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片丹心의 高麗 忠臣, 정몽주
정몽주(鄭夢周), 1337~1392
朝鮮 時代의 朱子學者들人 기대승 · 김장생 · 宋時烈 等은 慶尙道 永川에서 태어난 정몽주
를 韓國 留學의 鼻祖로 꼽았다.
勿論 哲學 外에도 外交的인 分野에서 그가 이룩한 業績은 실로 注目할 만하다.
中國의 明나라와 日本을 오가며 考慮가 이들 나라와 友好的인 關係를 맺게 하는 데 外交的인 手腕을 發揮했고, 李成桂의 麾下에서 倭寇 討伐에 參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高麗의 腐敗는 極度에 이르러 大勢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이때 李成桂의 아들 李芳遠(李芳遠, 後날 太宗)李 鄭夢周와 마주앉아 時調 한 首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萬壽山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百 年까지 누리고저
이것이 그 有名한 <何如歌>다. 다 썩어가는 高麗 王室만 붙들려 하지 말고, 서로 사이좋게 사는 것이 어떠하겠느냐는 內容이었다. 鄭夢周는 이에 다음의 詩로 答을 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一百 番 고쳐 죽어
白骨이 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向한 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萬古의 忠節 鄭夢周는 <丹心歌>를 통해 高麗에 對한 忠誠을 거듭 披瀝한 것이다.
結局 鄭夢周는 善竹橋(善竹橋) 위에서 鐵片에 맞아 숨을 거두고 朝鮮王朝는 도도히 그 門을 열어갔다.
죽음으로 名譽를 지킨 정몽주
鄭夢周는 李成桂를 王으로 推戴하려는 움직임을 感知하고 肅淸할 機會를 노렸다. 그러나 李芳遠이 部下 趙英珪(趙英珪) 等을 시켜 開城 南쪽의 善竹橋에서 鄭夢周를 撤退路 내리쳐 죽였다는 內容이다. 《五倫行實圖》에서 拔萃한 場面이다.
鄭夢周는 高麗 末期에 새로운 理念 體系로 導入된 朱子學을 積極的으로 硏究하고 五部學堂과 鄕校를 세워 널리 普及하는 데 貢獻했다.
또한 예(禮)를 大衆에 傳播하기 위해 《朱子家禮(朱子家禮)》에 따라 家廟(家廟)를 세우고 新株(神主)를 처음 세웠다.
高麗에 性理學의 基礎를 세우고 그 名分을 지키며 죽었기 때문에, 後에 ‘東邦理學志操(東方理學之祖)’로 推仰되었다.
그러나 實際 그는 鄭道傳의 急進的인 土地 改革에 反對하고 佛敎에 對해서도 折衝的인 態度를 取하는 等 果敢한 朱子學的인 理念의 實踐에는 多少 消極的이었다.
朝鮮王朝의 開國 功臣, 정도전
정도전(鄭道傳), 1342~1398
李成桂를 도와 朝鮮王朝를 여는 데 絶對的인 貢獻을 한 사람이 바로 정도전
이다.
當時 李成桂 等의 改革派는 中央集權을 强化하고 佛敎를 徹底히 批判하여 새로운 精神的 武器, 卽 程朱學(程朱學)을 그에 代身하고자 했다.
改革派의 核心 人物인 鄭道傳은 그러한 政治 路線을 實現하는 데 앞장서다가 한때 保守 勢力에 밀려 流配를 當하기도 했다.
그러나 李成桂의 幕僚로 急浮上했던 鄭道傳은 李成桂가 威化島에서 回軍한 1388年 무렵부터 照準의 田制改革案을 받아들이고 佛敎의 弊害論을 펼치면서 새로운 王朝 開創에 一等 功臣 役割을 遂行해나갔다.
1391年 李成桂가 三軍都摠制府를 設置하고 兵權을 掌握하자, 鄭道傳은 友軍都總制로서 李成桂를 輔弼했다.
鄭道傳은 새로운 首都 建設을 主唱하여 只今의 서울인 漢陽으로 遷都하게 했다.
그러나 糠粃(康妃) 所生인 방석을 世子로 冊封하게 함으로써 李芳遠과 對立角을 세우던 鄭道傳은 모든 王子들을 宮中에 불러들인 다음, 韓氏 所生의 王子들을 一擊에 죽여 없앨 計略을 꾸며놓았다.
그러나 事前에 陰謀를 알아차린 李芳遠과 그 夫人의 機智로 計略은 失敗로 돌아갔고, 이에 李芳遠은 鄭道傳과 남은
과 심효생
等을 모두 죽이고 말았다.
以後에 方席이 世子 자리에서 물러나고 柔弱한 방과가 世子에 올라 定宗이 되었으며, 방원은 그 뒤를 이어 太宗이 되었다.
鄭道傳은 朱子學을 朝鮮의 統治 理念으로 採擇하여 高麗의 이념적 支柱였던 佛敎 思想을 克服하는 한便, 百姓 本位의 理念과 官僚의 道德性을 바탕으로 하는 儒敎的 以上 國家 實現을 위해 努力했다.
그러나 鄭夢周와 정도전 가운데 後代에 正統으로 인정받은 것은 정몽주다.
그의 義理 精神은 建國 後 王朝의 安定과 維持라는 政治的 · 現實的 意圖에서 再評價되면서 朝鮮 道學의 鼻祖로 떠오르게 된다.
朝鮮의 儒學은 鄭夢周를 비롯하여 吉再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에서 李滉과 李珥로 이어지는 系統을 正統으로 본다.
이들이 强調한 절의(節義) 精神은 大義(大義)로 表現되는 政治 規範이고 이를 實現하기 위해 殺身成仁하는 性理學 特有의 都統적 規範이었다.
儒敎的 道德政治의 挫折, 조광조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광조
는 當代의 有名한 儒學者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弟子가 되어 젊은 나이에 將來가 屬望되는 學者로 손꼽히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燕山君은 그의 生母 尹氏가 廢位될 當時에 新進 士類人 윤필상 · 이극균 · 金宏弼 等이 贊成했다 하여 그들을 處刑하고, 나머지 新進 士類들을 削奪官職(削奪官職)
또는 流配를 보내는 甲子士禍(甲子士禍)를 일으키고 말았다.
이 일 後에 趙光祖는 스승을 代身하여 後輩들을 가르치는 데 平生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1506年 朴元宗 等 勳舊派 大臣들은 暴君 燕山君을 몰아내고 그의 異腹同生을 國王으로 봉했으니, 이것이 ‘中宗反正(中宗反正)’
이다.
以後 朝廷에서는 勳舊 勢力을 牽制하기 위해 士林의 學者들을 登用하기 始作했다.
이때 趙光祖는 眞사會試에 壯元 及第하고 謁聖試에도 及第하여 朝廷의 注目을 받았다.
김굉필 나무
金宏弼은 朝鮮 前期 中宗 臺의 性理學者로, 號는 寒暄堂(寒暄堂) · 簑翁(蓑翁)이다. 金宗直 門下에서 學問을 배움으로써, 吉再 · 김숙자 ·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性理學의 學問 傳統을 이었다. 그는 流配地에서도 學問 硏究와 人材 養成에 힘썼고 特히 趙光祖에게 學問을 傳受했으며, 1504年 甲子士禍 때 全羅道 順天의 流配地에서 四史(賜死)되었다. 寫眞은 ‘金宏弼 나무’라고 불리는 도동리에 所在한 나무다.
마침내 趙光祖는 中宗의 信任에 힘입어 여러 官職을 歷任했다.
趙光祖는 王道政治를 施行해야 한다고 믿었는데, 그의 改革的 政治에 힘입어 士林派가 朝廷에서 힘을 얻어갔다.
한便 勳舊派들은 當然히 그에게 反感을 갖게 되었고, 드디어 홍빈의 아버지 홍경주를 自己들 便으로 끌어들였다.
“우리가 趙光祖의 逆賊謀議를 임금께 告할 테니, 홍빈께서는 心腹을 시켜 宮中의 後援 나뭇잎에 꿀물로 ‘週初위왕(走肖爲王)’이라는 네 글字를 쓰십시오.
그러면 벌레들이 단물을 빨아먹기 위해 그 글字를 좀먹듯 파먹을 것입니다.
이때 홍빈께서 上監에게 後援 동산에 납시어 이것을 仔細히 보게 하시면 됩니다.
週初(走肖) 두 글字를 합치면 兆(趙)가 되지 않습니까? 이는 趙光祖가 王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趙光祖의 지나친 改革에 싫症을 느끼던 中宗은 이러한 狀況에 부닥치게 되자 그를 反逆罪로 다스렸다.
그는 全羅道 和順 땅의 능주로 귀양을 갔다가 끝내 死藥을 받아 죽고 말았다.
이 事件을 己卯士禍(己卯士禍)라 부르는데, 後날 그를 기리는 수많은 書院과 祠堂이 세워졌으며, 宣祖 初에는 마침내 領議政에 追贈됨과 同時에 文廟에 配享되었다.
趙光祖는 刑罰에만 依支하는 霸道政治에 反對하고 仁義(仁義)에 따르는 王道政治를 主唱했다.
愛民(愛民) 思想에 忠實한 그는 한前提(限田制)의 實施와 賢良科의 設置, 그리고 奴婢法과 庶孼法의 改善 等을 推進했다.
그러나 新進 士林의 우두머리로 中宗의 信任을 받아 儒敎的 道德政治를 實現하려 했던 趙光祖의 꿈은 結局 勳舊派에 依해 挫折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