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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政治哲學 다시보기

루터

人間은 神을 選擇할 수 있는가?

[ Martin Luther ]

要約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專橫만큼이나 主觀的 神祕主義 信仰에 對해서도 批判的이었다. 世俗的인 것과의 徹底한 斷絶도 千年王國의 革命的 建設도 그에게는 避해야할 劇團이었고, 그만큼 루터의 思想은 革命的이면서도 同時에 保守的이었다.
時代 르네상스
出生 - 死亡 1483年 ~ 1546年
루터

루터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의 그림

製圖士商事를 돌이켜 볼 때, 宗敎改革은 時代的 變化를 招來한 破壞力에 비해 井然한 思想的 體系를 갖지 못한 運動과 論爭의 連續이었다. 1) 宗敎改革이 로마 가톨릭 敎會의 權威를 붕괴시켰다고는 하지만, 敎會 權威의 墜落은 13世紀 末 十字軍 遠征에서 이미 始作되었다. 또한 宗敎改革의 結果로 世俗的인 政治權力이 負傷(浮上)되었다고는 하지만, 敎權과 王權의 區分은 5世紀 末 敎皇 겔라視우스 1歲(Gelasius I)에 依해 이미 公式化된 바 있었다. 이런 脈絡에서 본다면, 마틴 루터(Martin Luther)로부터 始作된 宗敎改革은 새로운 政治的 흐름이라기보다 存在하던 여러 龜裂들이 偶然的 契機로 凝縮되어 同時多發的으로 暴發한 事件들의 連續이라고 할 수 있다. 2)

그러나 ‘어떻게 루터의 「95個組 反駁文(Disputatio, 1517)」李 로마 敎會의 專橫에 對한 旣存의 反撥들을 한꺼번에 暴發시키는 契機를 마련했던가?’라는 質問은 如前히 남는다. 卽 龜裂들이 이미 存在했더라도 루터가 그것들을 어떻게 認識했고, 特定 局面에서 그는 自身의 생각을 어떤 意圖로 組織했으며, 그가 누구를 說得하려 했는지가 同時에 檢討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루터의 思想을 살펴보기 前, 宗敎改革이라는 巨大한 물결을 可能하게 만든 懸案들은 무엇이었으며, 이러한 懸案들을 政治社會的 葛藤의 中心으로 옮겨놓은 힘은 어디에서 推動되었는지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必要가 있다는 것이다.

改革의 土臺

사보나롤라

사보나롤라 프라 바르톨로메오(Fra Bartolomeo)의 그림. 이탈리아 피렌체 地域의 山 마르코 美術館(Museo di San Marco)에 있다.

세 가지 側面이 特히 浮刻된다. 첫째 루터로부터 始作된 宗敎改革은 15世紀 中葉부터 유럽 全域으로 擴散된 印刷術의 德을 톡톡히 보았다.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의 事例에서 보듯,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로마 가톨릭교회에 對抗하는 하나의 方法으로 印刷物이 널리 活用되고 있었다. 3) 따라서 流通되는 印刷物의 規模가 數百萬으로 擴大된 16世紀 初, 그것도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以來 印刷革命을 主導한 獨逸에서, 루터의 「95個組 反駁文」이 獨逸語로 飜譯 出版되어 15日 만에 獨逸 全域에서 읽혀진 것은 偶然이 아니었다. 4) 卽 1517年에서 1520年까지 루터가 쓴 30種의 著述들이 30萬卷 以上 팔려나간 事實에서 알 수 있듯이, 5) 루터의 宗敎改革은 始作부터 그 以前의 위클리프(John Wycliffe)나 後쓰(John Huss)와는 다른 土臺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 로마 敎皇에 對한 가톨릭 共同體 內部의 認識이 ‘調停者’에서 ‘僭主’로 轉換된 것도 루터의 宗敎改革이 成功하는 데에 큰 寄與를 했다. 로마 敎皇은 聖經에서 言及된 ‘베드로의 權威’를 繼承했다는 象徵的 意味만큼이나 가톨릭共同體 內部의 統一을 가져오는 實質的 役割을 擔當했다. 6) 敎皇은 聖經을 둘러싼 論爭에서 누가 옳은지를 判斷하는 基準이었고, 奇跡이나 豫言의 眞僞를 가리는 裁判官이었으며, 가톨릭 共同體 內部의 分裂과 葛藤을 종식시키는, 一種의 合意된 制度였던 것이다. 7) 그러나 合意된 制度로서 敎皇의 權威는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徐徐히 무너지기 始作했다. 敎皇의 命令에 順應하는 오랜 傳統을 拒否하며 모두가 聖經을 解釋할 수 있다는 새로운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同一한 理由에서 象徵的 權威에 依存해서 波紋校誌를 濫發하는 敎皇을 ‘僭主’로 認識하는 契機를 强化시켰다.

셋째, 宗敎改革이 進行되기 훨씬 以前부터 가톨릭 共同體의 分裂이 있었다는 點을 念頭에 둘 必要가 있다. 8) 種種 루터로부터 始作된 宗敎改革을 마치 基督敎 世界의 첫 宗派的 分裂처럼 이야기하는 境遇를 보게 된다. 그러나 嚴密하게 말하자면, 가톨릭 共同體의 分裂은 훨씬 以前부터 存在했다. 1054年 그리스 正敎會와 로마 敎會와의 對立은 1439年 페라라-피렌체 公議會에서 다시금 불거졌고, 1378年부터 1418年까지 持續된 西方 敎會 內部의 對立은 로마 敎會의 權威가 但只 物理的 優位에 不過했었다는 事實을 많은 사람들에게 刻印시켜 주었다. 9) 事實 1519年 名譽慾에 사로잡힌 에크(Johann Eck)가 로마 敎會의 正統性을 앞세워 루터를 非難했을 때, 獨逸의 젊은 神學者들이 루터의 便을 든 것은 充分히 豫測 可能한 일이었던 것이다. 卽 宗敎改革이 敎會의 分裂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後者가 前者를 加速化시켰던 것이다.

이렇듯 루터의 「95個組 反駁文」은 그 以前의 宗敎改革의 盲啞들과는 다른 土臺에 서 있었고, 이러한 土臺들은 루터가 提起한 懸案들이 瞬息間에 巨大한 運動을 觸發시킬 수 있는 動力을 提供했다. 게다가 獨逸은 이러한 宗敎改革의 推動力이 극대화될 수 있는 最適의 條件을 갖고 있었다. 相對的으로 弱한 로마 敎會의 影響力, 그리고 貧弱했던 聖職者들과 平信徒들의 紐帶도 한 몫을 한 것이다. 이런 狀況에서 敎皇이 아니라 聖書가 判斷基準으로 前提되고, 敎會의 位階가 아니라 信仰的 獻身이 正當性의 根據로 提示되자, 獨逸人들은 루터의 著述에 熱狂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꽃피운 르네상스 가톨릭 人文主義와는 달리, 獨逸에서 始作된 宗敎改革은 오래지 않아 로마 가톨릭교회를 正照準하기 始作했다.

禁慾的 世界觀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안토니오 로드리게스(Antonio Rodriguez)의 그림. 멕시코 국립미술관에 있다.

人間에 對한 루터의 悲觀的 見解는 種種 心理學的 精神分析의 對象이 되기도 한다. 過度하리만큼 嚴格한 性慾(性慾)에 對한 潔癖症, 지나칠 程度로 徹底한 理性(理性)에 對한 不信, 그리고 안타까우리만큼 悽絶한 自己(自己)에 對한 失望, 10) 이 모든 主題들이 아우구스티누스가 人間의 ‘支配欲’에 對한 批判으로부터 宗敎的 獻身의 必要性을 導出하는 水準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11) 아울러 當時 가톨릭 傳統의 ‘自己否定(自己否定)’的 信仰을 넘어 ‘믿음’(fide)의 理性에 對한 絶對的인 優位로 歸結된 루터의 宗敎觀이 어떻게 世俗的 政治權力과 시의적절한 協力으로 收斂되었는지도 큰 興味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루터에 對한 心理學的 궁금症과는 對照的으로, 루터의 어린 時節은 平凡했다. 12) 그는 1483年 11月 10日 獨逸 작센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家族은 마침 튀링겐(Thuringen)에서 移住해 왔는데, 그가 태어난 다음 해에 製鍊業에 손을 댄 아버지를 따라 만스펠트(Mansfeld)로 다시 居處를 옮겼다. 그의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der)는 農事를 짓다가 鑛夫가 되어 事業家로도 成功하고, 市民 代表로서 住民들의 信望도 한 몸에 받던 人物이었다. 가끔 루터의 淫慾(淫慾)에 對한 病的 忌避가 父母의 지나치게 嚴格했던 體罰의 結果라는 主張이 提起되지만, 父母의 訓育이 苛酷했다기보다 루터가 回顧하는 어린 時節이 修道僧의 自責으로 彩色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3)

루터는 만스펠트에서 라틴語 基礎敎育을 마친 뒤, 1497年 幕데부르크(Magdeburg)의 ‘共同生活 兄弟團’(Fratres Vitae Communis)에서 基督敎 敎理와 人文學的 敎養을 쌓는다. 이때 그는 안할트(Anhalt) 公國의 王子였다가 프란체스코회 修道僧이 된 빌헬름(Wilhelm)의 禁慾的 삶에 큰 感銘을 받는데, 이 時期 經驗들은 1498年부터 1501年까지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받은 敎育과 함께 그의 信仰에 主要한 土臺를 提供했다. 그러나 에르푸르트(Erfrut) 大學에서 碩士學位를 마치고 法學 科目을 本格的으로 履修하기 始作한 1505年까지, 그는 아버지의 所望대로 法律家의 길을 걷고 있었다. 當時 에르푸르트는 經濟的 豐饒를 발板으로 ‘작은 로마’라는 別名을 얻을 程度였기에, 그의 成功에 對한 家族의 期待도 그만큼 컸다.

따라서 1505年 7月 17日 루터가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투스 修道會에 들어가기로 決心했을 때, 野心滿滿했던 아버지는 그의 決定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事實 1505年 7月 2日 本家에 다녀오는 길에 벼락을 맞아 죽을 뻔 했을 때, ‘죽음의 恐怖에 사로잡혀 修道士가 되기로 序言(誓言)했다.’는 말은 누구도 納得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14) 그러나 그의 意志는 確固했고, 그의 아버지도 그의 決定을 尊重할 수밖에 없었다. 自身의 序言의 眞情性을 證明하듯, 宗敎改革의 旗발을 든 以後 政敵들의 無故(誣告)에도 欠을 찾을 수 없었을 만큼 그의 修道院 生活은 禁慾的이고 模範的이었다. 게다가 다른 修道士들과 比較할 수 없는 出衆한 知識은 當時 周邊 大學의 注目을 받기에 全혀 不足함이 없었다.

요한 스타우피츠

요한 스타禹피츠

1507年 루터는 新婦로 敍品을 받았고, 1509年 3月 9日 ‘聖書學社’(Baccalaureus biblicus)를 받기까지 聖書硏究에 沒入했다. 그해 가을 神學을 講義할 수 있는 ‘신학사’(Sententiarius) 資格을 取得한 後, 1510年에서 1511年 사이 로마에서 開催된 修道院 總會를 다녀온 期間을 除外하고는 에르푸르트 大學에서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의 『前擧論』(Libri Quattuor Sententiarum)을 가르쳤다. 로마에서 돌아온 後, 그는 바로 비텐베르크(Wittenberg) 大學의 講師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1512年 10月 神學 博士學位를 取得한 後, 그의 相關이자 스승이었던 요한 스타禹피츠(Johann von Staupitz)의 뒤를 이어 神學敎授가 되었다. 이처럼 루터는 1523年 손수 出版한 사보나롤라의 『冥想錄』(Meditatio)에 나오는 獄中 告白처럼, 15) ‘虛誕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依支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改革의 始作

반박문

反駁文 페르디난드 파웰(Ferdinand Pauwels)의 그림

1517年 10月 31日 비텐베르크 大學 宮廷敎會(Schlosskirche) 正門에 라틴語로 쓴 루터의 「95個組 反駁文」李 나붙었다. ‘免罪符 能力 天命에 對한 反駁’(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이라는 元來 題目에서 보듯, 「95個組 反駁文」은 敎皇 레오 10歲(Leo X)의 性(聖) 베드로 聖堂 建築費 充當과 幕데부르크 大主敎 알브레히트(Albrecht von Mainz)의 私慾이 빚은 ‘完全 免罪符’ 濫發에 對한 討論을 要求하는 글이었다. 여기에서 루터는 7世紀부터 通用되어 오던 世俗的 處罰의 ‘赦免’(indulgentia)李 敎會와 聖職者의 蓄財(蓄財)를 위해 濫用됨으로써 ‘免罪符(免罪符)’로 變質되었다고 指摘하고, 16) ‘告白聖事’(penitentia sacramentali)와 같은 敎會의 權威를 通한 懺悔가 아니라 眞正한 靈的 悔改를 促求했다. 17) 卽 이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權威에 正面으로 挑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95個組 反駁文」은 그동안 잠재되었던 葛藤을 고스란히 露出시켰고, 以後 큰 反響을 불러일으키기에 充分한 雷管을 갖고 있었다. 첫째, ‘敎皇은 어떤 罪도 社(赦)할 수 없다,’(Papa non potest remittere ullam culpam)'는 論題에서 보듯, 18) 루터는 敎皇의 權威가 絶對的일 수 없다는 點을 分明히 했다. 事實 當時 敎皇은 가톨릭 共同體에서 無所不爲의 權力을 行使했지만, 信仰의 問題에 있어 리더십을 發揮하지는 못했다. 托鉢 修道僧들의 거리說敎와 神祕主義의 蔓延으로 平信徒들의 信仰的 要求는 폭증했지만, 敎皇은 無差別的이고 恣意的인 波紋과 異端宣告를 除外하고는 指導力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록 敎皇의 權威를 全的으로 否定하진 않았지만, 루터의 論題는 敎皇이 無條件 服從해야 할 對象이 아니라는 點을 浮刻시키기에는 充分했던 것이다.

둘째, 信仰과 不信仰을 判斷하는 基準은 ‘敎會의 眞正한 寶物(verus thesaurus ecclesie)’인 聖書(聖書)뿐이며, 19) ‘眞正한 基督敎人’(verus christianus)이면 누구든지 敎會의 모든 靈的 活動에 參與할 수 있다는 點을 明白히 했다. 20) 이러한 論題들은 中世時代부터 宗敎的 權威를 支撐하던 聖職者와 平信徒의 位階를 破壞하는 重大한 挑戰이었다. 當時 로마 가톨릭교회는 라틴語를 읽고 쓸 能力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宗敎的 權威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政治權力들이 앞을 다투어 學校와 大學을 設立하고, 印刷術의 發達과 종이 價格의 引下로 出版이 活性化되면서, 많은 數의 平信徒가 聖職者의 特權처럼 여겨졌던 ‘聖書를 읽고 쓰는’ 活動에 參與할 能力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루터의 論題들은 가톨릭 共同體 內部의 位階에 짓눌린 平信徒들의 숨筒을 활짝 열어준 것이다.

獨逸語로 飜譯된 「95個組 反駁文」은 한 달 만에 獨逸을 넘어 유럽 全域으로 波及되었다. 그 一次的 效果는 免罪符 販賣實績의 急減으로 이어졌고, 聖職을 얻기 위해 支拂한 莫大한 돈을 免罪符 販賣를 통해 回收하려던 알브레히트 大主敎가 特히 큰 打擊을 입었다. 알브레히트가 敎皇에게 不滿을 吐露하고, 로마 가톨릭교회가 여러 經路를 통해 루터에 對한 壓力을 行使하면서 宗敎改革의 旗발이 徐徐히 올라가게 되었다. 幕데부르크 敎區의 免罪符 販賣를 맡고 있던 텟젤(Johann Tetzel)의 루터에 對한 批判을 비롯해, 兩側의 熾烈한 油印物 攻防은 오히려 宗敎改革의 불씨가 되었다. 1518年 하이델베르크 司祭團 모임, 1519年 라이프찌히에서 열렸던 에크와의 討論, 1520年 敎皇의 召喚에 對한 不應, 1521年 敎皇의 波紋敎書와 카를 5歲에 依한 資格剝奪, 이 모든 것들은 宗敎改革의 序幕에 不過했던 것이다.

새로운 神學

처음부터 體系的이지는 않았지만, 時間이 흐르면서 루터의 神學은 旣存의 가톨릭 傳統과는 다른 特性들을 續續 드러냈다. 特히 1520年 10月 10日 「主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라는 題目의 校誌가 敎皇으로부터 傳達되기 直前 自身의 信仰告白을 담은 「그리스도人의 自由」(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1520), 그리고 에라스뮈스의 公開的 批判에 對한 答辯의 一環으로 執筆된 「拘束된 意志」(De Servo Arbitrio, 1525)는 루터 神學의 獨自的 性格을 잘 보여준다. 所謂 ‘오직 믿음’(sola fide)과 ‘오직 恩惠’(sola gratia)로 대표되는 루터의 立場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神學이나 가톨릭 人文主義 思想과 融和될 수 없었던 理由들이 고스란히 露出된 것이다.

「그리스도人의 自由」는 敎皇 레오 10世에게 보내는 公開 書翰으로 始作한다. 이 書翰에서 루터는 敎皇에 對한 忠誠心을 强調하고, 自身은 敎皇이 아니라 敎皇廳(Curia Romana)의 腐敗한 聖職者들을 批判했을 뿐이라고 抗辯한다. 21) 그러나 이어지는 글에서는 敎皇의 壓力에 決코 屈服할 수 없다는 그의 確固한 信念이 披瀝된다. 크게 두 가지 主張이 展開된다. 첫째, 神과 人間의 ‘親愛(親愛:amicitia)에서 비롯되는 믿음을 바탕으로 先行(善行:bonitas)을 통해 救援에 이른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敎理를 拒否한다. 22) 루터의 主張에 따르면, 救援은 神과 人間의 關係나 人間의 努力이 아니라 神의 一方的 恩惠에 起因하고, 人間은 오직 이 恩惠에 對한 神의 約束을 ‘붙잡는 믿음’(fides apprehensiva)으로만 救援을 받을 수 있다. 23) 卽 그는 스콜라 哲學의 ‘사랑으로 形成된 믿음’(fides caritate formata)을 ‘그리스도에 依해 形成된 믿음’(fides Christo formata)으로 代替한 것이다.

둘째,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合一(合一)된 基督敎人은 그 누구에게도 復屬되지 않으며, 24) 同一한 根據에서 ‘모두가 王이자 祭司長이다.’라는 ‘萬人(萬人) 祭司長注意’를 力說한다. 25) 먼저 루터는 舊約聖書에서 提示되는 律法과 新約聖書에서 救援의 約束을 對備하고, 電子를 穩全히 履行할 수 없는 人間의 軟弱함은 後者에 對한 믿음을 통해서만 克服될 수 있다고 前提한다. 26) 이러한 前提에서 그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約束의 말씀이 實現되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主張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合一된 基督敎이라면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을 爲해 祈禱할 수 있고, 靈的인 勸勉을 할 수 있다.’고 附言한다. 27) 同時에 ‘基督敎人은 모든 사람의 從僕(從僕,dienstbarer Knecht)이어야한다.’는 聖書의 가르침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實踐하는 것이기에 ‘萬人 祭司長注意’와 衝突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28)

에라스뮈스

에라스뮈스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의 그림. 英國 내셔널 갤러리에 있다.

이러한 主張들은 「拘束된 意志」에서 에라스뮈스를 비롯한 人文主義者들의 理性主義에 對한 批判으로 發展한다. 1524年 에라스뮈스는 루터가 믿음을 앞세워 敎會秩序를 否定한다고 判斷되자, ‘自由意志’(libero arbitrio)를 前面에 내세우며 自制를 促求했다. 29) 그리고 그는 루터와 같이 ‘믿음’을 지나치게 내세우면 結局에는 人間의 理性的 判斷을 完全히 排除하는 非(非)理性的 信仰으로 歸結될 수 있다고 憂慮했다. 30) 事實 1521年 작센의 츠비카우(Zwickau)에서 벌어졌던 일처럼 루터의 著述에 刺戟을 받아 神으로부터 直接 啓示를 받았다고 主張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들 中에는 神의 恩寵으로 받은 知識이 있기에 聖經을 工夫하는 것조차 不必要하다고 宣傳하는 境遇도 있었다. 에라스뮈스는 改革의 必要는 共感했지만, 루터의 ‘믿음’ 至上主義에 內在하는 反(反)知性注意가 不便했던 것이다.

事實 루터는 가톨릭 人文主義에 對해 적지 않은 反感을 갖고 있었다. 「拘束된 意志」에서 보듯, 그는 人間이 理性的 選擇을 통해 神의 救援에 ‘同參’(cooperatio)할 수 있다는 가톨릭 人文主義者들의 專制를 못마땅해 했다. 모든 人間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以後 神의 恩寵이 없이는 罪와 死亡에서 헤어날 수 없는 狀態에 있고, 그러기에 사탄에게 完全히 從屬된 人間이 神의 使役(使役)에 參與한다는 것은 不可能하다는 것이다. 31) 또한 神의 命令은 옳다고 判斷되어 따르는 것이 아니라 神의 命令이기에 服從해야 하며, 神의 攝理는 人間의 能力으로는 決코 理解할 수 없다는 것이다. 32) 이렇듯 루터가 ‘믿음’을 앞세운 神祕主義 運動을 警戒했던 것은 事實이지만, 그의 反(反)知性注意가 無分別한 聖書解釋과 비(非)理性的 集團行動을 刺戟할 餘地가 있었음도 否認하긴 힘들다.

政治와 宗敎

‘오직 믿음’을 앞세운 루터의 神學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宗敎的 權威에 深刻한 打擊을 입혔다. 그러기에 1519年 6月 28日 篤實한 가톨릭 信者인 카를 5世가 神聖로마帝國의 皇帝로 選出되고, 같은 날 라이프찌히에서 開催된 에크와의 論爭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立場을 公開的으로 攻駁한 以後, 루터의 앞날에는 暗鬱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나 누구도 루터를 잠재울 수 없었다. 그는 두려움 속에서 오히려 剛해졌고, 以後 로마 가톨릭교회에 對해 더욱 痛烈한 批判을 加하지 始作한다. 이 時期에 作成된 「獨逸의 基督敎 貴族들에게」(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1520)라는 演說文에서 보듯,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같은 可視的이고 制度的인 形態가 아니라 ‘信仰 共同體’(congregatio fidelium) 또는 初期 基督敎人들의 ‘모임’(Gemeinde)의 回復을 꿈꾸었다. 33) 이제 그는 ‘敎會란 두 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라는 聖書的 意味를 實現하고자 마음을 먹은 것이다. 34)

實際로 루터는 洗禮를 통해 基督敎人이 된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差別이나 位階도 있을 수 없으며, ‘神의 사람들’(Gottes Volks)에 所屬된 모든 基督敎人들은 하나의 ‘靈的 共同體’의 構成員이라고 力說한다. 35) 그리고 그는 基督敎 社會에서는 世俗的 權力과 靈的 權威를 區別할 理由가 없다고까지 附言한다. 世俗的 政治權力이 基督敎人의 손에 들어가 있는 社會에서는 “우리가 그러하듯 洗禮를 받은 世俗的 權威도 同一한 믿음과 福音을 가졌기에, 그들이 司祭와 主敎가 되는 것을 許容해야 한다.”는 것이다. 36) 아울러 로마 가톨릭교회가 敎會法을 앞세워 世俗的인 權威의 正當한 行事까지 介入하는 것은 明白한 잘못일 뿐만 아니라, 敎皇도 主敎도 잘못이 있다면 世俗的 權威의 處罰을 避할 수 없다고까지 闡明했다. 37)

토마스 뮌처

토마스 뮌처 크리스토프 板紙헴(Christoph van Sichem)의 그림

이렇게 로마 가톨릭교회에 挑戰하면서, 루터에게는 또 하나의 宿題가 생겼다. 바로 ‘世俗的 權力과 基督敎 敎會와의 關係를 어떻게 設定하느냐?’는 問題였다. 이는 한便으로는 5世紀 末 겔라視우스 1歲의 世俗的 權威와 靈的 權威의 區分을 聯想시킨다. 이때 루터의 見解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世俗的인 領域에서까지 裁判權을 行使하는 것을 막고, 敎會와 關聯된 일이라도 葛藤이 있다면 世俗的 政治權力의 判斷에 맡겨야 한다는 程度의 主張으로 局限된다. 그러나 다른 한便에서는 世俗的 權威가 宗敎的 權威보다 優越하다고 결론지어질 要素를 갖고 있다. 루터는 基督敎 社會에서도 人間의 邪惡한 本性으로부터 公共善을 지키기 위해 政治權力이 必要하다고 보았고, 結果的으로는 宗敎的 權威도 政治權力의 올바른 行事의 對象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38) 따라서 政治的 權威와 宗敎的 權威가 모두 神으로부터 附與된다는 前提에서 본다면, 루터는 最小限 世俗에서의 政治權力의 敎會에 對한 優位를 認定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1525年 루터는 토마스 뮌처(Thomas Muntzer)依해 觸發된 獨逸農民戰爭에 對해 깊은 憂慮를 表明한다. 이렇듯 그는 敎皇의 專橫만큼이나 主觀的으로 經驗된 神祕主義 信仰에 批判的이었고, 政治社會的 差別을 贊成한 것은 아니었지만 急進的 信仰運動이 가져올 病弊에 對해서도 敏感했다. 다시 말하자면, 世俗的인 것과의 徹底한 斷絶도 千年王國의 革命的 建設도 그에게는 避해야할 劇團이었고, 그만큼 루터의 思想은 革命的이면서도 同時에 保守的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멜란히톤(Philipp Melanchton)이나 칼뱅(Jean Calvin)과 같이 루터의 革新에 共感한 神學者들은 革命的 破壞力을 純化할 새로운 制度를 苦悶했고,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와 같이 保守的인 側面에 不滿을 가졌던 思想家들은 루터가 지나치게 世俗的이었다는 批判을 멈출 수 없었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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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깊은 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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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照어

「95個組 反駁文」(Disputatio), 「獨逸의 基督敎 貴族들에게」(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사보나롤라 , 印刷革命, 구텐베르크, 위클리프, 後쓰, 요한 스타禹피츠(Johann von Staupitz), ‘赦免’(indulgentia), 免罪符, 카를 5歲, 「拘束된 意志」(De Servo Arbitrio), 「主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 「그리스도人의 自由」(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에라스뮈스 , 萬人祭司長注意, 오직 믿음(sola fide), 토마스 뮌처, 칼뱅, 키에르케고르

出處

提供處 情報

네이버 知識百科 話題의 連載글 '政治哲學 다시보기'의 論點들을 擴大하여 2卷 分量으로 묶어낸 冊이다. 著者 곽준혁 敎授는 中國이 特히 哲學 分野에서 國家重點大學으로 育成하고 있는 중산大學校에서 外國人 敎授 가운데 唯一한 東洋人이며, 英國 壘틀리지 出版社에서 東아시아 政治哲學 責任編輯者로도 東洋人으로서는 最初의 學者이다. 政治哲學者로서 지난 20餘 年間 '葛藤 調整 메커니즘'과 '政治的 리더십'을 苦悶해 온 著者가 이番에는 現實政治에서 맞닥뜨리는 危機들의 解法을 苦悶하기 위해 '정치사상사'의 形式을 빌려 그 根源들을 찾아 나선다. 이탈리아를 直接 찾아가기도 하고 古代 그리스와 라틴語 텍스트와 같은 1次 資料를 直接 찾아 정치사상사를 設計했다. 또한 챕터마다 現實에서 切實한 質問들로 始作하여 政治哲學이 이데아에 갇힌 學問이 아니라 우리 삶에 꼭 必要한 學問임을 立證하고 있다. 仔細히보기

  • 곽준혁 大學敎授

    政治哲學者이자 共和主義 理論價. 시카고大學에서 마키아벨리에 對한 硏究로 政治學 博士學位를 받았다. 고려대 政治外交學科 敎授, 慶北大 政治外交學科 敎授, 이탈리아 볼로냐大學 訪問敎授, 그리고 숭실대학교 價値와 倫理 硏究所 共同所長을 歷任했다. 現在 中國 중산大學校(中山大?校) 哲學科 敎授로 在職 中이며, 英國 壘틀리지(Routledge) 出版社의 "Political Theories in East Asian Context" 시리즈 責任 編輯者를 맡고 있다. 仔細히보기

  • 監修 최장집 敎授, 作家

    民主主義敎育硏究센터 所長, 高麗大學校 名譽敎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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