어요.

音樂的으로 더 熱心히 하는 理由가 오히려 그걸 넘어서기 위한 건데, 좀 抑鬱한 거죠. 純粹해요, 저는. 政治的으로 생각한 적 한番도 없고, 只今 와서 이러쿵 저러쿵 얘기해서 政治的으로 휘말리고 싶지도 않아요.”

-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심수봉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10ㆍ26을 聯想해요.

“그 얘기를 얼마 前에 듣고 男便한테 깜짝 놀랐어요. 어떤 CF 涉外가 進行되다가 만 적이 있는데, 우리 新郞이 그러는 거예요. ‘그럴 거야. 10ㆍ26에 對한 게 너무 强해서 어떤 CF도 그걸 뛰어넘을 수가 없을 거야. 10ㆍ26이 딱 가리고 있는데 얼마나 께름칙하고 찜찜하겠어?’ 그동안 몰랐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까 그제서야 사람들이 그걸 宏壯히 안 좋게 생각하겠구나 싶더군요”

심수봉의 노래는 女子의 노래다. 그것도 아주 슬픈 女子의 노래. 大部分이 單調人 그의 曲에서 話者는 늘 女子로서 아파하고 서러워하며 哀願한다. 스스로 女子라는 것을 이렇게 分明히 認識하고 노래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 늘 話者가 女性으로 분명하게 드러난 노래들만을 불러오셨어요. 스스로 女子라는 自意識이랄까, 正體性이랄까, 그런 게 剛한 便인가요?

“그건 女子라서가 아니라 저만의 色깔이기 때문일 거예요. 제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없이 자랐거든요. 父性에 對한 그리움이에요. 아버지의 사랑을 끊임없이 追求해왔기 때문에 男子를 보면 아버지를 느끼고, 사랑을 받아내게 위해 不斷히 努力하는 거죠. 그런 男子를 끊임없이 찾아 헤맸던 거예요. 저의 아픈 삶의 告白이랄까, 그런 거죠.”

- 1993年 MBC 라디오 프로그램을 進行하면서 擔當 PD와 再婚하셨잖아요. 어떻게 사랑에 빠지신 건 지 궁금해요.

“PD로서 MC를 宏壯히 仔詳하게 보살펴주고 神經 써줬는데 그걸 제가 誤解했어요.(웃음) 自己가 맡은 프로그램의 MC가 陽地 위에 있어야지 陰地 위에 있으면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다, 그래서 陽地 위로 끌어내기 위해 努力한 건데….

그걸 錯覺해서 <비나리> 라는 노래를 만들었어요. 아휴, 말하자면 錯覺에서부터 始作된 게 처음엔 悲劇이었다가…(웃음), 어디 自己를 위해 노래를 만들어주는 사람이 흔해요? 그쪽에서 큰 人心 쓴 것처럼 結婚했는데, 事實 뭐 다른 사람 만났었어도 똑같은 일이 있었을 거예요.

저는 恒常 추웠어요. 그건 어릴 때부터 있던 거라 治癒가 될 수 없었어요. 사람이 어떻게 治癒를 해주겠어요? 끝도 없이 목말라 있는 사람을 어떻게 끝없이 주겠어요. 그건 사람이 할 수가 없죠. 神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 엄마로선 어떠세요?

(깊은 한숨) “어린아이들한테 너무 아픔을 많이 줬죠. 아들 둘에 딸이 하나인데, 于先 缺損家庭을 만들어줬고…. 生命을 키울 資格도 없이 아이를 낳은 것 같고…. 제 노래 中 ‘無窮花’는 80年代 初盤 첫 아이 낳고 아주 어려울 때 만든 노래예요.

첫 단추가 異常하게 꿰어져서 結婚도 안 하고 아이부터 낳게 됐어요. 숨어서 애를 낳는, 一生에 꿈도 안 꾸던 일들이 展開가 되는데, 제가 處해있는 環境이 너무 悽然하고 괴로워서, 엄마로서 아이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한 게 ‘無窮花’예요.(심수봉은 첫 아이의 아빠와 헤어지고도 한 次例 더 結婚에 失敗했다.) 전 正말 애들을 좋아해요.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한테 견줘도 뒤지지 않는데, 아이들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없고. 只今은 다 커서 오히려 저를 理解하고 지켜주고 그러죠.”

- 篤實한 基督敎人이 되면서 달라진 것들이 있을까요?

“相對方을 바라보는 데 矜恤함이 생겨요. 그게 男便한테도, 모든 食口들한테도 適用이 되죠. 믿기는 85年부터 믿었는데, 最近에 하나님의 音聲을 듣는 直接的인 만남이 이루어졌어요. 요새는 人生의 意味를 거기에 두죠. 그래서 좋아요.

사람이란 게 本來 靈的인 存在거든요. 靈魂의 이야기를 빼고 살아갈 순 없어요. 靈魂의 世界에 對해 깊이 默想할 수 있고 안다는 것이 노랫말이나 노래에 깊이 倍니까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더 깊이가 있고 더 感動的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심수봉 하면 한(恨)이고, 그 悽絶한 슬픔이 感動을 줬던 건데, 너무 마음의 平安을 찾아버리면 우리로선 좀 곤란하지 않나 싶은데요.

“안 그래요. 왜냐하면 가장 아름다운 苦痛을 노래할 수 있으니까요. 完璧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밖에 없어요. 音樂은 그런 幅까지도 아울러 갖고 있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요.”

-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生을 살고 싶으세요?

“예전엔 저의 不幸이나 외로움, 祝福받지 못하고 거부당한 채 山 아웃사이더로서의 삶이 늘 다른 사람의 삶을 부러워하게 했어요. 하지만 只今은 心靈이 가난하게 태어난 제가 참 복된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빨리 찾을 수 있거든요. 基督敎人이기 때문에 다시 태어날 일은 없을 거예요. 이제 永遠한 곳에서 큰 賞을 받을 수 있도록 남은 生涯를 즐겁게, 이 世上에 태어난 召命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심수봉은 5月 4, 5日 서울, 8日 釜山, 10日 大邱에서 公演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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