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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됭 條約

條約社 - 條約이 맺은 歷史의 고빗길

베르됭 條約

近代 西유럽의 테두리가 그려지다

“父王께서 昇遐하신 뒤로 저 ‘로타르’가 나와 내 아우를 파멸시키려 무슨 짓을 했던지! 우리를 뒤쫓으며 어떤 虐殺을 저질렀던지! (……) 우리는 그에게 이겼으나, 兄弟愛와 基督敎人의 慈愛에 따라 그를 뒤쫓아 파멸시키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犯한 일에 對해 賠償을 要求했을 뿐. 하지만 그는 하느님의 審判에도 屈하지 않고 나와 내 아우를 攻擊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842年, 西유럽을 制霸하고 카롤링거 帝國을 세웠던 샤를마뉴 (Charlemagne)의 孫子 두 사람이 스트라스부르에 모였다. 그리고 熟議(熟議: 깊이 생각하여 充分히 議論함) 끝에, 兄인 루이(루드비히)가 먼저 동생인 샤를(카를)과 두 사람을 따라온 兵士들 앞에서 이렇게 엄숙히 演說했다. 그가 말을 마치자 샤를이 똑같은 말을 했는데, 다만 루이는 게르만語로, 샤를은 로망어(라틴語의 方言으로, 프랑스語의 前身)로 똑같은 內容을 말했다. 다음에는 다시 루이의 次例였다.

“하느님의 사랑과, 基督敎 나라와, 우리 모두의 安寧을 위하여, 오늘부터 나는, 하느님이 주신 智慧와 힘으로써, 내 아우 샤를을 全的으로 도울 것이다. 그것은 兄弟로서 마땅히 할 일이며, 그가 나를 똑같이 도울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나는 내 아우 샤를에게 해가 될 수도 있는 協約은 ‘로테르’와 決코 맺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盟誓했는데, 이番에는 로망어였다. 앞서 로타르 (Lothair)라고 불렀던 그들의 兄이자 共同의 敵의 이름도 로테르(Lothaire)가 되었다. 다시 샤를이 兄이 말한 內容을 그대로 따라하며(다만 ‘내 아우 샤를’ 代身 ‘내 兄 루드비히’라고만 고쳐서) 앞서와는 反對로 自身이 게르만어를 썼다. 그리고 두 사람을 따라온 兵士들은 이들의 盟誓가 반드시 지켜지도록 돕겠다고 各自의 言語로 誓約했다. 演說文, 盟誓文, 誓約文 모두는 로망어와 게르만어, 그리고 라틴語로 作成되어 後世에 남겨졌다.

英雄이 떠난 자리

842年, 베르됭 條約에 앞서 締結되었던 스트라스부르 盟約文. 카롤링거 王朝의 두 兄弟, 獨逸王 루이와 샤를 사이에 맺어진 이 盟約은 2個 國語로 읽히고, 3個 國語로 남겨졌다.

그들은 왜 한 집안의 兄弟이면서 똑같은 말을 2個 國語로 번갈아 하고, 3個 國語로 嵐氣는 번거로운 일을 했는가. 그리고 왜 똑같이 兄弟이며 基督敎徒인 로타르(로테르)를 相對로 하느님과 兄弟愛를 云云하며 싸울 것을 盟誓했는가? 그 까닭은 베르됭 條約을 豫備했다고 볼 수 있는 이 ‘스트라스부르 盟約’의 歷史的 意味와 聯關되어 있었다.

814年, 샤를마뉴가 죽었다. 當時 그의 프랑크 帝國은 東西로 엘베 江에서 피레네 山脈까지, 南北으로 地中海에서 발트海까지 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帝國의 實體는 겉보기만큼 富强하지는 않았다. 皇帝가 直接 稅金을 거둘 수 있는 땅은 首都인 아헨(Aachen) 一帶에 不過했으며, 帝國을 運營하는 輸入은 이슬람-비잔티움 사이의 中繼貿易에서 主로 나왔다. 그리고 地方 領主들이 帝國에 충성하도록 끊임없는 征服 事業을 통해 새 땅을 얻고, 그 땅을 領主들에게 새 封土로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皇帝는 首都에서 쉴 틈이 없이 東西南北을 돌아다니며 征服 戰爭을 벌이고 地方 勢力을 監視해야 했는데, 샤를마뉴처럼 보기 드문 英傑(英傑)李 아닌 다음에는 좀처럼 따라할 수 없는 生活이었다. 게다가 9世紀 들어 이슬람과 비잔티움 사이에 和解가 이루어지면서 굳이 프랑크를 거치지 않더라도 貿易이 可能해졌고, 그것은 帝國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했다. 그리고 이런 問題點을 加重시킨 것이 노르만, 이슬람 等의 侵攻,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랑크족 傳統의 分割相續制度였다.

모든 王朝는 後繼者 問題로 골치를 앓기 마련인데, 中國이나 朝鮮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採擇했던 맏아들 于先 制度, 몽골族의 막내아들 于先 制度, 滿洲族이나 튀르크의 後繼者 競爭 制度 等이 各各의 長點과 短點을 가지고 運用되어 왔다. 그런데 프랑크족은 分割相續制度라 하여 아들들에게 財産을 갈라 나눠주는 傳統이 있었고, 不足을 넘어 國家를 經營한 뒤에도 그 傳統을 固執했다.

아헨 聖堂에 있는 샤를마뉴의 玉座. 以後 東프랑크, 그리고 獨逸 王들도 이 玉座에서 卽位式을 가졌다. <出處: (cc) Bojin at en.wikipedia.org>

이러면 相續에서 疏外되는 王子가 없으니 좋을 것도 같지만, 기껏 征服 戰爭을 벌여 나라를 크게 키워 놔봤자 다음 代에는 몇 個로 쪼개지기 마련이었다. 샤를마뉴의 카롤링거 王朝에 앞섰던 메로빙거 王朝도 그에 따라 分裂과 統一을 反復했다. 다른 後繼者들이 죽으며 남은 兄弟에게 領土를 相續해 줌으로써, 또는 兄弟끼리의 싸움으로 暫時 統一이 이루어졌다가 얼마 뒤 統一 君主가 죽으면 다시 分裂이 찾아오는 式이었다. 또 自身에게 分割된 領土가 不滿인 境遇도 많았으므로, 葛藤의 素地는 그치지 않았다.

갈리아와 게르만, 그리고 이탈리아 北部까지 統合하고 敎皇에게서 ‘서로마 皇帝’로 認定받은 샤를마뉴度 이 問題를 深刻하게 苦悶했다. 그래서 一旦 806年에 세 아들에게 領土를 分割해 주겠다고 言及했지만(그에 따르면 맏아들 샤를은 只今의 프랑스 北部와 獨逸 北部를, 둘째 피핀은 이탈리아와 獨逸 南部를, 막내 루이는 프랑스 南部와 스페인의 一部를 다스리게 되어 있었다), 皇帝의 地位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對해서는 沈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피핀이 810年에, 샤를이 이듬해에 죽자 루이에게 皇帝의 地位와 帝國 領土 大部分을 물려주기로 決心했다(다만 이탈리아는 피핀의 아들인 베르나르에게 주었다). 그래서 813年에 그를 共同皇帝로 擁立하고, 이듬해에 肋膜炎으로 世上을 떠난다.

끝없는 骨肉相殘

敎皇에게 무릎을 꿇고 懺悔하는 ‘경건왕’ 루이. 이 行動은 그의 두터운 信仰心을 확인시켜 주었지만, 政治的으로는 그의 權威에 惡影響을 미쳤다.

카롤링거 프랑크 帝國의 第2代 皇帝가 된 루이( 루트비히 1歲 )는 王子 時節에는 혼자 힘으로 바르셀로나를 攻擊해 占領할 만큼 剛斷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나이가 들수록 戰爭을 싫어하고 信仰에 依支하려는 性向이 되었다.그래서 父王이 끊임없이 일으켰던 征服 戰爭을 一切 그만둬 버리자, 百姓들로서는 한숨을 돌렸을지 몰라도 帝國을 維持하던 영주와 技士들은 不滿이 솟구쳤다.

루이의 그런 性向은 817年의 ‘帝國 勅令’과 뒤이은 ‘베르나르 事態’ 以後 더 짙어졌다. 그는 우연한 事故로 목숨을 잃을 뻔하자 萬若을 對備해야겠다는 생각에서 帝國 勅令을 내려 後繼者 構圖를 樹立했는데, 皇帝의 地位와 大部分의 領土는 長男 로타르에게 물려주고 次男인 피핀에게는 아키텐을, 三南人 루이2世에게는 바이에른을 물려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決定은 조카인 이탈리아의 베르나르에게 不便했으며(삼촌은 勿論 조카까지 皇帝로 받들라는 소리였으니), 그는 루이 皇帝에게 對抗하려는 뜻을 비쳤다. 그러자 루이는 곧바로 大軍을 일으켜 이탈리아로 進軍했는데, 怯에 질린 베르나르가 降伏하자 그의 눈을 뽑으라는 命令을 내렸고, 베르나르는 그 後遺症으로 죽고 말았다. 帝國의 秩序를 維持하기 위해서 어쩌면 不可避한 措置였지만, 루이 皇帝는 以後 罪責感에 끝없이 시달리게 되었다. 그래서 822年에는 로마 敎皇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고 痛烈한 懺悔를 했는데, 이는 皇帝의 威信을 스스로 抛棄한 것이라 하여 프랑크 貴族들에게 한層 失望을 주었다. 아무튼 以後 루이는 漸漸 政治에서 손을 떼고 信仰에만 沒頭하여 ‘경건왕’이라는 別名까지 얻게 되지만, 帝國은 걷잡을 수 없는 葛藤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823年, 루이는 后妃에게서 넷째 아들을 얻는다. 後날 ‘대머리王’ 샤를이라고 불리게 될 王子였다. 뜻밖의 異腹同生 出生에 로타르 等은 唐慌했다. 로타르는 잘못하면 帝國 勅令에 따라 配分된 相續分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念慮했으며, 다른 王子들도 그랬지만 그들은 慇懃히 로타르가 大部分을 차지해 버린 帝國 勅令 自體에도 不滿이 있었다. 루이가 늦둥이를 唯獨 귀여워하며 로타르의 領地를 一部 떼어주기로 함으로써 憂慮가 現實化되자, 結局 그들은 손을 잡고 830年에 叛亂을 일으켰다. 約 百 年 뒤인 935年에는 멀리 韓半島의 後百濟에서 父王 甄萱 (甄萱, 867~936)李 늦둥이 異腹同生 錦江을 偏愛하는 것에 刺戟받은 身檢, 良劍, 용검 兄弟들이 叛亂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비슷한 일이 西유럽에서도 벌어진 것이다. 이 ‘第1次 王子의 亂’은 루이 皇帝가 더 많은 땅을 미끼로 피핀과 루이2歲(‘獨逸王’ 루이)를 說得함으로써 1年 만에 鎭壓되었으나, 이듬해에 다시 2次 叛亂이 터진다. 이番에는 루이 皇帝를 사로잡아 强制 退位시키고 監禁하는 데 成功, 王子들의 反逆은 成功하는 듯했다. 그러나 다시 동생들이 背信, 루이 皇帝가 復位하고 로타르의 領地 大部分을 샤를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反轉된다.

그리고 다시 反轉. 837年에 루이 皇帝가 相續分을 調整하면서 獨逸王 루이의 領地를 一部 샤를에게 떼어 주고, 838年에 피핀이 죽으니 그의 領地 大部分도 샤를에게 넘긴다고 하자 피핀의 後繼者인 피핀2世와 獨逸王 루이가 ‘第3次 王子의 亂’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番에는 앞서의 亂에서 主動者였던 로타르가 父王과 合勢했다. 그리하여 피핀2世와 獨逸王 루이를 排除하고 帝國을 東西로 갈라 東쪽은 로타르, 西쪽은 샤를이 갖는다는 條件으로 옛 전우인 동생과 조카를 擊退했다. 세 番째의 亂을 鎭壓한 경건왕 루이는 急速히 健康이 나빠졌으며, 840年에 숨을 거뒀다. 그것은 또 다른 紛爭의 始作을 알리는 信號였다.

마침내 베르됭으로

이미지 目錄

샤를마뉴의 맏孫子인 로타르 1歲. 帝國 全體에 君臨하려던 그의 欲心이 結局 베르됭 條約을 낳게 되었다.

‘대머리王’ 샤를. 實際로 그는 대머리가 아니었으나, 루이 경건왕의 王子로 태어났을 때 물려받을 領地가 하나도 없었으므로 ‘땅이 없는’ 샤를이라고 부르던 것이 訛傳되었다는 말이 있다.

로타르는 제3차 王子의 亂으로 定해진 판勢에 滿足하는 便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샤를마뉴에게 이어받은 皇帝의 位相, 곧 帝國 全體에 君臨하는 榮光을 꿈꿨다. 그래서 817年의 帝國 勅令을 다시 들먹이며 그 사이에 自身을 비롯한 王子들의 叛亂과 父王의 變德으로 數도 없이 다시 만들어진 領土 分割案을 一切 無效로 하고, 自身이 3代 皇帝로서 帝國에 君臨하며 領土의 大部分을 차지하겠노라 宣言한다.

當然히 대머리王 샤를은 反撥했으며, 로타르는 제3차 王子의 亂에서 敗해 領地가 없는 處地이던 피핀2世에게 ‘帝國 勅令에 따라 네 아버지에게 주어졌던 아키텐을 주겠다’고 誘惑해 自己 便으로 끌어들이며 샤를을 壓迫했다. 그러자 샤를도 앞서의 敵이었던 異服兄 獨逸王 루이와 손을 잡고 맞섰다. 이렇게 骨肉相爭은 다시 한 番 판을 바꿔 짜서 再開되었으며, 841年 6月의 퐁트누아 戰鬪에서 로타르는 奮戰했으나 동생들에게 慘敗해 달아났다. 그리고 勝利한 루이와 샤를은 842年에 各自의 軍隊를 이끌고 스트라스부르에서 만나, ‘盟約’을 맺었던 것이다. 퐁트누아 戰鬪 以後 氣勢가 꺾인 로타르는 協商을 要求했으며, 아마도 數十 年 동안 이 집안 사람들이 줄곧 그랬듯 두 동생 사이를 갈라놓고 판을 새로 짜려고 工作했겠지만, 그것에 對備해 ‘盟約’을 맺어둔 것인지라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結局 로타르가 동생들의 要求를 뭐든 받아들이겠다고 나옴으로써, 베르됭 條約 이 이루어지게 된다. 843年 8月이었다.

? 로타르는 皇帝의 稱號를 維持하되, 自身의 領地 밖에서 主君으로 君臨할 수 없다. 그의 影池는 프리시아, 알레마니아의 라인 江 西쪽 地域, 부르고뉴의 론 江 東쪽 地域, 프로방스, 이탈리아이다. 帝國 首都인 아헨과 로마도 그의 領地에 屬한다.

? 루이는 로타르의 領地 東쪽 地域을 다스린다. 작센, 아우스트라시아, 알레마니아의 라인 江 東쪽 地域, 바이에른이다.

? 샤를은 로타르의 領地 西쪽 地域을 다스린다. 네우스트리아, 아키텐, 가스코뉴, 셉티마니아, 부르고뉴의 론 江 西쪽 地域이다.

? 피핀2世는 아키텐을 다스리되, 샤를을 主君으로 섬긴다.

條約에 담긴 歷史的 意味

베르됭 條約으로 三分된 프랑크 帝國. 붉은色이 샤를의 서프랑크, 綠色이 로타르의 로타링겐(로타르 王國), 노란色이 루이의 동프랑크로, 오늘날의 프랑스, 獨逸, 이탈리아의 틀이 이때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프랑스, 獨逸, 이탈리아의 틀이 생겨났다고 한다. 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歷史를 살펴보면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意味深長한 歷史的 瞬間이었던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分割相續制의 盲點에 따라 富者, 兄弟間에 끝없이 되풀이되어 온 땅따먹기 싸움, 그 한 結果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닌가? 假令 獨逸王 루이는 스트라스부르 盟約에서 그토록 嚴肅하게 하느님과 兄弟愛를 들먹이며 샤를과 運命을 함께 하겠노라 했지만, 不過 3年 前에는 로타르와 손을 잡고 샤를과 죽도록 싸웠으며, 12年 前에는 샤를만 偏愛한다 하여 아버지에게까지 칼을 들이대지 않았던가?신의가 없기로는 샤를도 로타르度 다르지 않다. 그들이 철이 들고 말을 탈 줄 알기 始作한 以來, 서로 뻔질나게 篇을 바꾸어 어제의 兄弟가 오늘은 怨讐가 되고, 來日은 다시 冬至가 되는 場面을 演出한 것이 몇 番인가? 分明 베르됭 條約에 따른 領土 再分配는 샤를이 從前의 ‘第3次 王子의 亂’ 鎭壓 後 確保한 서프랑크 領地를 다시 確保하고, 로타르의 領地 가운데 相當 部分을 루이가 얻어낸 것, 그 以上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意味深長한 部分이 있다. 메로빙거 王朝 以來 모든 領土 싸움은 一方的인 宣言과 戰爭으로만 結論이 났었다. 그러나 그런 일을 數없이 되풀이하다 보니 貴族도 平民도 지칠 대로 지쳤고, 只今은 結論이 났어도 언제 또 狀況이 바뀔지 모르기에 不安이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盟約’, 그리고 ‘條約’이라는 形態로, 一旦 이루어진 結論을 서로 確認하고, 神과 臣下들과 萬百姓 앞에 公布함으로써 이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領土 分割이 그前처럼 “알레마니아는 누구에게, 부르고뉴는 누구에게” 式으로 地域 單位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알레마니아의 라인 江 東쪽은 누구에게, 西쪽은 누구에게” 式으로 地理的 境界로 이루어진 것도 特記할 만하다. 왜 그렇게 했을까? 스트라스부르 盟約에서 루이와 샤를은 똑같은 盟約文을 로망어와 게르만어로 되풀이해 읽었다. 루이가 데리고 온 兵士들은 大部分 게르만어만 알아들었고, 샤를의 兵士들도 로망어 말고는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로빙거 以來 프랑크족은 수많은 部族과 種族을 武力으로 支配하고 있었지만, 戰爭을 거듭하다 보니 프랑크족만으로는 싸울 수 없고 地域의 被支配層을 動員하게 되었다. 게다가 프랑크족 自體도 各 地域民들에게 同化되어 갔다. 그래서 갈리아 地域에서는 로망語만 쓰이고, 게르만 地域에서는 게르만語밖에 모르는 狀況이 되었던 것이다. 軍隊라는 組織이 서로 쓰는 말이 다르다면 一絲不亂하게 움직일 수 없다. 따라서 大體로 큰 江이나 山脈으로 나뉘는 自然的인 言語와 文化의 境界에 따라 領土 分界線도 定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 프랑스나 獨逸의 民族意識 같은 것은 없었으나, 그 始初를 일굴 만한 테두리가 비로소 그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北쪽의 프리시아(지금의 ‘低地帶 國家들’, 卽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에서 西部 알레마니아(只今의 알자스-로렌. 로렌은 로트링겐, 卽 ‘로타르의 王國’에서 나온 말이다), 東部 부르고뉴, 이탈리아로 이루어지는 매우 怪常하게 길다란 領土가 로타르의 몫이 된 까닭도 說明해 준다. 普通의 境遇라면 이렇게 交通도 不便하고 防禦하기도 힘든 國境을 設定하지 않는다. 그러나 루이와 샤를이 各各 게르만系와 로망界가 짙은 地域을 中心으로 領土를 나누다 보니 어중간한 地域이 그처럼 남겨졌다. 또한 로타르의 不滿을 撫摩하고자 名目上의 皇帝 地位를 주면서 帝國의 首都인 아헨과 로마가 모두 그의 손에 돌아가게끔 한다는 點도 考慮되었다.

普通 사람들이 세운 歷史

‘뚱보王’ 카를. 獨逸王 루이의 아들로 東ㆍ西 프랑크를 한때 하나로 합쳤지만, 그것을 維持할 技倆은 없었다.

베르됭 條約은 프랑크 王朝의 領土 變更社에 終止符를 찍지는 못했다. 855年에 로타르가 죽자, 그의 王國은 그의 세 아들에 依해 三分되었다. 프륌 條約으로, 루도비코는 皇帝位와 함께 이탈리아를, 로타르2世는 프리시아와 알레마니아를, 샤를(프로방스의 샤를)은 부르고뉴와 프로방스를 차지했다. 그리고 프로방스의 샤를이 863年, 로타르2歲가 869年에 죽자, 로타르의 아들 가운데 홀로 남게 된 루도비코는 870年에 두 三寸들(동프랑크의 루이와 西프랑크의 샤를)과 죽은 兄弟들의 領域을 나눠 갖는 메르센 條約 을 맺음으로써 다시금 領域을 再分配했다(이것으로 거의 只今과 비슷한 프랑스, 獨逸, 이탈리아의 境界線이 그려졌다. 알자스-로렌의 歸屬權은 그 뒤 數百 年 동안 프랑스-獨逸의 紛爭거리가 되지만). 다시 880年에는 루도비코의 後繼者인 카를로망의 죽음에 따른 리베몽 條約 으로 領域이 또 調整되었다. 881年에는 獨逸王 루이의 아들인 ‘뚱보王’ 카를二 桐ㆍ西 프랑크를 一時的으로 다시 합치기도 했으나, 分割相續制에 따른 君主 死後의 領土 分裂은 거듭되었다. 이렇게 카롤링거 王室의 핏줄도 차차 가물어졌다.

皇帝의 地位는 루도비코가 죽은 875年에 西프랑크의 샤를에게 넘어가 한동안 西프랑크에서 繼承되다가, 899年에 동프랑크의 아르눌프가 마지막 카롤링거 皇帝로 숨을 거뒀다. 東프랑크 王朝에서 카롤링거의 直系는 911年에 아르눌프의 아들인 루드비히가 죽고 콘라트가 새 王(‘最初의 獨逸 王’)李 되면서 끝났다. 西프랑크에서는 987年에 카롤링거 王室이 끝나고, 위그 카페가 ‘最初의 프랑스 王’으로 卽位했다. 以後 프랑스와 獨逸은 모두 프랑크의 分割相續制를 버리고 長子相續制를 導入했는데, 다만 獨逸에서는 諸侯가 王을 選擧로 뽑는 原則이 世襲制와 竝存했다. 近代的인 ‘國民國家’가 成立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이제 프랑스와 獨逸, 그리고 이탈리아는 서로 다른 나라로 發展해 가게 되었다.

베르됭 條約이 締結될 때, 그 歷史的 意味를 내다본 사람은 아마 한 名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以後의 領土 調整이 프륌 條約, 메르센 條約 等으로 이어진 것에서 알 수 있듯, 國際政治란 힘으로 만드는 現實이지만 그것을 法的으로 公式化하고 安定化하는 것은 조약이라는 認識이 漸次 자리 잡아 갔다. 또한 以前의 條約이 大體로 平和 條約이었던 反面 베르됭 條約을 起點으로 國境線 確定 條約이 一般的인 條約 類型에 追加되었다. 길고, 잦고, 殘酷하고, 野蠻的인 紛爭의 歲月이 그런 變化에 눈을 띄운 것이다. 아직은 먼 未來, 民族과 國民의 時代가 찾아왔을 때도, 이 베르됭 條約을 自身들의 共同體가 誕生한 起源으로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神이나 英雄이 獨斷的으로 이룩한 神話나 征服이 아니라, 普通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뤄낸 ‘妥協과 約束’李 歷史를 열었음을 되새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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發行日

發行日 : 2013. 04. 08.

出處

提供處 情報

古代부터 現代까지 64個의 條約으로 읽는 和解와 背信, 强壓과 和合 그리고 進步의 歷史.
‘地雷는 果然 쓸모 있는 武器일까?’, ‘난징 條約은 不平等條約인가?’와 같은 興味로운 물음을 던지며 世界史의 裏面을 파고들어 歷史와 社會를 바라보는 視角을 넓힌다. 江華島 條約과 같이 우리 歷史 속 條約부터 마스트리히트 條約처럼 生疏한 條約, 古代의 히타이트-이집트 條約에서부터 現代에 締結된 리우環境協約까지 歷史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世界를 形成한 條約을 알아본다.

  • 함규진 서울교육대학교 敎授, 歷史著述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方面의 知的 흐름에 關心이 많다. 政治學을 專攻하여 大學에서 講義를 하는 한便, 主로 歷史와 關聯된 冊을 여러 卷 썼고, 人物이나 思想에 對한 飜譯서도 많이 냈다. 東洋과 西洋, 傳統과 현대, 保守와 進步 等 서로 對立되는 듯한 立場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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