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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原文化 : 네이버 知識百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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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原文化 중원문화
  • 프랑스의 哲學者, 數學者, 物理學者, 生理學者. 라틴 이름은 레나투스 카르테視우스(Renatus Cartesius)이며, '近代哲學의 아버지'라 불리우며, 合理主義 哲學의 길을 열었다. 또한 解析幾何學의 創始者. 투렌 地方의 貴族 出身. 스콜라학의 敎育을 받고 軍隊勤務를 한 後, 當時 유럽 最初의 資本主義 國家인 네덜란드에 머물러, 自然科學과 哲學을 硏究하고 그에 對한 著述을 始作했다.그는 同時代人인 英國의 프란시스 베이컨과 마찬가지로 知識 硏究의 目的은 人間이 自然을 支配하고 技術을 開發하며, 原因ㆍ結果의 聯關을 取하여 人間 本質을 改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 (1) 普遍學의 理念] 데카르트는 새로운 原理 위에서 學問을 統一的으로 再建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嚴密한 論證的인 知識인 數學에 根據하여 形而上學, 醫學, 力學, 道德 等을 包含하는 學問 全體를 '普遍學'으로 定立하고자 했다. 그가 普遍學을 學問의 理念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은 數學的 方法을 모든 學問에 普遍的

  • 古代 그리스의 哲學者. 學問 全般에 걸친 百科全書的 學者로서 科學 제 部門의 基礎를 쌓고 論理學을 創建하기도 하였다. 트라키아의 스타게이로스에서 出生하여 플라톤의 學校에서 受學하고, 王子 時節의 알렉산더 大王의 敎育을 擔當하였다. B.C. 335年에 自身의 學校를 아테네 東部의 리케이온에 세웠는데, 이것이 페리파토스 學派(peripatetics : 逍遙學派, 逍遙學派)의 起源이 된다. 그는 플라톤의 非物體(非物體)的인 이데아의 見解를 批判하고 獨自的인 立場을 取하였지만, 플라톤의 觀念論에서 完全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觀念論과 唯物論 사이에서 動搖하였다. 그의 硏究는 1)存在와 그 構成ㆍ原因ㆍ起源을 對象으로 하는 理論學, 이것에는 第1哲學, 數學, 自然學이 包含되고, 2)人間의 活動을 對象으로 하는 實踐學, 여기에는 倫理學, 經濟學, 政治學이 包含되며, 3)創造性을 對象으로 하는 製作術(製作術), 여기에는 詩(詩) 等 藝術 活動이 包含된다. 第1哲學은 後에 形而上學이라...

  • 政治가, 數學者, 哲學者. 처음 사모스 섬에서 살다가, 사모스는 蒲柳크라테스가 政敵이었던 關係로 成年이 되어 이탈리아로 옮겨가서 크로톤 市에서 살았다. 이 當時(紀元前 6世紀 末) 이곳의 權力은 貴族階級의 손아귀에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秩序'에 關한 反動的인 學說을 提起하였는데, 이 秩序란 말은 社會生活에 適用할 境遇 貴族權力의 意志대로 解釋되고 있었다. 그는 古代 그리스의 民主主義를 '秩序' 破壞로 看做하였다.

  • 中國 古代 道家(道家)의 思想家. 이름은 週(周). 송(宋)에서 태어나 孟子와 同時代에 老子를 繼承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實在性은 疑心스럽다. 戰國時代 末期, 道家의 思想家들이 元本 『莊子』(莊子)를 編纂할 때, 이것을 莊周(莊周)에게 假託(假託)하여 『莊子』라 명명한 것인 듯하다. 이 『莊子』는 孔子ㆍ孟子보다 老子와 함께 莊子가 尊重되기에 이르렀던 한대 初期에, 戰國 末 以來의 道家의 論著(論著)를 附加하여 成立한 것으로서, 統一된 體系는 없지만 道家 思想의 歷史的 展開를 볼 수 있다. 그 基本的 思想의 中心은 當時 支配者의 地位에서 沒落하고 있던 思想家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 社會 속에서 個人의 삶에 얽힌 근심과 苦難으로부터 觀念論的으로 逃避하려고 한 人生論에 있다. 理想的인 삶이라는 것은 근심의 根源인 自己의 肉體ㆍ精神을 버리고 '許政'(虛靜), '恬淡'(恬淡)의 心境에 到達하여 自然의 法則에 따르고 어떠한 것에도 侵害받지 않는 自由ㆍ獨立을 얻어 世界의 밖에서

  • 프랑스의 數學者, 物理學者, 發明家, 哲學者, 神學者이다. [ (1) 數學과 物理學] 12歲 때 유클리드 幾何學에 沒頭하여 16歲에는 데자르그(Desargues)의 射影幾何學(射影幾何學)을 根據로 하여 『圓錐曲線론』(Essai pour les coniques)을 記述하였고 그 後 1642年 計算器를 發明하였다. 파스칼은 確率論, 數論(數論) 및 幾何學 等에 걸쳐서 貢獻한 바가 크다. 1646年 토리첼리의 氣壓計 實驗을 배움으로써 眞空이 存在한다는 假說을 主張하였는데, 그의 眞空 및 空氣壓力에 關한 理論은 自然에 關한 力學理論을 발전시키고 自然의 神祕性을 除去하는 데 큰 몫을 했다. 卽 그는 自然探究에 있어서는 推理나 經驗보다 權威가 앞서야 한다고 했는데, 그의 科學的 見解와는 다른 傾向을 보인다. [ (2) 쟝歲니즘] 初期에는 自由思想家들과 어울렸으나 宗敎的 體驗 以後 포르 르와얄 修道院에 들어가 宗敎에 歸依하였다. 嚴格한 禁慾宗敎人 쟝歲니즘에 歸依한 그는 人間의 偉大함을

  • 獨逸 啓蒙哲學의 署長을 연 哲學者이며 客觀的 觀念論의 立場에 섰다. 라이프치히 出身. 매우 早熟한 少年으로 成長했다. 政治家, 外交官으로서 다양한 活動을 하는 한便, 百科全書的인 博識家이다. 數學에서 뉴턴과는 別途로 微積分學의 方法을 創案하였고, 物理學에서는 에너지 保存의 法則을 豫見했다. 또 地質學, 生物學, 歷史學에 對해서도 硏究했다. 그의 哲學에 따르면, 世界는 無數히 많은 單一不可分(單一不可分)의 實體, 卽 能動的인 힘의 單位로서 自身 속에 전(全)우주를 表象하는 '宇宙의 거울'로서의 모나드로 構成된다. 그 表象力의 明暗의 程度車(差)가 無機的 自然에서 神에 이르기까지의 물(物)과 審(心)의 차(差)를 連續的으로 만들어 낸다(모나드론). 各各 獨立的이고 서로 關係가 없는, 그에 依하면 “창이 없는” 모나드를 相互 關聯 짓고 世界의 統一을 形成하는 것은 神에 依한 '豫定造化'(豫定調和)이다. 世界가 神의 豫定造化이며 最善의 秩序를 얻고 있다고 보는 것에서, 그의 樂觀

  • 觀念論과 對立되는 哲學的 立場. 普通, 生活하는 모든 사람들은 自然發生的으로 唯物論의 立場을 取하고 있다. 卽 自然物을 包含하여 社會的 存在物이 自身의 意識 밖에 獨立하여 存在하고 있으며 自身은 그 가운데에 存在하고 그들과 여러 關係를 맺고서 生活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事物이 人間의 意識 밖에서 意識과는 獨立的으로 存在한다는 것을 認定하는 것이 唯物論의 根本的 特徵이다. 唯物論 哲學은 이러한 自然發生的인 素朴한 唯物論에서 出發하여 그것을 理論的으로 定立한 것이다. 唯物論은 世界에 있어서 物質이 1次的이며 精神과 意識은 2次的이고, 物質로서의 世界는 時間的ㆍ空間的으로 永遠하고 無限하며, 神(神)에 依해 創造된 것이 아니라 그것 自體로 存在한다고 한다. 따라서 精神과 意識은 物質에 기초하여 成立한다고 說明한다. 이러한 唯物論은 흔히 얘기되는 物質 萬能主義나 物質만을 尊重하는 立場과 같은 道德的 意味나 一般的 生活 態度와는 別個의 것이다....

  • 백제의 近肖古王 때 學者. 日本의 招請으로 『論語』(論語) 10卷. 『千字文』(千字文) 1卷을 가지고 日本에 건너가 遺風(儒風)을 闡明하였으며, 그 該博한 經書(經書)의 知識으로 하여 信任을 받고 太子(太子)의 스승이 되었다. 이것은 日本의 文化를 깨우치는 重要한 契機가 되었다. 子孫은 代代로 그곳에 살면서, 學問에 關한 일을 맡고 日本 調整에 奉仕하여 文化 發展에 貢獻하였다. 日本의 歷史冊 『古事記』(古事記)에는 그의 이름을 와니키시라 하였고, 『日本書紀』(日本書記)에는 와니(王仁)라고 나와 있다. 우리 나라 歷史에는 그의 이름이 全혀 보이지 않는다. 全羅南道 靈巖에 그의 石像 및 遺跡地가 있다.

  • [ (1) 칸트哲學의 背景] 批判 哲學의 創始者로 널리 알려져 있는 칸트는 靑年時節부터 大陸의 合理論과 英國의 經驗論 모두에 關心을 두고 있었다. 初期에는 라이프니츠와 볼프(Wolff)의 哲學的 立場을 取할 程度로 合理論에 心醉했으며,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合理的 形而上學에 懷疑를 품고 英國 經驗論 特히 '칸트를 獨斷의 잠에서 깨워 준' 흄(Hume)으로부터 强力한 影響을 받은 것은 그 다음 時期였다. 그러나 칸트가 合理論과 經驗論의 影響뿐만 아니라 뉴턴의 自然哲學과 物理學에도 대단한 造詣가 있었음을 看過해서는 안 된다. 合理論者는 經驗과는 關係없는 超感性的 世界의 認識이나 學問으로서의 形而上學이라는 存在를 認定한다. 反面에 經驗論者는 經驗되지 않은 것이나, 超感性的 實體는 알 수 없다고 主張하며, 形而上學은 不可能하다는 立場을 取한다. 結局 經驗論과 合理論의 差異는 認識에 關한 觀點과 認識의 成立 問題에 起因한다고 볼 수 있다. 칸트는 이러한 兩大 思想의...

  • 普通 感覺的으로 外的 對象을 意識上에 나타내는 心象(心象)을 말한다. 이 點에서 事故에 依한 論理的, 抽象的인 槪念과 區別된다. 表象은 遲刻에 立脚하여 形成되지만, 이 境遇, 知覺의 對象이 只今 거기에 있을 때에는 遲刻 表象이라고 말해지며, 過去에 知覺된 對象이 記憶에 依해 再生(再生)될 때에는 記憶 表象, 또 過去의 知覺의 여러 要素가 主管에 依해 組合되어 나온 것은 想像 表象이라고 한다. 좁은 意味에서는 後者의 2個만을 表象이라 부른다. 觀念이라는 말도 表象과 같은 뜻으로 使用되기도 한다. 좁은 意味의 2個의 意味로서의 表象은 遲刻 表象과 달리, 知覺된 여러 要素 中에서 選擇이 이루어져 두드러진 것, 重要한 것이 받아들여져, 이것은 知覺 表象과 事故의 槪念을 媒介한다. 또한 이런 意味에서의 表象은 過去의 것을 再生한다거나 未來의 것을 豫見하여, 對象을 心象 위에 그려 내고, 科學的 認識이나 實踐 및 藝術的 創作에 있어서, 積極的인 役割을 한다. 唯物論은 表象을...

  • 敎義, 敎條, 敎理로 解釋되고 있는데, 本來 가톨릭 敎會에 있어서 信仰上의 眞理에 關한 不變의 整理(定理)로서, 超自然的인 啓示에 根據하여 定해지며 明確히 限定的인 말로 表現되었던 것. 도그마에는 理性의 批判이 許容되지 않으며 信者는 無條件的으로 믿어야만 한다. 여기에서 一般的으로 非理性的이고 盲目的으로 신봉되고 主張되는 命題나, 具體的 條件을 考慮하지 않고 固定的으로 主張되는 命題를 도그마라고 한다.

  • 라틴名은 Petrus. 12社도 中의 한 사람. 本名은 시몬, 예수에 依해서 베드로(盤石)라고 이름 붙여졌다. 그리스도의 初期 弟子 中의 한 사람이고, 야곱, 요한과 함께 가장 사랑 받고 恒常 그 옆에 있었다. 漁夫 出身으로서 바울처럼 敎養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性格이 素朴하고 正直했다. 그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에 依해 12四都의 우두머리가 되어, 敎會의 기둥으로서 敎會를 돌볼 使命을 附與 받았다. 그리스도의 死後, 베드로는 예루살렘 敎會의 中心人物로서 活動했고, 猶太人뿐만 아니라 異邦人들 또한 敎化시켰다. 그가 猶太敎를 對하는 態度는 保守的이었을망정, 偏狹하지는 않았다. 傳해 오는 바에 따르면, 로마로 가서 敎化 作業을 하는 途中 네로 皇帝의 迫害를 받아 殉敎했다.

  • 基督敎의 時調. B.C. 4景 로마 帝國의 植民地 팔레스타인 地方의 갈릴리에서 태어난 猶太人으로 木手였다. 猶太人은 예로부터 야훼(Jahweh) 神을 믿어 야훼가 救世主(Messiah)를 보내, 神의 善民인 유태民族을 救援해 줄 것이라는 메시아 思想을 갖고 있었다. 로마의 支配 아래 있었던 猶太人은 各地에서 叛亂을 일으켰으나 失敗하여, 그들의 絶望은 깊어져, 이 世上의 終末과 '神의 나라'를 실현시킬 메시아를 强烈히 要求하고 있었다. 유태의 支配階級이었던 사두개파와 宗敎 指導者 階級인 바래새파는 한便으로는 로마의 支配에 協力하고 或은 猶太敎의 律法의 固定化, 形式化에 專念하여, 民衆의 苦惱에 應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壓制와 貧困, 終末觀과 메시아 思想의 激化 속에서 半(反)로마의 實力 行事를 일으켰던 熱心黨(熱心黨)이나, 荒野에서 隱遁的인 共同生活을 하며 메시아의 出現을 기다린 엣세네(Essene)파 等의 運動이 일어나 유태 下層民의 支持를 받았다. 이 엣세네파로부터

  • 古代 그리스의 哲學者. 아테네에 살면서 많은 弟子들을 교육시켰는데, 플라톤도 그 中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思想 活動은 아테네 法에 違背된다 하여 死刑을 當했다. 當時 아테네에서는 民主主義制度가 衰退하면서, 社會的 荒廢가 擴大되는 狀況이었다. 소크라테스의 思想은 그 當時의 支配階級인 貴族階級을 代辯하고 있었는데, 새로운 新興階級의 出現으로 反民主主義的人 貴族階級이 守勢에 몰리고 있었다. 從來의 그리스의 唯物論的인 自然哲學에 對立하여 그는 '너 自身을 알라'라는 말을 基礎로 하여 '靈魂'에 對해 깊게 생각하면서 삶의 穩當한 方法을 아는 것을 知識의 目的이라 하고 이로써 道德的 行爲를 高揚시키는 것을 志向하였다. 卽 單純한 知識이 아니라 實踐誌(實踐知)를 重視하였다. 이러한 참된 지(知)를 얻을 수 있는 方法을 歸納法에서 찾고, 사람들의 對話에 依한 問答法에서 獨斷的인 잘못된 知識을 批判하고 除去하면서 一般的인 眞理에 到達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 中國 南宋의 儒學者. 이름은 희(熹), 字는 元會(元晦), 號는 회암(晦庵). 走者는 尊稱이다. 新安(安徽省) 사람. 朱子學을 集大成하였다. 19歲에 進士에 合格하여 關係(官界)에 들어갔으며 그 前後에 道學 外에 佛敎, 道敎도 工夫하였다. 24歲에 이연평(李延平)과 만나 그의 影響 下에서 鄭氏學(程氏學)에 沒頭하고 다음에 주염계, 장횡거(張橫渠), 二程子(二程子)의 說을 綜合 整理하여 朱子學으로 集大成하였다. 朱子의 學問은 이기설(理氣說 : 存在論), 性卽理(性卽理)의 설(倫理學), 격물규리__301/N 巨鯨(居敬)의 설(方法論), 經典의 主席이나 歷史書의 著述, 具體的인 政策論으로 되어 있고, 그 모두에 中世 封建社會의 根幹인 身分血緣的 階級秩序의 觀點이 貫徹되고 있다. 그의 業績은 '君臣(君臣)ㆍ富者(父子)ㆍ夫婦(夫婦)의 道'(三綱)와 '仁義禮智信'(仁義禮智信 : 五常五常)을 永遠不變의 '人리천리(人理天理)의 지'(至)로 보는 立場에 서서 그것을 超越的 또는 內在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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