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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으로 열린 窓

都市는 歷史다

유럽으로 열린 窓

페테르부르크는 自然 그리고 러시아의 지체에 對한 勝利를 의미했다. 처음에 표트르-파블로프스키 要塞 建築으로 始作된 建設은 18, 19世紀를 거치며 繼續되어 수많은 대로(prospect), 廣場, 宮殿, 庭園, 尖塔, 銅像, 運河들로 이루어진 獨特한 文化 空間을 形成하게 되었다. 오랜 時間을 두고 自然스럽게 膨脹한 ‘커다란 시골’ 모스크바와 달리, 상트페테르부르크 建築과 土木 計劃의 基本 原理는 徹底하게 ‘合理性’에 依存했다. 當時 사람들은 “마침내 이 都市에 幾何學이 當到했다.”고 썼다. 러시아人들에게 모스크바가 어머니이자 ‘心臟’과 같다면, 페테르부르크는 ‘머리’, 그것도 ‘차가운’ 아버지의 머리에 該當한다. 이 아버지의 頭腦와 함께 러시아의 近代는 始作되었다. 그곳은 最初의 러시아 科學 아카데미가 생긴 場所이며, 最初의 公共 圖書館, 最初의 劇場, 最初의 植物園, 平民 子女를 위한 最初의 學校가 門을 연 場所다.

페테르부르크는 그 自體로 ‘近代’ 러시아 文化의 새로운 方向性을 表象하는 象徵的인 記號였다. 이 都市는 모든 面에서 하나의 都市 以上의 意味를 지닌다. 러시아人을 유럽人으로 改造하기 위한 거의 유토피아的인 厖大한 文化 工學의 計劃인 것이다. 모스크바的인 ‘中世’를 拒否하고 유럽式의 ‘近代’를 導入하는 것, 그러니까 ‘유럽으로 열린 窓’인 페테르부르크를 통해 文化的 正體性의 코드를 徹底하게 改編함으로써 過去 러시아의 無知하고 後進的인 慣習을 버리고 進步的이고 啓蒙된 近代 西歐 世界에 同參하려는 것, 바로 이것이 페테르부르크式 近代의 目標였다.

이런 目標下에서, 當代人 18世紀 文化의 主體이던 貴族들이 處하게 된 狀況은 어땠을까? 말하자면 그건 ‘自身의 故國에서 하루아침에 外國人이 되는 經驗’과도 같았다. 通常的으로 ‘自然的인’ 行爲 領域에 該當하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통째로 ‘學習’의 領域으로 바뀌었다고 想像해 보라. 먹고, 입고, 마시고, 人事하는 法과 같은 日常 行爲의 모든 規範들을 마치 外國語를 배우듯이 새롭게 익히고 배워야만 한다! 이런 狀況은 當然하게도 그들의 日常을 ‘演劇과도 같은 것’으로 만들었는데, 그들은 말 그대로 ‘恒常 舞臺 위에 선 것처럼’ 살아가게 되었다. 皇帝 표트르는 이 演劇의 臺本에 該當하는 小冊子를 出刊하기도 했는데, 그가 直接 獨逸語 願書를 改作하고 潤色한 冊 《젊은이를 위한 禮法》에는 行爲 禮節에 關한 다양하고 詳細한 指示가 들어 있다. ‘恒時 外國人들과 함께 있는 自身을 想像할 것’, ‘飮食을 뱉거나, 나이프로 이를 쑤시거나, 큰 소리로 코를 풀지 말 것.’

要컨대, 都市 페테르부르크는 18世紀 러시아의 새로운 文化的 狀況, 곧 以前 時代의 모든 것에 對한 全面的인 ‘拒否’와 ‘不正’을 代辯한다. 그렇게 ‘갑자기’와 ‘새로운’이라는 두 單語는 18世紀 러시아 文化를 修飾하는 代表的인 述語가 된다. 是認 칸테미르의 有名한 句節은 이를 잘 보여 준다. “표트르의 英敏한 敎示를 所重히 하니, 그로써 우리가 갑자기 이미 새로운 民族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便 中世的 神性에 對한 近代的 世俗 權力의 勝利라는 18世紀의 方向 轉換은 페테르부르크를 ‘新(新)로마’로 보는 見解에 權威를 附與해 주었다. 표트르는 新星의 中心部, 假令 새로운 예루살렘이 되는 代身 最高의 權力的 傳統을 따르는 길을 擇했고, 그건 바로 페테르부르크를 ‘新로마’로 表象하는 길이었다. 페테르부르크의 都市 文章은 바티칸의 文章에서 따왔다. 이와 關聯해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都市名을 二重的으로 解釋할 수 있다는 點은 興味롭다. 周知하듯이 표트르는 ‘베드로’의 러시아式 이름이며, 따라서 ‘성스러운 베드로의 都市’는 곧 ‘ 표트르의 都市 ’이기도 하다.

事實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名稱은 Saint라는 修飾語가 어디에 걸리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解釋할 수 있다. 獨逸式 名稱인 Sankt Petersburg가 文法的으로 所有格을 包含해 聖스러운 Peter의 都市라는 뜻을 갖는다면, 러시아에 收容된 形態인 Sankt Peterburg는 所有格이 漏落되어 앞의 意味가 模糊해지므로 ‘표트르의 神聖한 都市’로 理解할 수 있다. 卽 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에 內包된 두 意味 中에서 ‘표트르의 意味論’이 ‘베드로의 意味論’을 壓倒하기 始作하고, 이에 따라 帝國 로마의 志向性이 漸次 皇帝 표트르에 對한 個人 崇拜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흔히 ‘표트르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일컬어지는 帝國의 새 首都는, 앞서 말했듯이 地政學的 觀點에서 볼 때 常識을 벗어나는 例外的인 選擇이었다. 領土의 中心部에 首都를 定하는 一般的 關係를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아예 領土의 바깥에 새로운 中心을 定하는 極端的인 事例였다. 러시아의 記號學者 유리 로트만(Yuri Lotman)은 이를 都市 空間의 地理的 配置에 關한 類型學으로 同心的(centric) 모델과 이심적(eccentric) 모델로 說明한다.

于先 自身을 둘러싼 周邊 世界와의 關係에서 ‘中心’의 位相을 附與받는 同心的 모델의 境遇, 通常 “大地의 中心”에 位置하면서 宇宙 自體의 理想化된 모델이 된다. 흔히 ‘天上 都市의 原形’이나 ‘周邊 世界를 위한 聖所(聖所)’로서 나타나는 이 모델의 代表的인 例로는, 로마, 예루살렘, 모스크바 等이 있다. 當然히 이 모델은 熱淋보다는 닫힘, 卽 ‘敵對的인 것으로 評價되는 周邊 世界로부터의 分離’를 志向한다.

한便 都市는 大地와의 關係에서 이心的으로, 그러니까 ‘警戒 너머에’ 자리할 수도 있다. 스뱌토슬라프, 샤를大祭, 무엇보다 표트르대제의 境遇가 이에 該當하는데, 同心的 모델의 閉鎖性과 比較했을 때, 이심적 構造는 열림과 解體, 開放된 ‘文化的 接觸’을 志向한다. 同心的 모델이 大槪 땅과 하늘의 仲介者로 表象되는 ‘高山都市’의 이미지와 關聯된다면, 이심적 構造는 文化 空間의 變更, 예컨대 ‘海岸이나 江어귀’에 位置한다. 主로 創造와 關聯된 神話를 통해 ‘하늘과 땅의 對立’을 活性化하는 前者에 비해, 後者는 ‘人工 對 自然의 對立’을 强調한다. 特히 洪水나 汎濫 等의 自然曆에 依해 都市의 人工性이 沒落하게 되는 이야기들, 終末論의 神話, 滅亡의 豫言은 後者를 特徵짓는 資質들이다. 1)

實際로 페테르부르크는 이심적 모델의 特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언젠가 이 人工의 都市가 痕跡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不吉한 終末論의 神話는 어쩌면 페테르부르크의 첫 삽이 떠지던 그 時點부터 이미 都市의 實際 歷史를 뒤덮고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의 實際 歷史는 神話的 要素로 點綴돼 있는데, ‘流言蜚語’나 ‘口傳野史’ 等의 形態로 民衆의 삶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페테르부르크의 이런 뿌리 깊은 神話學은 어떻게 說明될 수 있을까? 勿論 그 源泉的 醱酵素는 都市 建設이 隨伴한 끔찍한 犧牲의 傷處를 表現해 주는 ‘뼈 위에 세워진 都市’가 될 것이다. 하지만 더 包括的인 原因은 페테르부르크로 代辯되는 18世紀 러시아의 文化的 記號, 곧 ‘歷史의 不在’라는 記號로 봐야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표트르 時代 이데올로기의 特徵은 “갑자기, 새로워진 러시아”, 卽 18世紀 初盤 러시아가 體驗하고 있던 것을 하나의 ‘出發點’ 或은 ‘始作’으로 看做하려는 傾向이었다. 이에 따른 자연스런 結果는 무엇인가? “그 以前의 모든 것을 存在하지 않는 것, 或은 最小限 歷史的 現實性을 缺如한 無知와 混沌의 時代에 屬하는 것이라고 宣布하는” 것이다. 2) 다시 말해, 표트르 時代 以前의 러시아는 ‘無(엔트로피)’로 看做되며, 理想的인 러시아는 지나간 것과 無關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이와 같은 ‘歷史 不在’의 狀況은 자연스럽게 神話의 猛烈한 成長을 誘發할 수밖에 없었다. 記號的인 眞空 狀態를 가득 메운 것은 다름 아닌 ‘神話’였는데, 人工的인 都市의 狀況은 全的으로 神話所敵으로 되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點은 歷史와 神話의 이와 같은 ‘몸 섞기’가 但只 神話的 이야깃거리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事實이다. 誕生 以後 거의 곧바로 이 都市는 自身의 虛構的 焚身, 그러니까 都市의 이미지와 自己認識에 影響을 끼치는 自身의 ‘雙둥이’를 갖게 되었다. 바로 “文學的 페테르부르크(literary Petersburg)”다. 그것은 單純히 都市의 藝術的 ‘反映’이 아니라 우리가 푸시킨이나 도스토옙스키의 作品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섬뜩한 ‘分身(alter-ego)’의 캐릭터에 該當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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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

東宮 레닌그라드, 1754~6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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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處: 美術大辭典(用語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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提供處 情報

都市의 歷史를 모르고서는 人間의 歷史를 理解할 수 없다. 지친 日常에서 벗어나기 위해 都市의 空間을 散策하듯 都市의 歷史를 거닐어 보자. 都市는 어떻게 始作되었으며, 都市 속 空間들은 어떤 意味를 갖는지, 都市에서 왜 그토록 많은 事件이 일어났는지, 解答이 歷史 속에 있다. 아시아를 代表하는 서울과 도쿄, 베이징에서 유럽의 象徵 파리와 런던을 거쳐 美國 歷史의 산證人 시카고까지 이어지는 世界 都市 文化史 오디세이. 時間을 거스르고 空間을 뛰어 넘는 생생한 歷史 旅行이 펼쳐진다. 仔細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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