要約
朝鮮 世宗 때 宮中에 設置한 學問 硏究 機關이다. 高麗 時代에도 있었지만 이름뿐이었고, 1420年에 世宗이 實質的인 學問 硏究 機關으로 만들었다. 世宗의 訓民正音 創製를 도왔고, 여러 가지 冊을 만들어 내는 等 世宗 때의 文化 發展에 크게 이바지했다.
풀이
景福宮에 있었던 集賢殿
壬辰倭亂 때 景福宮이 불에 타 破壞되면서 集賢殿의 옛 建物은 사라졌고, 只今은 수정전이라는 殿閣이 들어서 있다.
朝鮮 第4代 임금인 世宗은 좋은 政治를 펼치려면 무엇보다 뛰어난 人材를 기르고 學問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高麗 時代부터 내려온 圖書館인 集賢殿을 學問 硏究 機關으로 만들고 學者 20餘 名을 뽑아 일하게 했다.
集賢殿에서 일하는 學者들에게 가장 重要한 일은 王과 臣下의 學術 討論인 競演과 王世子에 對한 敎育인 서연을 準備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專門 知識을 가진 學者들이 王과 王世子가 바른 政治를 펼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集賢殿 學者들은 外交 文書를 作成하거나 過去 試驗의 試驗官이 되거나, 實錄 編纂에 參與하기도 했다.
世宗은 集賢殿 學者들을 爲해 많은 冊을 내려 주었고, 官廳의 일에서 벗어나 工夫에만 專念할 수 있도록 配慮했다.
그 結果, 集賢殿은 學問 硏究를 바탕으로
訓民正音
創製를 돕고 《高麗史》와 《農事直說》, 《八道地理志》, 《三綱行實圖》, 《
龍飛御天歌
》, 《月印千江之曲》 等 많은 冊을 펴냈다.
그러나 世祖 때인 1456年 集賢殿에서 일하던 여러 名의 學者들이 端宗 復位 運動을 벌이다 죽임을 當하면서 集賢殿도 廢止되었다. 以後 集賢殿의 役割은
弘文館
이 代身하다가 正祖 때
奎章閣
으로 이어졌다.
深化
世宗은 集賢殿의 學士들을 爲해 賜暇讀書 制度도 만들었다. 賜暇讀書란 集賢殿에서 일하는 젊은 學士들에게 休暇를 주어 學問 硏究에만 沒頭할 수 있도록 支援하는 制度였다.
이것은 世宗이 學問 發展에 기울인 關心과 精誠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第9代 임금인 成宗도 賜暇讀書를 奬勵하여 學士들이 머물며 工夫할 수 있는 空間인 讀書堂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賜暇讀書는 第10代 賃金인 燕山君 때 廢止되었다.
集賢殿은 朝鮮 世宗 때의 學問 發展과 文化 復興의 産室이었다. 朝鮮에서 가장 뛰어난 人材들이 이곳에 모였으며, 임금의 全幅的인 支援을 받아 學問 硏究에 沒頭할 수 있었다.
世宗의 가장 뛰어난 業績으로 評價받는
訓民正音
도 集賢殿에서 完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