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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敎

韓國民族文化大百科

檀君敎

[ 檀君敎 ]

類型 團體
時代 近代
性格 新宗敎
設立一時 1910年
解體一時 1936年
設立者 정훈모(鄭薰謨)

正義

1910年 정훈모(鄭薰謨)가 羅喆(羅喆)과 分立해 維持한 宗敎.

內容

大倧敎에서 分離하여 세운 것으로, 大倧敎의 初期 名稱이기도 하다. 羅喆은 1909年 1月 15日에 서울에서 정훈모·오기호(吳基鎬)·이기(李沂) 等과 함께 檀君敎의 重光飾(重光式: 중광은 이미 創始되어 있는 가르침을 거듭 빛낸다는 뜻)을 擧行하고 初代 都司敎(都司敎)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1910年 庚戌國恥를 當하자 8月에 校名을 大倧敎로 바꾸었다.

한便, 檀君敎의 창교 때부터 積極 參與했으며 改名 以後 北部支社校(北部支司敎)의 職責을 맡고 있던 정훈모는 1910年 陰曆 9月 10日 檀君敎의 名稱 固守를 名分으로 내걸고 이유형(李裕馨)·柳濯(兪鐸)·서창보(徐彰輔) 等과 더불어 羅喆과 分立하였다. 自身은 都司敎로서 任務를 다하면서 當時 政府 閣僚였던 박영효(朴泳孝)·정두화(鄭斗和)·민병한(閔丙漢) 等을 入校시킴으로써 朝鮮總督府의 공引下에 活潑하게 布敎活動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1912年 理由型이 敎壇을 掌握하고 정훈모를 逐出하였다. 1915年 정훈모는 다시 大宗師로 推戴되어 兩分된 敎壇을 再整備하였다.

그 뒤 1930年 안循環에 依해 敎堂人 單聖戰(檀聖殿)을 始興에 세워 活潑한 布敎活動을 벌였다.

하지만 徐徐히 日帝의 彈壓이 加해지자 1936年 平壤支部가 閉鎖되고, 始興의 總本部度 閉鎖되면서 그 뒤 檀君敎는 解體되었다.

參考文獻

  • 『大倧敎중광六十年社』(大倧敎種警鐘社編修委員會, 大倧敎總本司, 1971)
  • 『檀君敎復興經略』(정진홍, 界新黨, 1937)
  • 「檀君信仰總論」(이강오, 『전북대학교論文集』10, 전북대학교,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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