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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俗文化館 : 네이버 知識百科

  • 父母에 對한 子女들의 禮節은 아침의 問安人事로부터 始作되었다. 父母와 딴 房에서 사는 子女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洗手를 하고 옷을 端正히 입은 다음 父母들이 쉬는 房을 찾아가 아침問安人事를 드렸다. 萬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면 父母보다 먼저 찾아가서 아침問安人事를 드렸다. 이때 子女들은 큰절을 하면서 問安人事말을 하였다. 父母들은 子女들의 問安人事에 別일 없었다는 簡單한 對答을 하였다. 間或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으면 그 內容을 簡單히 알려주기도 하였다. 아침問安人事 때 父母들이 “절은 그만두어라”라고 하면 子女들은 問安人事말만 하였다. 아침問安人士가 끝나면 子女들은 父母들이 밤새 利用한 이부자리를 개어드리고 方案을 깨끗이 整理하며 洗手물을 떠다드리는 等 父母들의 아침生活을 도와드렸다. 저녁에도 子女들은 父母에 對한 禮節을 精誠다해 지켰다. 저녁이 되어 잘 때가 子女들은 父母들이 밤새 쉬는데 不便이 없도록 方案을 보살피고 이부자리를...

  • 아기가 出生하면 곧 이름을 지어부르는데 이것은 世界 모든 나라와 民族들의 共通的인 風習이다. 그러나 이름을 짓는 具體的인 風習은 나라와 民族에 따라 그리고 歷史的 時代와 時期에 따라 다르다. 元來 우리 祖上들은 固有한 우리말로 된 이름을 지어 불렀다. 우리나라에 儒敎思想이 傳播되고 支配階級이 事大主義思想에 물젖게 되면서 官廳이름, 벼슬이름, 고장이름 等과 함께 사람의 이름도 漢字말로 지어 부르게 되었다. 實例로 新羅사람 異斯夫를 太宗(苔 이끼, 宗 마루)으로, 居柒夫를 黃鐘(荒 거칠, 宗 마루)으로, 某말을 祭床(堤 防築, 上 윗)으로, 小나를 衿川(金 쇠, 川 內)으로 表記한 것을 들수 있다. 이것은 元來 固有한 우리말로 된 이름을 漢字로 表記한 것인데 그것이 本名으로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正式이름은 基本이름이라는 뜻에서 本名이라고 하는데 封建時機에는 少年時節이 끝나고 어른이 되는 冠禮를 치르는 것을 契機로 짓게 된데로부터 官命(冠名)이라고도 하였다. 처음에...

  • 食生活과 關聯한 俗談 가운데서도 于先 들것은 食生活의 重要性을 强調한 것이다. ‘金剛山도 食後景’, ‘鬚髥이 碩字라도 먹어야 한다’, ‘먹는 것이 하늘이다’, ‘밥이 藥이다’, ‘사흘 굶으면 원을 안다더냐’ 等은 먹는 것을 重視한 俗談들이다. 食生活 素材의 俗談에서 가장 많은 것은 밥과 떡에 比喩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 民族의 食生活風習 卽 日常時에는 밥을 먹고 名節에는 떡을 特食으로 해먹는 風習의 反映이다. 떡은 名節 뿐 아니라 結婚式이나 還甲 같은 잔치에도 貴한 손님이 올때도 葬禮나 祭祀 때에도 만들었다. 그리하여 ‘떡 본김에 祭祀를 지낸다’는 俗談도 생겼다. 俗談에는 밥을 素材로 한 것보다 떡을 素材로 한 것이 더 많다. 그것은 ‘밥위에 떡’이라는 俗談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밥은 늘 먹는 예사로운 것에 비하여 떡은 特色으로서 그와 連結된 이런저런 이야기 거리가 많은데 있었다. ‘오는 떡이 커야 가는 떡이 크다’, ‘떡으로 치면 떡으로 치고 돌로 치면 돌로...

  • 伽倻琴은 6世紀 初, 中葉에 活動한 庶民出身의 音樂家이며 作曲家, 演奏家인 于勒에 依하여 새롭게 創案 製作된 우리나라의 特色 있는 民族絃樂器이다. 高句麗, 백제, 新羅 다음에 세워진 伽倻라는 나라에서 나왔다고 하여 ‘伽倻琴’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오늘의 慶尙北道 高靈地方으로 推定되는 大伽倻의 성열현에서 태어난 于勒은 6世紀 初葉에 伽倻國(金官伽倻)의 樂士로 活動하다가 6世紀 中葉에 이르러 弟子 利文과 함께 新羅땅에 넘어가 新羅音樂家들인 法知, 戒告, 萬德 等에게 伽倻琴音樂을 傳授하였다. 于勒이 伽倻琴을 創案한 것은 그가 伽倻國에서 樂士로 活動하던 時期였다. 于勒은 當時까지 伽倻國에 傳해지고 있던 여러 가지 多絃樂器들, 特히는 古代진국 삼한(變한, 辰韓, 馬韓)사람들이 만들어 쓰다가 伽倻사람들에게 傳授한 ‘瑟’(好瑟)을 參酌하여 伽倻琴을 만들었다. 이것은 伽倻琴의 前震樂器의 하나가 瑟이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그러므로 實學者 한치윤(1765~1814年)...

  • 예로부터 七月七夕날에는 견우와 織女가 烏鵲橋에서 만난다는 傳說이 傳해지고 있다. 七夕날에는 家庭에서 冊이나 欌籠에 넣어 두었던 옷을 꺼내어 말리는 風習이 있었다. 그리고 平壤地方에서는 七夕날 밤이면 處女들이 뜨락에 멍석을 펴고 하늘을 우러러 織女星을 쳐다보면서 바늘귀에 실을 꿰는 놀이를 하였다. 七夕날 저녁에 비가 내리면 이것을 견우와 織女가 烏鵲橋에서 만난 기쁨의 눈물이라고 하였고 새벽에 내리는 비는 離別의 눈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七夕날 까마귀나 까치를 보지 못하면 하늘에 다리를 놓으러 간 것이라고 하였다. 옛날 어느 별나라에 아름다운 한 處女가 살고 있었다. 處女는 천을 곱게 짰으므로 織女라고 하였다. 어느덧 處女는 꽃피는 나이가 되어 아버지는 이웃 별나라의 한 總角을 사위로 맞이하게 되었다. 總角은 牽牛라 하여 每日 소를 끌고 하늘防川을 다니는 木洞이었다. 結婚한 견우와 織女는 끝없이 幸福하였다. 사랑에 醉한 그들은 천을 짜는 것도 잊고 소를...

  • 民俗舞踊 ‘부채춤’은 오랜 歷史的 期間에 各異한 生活的 契機와 情況들에서 추어진 ‘부채춤’들을 現代的 美感에 맞게 再形象한 舞臺藝術作品이다. 아름답고 優雅한 朝鮮女性들의 高尙한 精神世界를 보여주는 ‘부채춤’은 一部分形式의 舞踊으로서 느린 춤으로 一貫되어 있다. 作品은 네 個 場面으로 構成되어 있다. 再形象한 ‘부채춤’은 일정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있지 않지만 이 춤에는 우리 民族의 아름답고 高尙한 精神世界가 一般化 되어 있는 것이 特徵이다. 춤에 形象된 優雅하고 부드러운 旋律과 密着된 負債놀림은 그 하나 하나가 점잖고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는 우리 民族의 固有한 民族的 情緖를 훌륭히 具現하고 있다. 作品에는 또한 부채눕혀펴기, 돌려펴기, 무릎쳐펴기, 어깨쳐펴기, 몸쳐펴기 等 多樣한 負債놀림技法과 돌려메機, 끌어올리기, 끌어벌리기, 메기, 뿌려치기 等 아름다운 曲線美를 보여주는 팔놀림技法이 잘 配合된 것으로 하여 朝鮮춤의 固有한 춤가락이 훌륭히...

  • 道德倫理生活과 關聯된 俗談들은 예로부터 文明하고 禮節이 밝은 우리 先祖들이 어릴때부터 子息들을 잘 敎育 敎養하여 父母를 잘 모시고 이웃들 사이의 義理를 貴重히 여기고 親舊들 사이에 信義를 지키며 利己主義를 비롯한 온갖 非道德的인 行爲를 容恕치 않고 제때에 일깨워주며 근면하고 선량한 品性을 지니고 禮節 바르게 樂天的으로 살아온 우리 民族의 高尙한 精神 道德的 風貌를 反映한 것이다. ‘돈모아 둘 생각말고 子息을 가르치라’, ‘황금천냥이 子息敎育만 못하다’, ‘세살 때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子息 잘못 기르면 虎狼이만 못하다’, ‘물도 곬을 찾아야 큰 江에 든다’, ‘父母가 착해야 孝子가 난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집안에서 새는 바가지 들에 나가서도 샌다’를 비롯하여 많은 俗談들이 그러한 思想을 表現하고 있다. 우리 民族의 日常生活과 高尙한 道德觀念은 아이들의 敎養에 특별한 關心을 돌리게 하였고 그렇게 되자면 父母들 自身이 아이들의 거울이...

  • 相續이라고 하면 흔히 財産相續만을 念頭에 두는 境遇가 많다. 그것은 全般的인 相續風習에서 財産相續이 主要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封建社會에서 가장 主要한 財産은 집, 家藏什物, 土地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밖에 兩班統治者들속에서는 奴婢도 財産으로 되고 있었다. 家庭의 代價 맏아들에게 물려지던 家父長的家族制度下에 기초한 財産相續에서도 맏아들을 優待하는 것이 一般的인 生活慣習으로 되고 있었다. 財産相續에서 맏아들을 優待하는 生活慣習은 맏아들內外가 家長權과 主婦權을 물려받고 그들이 父母를 모시고 祖上의 祭祀를 받드는 權限과 義務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은 父母를 모시고 祖上의 祭祀를 받들 義務를 지닌 맏아들에게 물려주었고 둘째아들부터는 살림을 갈라 세간을 내보낼 때 다른 집을 마련해주었다. 맏아들이 물려받은 집은 다른 아들들이 받은 집들보다 規模가 相對的으로 컸다. 土地相續은 크게 두 가지 形態로 進行되었는데 그...

  • 죽은 사람을 追慕하여 지내는 儀禮가 祭祀이며 祭祀때 차리는 飮食床을 祭祀床이라고 하였다. 祭祀床은 儀禮床차림에서 그 淵源이 가장 오랜 것中 하나이다. 祭祀지내는 風習은 靈魂不滅의 迷信的인 觀念이 發生한 原始時代에 이미 있었으며 그것이 古代와 中世에 이르러 더욱 盛行하였다. 祭祀床차림에 關한 具體的인 資料는 『三國遺事』 ‘駕洛國記’에서 찾아볼 수 있다. 『三國遺事』 第2卷 ‘駕洛國記’에는 “金官伽倻에서 해마다 說이 오면 술, 떡, 茶菓 等 祭物을 마련하여 가지고 始祖인 金首露의 祠堂에 祭祀를 지냈다”고 하였다. 高麗時代의 祭祀床차림에 關한 資料는 三國時代의 資料보다 具體的으로 傳해지고 있다. 10世紀 中葉(文宗 때) 祭祀床차림은 官等級에 따라 差等있게 차리게 되어 있었다. 朝鮮時代에 이르러 祭祀床은 祭祀의 規例가 많이 늘어나면서 차림도 더욱 搖亂해졌다. 家庭祭祀에는 忌祭, 時祭, 俗節祭 等이 있었는데 格式에 따라 祭祀床을 차렸다. 祭祀床차림에서는...

  • 꽹과리는 우리나라의 固有한 金屬製 打樂器의 하나로서 꽹매기, 꽹치, 매구라고도 하였다. 옛 文獻記錄들에는 뇨(?), 情(鉦), 箏(錚), 黨(?) 等으로 씌여 있다. 꽹과리는 遠視時期, 古代부터 이미 우리 先祖들이 民俗歌舞에 利用되었다고 認定되는데 中世初期人 三國時代에 이르러서는 징과 함께 우리 民族의 農耕두레놀이와 結付된 農樂과 民俗놀이인 탈춤에 많이 쓰이었다. 高麗때의 꽹과리는 民間에서 農樂, 탈춤音樂에 쓰이었을 뿐 아니라 宮中고취악대의 하나인 要古代에서도 利用되었다. 『高麗圖經』에 依하면 高麗에서는 外國使臣一行을 맞이할 때 組織되는 고취악대로 名家臺, 要古代가 있었는데 꽹과리는 要古代에서 북과 함께 節酒를 맞춘 打樂器로 쓰이었다고 한다. 卽 피리부는 名家代와 꽹과리, 북을 치는 要古代는 王의 수레 100여보 앞에서 천천히 걸어가는데 먼저 名家代가 매 10報 程度마다 一齊히 피리를 불다가 그치면 要古代가 꽹과리, 북을 쳐서 切手를 맞추었다. 꽹과리는...

  • 모내기는 모板에서 떠온 볏모를 써레親 논판에 심는 일이다. 이 일은 힘들고 품이 많이 들며 제철에 와닥닥 해치워야 하므로 품앗이나 두레를 맺어 여러 사람들이 달라붙어 하였다. 모내기철에는 ‘고양이손도 빌려쓰고’ 싶을 程度로 일손이 많이 要求되었고 바쁘게 돌아쳐야 하였다. 이로부터 ‘모내기때에는 부지깽이도 뛴다’는 俗談까지 나왔다. 모내기때에 일꾼들은 어둑새벽에 들로 나가 논판에 들어섰고 한두판의 모를 옮기고야 새날의 해를 맞고 아침밥을 들었다. 저녁에는 못자의 눈금이 보이지 않을 때에야 논판에서 나와 손발을 씻고 별빛을 밟으며 마을로 돌아왔다. 모내기를 위하여 農民들은 于先 논물을 여러 가지 方法으로 힘들게 댔다. 그리고 모내기 前날에 써레질을 끝내고 논판의 물을 調節하여 앙금이 앉은 논판의 흙이 꾸덕꾸덕해지게 하였다. 그래야 옮기는 모포기가 흙에 잘 꽂혀 물에 뜨지 않고 빨리 자랄 수 있었다. 農民들은 土質과 種子, 地帶的 特性에 맞게 抛棄臺數, 깊이...

  • 지짐은 옛부터 우리 先祖들이 즐겨 먹는 民族飮食의 하나이다. 지짐은 名節이나 大事 때에는 으레 떡이나 국수와 함께 반드시 오르곤 하는 飮食이다. 지짐은 낟알을 物望에 갈거나 낟알가루를 흐르勒 흘러내리도록 묽게 반죽하여 기름에 얇게 지져 낸 것이다. 煎餠이라고도 하였다. 지짐의 基本 材料로는 찹쌀, 綠豆, 밀, 수수, 메밀, 감자, 옥수수, 豌豆콩 等을 썼고 이밖에 덧감으로 파, 마늘, 고기, 菜蔬도 썼다. 여러 가지 材料로 만들어진 다양한 種類의 지짐 가운데 가장 맛좋은 것으로 이름난 것은 노티와 빈대떡이다. 노티는 흰찹쌀이나 찰기장, 차조 가루를 익반죽하여 엿기름을 두고 삭힌 다음 기름에 지진 것이다. 노티는 別食으로 大槪 名節 때 만들어 먹곤 하였다. 特히 平安道 地方에서 노티를 秋夕에 많이 만들었는데 맛이 향기롭고 달콤하면서 쫄깃쫄깃한 것이 먹으면 根氣가 있었다. 노티는 오래 두고 먹어도 變하지 않는 것이 特徵이다. 빈대떡은 綠豆를 物望에 갈아 기름에 동글납작하게 지

  • 이 地域은 여러 가지 낟알도 나고 水産物과 山나물이 골고루 있어 特色있는 飮食들도 적지 않았다. 特히 個性과 서울은 한 國家의 首都였으므로 여러 가지 一般飮食과 儀禮飮食이 發展하였다. 開城, 서울, 京畿道 地方의 밥으로 有名한 것은 藥밥, 醬국밥, 五穀밥이었다. 藥밥은 正月 보름날 지어 먹는 名節飮食인데 生日날이나 貴한 손님을 맞이할 때에도 特別히 지어 待接하기도 하였다. 醬국밥은 그릇에 흰쌀밥을 骨朔하게 담고 그 위에 닭고기와 늦버섯, 실달걀을 놓은 다음 팔팔 끓인 醬국물을 밥에 부어낸 飮食이다. 平安道사람들이 소금을 넣고 끓인 닭고기溫飯을 즐겼다면 京畿道사람들은 간醬을 두고 끓인 醬국밥을 즐겼다. 五穀밥은 正月 14日 아침에 지어 서로 나누어 먹는 別食이었다. 五穀밥을 지어 먹는 風習은 거의 全國에 있었는데 그 中에서도 京畿道가 특별하였다. 粥에서는 잣과 쌀을 함께 갈아서 쑨 잣粥과 삶은 팥에 쌀을 넣고 쑨 팥粥이 有名하였다. 떡에서는 個性編修, 조랭이떡국...

  • 우리 民族은 오랜 期間의 栽培經驗에 토대하여 果實나무種類에 따른 各異한 나무心氣風習을 創造하였다. 果實나무모를 심는 適當한 時期와 나무모를 잘 살려내는 優秀한 心氣方法은 오랜 期間 傳統으로 내려오면서 하나의 生産風習으로 굳어졌다. 여러 가지 果實나무心氣方法에는 共通性이 있으면서도 品種에 따라 일정한 差異가 있었다 實學者 홍만선(1643~1715年)李 쓴 『山林經濟』에는 沙果나무, 능금나무 심는 方法에 對하여 다음과 같이 씌어있다. “謝過는 ··· 모두 씨를 심지 못하며 다만 椄을 붙여야 한다”, “능금이나 벚(매지나무)은 씨를 심지 않고 나무를 繁殖시키는데 그 方法은 뽕나무의 가지를 눌러심는 法과 같다. ··· 가지를 눌러심어서 뿌리가 내리면 옮겨심는 方法이 좋으며 또 씨를 심으면 나기는 하나 맛이 좋지 못하다” 沙果나무모는 歷史記錄에 씌어 있는 바와 같이 接하기와 뿌리내기 方法으로 키웠다. 沙果나무接하기는 야광나무, 매지나무 等을 椄그루로 하였다....

  • 家庭에서 男便과 아내는 기둥의 地位를 차지하며 그들 사이의 關係는 家族關係에서 가장 中心的인 關係이다. 婚姻으로 結合된 夫婦 사이에 子女가 태어나면 夫婦는 곧 父母가 되어 父母와 子女의 關係가 생겨나고 그것은 다시 兄弟姊妹들 사이의 關係와 같은 새로운 家族關係를 가져온다. 夫婦는 또한 한집에서 살면서 家庭살림을 直接 組織하고 運營해 나가기때문에 그들 사이의 關係는 家族關係에서 가장 中心的인 關係가 된다. 家庭에서 夫婦 사이의 두터운 信任은 그들 사이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으며 夫婦間의 사랑은 家庭살림을 運營하고 아들딸의 養育과 敎養에 對한 責任과 利害關係의 共通性에 依하여 더욱더 두터워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夫婦는 人間倫理의 基本으로서 집안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여기에 起因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지난날 家父長的 家族制度下에서는 男便과 아내는 子女들, 特히 아들을 낳아 家庭의 代를 잇게 하는 것을 第一次的인 것으로 看做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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