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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깊은 집

韓國文學

마당 깊은 집

區分 長篇 小說
著者 김원일
發表媒體 문학과사회
發表日 1988年

作品解說

1988年 季刊 『文學과 社會』 여름號와 가을號에 걸쳐 連載되고 같은 해 문학과지성사에서 單行本으로 發刊된 김원일의 長篇小說.

6.25街 끝난 50年代 初 大邱의 ‘마당 깊은 집’에 모여 살게 된 여섯 家口 스물 두 名의 人物들에 얽힌 事件들을 어린 少年 길남을 1人稱 主人公으로 내세워 그 時點으로 이야기를 敍述하고 있는 小說이다. 中心이 되는 敍事는 主人집이 그들이 모여 살던 마당 깊은 집을 헐어버린다는 結末로 맺어지지만, 作品은 그러한 巨大 敍事가 아닌 各各의 構成員들의 이야기와 그러한 人物들이 마당 깊은 집을 통해 서로를 마주하며 發生하는 일들을 緻密하게 連結하는 方式으로 構成되어 있다.

主人公인 길남은 故鄕 陣營에서 남의 집에 얹혀 지내다가 누나를 따라 大邱로 와서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마당 깊은 집의 아래채 넷째 房에 살게 된다. 社會主義者인 아버지가 單身으로 越北해버린 狀況에서 長男으로서의 義務를 强要하는 어머니로 인해 負擔을 느낀 길남은 家出을 하는 것으로 어머니에 對한 不滿을 드러내지만, 結局 어머니의 손에 依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家長의 役割과 生存의 原理를 깨달으며 成長하게 된다. 길남의 食口와 함께 그곳에 살게 된 構成員들은 다음과 같다. 京畿道 鉛白에서 避難 온 ‘京畿宅’은 모두 세 食口로 아래채 첫째 房에서 살고 있으며, 그 中 美軍 部隊에서 勤務하던 딸 미선이는 美軍과 結婚하여 美國으로 간다.

아래채 둘째 房에 사는 俊豪의 食口는 모두 넷인데 그들은 退役 將校이자 傷痍軍人인 아버지가 고무팔에 쇠갈고리를 달고 돌아다니며 行商을 하여 벌어온 돈으로 生計를 이어간다. 셋째 房의 ‘平壤宅’은 平壤에서 避難을 왔는데, 네 食口 中 그의 아들 정태가 越北 未遂로 逮捕된다. 바깥채의 ‘金泉宅’은 金泉에서 아들과 둘이 함께 避難 온 處地인데, 社會主義者인 男便을 쫓는 刑事의 괴롭힘에 시달리곤 한다. 한便 이 다섯 家口가 사는 마당 깊은 집의 主人집 食口들은 위채에 살고 있는데, 모두 여덟 名으로 構成된 이 家族은 地方의 有志이자 日帝 時節 要職을 거친 親戚들이 있는 富者집이다. 이렇듯 위채-아래채와 바깥채로 分割된 마당 깊은 집의 空間的 構成은 當代 社會를 壓縮해서 보여주고 있다.

아래채와 바깥채의 다섯 食口는 때로는 利己的이기도 하지만 장마로 인해 마당이 잠기자 모두 힘을 합쳐 물을 퍼내며 서로가 서로에게 依支할 수밖에 없음을 自覺한다. 結末에 이르러 마당 깊은 집이 헐리고 이웃들은 뿔뿔이 흩어지는데, 그 過程에서 길남의 어린 동생 길수는 가난으로 인해 藥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죽는다. 길수의 죽음은 위채 老마님의 盛大한 葬禮와 對比되며 길남에게 쓰라린 世上의 理致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길남의 家族을 包含해 京畿宅, 平壤宅, 金泉宅 等은 家長으로서의 아버지의 不在라는 共通點을 가지고 있는데, 그 자리를 어머니가 代替하고 結局 길남으로 대표되는 다음 世代가 이어받는다. 作家는 이러한 構成을 통해 6.25 以後의 現實과 分斷의 멍에를 事實的으로 그려냄과 同時에 그에 對한 操心스러운 克服을 摸索하고 있다.

줄거리(사이버 文學廣場 提供)

내가 初等學校를 卒業하고 大邱市로 올라온 그 무렵부터 저 江原道 楊口 最前方에서 陸軍 士兵으로 滿期 除隊한 60年代 中盤까지, 우리 家族은 줄곧 장관동 언저리에서만 다람쥐 쳇바퀴 돌리 듯 옮겨다니며 살았다. 어머니 앞으로 登記된 우리 집을 장관동에서 처음 마련한 1966年까지 우리가 그 附近에서 옮겨다닌 貰房만도 아홉 집이나 되었다.

그래서 내가 大邱市로 나왔을 때 살던 집을 다른 貰房 집과 區別하려 우리 食口는 그 너른 집을 말할 때 '마당깊은 집'이라 불렀다. 내가 大邱市로 오니 先例누나는 中學校 3學年이었고, 겁먹은 큰 눈만 껌벅거려 멍청해 보이는 길중이는 그해 막 初等學校에 入學해 있었다. 막내아우 길수는 아직 사팔뜨기가 고쳐지지 않았고 팔다리가 앙상하게 마른 데다 앙가발이걸음을 걸었다. 마당 깊은 집의 아래채와 위채에 살던 사람들을 집어내자면 그 數가 많을 수밖에 없지만, 나는 그 얼굴들 하나 하나를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所持品만큼 只今도 鮮明하게 記憶하고 있다.

수돗간에서부터 첫째 放은 競技도 延白郡에서 避難 나온 京畿宅 家族이 살았다. 食口는 셋이었다. 京畿宅은 나이 쉰 初盤이었는데 그 나이로서는 드물게 開城에서 高女까지 다닌 有識한 아주머니였다. 키가 멀대같은 競技宅 아들 興揆氏는 邊두리 齒科病院 記功詞로 老總角이었다. 젖통과 엉덩이가 큰 競技宅 딸 미선이 누나는 마당 깊은 집에서 멋쟁이 處女로 통했는데, 늘 껌을 씹으며 입안에서 소리내어 터뜨렸다.

둘째 放은 退役 將校 傷痍軍人 家族이 살았다. 亦是 세 食口였다. 오른팔을 戰爭터에서 잃어 고무팔 달린 쇠갈고리 두 個가 손가락 구실을 하는 준호 아버지는 사람을 볼 때 그 쏘아보는 눈초리가 戰爭터의 敵軍을 對하듯 敵意를 품은 데가, 말數 적은 조용한 사람이었다. 얼굴이 주근깨 투성이인 준호 엄마는 내가 大邱로 갔을 때 아기를 배고 있었다. 다섯 살인 俊豪는 바깥마당 金泉宅 아들 복술이와 비슷한 또래여서 자주 싸우고 금세 親해지는 동무 사이였다. 내 막내아우 길수는 앙가발이걸음으로 그 개구쟁이 둘을 졸졸 따라다니며 늘 빙충맞은 짓을 도맡아 했다. 셋째 放은 平壤宅 家族이 살았다. 모두 네 食口였다.

京畿宅보다 나이가 서너 살 아래인 平壤宅은 양키市場에서 헌 軍服을 파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네는 딸 하나에 아들 둘을 두고 있었다. 깜조록한 얼굴에 雙꺼풀진 눈이 예쁜 醇化누나는 婚期가 찬 處女였다. 늘 火가 끓는 裳板의 말라깽이 큰아들 靜態氏는 肺가 나빠 집에서 놀고 이었다. 여드름이 울긋불긋 난 둘째아들 民彛型은 靜態氏와 달리 몸이 실했고 집과 가까운 경북고등학교 卒業班 學生이었다. 위채 食口는 모두 여덟이었다. 主人아저씨는 出勤 때나 그 얼굴을 잠깐 볼 수 있을 만큼 늘 바쁜 사람이었다. 主人아저씨는 大邱 邊두리 침산동에 綿紡績機 열 몇 臺를 차려 놓은 工場을 運營했다. 主人아주머니는 바깥으로 나도는 活動家로 有閑層 婦女子를 相對로 契主 노릇을 하고 있기도 하였다. 안살림은 七旬의 年歲를 넘은 老마님이 맡아 살았다.

主人아저씨와 主人아주머니 사이에는 大學校 二 學年에서 中學校 二 學年까지 아들만 셋을 두고 있었다. 市內 私立學校 法大를 補缺로 들어갔다는 성준형은 乾達 大學生이었으며 '戀愛 大將'이라는 別名이 붙어 있었다. 高等學校 二 學年인 짱구型과 中學校 二 學年인 똘똘이型은 平壤宅 둘째 아들인 民彛型이 저녁나절 두 時間씩 工夫를 가르쳤다. 위채 나머지 한 食口는 食母 安氏로, 慶北 高齡이 故鄕이었다. 5月 初旬 어느 날 나는 어머니의 願대로 新聞팔이에 나섰고 내가 新聞팔이를 始作한 뒤 보름만에 준호엄마는 딸을 낳았다. 1954年 그해 여름 장마는 길고 지루했다. 本格的인 장마가 始作되자, 어머니의 바느질 일거리가 뜸해져, 우리집 食口는 굶는 일이 잦아졌다.

繼續되는 장마비로 因해 마당 깊은 집 食口들은 어느 날 밤에는 마당 한 가득 차 오른 물을 퍼내는 騷動을 한 次例 겪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아침 저녁나절로 시원한 기운이 뻗히면서 어머니의 일감이 다시 밀려들었고, 나는 같이 新聞을 팔던 한週의 도움을 받아 新聞팔이 少年이 아닌 大邱日報 新聞配達員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햇살 맑고 잔풍한 午前이었다. 나는 마당에서 누나가 썼던 中學校 一 學年 英語 冊으로 單語 쓰기를 工夫하고 있었고 醇化누나는 쪽마루에 앉아 헌 軍服의 닳은 소매를 깁고 있었다.

"우리집도 孫子들이 다 컸다 보이 아래채 房 하나를 더 써야 되겠데이. 아래채 김장하기 前에 어느 집이든 房을 하나 비워져야 할 낀데……." 老마님의 혼잣말 같게, 그러나 아래채 누구나 들으라고 한마디를 흘렸다. 老마님의 그 말 以後에 마당 깊은 집은 술렁이기 始作했다. 貰들어 사는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흉을 늘어놓았다. 不安한 내 어머니는(어머니는 當時 바느질로 生活을 꾸려 가셨는데 株顧客 層은 妓生들이었다) 平壤宅 아주머니와 함께 主人 아주머니를 찾아가 相議를 드린 끝에 長斫더미를 들여놓았다.

主人 아주머니는 長斫을 다 땔 때까지는 老마님度 쫓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내 어머니께 했던 것이었다. 우리 집이 長斫을 들여놓은 後, 俊豪네 집을 除外한 나머지 집들도 다투어 長斫더미를 들여놓았다. 그러나, 長斫을 들여놓지 않은 俊豪네度 또 長斫을 들여놓은 다른 食口들도 그 집에서 쫓겨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老마님이 말만 꺼내었다 흐지부지되었던 '아래채 房 한 칸을 비워 달라'는 問題가 다시 擧論되기는 12月로 접어들어서였다. 장사 手腕으로 맺고 끊는데는 履歷이 난 大讚 女丈夫 主人아주머니가 直接 나섰다. 安氏는 아래채 네 房을 돌며 主人 아주머니의 呼出 命令을 내렸고 時間이 흐르자, 어머니가 房門을 열고 나타났다. 나는 어머니의 暗澹한 얼굴에서 우리 집 家族이 房을 비워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 들어 사는 네 食口가 제비뽑기를 했는데 不幸하게도 내 어머니가 걸려든 것이다) "어무이 金泉때祈禱 房을 비워야 되는 것 같던데 그 가겟房에 우리가 들어가모 안 되겠습니껴?" 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이튿날 아침에 金泉宅을 찾아갔으나, 金泉宅에게서 主人 아주머니가 이미 이곳에서 貰를 살 사람을 定해 놓았다는 말을 傳해 듣게 되었다.

어머니는 貰를 살 사람을 搜所聞한 끝에 步金堂에서 일하는 鄭技士라는 것을 알아냈고, 그와 合意한 끝에 우리집 食口가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또한, 어머니는 준호 어머니의 付託대로, 준호 아버지가 가게 앞에서 군고구마와 풀빵을 팔 수 있는 자리를 세놓아 주었다. 金泉宅이 移徙를 가고 난 後, 平壤宅의 큰아들 靜態氏가 없어졌고, 사람들은 그가 平素 가깝게 지내던 金泉宅과 눈이 맞아 도망간 것이라고 쑥덕였다.

醇化누나와 民彛型은 靜態氏를 찾아 날마다 저잣거리며 驛 周邊을 돌아다녔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競技宅이 俊豪네 가네에서 俊豪아버지에게 하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靜態氏는 金泉宅과 복술이를 데리고 越北을 試圖하다가 失敗를 했다는 것이다. 金泉宅과 복술이는 無事히 越北을 했지만, 정작 靜態氏 自身은 失敗를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後, 靜態氏의 일심 公判이 있었고 二十 年刑의 宣告 判決을 받았다. 靜態氏는 上告를 스스로 抛棄하며 '南朝鮮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統一될 그날'까지 監房에서의 삶을 擇하고 말았다.

마당 깊은 집에 貰를 든 家口는 4月 10日로 約束된 期間을 채우자 모두 떠났다. 平壤宅네는 양키市場 끝머리 동인동으로, 俊豪네는 當時 능금밭이 많았던 복현동 避難民 板子村 洞네로, 그렇게 貰房을 얻어 쪼개어져 흩어졌다. 京畿宅네만이 結婚式 날짜를 잡아 놓은 興揆氏가 새살림을 始作할 집을 색시집 쪽에서 마련해 주어 가장 홀가분하게 理事를 났다. 우리집은 새로운 貰房으로 옮겨앉았으나 마당 깊은 집과의 距離는 不過 一百 미터 남짓 되었다.

4月 中旬 어느 날이었다. 新聞 配達을 나선 길에 나는 마당 깊은 집이 무너지는 것을 目擊할 수 있었다. 내 마음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 듯 아픔이 마음을 쳤다. 내 大邱 生活 첫 一 年이 저렇게 묻히고 마는구나 하고 나는 슬픔 가득 찬 마음으로 그 光景을 지켜보았다. 곧 二層 洋屋집이 초라한 내 生活의 발자취를 딛듯 그 땅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나는 地方 大學을 卒業한 그해 곧 서울로 올라와 出版社에 就職했다. 그러나 結婚은 大邱處女와 했으므로 休暇는 妻家가 있는 大邱로 가곤 했었다. 내가 職場生活을 했던 (只今은 文筆家이다) 五 年 前 그해 여름 休暇 때, 우리 食口는 大邱로 내려갔다. 大學 同窓生을 만나 낮술을 한 盞하고 中央통 길을 걷고 있었는데 나는 새로 지은 建物에 내 걸린 낯익은 看板하나를 發見했다. '정민 內科醫院' 이었다.

나는 看板 앞에서 暫時 망설이다 階段을 밟고 二層과 三層을 쓰는 病院으로 올라갔다. 四十代 後半의 民彛型은 이미 머리카락이 희끗한 中年으로 變해 있었다.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했음은 當然했다. 通姓名을 하고 우리는 서로 반갑게 손을 마주 잡았다. 自然 마당 깊은 집 時節 이야기부터 話題에 올랐다. 民彛型은 준호 아버지는 書店을 하고 있다고 傳했다. 나는 暫時 망설이다가 靜態氏의 消息을 물었다. 그는 꼬박 刑量을 채워 75年 正月에야 釋放되었는데, 그해 7月 '社會安全法' 制定에 依해 轉向 拒否에 따른 保安 監護 處分을 받아 7個月만에 다시 收監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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提供處 情報

  • 著者 권영민 大學敎授, 文學評論家

    1948年 忠南 保寧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및 同 大學院을 卒業한 後 文學博士 學位를 받았으며, 美國 하버드대 客員敎授, 버클리에서 韓國文學 招聘 敎授를 歷任했다. 1990年 現代文學評論賞, 1992年 金煥泰評論上, 2006年 萬海對象 學術賞을 受賞한 바 있으며, 以外에도 서울文化藝術賞을 受賞했다. 現在는 서울對 國文科 敎授로 在職 中이다. 著書로는 『韓國 現代文學史』, 『우리文章講義』, 『敍事樣式과 談論의 近代性』, 『韓國 階級文學 運動史』, 『韓國 近代文學과 時代 精神』, 『越北 文人 硏究』, 『한국문학 50年』, 『尹東柱 硏究』, 『작은 기쁨』 『文學의 理解』等이 있다. 仔細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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